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74자)

효도 관광

제주 한 달 살기 · 석담율

경로당 텔레비전에 계획도가 떴다⁠. 편집자 손님이 밤새 만든 이 분짜리 영상이었다⁠. 윗밭과 아랫밭 위로 객실동이 겹쳐지고⁠, 돌담집 올레가 진입로로 바뀌고⁠, 포구 위로 「⁠전용 해변⁠」 글씨가 떠올랐다⁠. 마지막에 불턱이 화면 가득 나오고 「⁠이전⁠」 두 글자가 커졌다⁠. 할망 열넷과 하르방 여섯이 숨을 죽이고 보았다⁠. 영상이 끝나자 맨 앞의 하르방이 리모컨을 들고 물었다⁠.

“⁠이거 다시 하려면 어디 눌러⁠?⁠”

편집자 손님이 세 번을 다시 틀었다⁠. 세 번째에는 할망들이 「⁠이전⁠」 글자가 나오기 전에 먼저 혀를 찼다⁠. 현 삼촌네 할망만 혀를 차지 않았다⁠. 할망은 영상이 끝날 때마다 화면 구석에 작게 나온 「⁠주민 보상⁠」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불턱 옮기는 건 나도 싫어⁠. 근디 우리 손주 대학 등록금은 불턱이 안 내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경로당 창으로 윗밭이 멀리 보였다⁠. 대봉 씨가 사다리 위에서 귤을 따고⁠, 미랑 씨가 사다리 다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미랑 씨는 아버지가 가지를 하나 옮겨 갈 때마다 사다리를 따라 옮겼다⁠. 불룩한 배가 사다리에 닿을까 봐 엉덩이를 뒤로 뺀 자세가 우스꽝스러웠다⁠. 대봉 씨는 귤 하나를 따서 아래로 떨어뜨렸고⁠, 미랑 씨는 한 손으로 받았다⁠. 나는 사흘째 대봉 씨와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열 시에 경로당 앞 길가로 커다란 관광버스가 들어왔다⁠. 앞 유리에 「⁠섬바람리조트 초청 · 모살개 어르신 효도 관광⁠」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리조트 직원이 문 앞에 서서 타는 사람 머릿수를 셌다⁠. 할망과 하르방이 하나둘 버스에 올랐다⁠. 나는 춘옥 삼촌 팔을 붙잡고 따라 올랐다⁠.

“⁠선생님은 마을 분이 아니신데요⁠.⁠”

직원이 막았다⁠. 춘옥 삼촌이 내 팔을 끼고 직원을 올려다보았다⁠.

“⁠내 보호자여⁠. 나 무릎이 안 좋아⁠.⁠”

춘옥 삼촌은 오늘 아침 갯바위를 나보다 빨리 탔다⁠. 직원은 춘옥 삼촌 브로치를 보고 길을 비켰다⁠. 바로 뒤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대구 아저씨가 등산 조끼를 입고 버스 계단에 발을 올리고 있었다⁠.

“⁠저는 이 선생님 보호자입니다⁠.⁠”

“⁠보호자의 보호자요⁠?⁠”

“⁠보호자도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직원은 포기했다⁠.

*

버스가 해안 도로를 달리자 기사가 노래방 기계를 켰다⁠. 마이크가 앞자리부터 돌았다⁠. 고추 할망이 트로트 한 곡을 꺾어 부르자 버스가 들썩였다⁠. 하르방 하나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 대신 젊을 때 고기 잡던 이야기를 오 분 동안 했다⁠. 대구 아저씨는 박자에 맞춰 호루라기를 불다가 춘옥 삼촌한테 뒤통수를 맞았다⁠.

마이크가 맨 앞자리의 양 본부장에게 갔다⁠. 양 본부장은 사양하다가 할망들 성화에 못 이겨 일어났다⁠. 반주 없이 불렀다⁠.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해녀들이 노 저으며 부르던 노래였다⁠. 양 본부장 목소리는 낮고 갈라졌다⁠. 춘옥 삼촌이 창밖을 보던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두 번째 소절부터 할망들이 따라 불렀다⁠. 버스 안에 노 젓는 소리가 찼다⁠. 양 본부장은 마지막 소절에서 목이 메어 노래를 끝내지 못하고 마이크를 내렸다⁠. 춘옥 삼촌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느 어멍 소리다⁠.⁠”

나는 박수를 치지 못했다⁠. 버스 안에서 박수를 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섬바람리조트 중문점 로비는 천장이 높았다⁠. 바닥이 대리석이라 할망들의 고무신이 쭉쭉 미끄러졌다⁠. 양 본부장이 대연회장에서 설명회를 열었다⁠. 화면에 숫자가 떴다⁠. 모살개 리조트가 문을 열면 생기는 일자리⁠, 마을 공동 해안 땅을 팔면 집마다 돌아가는 보상금⁠, 해녀회에 따로 나가는 지원금⁠. 할망들이 보상금 숫자에서 수군거렸다⁠. 숫자가 컸다⁠. 양 본부장은 숫자를 다 보여 주고 나서 화면을 껐다⁠.

“⁠삼촌들⁠, 저는 열여덟에 이 마을을 떠났습니다⁠. 돈이 없어서요⁠. 지금 이 마을 아이들도 다 그렇게 떠납니다⁠. 저는 아이들이 떠나지 않아도 되는 마을을 만들고 싶습니다⁠.⁠”

할망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끄덕이는 할망들을 탓할 수 없었다⁠. 양 본부장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점심은 뷔페였다⁠. 할망들은 접시를 들고 줄을 서서 회와 갈비와 초밥을 쌓았다⁠. 디저트 칸에 「⁠제주 감귤 무스⁠」라는 이름표를 단 작은 유리컵이 줄지어 있었다⁠. 위에 귤 조각이 얹혀 있었다⁠. 나는 하나를 가져와 숟가락으로 귤 조각과 무스를 함께 떴다⁠.

혀에 올리자마자 알았다⁠. 단맛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고르고⁠, 향이 껍질 쪽으로 붕 떠 있었다⁠. 장터 맛보기 시합 네 번째 접시의 맛이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서른 해 동안 교실에서 아이들 손드는 것만 보다가⁠, 손을 드는 사람이 되니 팔이 떨렸다⁠.

“⁠본부장님⁠, 이거 제주 귤 아니에요⁠.⁠”

식당이 조용해졌다⁠. 할망들이 숟가락을 든 채로 나를 보았다⁠. 양 본부장이 다가와 무스를 한 숟가락 떠 먹었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양 본부장은 주방을 향해 손짓해 조리장을 불렀다⁠. 조리장은 하얀 모자를 벗어 쥐고 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디저트용 과일은 수입 오렌지 통조림을 쓴다고 했다⁠. 제주 귤은 값이 들쑥날쑥하고 껍질 까는 품이 들어서⁠.

“⁠리조트 문 열면 마을 귤 사 주신다면서요⁠.⁠”

내가 말했다⁠. 양 본부장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맞습니다⁠. 지금은 안 씁니다⁠. 수입이 싸서요⁠. 숨기지 않겠습니다⁠.⁠”

양 본부장은 할망들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모살개점은 다르게 하겠다는 겁니다⁠. 마을 귤을 계약으로 사겠습니다⁠. 문서로 드리겠습니다⁠.⁠”

“⁠문서로요⁠?⁠”

“⁠문서로요⁠. 대신 2단계가 되어야 모살개점이 섭니다⁠.⁠”

양 본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숨기지도 않았다⁠. 고추 할망이 무스 컵을 밀어 놓고 말했다⁠.

“⁠바다 건너온 거 먹으러 버스 타고 왔네⁠.⁠”

할망들이 리조트 정원을 구경하는 동안 양 본부장이 테라스로 나를 불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양 본부장은 커피에 손을 대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바래서 노랗게 뜬 사진이었다⁠. 검은 잠수복을 입은 여자가 주황색 둥근 부표를 끌어안고 바위에 앉아 웃고 있었다⁠. 해녀들이 물 위에 띄워 몸을 기대는 테왁이었다⁠.

“⁠어머니입니다⁠. 저 테왁도 빚으로 산 겁니다⁠.⁠”

“⁠웃고 계시네요⁠.⁠”

“⁠춘옥 삼촌 말이 맞습니다⁠. 저는 어머니 웃는 걸 이 사진으로만 봤습니다⁠.⁠”

양 본부장은 휴대전화를 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싱가포르 투자사는 기한을 정해 두었습니다⁠. 18일까지 돌담집과 해안 땅을 같이 사지 못하면 돈을 뺍니다⁠. 그럼 모살개점은 없습니다⁠. 1단계로 산 귤밭 서른 필지는 회사에 빚으로 남고요⁠. 그 땅을 판 이웃들은 땅도 없고 일자리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저한테 그 말씀을 하세요⁠?⁠”

“⁠선생님은 표가 없지만 대봉이 형은 있으니까요⁠. 형은 선생님 말을 듣습니다⁠.⁠”

양 본부장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반쯤 남은 커피 위로 바닷바람이 잔물결을 일으켰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리조트 커피 맛까지 혀에 담아 둘 자리가 없었다⁠.

*

돌아오는 버스에서 양 본부장이 마이크를 먼저 잡았다⁠. 노래가 아니었다⁠. 창밖으로 해가 기울었다⁠.

“⁠삼촌들⁠, 오늘 보신 대로입니다⁠. 저희는 아직 모자랍니다⁠. 그래도 일자리와 보상금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손주 학비⁠, 병원비⁠, 집 고칠 돈⁠. 16일 총회에서 잘 생각해 주십시오⁠.⁠”

양 본부장이 앉자 춘옥 삼촌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마이크를 받았다⁠. 노래방 마이크라 내 목소리에 메아리가 붙었다⁠. 버스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는 메아리가 다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삼촌들⁠, 저는 마을 사람이 아니라서 총회에서 표가 없어요⁠.⁠”

메아리가 다시 붙었다⁠. 하르방 하나가 「⁠없어요⁠, 없어요⁠」 하고 따라 해서 또 웃음이 났다⁠.

“⁠그래서 지금 말씀드릴게요⁠. 지난 보름 동안 모살개 귤이 이천 상자 넘게 서울로 갔어요⁠. 「⁠귤 따는 한 달 살기⁠」 하겠다는 손님이 서른두 팀 기다리고 있어요⁠. 손님 한 팀이면 할망 집 빈방 하나가 차요⁠. 리조트 보상금보다 작아요⁠. 작은 대신에 할망 집이 할망 집으로 남아요⁠. 불턱도 불턱으로 남고요⁠.⁠”

현 삼촌네 할망이 뒷자리에서 소리쳤다⁠.

“⁠선생은 한 달 뒤에 가잖아⁠!⁠”

메아리 없는 목소리였다⁠. 버스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마이크를 쥔 채 대답을 찾았다⁠. 대답 대신 양 본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양 본부장도 같은 질문을 들고 있는 얼굴이었다⁠.

“⁠네⁠. 저는 가요⁠.⁠”

나는 마이크를 내렸다⁠. 메아리가 내 말을 한 번 더 했다⁠.

*

모살개에 내리자 전봇대 꼭대기의 확성기가 지지직거렸다⁠. 마을 방송이었다⁠.

「⁠알립니다⁠, 알립니다⁠. 오는 11월 16일 저녁 일곱 시⁠, 마을회관에서 마을 총회를 엽니다⁠. 안건은 마을 공동 해안 토지 매각 건입니다⁠. 마을 회원은 한 집에 한 분씩 꼭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두 번 되풀이되었다⁠. 할망들이 길가에 멈춰 확성기를 올려다보았다⁠. 춘옥 삼촌은 올려다보지 않았다⁠. 브로치를 떼어 손바닥에 쥐고 집으로 내려갔다⁠.

밤 아홉 시⁠, 나는 윗밭으로 올라갔다⁠. 대봉 씨가 머리에 전등을 달고 혼자 귤을 따고 있었다⁠. 수건 위에 전등 끈을 둘러 묶어서 머리가 동그란 귤 같았다⁠. 전등 불빛이 귤나무 잎 사이로 오갔다⁠. 대봉 씨는 내 발소리에 돌아보다가 내 얼굴에 불빛을 정통으로 쏘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이고⁠, 미안허우다⁠.⁠”

대봉 씨가 전등을 끄려다 엉뚱한 단추를 눌러 불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깜빡이는 불빛 속에서 대봉 씨가 허둥거렸다⁠. 나는 웃음이 터졌다⁠. 사흘 만에 처음 웃었다⁠. 대봉 씨가 겨우 불을 끄자 달빛만 남았다⁠.

“⁠숨긴 거⁠, 미안허우다⁠.⁠”

대봉 씨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귤나무 가지 하나를 잡았다⁠. 대봉 씨가 내 손에 귤 하나를 따서 올려놓았다⁠. 나는 껍질을 깠다⁠. 한 줄로 길게 까 보려 했는데 중간에 끊겼다⁠. 대봉 씨가 귤 하나를 더 따서 내 손에 놓았다⁠. 욕심쟁이네⁠, 대봉 씨가 말했다⁠. 두 번째는 끊기지 않았다⁠.

한 조각을 대봉 씨 입에 넣어 주었다⁠. 대봉 씨가 한 조각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귤은 달았다⁠. 열흘 전의 신맛은 혀끝 한 귀퉁이에만 남아 있었다⁠. 대봉 씨 손가락이 내 입술에 닿은 채로 멈췄다⁠. 귤 향이 손가락에 배어 있었다⁠. 대봉 씨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대봉 씨 입술에서 귤 맛이 났다⁠. 신맛이 먼저 오고⁠, 오래 지나서 단맛이 왔다⁠. 윗밭 맨 위 나무의 맛이었다⁠. 대봉 씨 작업복에서 흙냄새와 땀 냄새가 났고⁠, 내 등 뒤에서 귤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우리는 한참 그렇게 서 있었다⁠. 쉰여덟과 예순의 숨이 달빛 속에서 하얗게 섞였다⁠.

춘옥 삼촌 집에 돌아와 작은 방 불을 켰다⁠. 가방 안쪽 지퍼를 열고 통장을 꺼냈다⁠. 표지의 손톱자국을 엄지로 쓸었다⁠. 두 해 동안 한 번도 열지 않은 통장이었다⁠. 돋보기를 쓰고 첫 장을 넘겼다⁠. 숫자는 한 줄뿐이었다⁠. 선묵이 마지막으로 남긴 숫자였다⁠. 육천을 빼고도 한참이 남는 숫자였다⁠.

나는 통장을 덮지 않고 펼쳐 둔 채 불을 껐다⁠. 내일 아침 서귀포 은행 문이 열리는 시간은 아홉 시였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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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가비2026.11.01· 9화

    계획도 영상에서 불턱 위에 「이전」 두 글자가 커질 때 할망들이 숨죽이는 장면, 화가 나서 혼났어요.

    • 석담율작가2026.11.01

      불턱은 해녀들이 물질 뒤에 불 쬐는 자리예요. 그 두 글자를 본 할망들이 다음 날 아침 먼저 움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