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76자)

예약 취소

제주 한 달 살기 · 석담율

춘옥 삼촌이 말려 둔 귤껍질 한 줌을 주전자에 넣고 물을 부었다⁠. 껍질은 지난겨울 것이라 가죽처럼 질겼다⁠. 물이 끓자 안거리 부엌에 쌉쌀한 냄새가 퍼졌다⁠. 한 모금 마시니 혀뿌리에 쓴맛이 먼저 닿고⁠, 삼키고 나서 입천장에 단 기운이 남았다⁠. 학교 보건실 선생님이 감기 걸린 아이들한테 끓여 주던 차와 같은 맛이었다⁠. 춘옥 삼촌은 이 차를 진피차라고 불렀고⁠, 해녀들은 물질 끝내고 불턱에서 이걸 마셨다고 했다⁠.

마당에서는 할망 셋이 상자를 접고 있었다⁠. 현 삼촌네 할망⁠, 고추 말리던 할망⁠, 그리고 이름을 아직 모르는 할망 하나가 각자 엎은 바구니에 앉아 손을 놀렸다⁠. 손이 내 두 배는 빨랐다⁠. 택배 트럭이 아침에 이백 상자를 싣고 갔고⁠, 점심에 이백 상자가 더 나갈 차례였다⁠. 할망들은 상자 뚜껑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는 일을 서로 하겠다고 다퉜다⁠. 도장이 하나뿐이어서 나는 순번을 정해 주었다⁠. 서른 해 동안 교실에서 한 일 가운데 가장 많이 한 일이 순번 정하기였다⁠.

현 삼촌네 할망이 제 차례를 기다리다 못해 도장을 낚아채 상자 대신 제 손등에 찍었다⁠. 붉은 「⁠참 잘했어요⁠」가 주름진 손등에 비뚤게 앉았다⁠. 고추 할망이 보고 웃다가 바구니에서 굴러떨어졌다⁠. 나는 할망을 일으키며 다친 데가 없는지 무릎을 먼저 보았다⁠. 할망은 내 손을 뿌리치고 손등을 하늘에 비춰 보았다⁠.

“⁠칠십 평생에 잘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할망들은 이후로 상자 하나를 접을 때마다 손등을 서로 비춰 보았다⁠. 점심때까지 할망 셋의 손등이 다 붉어졌다⁠.

대봉 씨는 아침 일찍 트럭을 몰고 공항에 갔다⁠. 떠나기 전에 수건을 새것으로 바꿔 쓰고 거울 앞에서 두 번 고쳐 맸다⁠. 나는 모른 척했다⁠.

*

열한 시쯤 골목 아래에서 트럭 소리가 올라왔고⁠, 트럭 뒤로 검은 승용차가 한 대 따라 올라왔다⁠. 승용차에서 양 본부장이 내려 트럭 조수석 문을 먼저 열어 주었다⁠. 나는 툇마루에서 다 보았다⁠. 양 본부장이 손을 내밀었고⁠, 조수석에서 내리는 사람은 손 대신 문틀을 짚었다⁠.

“⁠미랑이 많이 컸다⁠. 아니⁠, 많이 무거워졌다⁠.⁠”

“⁠오빠⁠, 그런 말 하면 요즘은 큰일 납니다⁠.⁠”

양 본부장은 웃으며 차로 돌아갔다⁠. 오빠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이 마을에서는 누구든 삼촌이고 누구든 오빠였다⁠. 그래도 나는 두 사람이 공항에서부터 함께 왔다는 것을 기억해 두었다⁠.

미랑 씨가 정낭 막대 사이로 들어온 것은 몇 분 뒤였다⁠. 남색 패딩을 입고⁠, 한 손에 캐리어를 끌고⁠, 다른 손으로 배를 받치고 있었다⁠. 패딩 앞섶이 불룩했다⁠. 미랑 씨는 마당에 쌓인 상자와 바구니에 앉은 할망들과 툇마루에서 진피차를 따르는 나를 차례로 보았다⁠. 표정이 셋 다 다르게 바뀌었다⁠.

“⁠삼촌들⁠, 안녕하세요⁠.⁠”

할망들이 일어나 미랑 씨의 배를 쓰다듬었다⁠. 미랑 씨는 웃으면서 받았고⁠, 웃음이 끝나자 나를 보았다⁠.

“⁠문은영 선생님이시죠⁠? 고미랑입니다⁠. 이 집 예약을 관리하는 사람이에요⁠.⁠”

“⁠안녕하세요⁠. 먼 길 오셨네요⁠. 차 한잔 드릴까요⁠?⁠”

“⁠네⁠. 안에서 이야기 좀 해요⁠.⁠”

미랑 씨는 안거리 부엌 식탁에 앉았다⁠. 나는 진피차를 한 잔 따라 앞에 놓았다⁠. 미랑 씨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기만 하고 마시지 않았다⁠. 대봉 씨는 미랑 씨 캐리어를 밖거리에 들여놓고 나서 마당에 서성거리다가 귤밭으로 올라갔다⁠. 물 주러 간다고 했다⁠. 귤밭에는 호스가 없었다⁠.

“⁠선생님⁠, 저희 아빠 작년 겨울에 사다리에서 떨어졌어요⁠.⁠”

미랑 씨는 사다리 이야기부터 꺼냈다⁠. 윗밭 꼭대기 가지를 따다가 사다리 다리가 돌에 미끄러졌다고 했다⁠. 어깨뼈가 부러져 핀을 박았고⁠, 아버지는 딸에게 사흘이 지나서야 알렸다고 했다⁠. 혼자 응급실에 가고⁠, 혼자 수술 동의서에 도장을 찍고⁠, 혼자 퇴원했다고 했다⁠.

“⁠그 사흘 동안 저는 아빠가 귤 따느라 바빠서 전화를 안 받는 줄 알았어요⁠.⁠”

미랑 씨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얼굴을 찡그렸다⁠. 쓴맛이 혀뿌리에 닿은 얼굴이었다⁠.

“⁠저 3월에 둘째 낳아요⁠. 첫째는 세 살이고요⁠. 남편은 지방 발령이 났어요⁠. 아빠가 집 팔면 빚 갚고 남는 돈으로 저희 집 근처에 작은 아파트 하나 얻을 수 있어요⁠. 아빠는 손주 보고⁠, 저는 아빠 보고⁠. 그게 제 계산이에요⁠.⁠”

“⁠아버님한테도 그게 좋을까요⁠?⁠”

“⁠선생님⁠.⁠”

미랑 씨가 잔을 내려놓았다⁠. 소리가 크지 않았는데 식탁이 울렸다⁠.

“⁠선생님은 한 달 뒤에 가시잖아요⁠. 아빠는 여기 남아요⁠. 혼자요⁠. 귤값은 내년에도 떨어지고⁠, 아빠 어깨는 내년에 더 안 좋아져요⁠. 선생님이 라이브에서 웃으시는 동안⁠, 저는 아빠가 또 사다리에 올라가는 걸 서울에서 보고 있었어요⁠.⁠”

나는 대답할 말을 혀 위에서 굴려 보았다⁠. 맛이 다 썼다⁠.

“⁠그리고 하나 더요⁠. 선생님이 이웃 귤까지 받아서 파시면 그건 중개예요⁠. 돈이 아빠 통장으로 들어가니까 세금도 아빠가 내요⁠. 문제 생기면 책임도 아빠가 지고요⁠. 선생님은 그때 서울에 계실 거고요⁠.⁠”

미랑 씨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나는 서른 해 동안 학부모 상담을 했다⁠. 틀린 말을 하는 학부모보다 맞는 말을 하는 학부모가 훨씬 어려웠다⁠.

“⁠아버님이 라이브 날 웃으셨어요⁠.⁠”

“⁠아빠가 웃었다고요⁠?⁠”

미랑 씨가 짧게 웃었다⁠.

“⁠아빠는 엄마가 서울 간다고 짐 쌀 때도 귤밭에 있었어요⁠. 웃는 건 귤 때문이에요⁠. 사람 때문이 아니라⁠.⁠”

*

정낭에서 춘옥 삼촌 목소리가 들렸다⁠. 미랑 씨가 식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랑 씨 얼굴에서 서울 사람이 쑥 빠져나갔다⁠.

“⁠삼촌⁠!⁠”

“⁠아이고⁠, 미랑아⁠. 배가 남산만 하다⁠.⁠”

춘옥 삼촌은 빙떡 접시를 미랑 씨 손에 들려 주고 배를 두 손으로 감쌌다⁠. 미랑 씨는 빙떡 하나를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씹다가 멈췄다⁠. 눈가가 붉어졌다⁠.

“⁠삼촌⁠, 이거 맛이 그대로네⁠.⁠”

“⁠메밀이 그대로니까 그대로지⁠.⁠”

“⁠서울에서 메밀전병 사 먹으면 이 맛이 안 나⁠.⁠”

미랑 씨는 서서 빙떡 두 개를 먹었다⁠. 춘옥 삼촌이 툇마루에 앉으며 나와 미랑 씨를 번갈아 보았다⁠.

“⁠둘이 싸웠냐⁠?⁠”

“⁠이야기했어요⁠, 삼촌⁠.⁠”

“⁠얼굴 보니 싸웠네⁠. 나는 미랑이 편이여⁠.⁠”

미랑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디 귤은 저 선생 편이여⁠.⁠”

미랑 씨가 빙떡을 든 채로 춘옥 삼촌을 보았다⁠. 춘옥 삼촌은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마당의 할망들에게 도장 순번이 누구냐고 소리쳤다⁠.

나는 진피차를 보온병에 담아 귤밭으로 올라갔다⁠. 대봉 씨는 윗밭 맨 위 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에 가위도 바구니도 없었다⁠. 나무 둥치 옆에 알루미늄 사다리가 눕혀져 있었고⁠, 사다리 한쪽 다리에 새 고무가 감겨 있었다⁠.

“⁠물은 다 주셨어요⁠?⁠”

대봉 씨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거짓말이 들킨 얼굴이었는데⁠, 들켜서 오히려 편해진 얼굴이기도 했다⁠. 나는 보온병 뚜껑에 차를 따라 건넸다⁠.

“⁠미랑이 말이 다 맞수다⁠.⁠”

“⁠맞는 말이라서 어려워요⁠.⁠”

“⁠미랑이 어릴 때 이 나무에 올라가서 안 내려왔수다⁠. 귤 다 먹기 전에는 안 내려간다고⁠. 내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업고 내려왔지⁠.⁠”

대봉 씨는 눕혀 둔 사다리 다리의 새 고무를 엄지로 문질렀다⁠. 떨어진 뒤에 감은 고무였다⁠.

“⁠이번엔 미랑이가 사다리를 들고 온 거우다⁠. 나를 업고 내려가겠다고⁠.⁠”

나는 남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먼저 왔고⁠, 단맛은 끝내 오지 않았다⁠. 차가 식어 있었다⁠.

*

저녁은 밖거리 마루에서 먹었다⁠. 대봉 씨가 갈치를 구웠고⁠, 미랑 씨는 밥을 펐고⁠, 나는 무를 채 썰어 귤 식초에 무쳤다⁠. 셋이 한 상에 앉자 숟가락 소리만 났다⁠. 나는 무침을 한 젓가락 먹어 보고 귤 식초가 너무 세다는 것을 알았다⁠. 대봉 씨는 두 젓가락을 먹었다⁠. 미랑 씨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제가 하나 생각한 게 있어요⁠.⁠”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미랑 씨가 고개를 들었다⁠.

“⁠이 마을 할망 집마다 빈방이 있어요⁠. 자식들 나간 방이요⁠. 한 달 살기 손님을 거기 받는 거예요⁠. 손님은 아침마다 귤을 따고⁠, 할망들이 밥을 차리고⁠, 오후에는 바다에 가고⁠. 손님은 숙박비를 덜 내고⁠, 할망들은 방세를 받고⁠, 귤밭은 일손을 얻어요⁠. 옛날 수눌음처럼요⁠.⁠”

“⁠수눌음 알아요⁠?⁠”

미랑 씨가 물었다⁠.

“⁠어제 춘옥 삼촌한테 배웠어요⁠. 이웃끼리 일손을 주고받는 거라고⁠.⁠”

“⁠선생님⁠, 할망 집에서 손님을 받으려면 숙박업 신고를 해야 하고⁠, 소방 점검을 받아야 하고⁠, 밥을 팔면 위생 교육을 받아야 해요⁠. 할망이 손님한테 밥 차리다가 손님이 탈 나면요⁠? 손님이 귤 따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지면요⁠? 엄마들 방에 모르는 사람을 재워요⁠?⁠”

“⁠그러니까 법대로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죠⁠. 신고하고⁠, 점검받고⁠.⁠”

“⁠누가요⁠? 선생님이요⁠? 한 달 뒤에 가실 선생님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봉 씨가 갈치 가시를 발라 미랑 씨 밥 위에 올려 주었다⁠. 미랑 씨가 어릴 때부터 그랬을 손놀림이었다⁠. 대봉 씨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수건을 고쳐 썼다⁠.

“⁠해 보자⁠.⁠”

미랑 씨가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아빠⁠.⁠”

“⁠윗밭 귤 다 딸 때까지만 해 보자⁠. 따는 동안은 귤이 달려 있잖아⁠.⁠”

내가 현 삼촌한테 한 말이었다⁠. 대봉 씨가 현 삼촌네 마당에서 내가 한 말을 언제 들었는지 나는 몰랐다⁠. 미랑 씨는 아버지를 오래 보다가 밥상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

밤 열 시⁠, 마당에서 미랑 씨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거리 창이 얇았다⁠.

“⁠본부장님⁠, 18일 그대로 갑니다⁠. 네⁠. 제가 아빠 데리고 갈게요⁠. 그 사람은 제가 정리할게요⁠.⁠”

나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정리라는 말이 내 이름 뒤에 붙는 것을 처음 들었다⁠. 교무실에서는 늘 내가 정리하는 사람이었다⁠.

열 시 반에 휴대전화가 떨었다⁠.

「⁠예약이 호스트 사정으로 취소되었습니다⁠. 결제 금액은 사흘 안에 환불됩니다⁠. 퇴실일 10월 28일⁠」

돋보기를 쓰고 두 번 읽었다⁠.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나는 조끼를 걸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미랑 씨가 툇마루 끝에 앉아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제가 나가면 집이 팔리나요⁠?⁠”

“⁠네⁠.⁠”

미랑 씨는 망설이지 않았다⁠. 대답을 미리 준비해 둔 학생처럼 또렷했다⁠.

“⁠환불은 전액 해 드려요⁠. 사흘 뒤 퇴실이에요⁠. 미안해요⁠, 선생님⁠. 저는 아빠가 하나뿐이에요⁠.⁠”

밖거리 문이 열리고 대봉 씨가 나왔다⁠. 대봉 씨는 미랑 씨를 보고 나를 보았다⁠. 미랑 씨가 먼저 말했다⁠.

“⁠아빠⁠, 내가 관리하는 예약이야⁠. 내가 정했어⁠.⁠”

대봉 씨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수건을 벗어 손에 쥐었다가 다시 썼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대봉 씨가 말하지 않는 것으로 딸 편을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딸 편을 들 수밖에 없는 아버지라는 것도 알았다⁠.

나는 정낭 막대 사이로 나갔다⁠. 올레는 캄캄했고⁠, 담 너머 귤 향이 밤이라 더 짙었다⁠. 골목 끝 바닷가 집에 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춘옥 삼촌네였다⁠. 나는 대문 없는 마당에 들어가 부엌 창을 두드렸다⁠. 춘옥 삼촌이 몸빼 바지에 내복 차림으로 창을 열었다⁠.

“⁠삼촌⁠, 방 한 칸 세 주실래요⁠?⁠”

춘옥 삼촌은 나를 위아래로 보고⁠, 내 뒤 캄캄한 올레를 보았다⁠.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방세는 귤로 받으켜⁠. 근디 나 코 고는 건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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