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30자)

계약금

제주 한 달 살기 · 석담율

새벽 다섯 시⁠, 나는 춘옥 삼촌 집에서 올레를 올라갔다⁠. 하늘이 아직 검었고 담 너머 귤나무들이 검은 덩어리로 웅크리고 있었다⁠. 돌담집 마당에 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대봉 씨가 밖거리 처마 밑에 사다리를 세우고 전구 줄을 매고 있었다⁠. 미랑 씨가 사다리를 잡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나는 얼른 가서 사다리 다리를 붙잡았다⁠.

“⁠어깨⁠.⁠”

“⁠선생까지 왜 이러우꽈⁠.⁠”

대봉 씨는 투덜거리면서도 사다리에서 내려와 나에게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대정 오일장에서 샀다고 했다⁠. 봉투 안에 귤색 앞치마가 들어 있었다⁠. 앞섶에 주머니가 두 개 있었고⁠, 한쪽 주머니에 돋보기가 딱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선생 조끼랑 색 맞추느라고 세 집을 돌았수다⁠.⁠”

“⁠세 집이나요⁠?⁠”

“⁠오일장 할망들이 무사 귤색을 찾냐고 다 물어봐서⁠.⁠”

나는 앞치마를 둘렀다⁠. 끈을 등 뒤에서 묶는데 손가락이 꼬였다⁠. 대봉 씨가 뒤에서 끈을 잡아 묶어 주었다⁠. 매듭이 단단했다⁠. 귤 상자 끈을 묶는 손이었다⁠.

다섯 시 반⁠, 돌담집 마당에 솥 세 개가 올라갔다⁠. 춘옥 삼촌은 빙떡 반죽을 큰 양푼에 풀었고⁠, 고추 할망은 어젯밤부터 고은 돼지 뼈 국물에 모자반을 넣어 몸국을 끓였고⁠, 현 삼촌네 할망은 차조를 쪄서 팥고물을 묻힌 오메기떡을 쟁반에 줄 맞춰 놓았다⁠. 오메기떡 하나를 집어 먹자 차조가 이 사이에서 쫀득하게 늘어나고⁠, 팥고물이 혀에 텁텁하게 붙었다가 단맛을 풀었다⁠. 나는 하나를 더 집으려다 현 삼촌네 할망한테 손등을 맞았다⁠.

“⁠팔 거여⁠. 먹지 마⁠.⁠”

“⁠맛을 봐야 팔죠⁠.⁠”

“⁠아까 봤잖아⁠.⁠”

대봉 씨는 정낭 막대 세 개를 다 빼서 담에 기대 놓았다⁠. 막대가 다 내려져 있으면 집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막대를 아예 빼 두면 누구든 들어오라는 뜻이라고 춘옥 삼촌이 말했다⁠. 진짜 그런 뜻이 있는지는 춘옥 삼촌만 알았다⁠.

대구 아저씨는 올레 입구에 서서 호루라기를 물었다⁠. 주차 안내를 맡겠다고 자원했는데⁠, 올레에는 차가 들어올 수 없었다⁠. 대구 아저씨는 그래도 사람이 올라올 때마다 호루라기를 짧게 불고 손바닥으로 마당 안을 가리켰다⁠. 대구 아주머니는 귤 바구니마다 귤잎과 동백 가지를 꽂았다⁠. 편집자 손님은 담 위에 휴대전화를 세우고 라이브를 켰다⁠. 화면 제목은 「⁠모살개 돌담집 장터 · 할망 손맛 · 흉터 귤⁠」이었다⁠.

*

계산대는 툇마루였다⁠. 처음에는 내가 맡았다⁠. 열 시가 되기도 전에 손님이 마당을 꽉 채웠고⁠, 나는 거스름돈을 세다가 두 번 틀렸다⁠. 세 번째 틀렸을 때 미랑 씨가 툇마루로 올라왔다⁠. 패딩 소매를 걷고 내 옆에 앉았다⁠.

“⁠선생님⁠, 비켜 보세요⁠.⁠”

미랑 씨는 돈 통을 앞으로 당기고 가격표를 다시 붙였다⁠. 빙떡 두 개 묶음⁠, 몸국 한 그릇⁠, 흉터 귤 한 봉지를 묶어 「⁠할망 세트⁠」라고 이름을 붙였다⁠. 가격 끝자리를 맞춰 거스름돈이 덜 나가게 했다⁠. 휴대전화 계산기 두드리는 손가락이 피아노 치는 손 같았다⁠.

“⁠집 팔 사람이 무슨 장터냐더니요⁠.⁠”

“⁠손님들 줄 서 있는 거 보면 손이 근질거려요⁠. 아빠 닮아서⁠.⁠”

미랑 씨는 손님에게 웃으며 거스름돈을 내주고 나를 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나는 귤 봉지를 묶었다⁠. 열 개를 묶는 동안 미랑 씨는 스무 명을 계산했다⁠. 미랑 씨는 「⁠할망 세트⁠」가 다 나가자 할망들에게 빙떡을 두 배로 부치라고 지시했다⁠. 춘옥 삼촌이 반죽 국자를 든 채로 대봉 씨에게 소리쳤다⁠.

“⁠대봉아⁠, 니 딸이 나한테 일 시킨다⁠!⁠”

“⁠삼촌이 업어 키운 딸이우다⁠.⁠”

가족 단톡방에도 장터가 올라왔다⁠. 재온이 라이브 화면을 찍어 올렸다⁠.

「⁠엄마 앞치마 뭐야⁠」

「⁠엄마 웃는 거 오랜만에 본다⁠」

두 번째 글은 금세 지워졌다⁠. 지워졌다는 표시만 남았다⁠. 나는 지워진 자리를 한참 보다가 휴대전화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돋보기와 휴대전화가 한 주머니에 들어가자 앞섶이 불룩해졌다⁠.

*

열한 시쯤 올레 입구에서 호루라기가 길게 울렸다⁠. 대구 아저씨가 누군가를 막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커다란 천을 둘둘 말아 어깨에 메고⁠, 아내와 아이 둘을 데리고 서 있었다⁠. 남자는 대구 아저씨 어깨 너머로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문은영 선생님⁠!⁠”

영식이었다⁠. 마흔하나가 된 영식은 머리숱이 반으로 줄었고 배가 나왔다⁠. 그래도 손 흔드는 모양은 복도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던 열두 살과 똑같았다⁠. 영식은 마당으로 뛰어 들어와 내 앞에서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아이 둘이 아빠를 따라 허리를 굽혔다⁠.

“⁠선생님⁠, 저 영식이에요⁠. 복도에 맨날 서 있던 애요⁠.⁠”

“⁠알아⁠. 복도 창문으로 수업 다 따라 하던 애⁠.⁠”

영식의 아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영식은 어깨에 멘 천을 풀었다⁠. 회사에서 만들었다는 현수막이었다⁠. 흰 바탕에 귤색 글씨로 「⁠문은영 선생님 귤 장터 · 늘솔초 6학년 2반 일동⁠」이라고 박혀 있었다⁠. 대구 아저씨와 대봉 씨가 현수막을 밖거리 처마에 매달았다⁠. 할망들이 현수막을 올려다보며 늘솔초가 어디냐고 물었다⁠.

영식은 몸국 두 그릇을 먹고 나서 내 옆에 쭈그려 앉았다⁠.

“⁠선생님⁠, 고백할 게 있어요⁠. 6학년 때 선생님 분필 통 숨긴 거 저예요⁠.⁠”

“⁠알아⁠.⁠”

“⁠아셨어요⁠?⁠”

“⁠네 사물함에 분필 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어⁠. 내가 모른 척해 줬지⁠.⁠”

영식은 서른 해 만에 들킨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영식의 아이들이 아빠가 혼나는 걸 처음 본다며 좋아했다⁠. 영식은 귤 다섯 상자를 주문하고⁠, 빙떡을 비닐에 싸서 서울 비행기에 들고 간다고 했다⁠.

점심때가 지나자 편집자 손님이 맛보기 시합을 열었다⁠. 귤 다섯 알을 까서 접시에 놓고⁠, 그중 하나는 대구 아주머니가 마트에서 사 온 수입 오렌지 조각이었다⁠. 눈을 가리고 어느 것이 어느 나무에서 왔는지 맞히는 놀이였다⁠. 나는 눈가리개를 하고 하나씩 혀에 올렸다⁠. 첫 번째는 아랫밭 귤⁠, 물이 많았다⁠. 두 번째는 윗밭 맨 위 나무⁠, 신맛이 세다가 끝이 꿀이었다⁠. 세 번째는 흉터 귤⁠. 네 번째에서 나는 혀를 멈췄다⁠. 단맛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고르고⁠, 향이 껍질 쪽으로 붕 떠 있었다⁠.

“⁠이건 바다 건너온 거예요⁠. 단맛에 굴곡이 없어요⁠.⁠”

마당이 박수로 뒤집혔다⁠. 춘옥 삼촌이 내 등을 쳤다⁠.

“⁠해녀 혀라니까⁠.⁠”

*

점심 무렵 점퍼를 입은 중년 남자 하나가 몸국을 먹고 나서 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서귀포시청 관광 부서 주무관이었다⁠. 쉬는 날이라 구경 왔다고 했다⁠.

“⁠선생님⁠, 경관 심의에 의견 내실 거면 시청 공람부터 보세요⁠. 계획도는 마당 하나 그림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직접 보셔야 압니다⁠. 저는 말 못 해요⁠. 몸국은 맛있습니다⁠.⁠”

주무관은 빈 그릇을 고추 할망에게 돌려주고 내려갔다⁠. 나는 명함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하나 더 무거워졌다⁠.

현 삼촌도 장터에 왔다⁠. 귤 한 봉지를 사고⁠, 돈을 내미는 손을 대봉 씨가 밀어냈다⁠. 현 삼촌은 돈을 툇마루에 놓고 도망치듯 내려갔다⁠. 평식 씨는 작업복 대신 평상복을 입고 올레 끝에 서 있었다⁠. 마당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춘옥 삼촌이 빙떡 두 개를 종이에 싸서 들고 나갔다⁠. 평식 씨가 지갑을 꺼내자 춘옥 삼촌은 아들 손등을 국자로 때렸다⁠. 평식 씨는 빙떡을 받아 들고 담 그늘에 서서 먹었다⁠. 먹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세 시가 되자 솥이 다 비었다⁠. 몸국 솥 바닥을 고추 할망이 숟가락으로 긁었고⁠, 귤 상자는 빈 것만 쌓였다⁠. 미랑 씨가 돈 통을 열어 지폐를 세었다⁠. 손가락이 빨랐다⁠. 다 세고 나서 미랑 씨는 한참 돈 통을 들여다보았다⁠.

“⁠아빠⁠, 이거 아랫밭 밭떼기 받은 거보다 많아⁠.⁠”

대봉 씨가 돈 통을 들여다보았다⁠. 수건 밑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

양 본부장이 정낭 자리로 들어온 것은 할망들이 솥을 씻고 있을 때였다⁠. 막대가 다 빠져 있어서 구두를 털 데가 없었다⁠. 양 본부장은 처마에 매달린 현수막을 올려다보고⁠, 빈 상자 더미를 보고⁠, 마당에 남아 있던 마을 사람 스무 명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하던 일을 멈췄다⁠.

“⁠삼촌⁠, 축하드립니다⁠. 잘하셨습니다⁠.⁠”

대봉 씨는 씻던 솥을 내려놓았다⁠. 손에 묻은 물기를 작업복에 닦고 양 본부장 앞으로 걸어갔다⁠.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이었다⁠.

“⁠본부장⁠, 나 집 안 팔쿠다⁠.⁠”

마당이 조용해졌다가 누군가 손뼉을 쳤다⁠. 고추 할망이었다⁠. 할망 둘이 따라 쳤다⁠. 대구 아저씨가 호루라기를 짧게 불었다⁠. 양 본부장은 박수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형님⁠, 따로 말씀 나누시지요⁠.⁠”

“⁠여기서 말헙서⁠. 다 아는 사람들이우다⁠.⁠”

양 본부장이 잠시 대봉 씨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서류 가방을 열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를 펼쳐 대봉 씨가 아니라 나에게 보였다⁠. 돋보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맨 아래 붉은 도장이 컸다⁠.

「⁠부동산 매매 가계약서 · 2027년 8월 12일 · 매도인 고대봉⁠」

“⁠형님은 8월에 가계약을 하셨습니다⁠. 계약금 삼천만 원을 받으셨고요⁠. 그 돈은 조합에 밀린 이자로 다 들어갔습니다⁠. 형님이 계약을 깨시려면 받은 돈의 두 배⁠, 육천을 돌려주셔야 합니다⁠. 그게 법입니다⁠.⁠”

양 본부장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마당이 작아서 크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양 본부장은 종이를 접어 다시 가방에 넣었다⁠.

“⁠오늘 장터 매출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육천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형님⁠, 저는 형님 망신 주러 온 게 아닙니다⁠. 다들 아셔야 하니까 말씀드린 겁니다⁠. 귤 사 주신 분들도요⁠.⁠”

마을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할망들이 솥 앞에서 손을 멈췄다⁠. 영식은 서울 가는 비행기 시간이 되어 아까 떠났다⁠. 다행이었다⁠. 대구 아저씨가 호루라기를 입에서 뺐다⁠. 편집자 손님이 담 위의 휴대전화를 슬그머니 껐다⁠.

마당 가장자리에서 수군거림이 일었다⁠.

“⁠육천이면 장터를 열 번 열어도 안 되네⁠.⁠”

“⁠그럼 대봉이는 처음부터 팔 사람이었던 거여⁠?⁠”

“⁠팔 사람이 귤은 왜 팔아⁠.⁠”

현 삼촌네 할망이 말을 거들려다 입을 다물었다⁠. 제 밭을 판 집이었다⁠. 춘옥 삼촌이 국자를 든 채로 대봉 씨 옆으로 걸어갔다⁠. 국자 끝에서 몸국 국물이 한 방울씩 마당에 떨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봉 씨 옆에 서 있기만 했다⁠. 꼬부라진 허리가 대봉 씨 팔꿈치에 닿았다⁠. 할망 둘이 춘옥 삼촌 뒤로 가서 섰고⁠, 나머지는 솥을 들고 슬금슬금 올레로 내려갔다⁠. 마당이 반으로 갈라졌다⁠.

양 본부장이 마당을 나가다 내 앞에서 멈췄다⁠.

“⁠선생님⁠, 이 마을 사람들 주머니 사정은 제가 선생님보다 오래 압니다⁠. 귤 사 주시는 분들한테도 육천 이야기는 하셔야 공평합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양 본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빠진 정낭 막대 사이로 나갔다⁠.

나는 미랑 씨를 보았다⁠. 미랑 씨는 돈 통을 무릎에 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다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대봉 씨가 나를 보았다⁠. 수건을 천천히 벗었다⁠. 짧은 회색 머리에 땀이 눌어붙어 있었다⁠. 대봉 씨는 벗은 수건을 두 손으로 쥐고 비틀었다⁠. 물기는 나오지 않았다⁠.

“⁠말했으면⁠, 선생이 귤 팔아 줬겠수과⁠?⁠”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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