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36자)

배액

제주 한 달 살기 · 석담율

서귀포 은행 문은 아홉 시에 열렸다⁠. 나는 여덟 시 사십 분부터 문 앞에 서 있었다⁠. 서른 해 동안 아침 여덟 시 사십 분이면 교실 문을 열었다⁠. 몸이 여덟 시 사십 분을 기억했다⁠.

번호표를 뽑고 창구에 앉아 통장을 내밀었다⁠. 젊은 직원이 통장 표지의 손톱자국을 힐끔 보고 첫 장을 넘겼다⁠. 내가 육천만 원을 자기앞수표로 찾겠다고 하자 직원의 손이 멈췄다⁠.

“⁠고객님⁠, 실례지만 어디에 쓰실 돈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남의 빚 갚아 주려고요⁠.⁠”

직원이 모니터 옆의 노란 종이를 슬그머니 꺼냈다⁠. 「⁠보이스피싱·로맨스 스캠 예방 확인서⁠」라는 제목이 보였다⁠. 직원은 펜을 쥐고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누가 송금하라고 시켰나요⁠? 검찰이나 금융감독원이라고 하면서요⁠.⁠”

“⁠아니요⁠.⁠”

“⁠그럼 혹시⁠… 최근에 알게 된 남자분이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제주에서 만난 분이요⁠?⁠”

나는 잠깐 생각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네⁠, 제주에서 만난 남자예요⁠. 보름 됐어요⁠.⁠”

직원의 펜이 종이 위에서 굳었다⁠.

“⁠근데 그 사람은 이 돈 받기 싫어해요⁠. 제가 우겨서 주려는 거예요⁠.⁠”

직원이 일어나 뒤쪽 책상의 지점장에게 갔다⁠. 둘이 나를 번갈아 보며 수군거렸다⁠. 지점장이 다가와 내 앞에 앉았다⁠. 쉰 살쯤 된 여자였다⁠. 지점장은 확인서의 질문을 하나씩 읽었고⁠, 나는 하나씩 대답했다⁠. 남자가 투자 이야기를 했느냐⁠, 아니다⁠. 해외에 있다고 했느냐⁠, 아니다⁠. 귤밭에 있다⁠.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느냐⁠, 아니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다⁠. 지점장이 마지막 질문에서 펜을 내려놓고 나를 오래 보았다⁠.

“⁠고객님⁠, 그분 귤밭 하시는 분이세요⁠?⁠”

“⁠네⁠. 모살개요⁠.⁠”

“⁠라이브에 손만 나오던 분이요⁠?⁠”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점장도 웃었다⁠. 지점장의 어머니가 춘옥 삼촌 라이브를 보고 귤을 세 상자 시켰다고 했다⁠. 지점장은 확인서에 서명을 받고 수표를 끊어 주었다⁠. 봉투를 건네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받기 싫어하는 분한테 주는 돈이 제일 안 받아집니다⁠. 저희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은행 문을 나서자 바람이 셌다⁠. 봉투는 손바닥보다 작았고 종이 한 장 무게였다⁠. 선묵이 서른두 해 동안 출근해서 번 돈이 수표 한 장에 들어 있었다⁠. 나는 봉투를 가방 안쪽 지퍼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끝까지 잠갔다⁠. 두 번 확인했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가방을 앞으로 돌려 안았다⁠. 소매치기 걱정이 아니었다⁠. 선묵을 안고 걷는 기분이 들었다⁠.

*

돌아오는 버스에서 가족 단톡방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재온이 아니라 며느리였다⁠.

「⁠어머님⁠, 재온 씨 어젯밤에 아버님 사진 보다가 잠들었어요⁠. 화난 거 아니에요⁠. 무서운 거예요⁠.⁠」

나는 답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쓰다가 지웠다⁠. 마지막에는 「⁠알아⁠. 고맙다⁠.⁠」만 보냈다⁠. 며느리가 귤 그림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나는 봉투가 든 가방을 무릎 위에서 두 손으로 눌렀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봉투 모서리가 손바닥을 찔렀다⁠.

*

돌담집 올레를 올라가는데 윗밭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대구 아저씨가 귤나무 사이에 서서 손님들과 할망들에게 오늘 딴 상자 수를 외치고 있었다⁠. 이 주째 귤 따기 실적이라고 했다⁠. 대구 아주머니가 남편 호루라기 끈을 잡아당겨 입에서 빼냈다⁠. 편집자 손님은 사다리 위에서 꼭지를 두 번 자르며 「⁠귤 따는 한 달 살기⁠」 기다리는 사람이 마흔 팀으로 늘었다고 소리쳤다⁠. 춘옥 삼촌네 옆집 할망이 빈방을 하나 더 내놓겠다고 했다는 말도 들렸다⁠. 돌담을 맞댄 집이 넷이 되었다⁠.

나는 손을 흔들어 주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가방이 무거웠다⁠.

밖거리 마루에 대봉 씨와 미랑 씨가 마주 앉아 귤을 고르고 있었다⁠. 상품과 파치를 가르는 일이었다⁠. 미랑 씨는 흉터 귤을 파치 바구니에 넣다가 멈추고 상품 바구니로 옮겼다⁠. 흉터 귤이 더 달다는 것을 미랑 씨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가 두 사람 사이에 봉투를 놓았다⁠.

“⁠육천이에요⁠. 가계약 깨시는 데 쓰세요⁠.⁠”

대봉 씨는 봉투를 보지 않았다⁠. 손에 든 귤만 보았다⁠. 미랑 씨가 봉투를 열어 수표를 꺼냈다⁠. 숫자를 확인하고 아버지를 보고 나를 보았다⁠.

“⁠선생님⁠, 이거 어디서 난 돈이에요⁠?⁠”

“⁠남편 보험금이에요⁠.⁠”

대봉 씨가 귤을 바구니에 내려놓았다⁠. 수건을 벗었다⁠. 짧은 회색 머리 밑의 이마가 땀에 젖어 있었다⁠.

“⁠선생 서방님이 남긴 돈으로 내 빚 갚으면⁠, 나는 평생 그 돈 위에서 귤 따야 하우다⁠.⁠”

“⁠그 돈 위에서 귤 따시면 되잖아요⁠. 귤은 땅 위에서 따나 돈 위에서 따나 똑같이 달아요⁠.⁠”

“⁠안 똑같수다⁠.⁠”

대봉 씨 목소리가 처음으로 커졌다⁠.

“⁠선생은 이 돈 주고 서울 가면 끝이우다⁠. 나는 귤 딸 때마다 선생 서방님한테 빚진 걸 떠올려야 하고⁠. 그건 귤이 아니라 빚이우다⁠.⁠”

미랑 씨가 수표를 봉투에 도로 넣었다⁠. 손끝이 떨렸다⁠.

“⁠선생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우리 아빠 꼬시는 거예요⁠? 서울에서 혼자 사시기 싫어서⁠?⁠”

마루가 조용했다⁠. 미랑 씨 말이 칼처럼 마루에 꽂혔는데⁠, 나는 칼날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미랑 씨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 아드님은 아세요⁠? 아버지 돈을 이렇게 쓰시는 거⁠?⁠”

“⁠알아요⁠. 싫어해요⁠.⁠”

“⁠그런데도요⁠?⁠”

“⁠그런데도요⁠.⁠”

“⁠네⁠. 혼자 살기 싫어요⁠.⁠”

미랑 씨 눈이 커졌다⁠. 대봉 씨가 고개를 들었다⁠.

“⁠남편 장례식에서 사흘 동안 손님 신발만 정리했어요⁠. 두 해 동안 서울 집에서 아침 여덟 시 사십 분이면 눈을 떴어요⁠. 갈 데가 없는데 눈이 떠졌어요⁠. 여기 와서 처음으로 그 시간에 갈 데가 생겼어요⁠. 귤밭에요⁠. 혼자 살기 싫어서 이 돈 쓰는 거 맞아요⁠. 그런데 아버님을 사려는 게 아니에요⁠. 제 아침을 사려는 거예요⁠.⁠”

미랑 씨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봉 씨가 봉투를 집어 내 앞으로 밀었다⁠. 손바닥이 봉투 위에 오래 머물렀다⁠.

“⁠선생 아침은 선생 돈으로 사우다⁠. 내 빚 말고⁠.⁠”

나는 봉투를 받지 않았다⁠. 대봉 씨도 손을 떼지 않았다⁠. 봉투가 마루 한가운데에서 두 손 사이에 끼어 있었다⁠. 미랑 씨가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흉터 귤 하나를 집어 갔다⁠. 나는 결국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넣으면서 대봉 씨를 보지 않았다⁠.

대봉 씨는 내가 마루에서 내려갈 때까지 귤을 골랐다⁠. 흉터 귤 하나를 파치 바구니에 넣었다가 꺼내 상품 바구니에 넣고⁠, 다시 꺼내 손에 쥐었다⁠. 나는 신발을 신으며 대봉 씨 손을 보았다⁠. 귤을 쥔 손등에 가위 자국이 하얗게 겹쳐 있었다⁠. 정낭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대봉 씨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

돌아보았다⁠. 대봉 씨는 쥐고 있던 흉터 귤을 마루 끝에 내려놓았다⁠. 내가 가져가라는 뜻인지⁠, 그냥 내려놓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대봉 씨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귤을 가지러 돌아가지 않았다⁠.

*

밤 열 시⁠, 춘옥 삼촌 집 부엌문이 다시 열렸다⁠. 평식 씨였다⁠. 이번에는 서류 봉투가 없었다⁠. 작업 점퍼 대신 낡은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춘옥 삼촌이 아무 말 없이 밥상을 차렸다⁠. 갈치 한 토막과 몸국과 김치였다⁠. 평식 씨는 숟가락을 들기 전에 나를 보았다⁠.

“⁠선생님⁠, 어멍이 회사에 말하라고 해서 말했수다⁠. 해녀회는 안 판다고⁠. 본부장님이 알았다고 했수다⁠.⁠”

“⁠고마워요⁠.⁠”

“⁠고마울 일이 아니우다⁠. 회사가 총회에서 지면 우리 하청은 망하우다⁠. 1단계 공사비를 아직 반도 못 받았수다⁠.⁠”

평식 씨는 몸국을 한 숟가락 떴다⁠. 춘옥 삼촌이 아들 숟가락 위에 갈치 살을 발라 얹었다⁠. 미랑 씨 밥 위에 갈치 가시를 발라 주던 대봉 씨 손과 똑같았다⁠. 이 마을 부모들은 다 같은 손을 가졌다⁠.

“⁠그래도 어멍 편 하쿠다⁠. 우리 딸 등록금은 내가 대리운전을 하든 뭘 하든 대우다⁠. 어멍 불턱을 내가 이전하는 건 못 하쿠다⁠.⁠”

춘옥 삼촌이 갈치를 바르던 손을 멈췄다⁠. 아들을 보지 않고 다시 갈치를 발랐다⁠. 손이 아까보다 느렸다⁠.

평식 씨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목소리를 낮췄다⁠.

“⁠선생님⁠, 하나 더 말씀드리쿠다⁠. 총회에서 지면 해안 땅은 못 사지만⁠, 회사는 돌담집을 놓지 않을 거우다⁠. 포구 옆 옛 넙치 양식장 땅을 회사가 벌써 사 놨수다⁠. 거기에 작은 호텔 하나 짓는 계획이 따로 있수다⁠. 양식장으로 가는 길도 돌담집 올레뿐이우다⁠. 그러니 대봉이 형이 가계약을 깨면 회사는 소송을 해서라도 돌담집을 가지려 할 거라⁠. 본부장님이 오늘 저녁에 형한테 전화하는 걸 들었수다⁠. 18일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내일 당장 잔금 치르자고⁠.⁠”

나는 숟가락을 쥔 채 굳었다⁠.

“⁠형이 뭐라고 했어요⁠?⁠”

“⁠형은 아무 말도 안 했수다⁠. 본부장님 혼자 말했지⁠.⁠”

평식 씨가 돌아간 뒤 춘옥 삼촌이 설거지를 하며 등을 보인 채로 말했다⁠.

“⁠대봉이 각시 서울 갈 때⁠, 대봉이가 각시한테 돈 한 푼 못 쥐여 보냈어⁠. 그 해 귤이 반이 떨어져서⁠. 그래서 내가 대봉이 몰래 각시한테 봉투를 줬지⁠. 물질해서 모은 돈이었어⁠.⁠”

춘옥 삼촌은 그릇을 헹궈 엎어 놓았다⁠.

“⁠대봉이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다음 해부터 귤 딸 때마다 나한테 한 상자씩 갖다 놓더라⁠. 칠 년을⁠. 내가 그만하라고 해도 안 들어⁠. 칠 년째 되던 해에 봉투 값이 다 찼다고 하더니 그다음부터는 방세라고 우기며 갖다 놓고⁠.⁠”

“⁠그럼 지금 갖다 주시는 상자는요⁠?⁠”

“⁠그건 그냥 주는 거지⁠. 빚 다 갚고 나서야 그냥 주는 사람이 된 거라⁠.⁠”

춘옥 삼촌은 행주를 짜서 널었다⁠. 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놈은 받으면 갚아야 사는 놈이여⁠. 육천을 받으면 육천 갚을 때까지 은영이 니 얼굴을 빚으로 볼 거라⁠. 그게 싫은 거지⁠.⁠”

나는 가방 안의 봉투를 생각했다⁠. 칠 년 동안 한 상자씩 귤을 나르는 대봉 씨가 눈에 그려졌다⁠. 육천이면 몇 해를 날라야 하는지 따지려다 그만두었다⁠. 따지는 것만으로도 혀가 썼다⁠.

*

새벽 다섯 시⁠, 나는 올레를 올라갔다⁠. 하늘이 막 회색으로 풀리고 있었다⁠. 가방 안에 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한 번 더 말해 볼 작정이었다⁠. 이번에는 받아 달라고 하지 않고 빌려 가라고 할 생각이었다⁠. 이자도 받겠다고⁠, 귤로 받겠다고⁠. 올라가는 내내 할 말을 혀 위에서 굴렸다⁠.

돌담집 정낭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막대 세 개가 다 가로질러 있었다⁠. 첫날 땅으로 다 내려져 있던 막대들이 돌기둥 구멍에 하나씩 꽂혀 올레를 막고 있었다⁠. 하나는 이웃에 잠깐 갔다는 뜻⁠, 둘은 조금 멀리 갔다는 뜻⁠, 셋은 멀리 오래 갔다는 뜻이라고 춘옥 삼촌이 말했었다⁠.

마당 너머 대봉 씨 트럭 자리가 비어 있었다⁠. 바퀴 자국에 이슬이 고여 있었다⁠. 밖거리 처마 밑에 장터 날 매단 현수막이 한쪽 끈이 풀린 채 바람에 펄럭였다⁠. 밖거리 문이 열리고 미랑 씨가 패딩을 걸치고 나왔다⁠. 미랑 씨는 막대 너머의 나를 보고 한참 서 있다가 다가왔다⁠. 막대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 보았다⁠.

“⁠아빠 서귀포 갔어요⁠. 본부장님이랑⁠. 네 시에 나갔어요⁠.⁠”

“⁠왜요⁠?⁠”

미랑 씨는 대답 대신 맨 위 막대에 손을 얹었다⁠. 막대 위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손바닥이 젖었다⁠.

“⁠저도 아빠가 이럴 줄은 몰랐어요⁠.⁠”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