2화(6,514자) · 1963~1982년, 안동과 성남
굽은 팔
이재명의 삶 · 네오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의 지통마는 청량산 자락에 붙은 화전민 마을이다. 봉화와 영양 쪽으로 산이 겹겹이 닫히는 골짜기에서 사람들은 산나물을 캐 먹으며 아이를 길렀다. 이재명은 이 골짜기에서 1963년 10월에 태어났다. 출생신고를 제때 하지 못해 호적에는 1964년 12월 22일로 올랐으니, 이재명은 처음부터 생일이 둘인 아이였다.
아버지 이경희는 청구대 법대를 다니다 그만두고 경찰과 교사, 탄광 관리자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어머니 구호명은 산비탈에 밭을 일궜다. 재명은 7남매 가운데 다섯째였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서울 쪽으로 올라갔고, 이후로 아이들은 어머니 혼자 거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산비탈 밭을 일구다가 아들이 온다고 좋아하며 반겼다. 가난했지만 이 산골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재롱을 떨던 시절을 이재명은 행복했던 때로 기억했다. 형편이 어려워 한 고을 안에서만 이사를 서너 번 다녔다.
학교까지는 6킬로미터, 옛 셈으로 15리였다. 아이 걸음으로 매일 두 시간 반을 걸어 산길을 넘고 개울을 건너야 삼계국민학교가 나왔다. 겨울이면 먼저 간 아이들이 심술을 부려 징검다리에 물을 뿌려 놓았다. 물은 금세 돌 위에서 얼었고, 고무신이 미끄러지면 발이 얼음물에 빠졌다. 그렇게 빠진 발은 얼어 터졌다. 여름에는 비가 쏟아져 개울이 넘치면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아이들은 이 핑계를 놓치지 않았다. 홍수를 구실 삼아 친구들끼리 작당해 다 함께 결석한 날도 있었다.
점심 급식을 받지 못해 굶는 날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재명은 혼자 도서관에 남아 책을 읽었다. 이 무렵 이재명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학교에서 하도 많이 맞아서, 선생님이 되면 아이들을 때려 보겠다는 복수심에서 나온 꿈이었다고 이재명은 털어놓은 적이 있다. 6학년 담임 박병기는 이 아이를 기억력이 탁월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개구쟁이로 봤다. 가난했지만 머리가 좋고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아이였다. 이 환경에서 그렇게 집중하고 배움에 목말라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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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2월, 재명은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을 따라 경기도 성남으로 올라왔다. 열세 살이었다. 가족이 든 곳은 중원구 상대원동, 상대원시장 꼭대기의 월세 단칸방이었다. 밤이면 여덟 식구가 이 방에 나란히 누워 함께 잤다.
아버지는 시장에서 쓰레기를 치웠다. 어머니는 시장에 딸린 공중화장실을 지키며 청소를 했다. 어머니는 이 일로 일곱 남매를 키웠다. 화장실 앞에서 휴지를 팔고, 들어가는 사람에게 사용료로 10원이나 20원을 받았다. 식구들은 시장에서 버린 썩은 과일로 배를 채웠다. 거칠지만 인정 넘치는 시장통, 공장의 차가운 불빛, 노동자들의 지친 어깨, 그리고 길거리가 열세 살 소년이 만난 성남이었다. 이곳은 철거민의 도시라고 불렸다. 누가 어디 사느냐고 물으면 재명은 서울 옆에 산다고 답했다.
중학교는 가지 못했다. 동네 형의 이름을 빌려 공장에 들어갔다. 법으로는 일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주민등록 등본 한 장이면 사람을 쓰던 시절이었다. 검정고시 학원비 칠천 원이 없어서 학원 대신 공장이었다. 아침이면 어머니가 이재명의 손을 잡고 공장까지 데려다주었다. 이 꼬맹이를 공장 문 앞에 두고 돌아서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이재명은 어른이 되어서야 헤아렸다.
첫 일터는 목걸이 부품을 만드는 가내공장이었다. 아침 8시 반에 들어가 밤 9시까지, 하루 열두 시간 넘게 납땜을 했다. 일당은 500원 남짓이었다. 브라보콘 하나가 130원 하던 때였다. 밤 10시까지 야근을 하는 날이 잦았고, 새벽 2시까지 철야를 하는 날도 있었다. 일이 새벽 2시에 끝나면 통행금지가 풀리는 4시까지 공장에서 기다렸다가 집으로 갔다. 이 시각까지 어머니는 잠들지 않고 아들을 기다렸다. 쉬는 날 없이 한 달을 꼬박 다니면 월급이 5만 2,900원이었다. 소년은 공장을 옮겨 가며 납땜을 하고, 용접을 하고, 철판을 잘랐다.
다음 일터는 상대원동의 동마고무였다. 거기서 동력 벨트가 이재명의 손가락 세 개를 휘감았고, 감긴 손가락은 엉겨 붙었다. 왼손 손가락 아래에는 이때 박힌 고무가루가 남았다. 손가락을 다쳤을 때 소년에게 돌아온 것은 치료가 아니라 사장의 손이었다. 사장은 이재명의 뒤통수를 때렸다. 군복을 입은 관리자들은 각목을 들고 다니며 소년들을 때렸다. 재명은 반항기가 있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더 맞았다. 야구 글러브 공장의 고참들은 신참들 손에 권투 글러브를 끼워 서로 싸움을 붙였다. 진 쪽이 아이스크림을 샀다. 고참들에게 맞는 날이 쌓일수록 소년은 절망 쪽으로 기울었다.
같이 일하던 열두 살 소년공이 노래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이었다. 재명은 이 노래를 부르며 긴 밤을 버텼다. 도시락을 싸 들고 공장으로 가는 길가와 공장 담벼락에는 유난히 개나리가 많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 개나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춘기가 오자 출근길이 달라 보였다. 잿빛 작업복을 입고 공장으로 걸었고, 맞은편에서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학교로 걸어왔다. 이 아이들이 몹시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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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글러브와 스키 장갑을 만드는 대양실업에서 이재명은 프레스 기능공으로 일했다. 프레스가 내려와 이재명의 왼쪽 손목을 물었다. 쇳덩이가 떨어진 자리에서 뼈가 부러졌고 성장판 일부가 깨졌다. 치료는커녕 산업재해 보상조차 받지 못했다. 이때 소년은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살려면 공부를 해야 했다. 부러진 팔은 그대로 아물었고, 몸이 자라는 동안 팔꿈치 쪽으로 뒤틀리며 굽었다. 손목 관절과 함께 팔이 엉망으로 굽어 버렸고, 왼팔은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지체 장애 6급이었다.
소년은 이 팔을 감췄다. 한여름에도 긴팔 셔츠만 입었다. 공장에서 돌아오면 늦은 저녁을 허겁지겁 먹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면 어머니가 곁으로 와 앉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깰세라 휘어 버린 팔꿈치를 가만히 쓰다듬었고, 속울음을 삼켰다. 소년은 이 손길을 알고 있었다.
벨트에 감겨 뭉개진 손가락을 보고도 어머니는 울었다. 프레스에 비틀어진 왼팔을 보고 또 울었다. 이 무렵 소년은 일기장에 제 몸의 앞날을 셈해 적었다.
「나 같은 팔 병신은 군역이 면제될 텐데 정말 그렇게 되면 난 어떻게 한단 말이냐」
1979년에는 오리엔트 시계공장에서 시계 표시판에 도장과 도금을 했다. 스프레이를 뿜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하는 사이 냄새를 맡는 감각이 상했다. 이후로 이재명은 냄새를 잘 맡지 못했다. 냉동회사에서 함석판을 접고 자르다 손에 남은 흉터도 있었다. 손가락과 팔과 후각, 공장은 소년의 몸에서 하나씩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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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무렵, 이재명은 살아야 할 이유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 가난의 늪은 끝을 몰랐다. 동네 약국에 가서 수면제를 달라고 했다. 웬 어린놈이 수면제를 달라는 것을 약사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약사는 수면제 대신 소화제를 한 움큼 내주었다. 소년은 이 소화제를 가득 삼키고 어설프게 연탄불을 피웠다.
살았다. 이재명을 살린 것은 동네 약국의 약사였다.
1980년 5월, 공장에 광주 이야기가 돌았다. 북한군과 폭도들이 나라를 뒤엎으려 폭동을 일으켰고 군인들이 폭도들에게 많이 죽었다는 말이었다. 모든 언론과 주변이 그렇게 말했다. 재명도 거기에 동조했고, 제 입으로 이들을 비난했다.
같은 달, 이재명은 헌인릉으로 소풍을 다녀오는 중학생들과 길에서 마주쳤다. 이날 일기는 짧았다.
「헌인능에 소풍 갔다 오는 중학생 아이들과 마주쳤다. 나는 교복 하나 입어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못 입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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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을 벗어날 길은 작업반장에게서 보였다. 반장이 고졸이었다. 재명은 고졸 자격을 따서 공장 관리자가 되기로 했다. 1978년 4월, 이재명은 고입 검정고시 야간반에 등록했다. 학원비가 칠천 원에서 만 원이었고, 소년공의 첫 월급이 만오천 원이던 때였다.
아버지는 반대했다.
“착실히 일이나 할 것이지 뭔놈의 공부냐?”
아버지는 아들이 책을 펴면 일부러 전기를 껐다.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는 아들을 믿었고, 아들이 무엇을 고르든 이 편에 섰다. 재명은 오후 6시에 퇴근해 7시부터 10시까지 학원에서 공부했다. 집에 들르면 밤 11시였고, 거기서 다시 독서실로 가서 새벽 2시까지 책을 붙들었다. 졸음을 이기려고 독서실 책상 둘레에 압정을 뿌려 놓았다. 졸다가 팔이 내려가면 압정이 살을 찔렀다. 압정이 두어 개 박힌 채 잠든 날도 있었고, 참고서에는 늘 피가 묻어 있었다.
1978년 8월, 고입 검정고시에 붙었다. 1980년 4월, 대입 검정고시에 붙었다. 그래도 하루는 그대로 공장에서 시작했고, 일기장에는 흔들림이 그대로 적혔다. 1980년 7월의 일기는 이랬다.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공부하기가 싫어진다. 그러면서도 평생 공돌이로 썩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한 달 뒤 8월 20일, 같은 일기장에 다른 문장이 들어섰다.
「어렵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한번 해볼까?」
어머니는 이 무렵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재명이는 크게 될 아이다.”
1981년 7월, 이재명은 대입 학력고사를 준비하려고 공장 생활을 끝냈다. 다섯 해 남짓 목걸이 공장과 고무공장, 글러브 공장과 시계공장, 냉동회사를 전전한 끝이었다. 열세 살에 남의 이름으로 들어간 공장 문을, 소년은 제 이름으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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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의 교육개혁 조치로 대학의 문이 넓어져 있었다. 학력고사에서 전국 3,000등 안에 드는 점수를 받았다. 1982년, 중앙대 법학과가 이재명을 장학생으로 뽑았다. 여섯 학기 등록금이 면제였고, 생활비로 한 달에 20만 원이 나왔다. 공장에서 받던 월급의 네 배 가까운 돈이었다.
대학 입학식 날, 이재명은 교복을 입고 갔다. 2년 전 일기장에 앞으로도 못 입을 것이라고 적었던 옷이었다.
같은 해 캠퍼스에서 이재명은 유인물 한 장을 손에 쥐었다. 광주의 진실이 거기 있었다. 북한군도 폭도도 아니었다. 1980년 5월 공장에서 들은 말을 믿고 제 입으로 비난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이재명은 그제야 알았다. 수치스럽고 죄송했고, 자기 자신에게 모멸감이 들었다.
이 부끄러움이 이재명의 인생을 바꿨다. 공장에서 다친 팔과 받지 못한 보상, 밤새 철야를 하던 아이들의 삶이 개인이 무능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는 것을 이재명은 알게 됐다. 누구나 공정한 자리에서 제 몫을 펴며 사는 정상적인 세상, 이것이 이재명의 꿈이 됐다.
출처 · 서울신문, 2025년 4월 28일, 「소년공→변방의 장수→세 번째 대권 도전 나선 ‘불굴의 정치인’」 · 경향신문, 2025년 6월 4일, 「소년공에서 야당 원톱으로···절체절명 위기 넘고 세 번째 도전 ‘어대명’ 완성」 · 매일신문, 2025년 6월 4일, 「“개천서 용 났네”…이재명 대통령 고향 안동 예안면 지통마 ‘들썩’」 · 경북매일, 2025년 6월 4일, 「안동 산골서 태어나… ‘소년공-변호사-도지사-대통령’ 신화」 · 매일신문, 2025년 11월 22일, 「이재명 대통령 모교서 ‘반갑다 친구야’ 잔치한마당」 · 프레시안, 2025년 6월 4일, 「이재명 당선인의 인생 여정…은사 박병기의 따뜻한 회상」 · 프레시안, 2025년 6월 4일, 「‘소년공’ 출신 대통령, 이재명은 누구인가」 · 뉴시스, 2021년 10월 10일, 「소년공서 與 대선후보까지…‘0선’ ‘경기지사’ 첫 후보」 · 쿠키뉴스, 2022년 3월 5일, 「이재명 “더는 안 울겠다”… ‘고향’ 성남서 함박웃음」 · 딜사이트, 2025년 6월 4일, 「인간 이재명의 삶…‘소년공’에서 ‘권력 정점’으로」 · 쿠키뉴스, 2025년 6월 4일, 「노동자 출신 첫 대통령 이재명…안동 출신 소년공의 반전 드라마」 · 한경비즈니스, 2025년 6월 7일, 「가난에 치여 학교도 못 다닌 14살 소년, 대통령이 되기까지」 · CBS노컷뉴스, 2021년 10월 11일, 「겁없던 소년공이 대선후보로…이재명 걸어온 길」 · 시대, 2025년 4월 27일, 「‘소년공’ 출신 이재명, 다시 대선 길에 나서다」 · 전자신문, 2025년 6월 4일, 「정치테러에서도 살아남은 ‘소년공’ 출신 대통령」 · 뉴시스, 2021년 7월 17일, 「이재명, 軍미필 공격에 장애 왼팔 공개」 · YTN, 2025년 6월 4일, 「소년공에서 대통령으로...“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 · 서울신문, 2021년 8월 1일, 「[대선주자대해부] #소년공#인권변호사#경기지사…정책·민심 업고 “끝까지 간다”」 · 경기일보, 2020년 9월 26일, 「이재명, 국민 우울증 증가에 “부조리한 세상 바꾸겠다. 함께 살자”」 · 아시아경제, 2020년 9월 27일, 「이재명, 코로나 자살 급증에 “죽지 말고 살자…40년전 저도 극단적 선택”」 · 전북일보, 2025년 6월 4일, 「〔이재명 누구인가〕 “누구나 절망하지 않는 세상 꿈꾸던 소년공에서 대통령까지”」 · 뉴시스, 2018년 6월 14일, 「16년 만에 경기도지사 탈환한 이재명은 누구인가」 · 뉴시스, 2021년 5월 17일, 「5·18 앞두고 전북 찾은 이재명…‘함께 사는 세상 만들겠다’」 · 시대, 2022년 2월 22일, 「[전문] 이재명 “제 모든 정책에는 가난하고 참혹했던 삶 녹아있어”」 · 주간경향, 2021년 7월 23일, 「〔책에서 밝힌 후보자 X파일〕(1) 이재명 “내 팔은 손목관절과 함께 굽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