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54자)

파치

제주 한 달 살기 · 석담율

새벽 여섯 시 반⁠, 귤밭에는 이슬이 무릎까지 차 있었다⁠. 대봉 씨가 빌려준 목장갑은 손가락이 한 마디씩 길었고⁠, 장화는 두 치수가 컸다⁠. 나는 귤색 조끼 위에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가위를 들었다⁠. 학교 미술 시간에 아이들 색종이를 자르던 가위보다 날이 짧고 손잡이가 두꺼웠다⁠.

“⁠두 번 자릅서⁠.⁠”

대봉 씨가 귤 하나를 손바닥에 받쳐 들고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가지에서 넉넉하게 끊어 떼고⁠, 다음에는 꼭지를 껍질에 바짝 붙여 한 번 더 잘랐다⁠. 꼭지가 길게 남으면 상자 안에서 옆 귤을 찌르고⁠, 찔린 자리부터 곰팡이가 슨다고 했다⁠. 귤 한 알이 썩으면 한 상자가 다 썩는다고 했다⁠.

나는 처음 열 개를 한 번씩만 잘랐다⁠. 대봉 씨는 아무 말 없이 내 바구니에서 귤을 하나씩 꺼내 꼭지를 다시 잘랐다⁠. 나는 받아쓰기 공책을 돌려받는 아이처럼 대봉 씨 손을 지켜보았다⁠. 열한 번째부터는 두 번씩 잘랐다⁠. 대봉 씨가 내 바구니를 들여다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칭찬 도장 같은 끄덕임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허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빈 바구니를 뒤집어 놓고 엉덩이를 붙인 채 낮은 가지를 땄다⁠. 앉아서 따니 손이 더 빨랐다⁠. 대봉 씨가 나를 한 번 보더니 말없이 제 바구니도 뒤집어 놓고 앉았다⁠. 쉰여덟과 예순이 나란히 엎은 바구니에 앉아 귤을 따는 동안 밭 위로 까마귀가 두 번 지나갔다⁠.

밭은 돌담으로 둘로 나뉘어 있었다⁠. 집 뒤 경사진 땅이 윗밭⁠, 돌담 너머 평평한 땅이 아랫밭이었다⁠. 윗밭 나무는 허리가 굵고 가지가 낮게 퍼졌고⁠, 아랫밭 나무는 키가 고르고 줄이 반듯했다⁠. 나는 윗밭에서 하나⁠, 아랫밭에서 하나를 따서 나란히 까 먹었다⁠. 아랫밭 귤은 물이 많고 맛이 얇아서 삼키고 나면 혀에 남는 것이 없었다⁠. 윗밭 귤은 신맛이 세게 오다가 목으로 넘어간 뒤에 단맛이 뒤늦게 올라왔다⁠.

“⁠윗밭 나무는 몇 살이에요⁠?⁠”

“⁠아방이 심었수다⁠. 내가 아홉 살 때⁠.⁠”

대봉 씨는 윗밭 나무 둥치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껍질에 이끼가 끼어 있었다⁠. 오십 년 가까이 이 언덕의 바람을 맞고 선 나무들이었다⁠.

*

창고 뒤에 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너무 크거나 너무 작거나⁠, 껍질에 바람 자국이 긁힌 것들이었다⁠. 대봉 씨는 상품이 못 되는 귤을 파치라고 불렀다⁠. 파치는 주스 공장에 넘기는데⁠, 한 상자 따는 품삯도 안 나온다고 했다⁠.

나는 껍질에 갈색 흉터가 길게 난 귤을 하나 골랐다⁠. 손톱을 넣자 껍질이 얇아서 쉽게 벗겨졌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나는 눈을 감았다⁠. 상품 귤보다 신맛이 덜 날카롭고⁠, 단맛이 혀 가운데로 두껍게 깔렸다⁠. 두 조각⁠, 세 조각을 연달아 먹었다⁠.

“⁠이게 왜 버려져요⁠?⁠”

“⁠못생겨서⁠.⁠”

“⁠가지 끝에서 바람 맞은 놈들이죠⁠? 바람 맞고 상처 난 귤이 더 달아요⁠. 저희 반에도 그런 애들 꼭 있었어요⁠. 얼굴에 상처 달고 다니는 애가 속은 제일 달아요⁠.⁠”

대봉 씨가 흉터 귤 하나를 집어 까 먹었다⁠. 오래 씹었다⁠. 오십 년 동안 이 밭의 귤을 먹은 사람이 처음 먹어 보는 사람의 얼굴을 했다⁠.

아홉 시쯤 일 톤 트럭이 아랫밭 돌담 앞에 멈췄다⁠. 귤을 밭째 사 가는 중매인이었다⁠. 체크무늬 조끼에 볼펜을 귀에 꽂은 남자가 내려 아랫밭 나무를 몇 그루 둘러보고⁠, 귤을 하나 따서 껍질째 반으로 갈라 냄새를 맡았다⁠.

“⁠삼촌⁠, 아랫밭 통째로 작년 가격에서 삼 할 빼고 갑시다⁠.⁠”

“⁠삼 할이면 비료값도 안 나오우다⁠.⁠”

“⁠올해 마트에 수입 오렌지가 깔렸수다⁠. 요즘 애들은 귤 안 까먹어요⁠. 손에 냄새 밴다고⁠. 열흘 뒤에 조생 쏟아지면 이 가격도 없어요⁠.⁠”

나는 장갑을 벗고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갔다⁠.

“⁠아랫밭 귤은 열흘만 더 두면 맛이 올라요⁠. 지금 따는 건 손해예요⁠.⁠”

중매인이 나를 위아래로 보았다⁠. 회색 단발⁠, 동그란 안경⁠, 귤색 조끼에 비닐 앞치마⁠. 무엇으로 보였는지는 중매인의 입꼬리가 말해 주었다⁠.

“⁠아주머니는 누구시우꽈⁠?⁠”

“⁠한 달 살기 손님이에요⁠.⁠”

“⁠한 달 살기 손님이 귤값을 압니까⁠? 열흘 뒤에 맛이 오르면 뭐 해요⁠. 맛있는 귤이 넘쳐서 값이 떨어지는데⁠. 나는 맛을 사는 사람이 아니우다⁠. 물량을 사는 사람이지⁠.⁠”

중매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다가 귤 하나를 까서 중매인 손에 쥐여 주었다⁠. 윗밭 귤이었다⁠. 중매인은 한 조각을 먹고⁠, 잠깐 멈췄다가⁠, 나머지를 다 먹었다⁠.

“⁠윗밭 건 안 팝니다⁠.⁠”

대봉 씨가 말했다⁠. 중매인은 손을 털고 아랫밭 계약서를 내밀었다⁠. 대봉 씨는 계약서를 오래 보지 않고 도장을 찍었다⁠. 트럭이 떠난 뒤 대봉 씨가 받은 돈을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았다⁠. 아랫밭 한 해 농사가 봉투 하나에 들어갔다⁠.

트럭 꽁무니가 골목 아래로 사라지자 춘옥 삼촌이 빨간 고무 대야를 옆구리에 끼고 올라왔다⁠. 파치를 얻어다 껍질을 말려 차를 끓인다고 했다⁠. 춘옥 삼촌은 파치 더미 앞에 털썩 앉아 귤을 고르면서 나를 흘끔거렸다⁠.

“⁠육지 삼촌이 중매인한테 귤을 먹였댄⁠?⁠”

소문은 트럭보다 빨랐다⁠. 아랫집 할망이 돌담 너머로 다 보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흉터 귤 하나를 까서 춘옥 삼촌에게 건넸다⁠. 춘옥 삼촌은 한 조각을 오물거리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흉터 난 놈이 달아⁠. 바다도 그래⁠. 파도 센 바위에 붙은 소라가 달아⁠. 육지 삼촌 혀가 해녀 혀여⁠.⁠”

“⁠해녀 혀는 어떤 혀예요⁠?⁠”

“⁠짠 걸 하도 먹어서 단 걸 귀신같이 알아⁠.⁠”

춘옥 삼촌이 대야에 파치를 쓸어 담다가 손을 멈추고 대봉 씨를 보았다⁠. 대봉 씨는 아랫밭 돌담에 기대 봉투 든 가슴께를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대봉이 각시도 이 밭 귤을 좋아했주⁠. 서울 간 뒤로는 한 번도 안 먹었을 거라⁠.⁠”

춘옥 삼촌은 나한테만 들리게 말하고⁠, 대야를 이고 골목을 내려갔다⁠. 허리가 꼬부라졌는데도 대야는 머리 위에서 한 번도 기울지 않았다⁠.

*

점심을 먹고 대봉 씨 휴대전화가 울렸다⁠. 대봉 씨는 짧게 대답하고 끊었다⁠.

“⁠양 본부장이우다⁠. 말뚝 하나 빠졌다고⁠.⁠”

“⁠뭐라고 하셨어요⁠?⁠”

“⁠바람이 뽑았다고 했수다⁠.⁠”

대봉 씨가 작업복 가슴 주머니를 툭 쳤다⁠. 돌돌 만 빨간 깃발이 아직 거기 꽂혀 있었다⁠.

저녁에 나는 안거리 툇마루에 앉아 휴대전화를 열었다⁠. 단톡방 목록을 손가락으로 한참 내려야 했다⁠. 「⁠늘솔초 1999 졸업 6-2⁠」 마지막 글은 네 해 전 누군가의 결혼식 청첩장이었다⁠. 나는 돋보기를 쓰고 한 글자씩 눌렀다⁠.

「⁠얘들아⁠, 선생님이다⁠.⁠」

일 분도 안 되어 휴대전화가 떨기 시작했다⁠.

「⁠선생님⁠!⁠!⁠!⁠!⁠」

「⁠헐 문은영 선생님⁠?⁠」

「⁠선생님 살아 계셨어요⁠?⁠」

「⁠저 아직도 받아쓰기 빵점 받는 꿈 꿔요⁠」

「⁠숙제 검사 아니죠⁠? 저 지금 회사인데 손이 떨려요⁠」

마흔 넘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웃다가 돋보기가 콧등에서 미끄러졌다⁠. 귤 사진 세 장을 올렸다⁠. 흉터가 잘 보이게 찍은 파치였다⁠.

「⁠선생님 제주에서 귤 판다⁠. 못생긴 귤이다⁠. 맛은 선생님이 보증한다⁠.⁠」

「⁠선생님 보증이면 수우미양가 중에 수예요⁠?⁠」

「⁠수다⁠.⁠」

「⁠저 다섯 상자요⁠」

「⁠회사 사람들 것까지 열 상자 갑니다⁠」

「⁠선생님 저 영식이에요 맨날 복도에 서 있던 애 기억하세요⁠? 세 상자요⁠」

나는 영식을 기억했다⁠. 복도에 세워 두면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수업을 다 따라 하던 아이였다⁠. 세무사가 되었다는 아이 하나가 「⁠선생님 통신판매 신고는 하셨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농부가 자기 귤 파는 거다⁠. 선생님은 심부름꾼이다⁠.⁠」 하고 보냈다⁠. 「⁠심부름꾼이 반장보다 무섭다⁠」는 답이 왔다⁠.

가족 단톡방도 떨었다⁠.

「⁠엄마 제자들한테 귤 팔아⁠? 영식이라는 사람이 엄마 귤 사진을 회사 게시판에 올렸던데⁠」

「⁠선생님이 제자한테 물건 파는 거 민폐야 엄마⁠」

「⁠어머님 저도 두 상자요⁠」

「⁠여보⁠」

나는 「⁠며느리 두 상자 접수⁠」라고 보내고 단톡방을 닫았다⁠. 재온이 숨을 고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릴 때부터 화가 나면 코로 숨을 세 번 쉬고 말하는 아이였다⁠.

밤 열한 시까지 마흔일곱 상자가 모였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밖거리로 건너갔다⁠.

*

대봉 씨는 마루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 놓고 귤 상자를 접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옆에 앉아 상자를 같이 접었다⁠. 상자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귤을 꼭지가 위로 오게 한 줄씩 앉혔다⁠. 꼭지를 아래로 두면 위에 얹힌 귤 무게에 꼭지 자리가 눌려 짓무른다고 대봉 씨가 말했다⁠. 나는 캐리어 맨 밑에서 꺼내 온 도장을 상자 뚜껑마다 찍었다⁠. 동그란 테두리 안에 「⁠참 잘했어요⁠」라는 글씨가 있는 붉은 도장이었다⁠. 서른 해 동안 아이들 공책에 찍던 것이었다⁠. 퇴직하던 날 교실 서랍을 비우다가 도저히 버리지 못하고 가방에 넣어 온 것이었다⁠.

“⁠무사 그걸 찍으우꽈⁠?⁠”

“⁠못생겨도 잘했다고요⁠.⁠”

대봉 씨가 내 손에서 도장을 받아 들고 상자 하나에 눌러 찍었다⁠. 힘을 너무 줘서 글씨가 번졌다⁠. 나는 번진 것도 잘했다고 했다⁠. 대봉 씨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미랑⁠」이라는 이름 아래 「⁠아빠 측량 사진 보내 봐⁠. 말뚝 몇 개 박았어⁠?⁠」라는 글자가 떴다⁠. 대봉 씨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

내가 휴대전화 화면을 내밀자 대봉 씨는 돋보기를 쓰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화면을 위로 밀고⁠, 또 밀었다⁠.

“⁠파치를 선생님 제자들한테 보낸다고 마씸⁠?⁠”

“⁠네⁠.⁠”

“⁠못생긴 걸 돈 받고 보내면 내 얼굴이 뭐가 되우꽈⁠?⁠”

“⁠얼굴은 상자에 안 들어가요⁠.⁠”

대봉 씨가 상자 접던 손을 멈췄다⁠. 나는 조끼 주머니에서 귤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매끈한 상품⁠, 하나는 흉터 난 파치였다⁠. 둘 다 까서 접시에 한 조각씩 놓고⁠, 대봉 씨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다⁠.

“⁠무사 눈을 감으라고⁠?⁠”

“⁠눈으로 먹으면 못생긴 게 맛없어요⁠.⁠”

대봉 씨가 눈을 감았다⁠. 수건을 쓴 머리가 꾸벅 숙여졌다⁠. 나는 한 조각씩 대봉 씨 입에 넣어 주었다⁠. 대봉 씨 입술이 내 손가락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대봉 씨는 두 조각을 다 먹고 눈을 감은 채로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두 번째⁠, 파치였다⁠.

“⁠두 번째가 달다⁠.⁠”

“⁠두 번째가 흉터예요⁠.⁠”

대봉 씨가 눈을 떴다⁠. 쑥스러울 때마다 그러듯 수건을 고쳐 썼다⁠. 그러고는 웃지 않았다⁠. 마루 끝에 놓인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빼 내 앞에 놓았다⁠. 어젯밤 창 너머로 본 종이였다⁠. 뒤집혀 있지 않았다⁠.

「⁠임의경매 개시 예정 안내⁠」

모살개 지역 조합이 보낸 안내문이었다⁠. 원금과 밀린 이자를 11월 30일까지 갚지 못하면 담보로 잡힌 돌담집과 귤밭이 경매에 넘어간다고 적혀 있었다⁠. 금액은 둘째 줄에 있었다⁠.

“⁠사십칠 상자로 이걸 막을 거우꽈⁠?⁠”

대봉 씨 목소리는 나무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오래 혼자 들고 있던 것을 남에게 처음 보여 주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텔레비전에서 일기 예보가 나왔다⁠. 다음 주 남부 지방 기온이 평년보다 높고⁠, 제주 감귤 착색이 늦어진다고 했다⁠.

“⁠양 본부장한테 팔면 잔금으로 이게 끝나우다⁠. 딸도 걱정 안 하고⁠. 경매로 넘어가면 반값도 못 받고⁠.⁠”

“⁠그럼 왜 아까 윗밭 건 안 판다고 하셨어요⁠?⁠”

대봉 씨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돋보기를 벗었다⁠. 둘째 줄의 숫자는 맨눈으로 봐도 컸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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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윤찬2026.11.01· 2화

    「두 번 자릅서」 제주 말이 들리는 것 같아요. 귤 따는 가위가 따로 있는 줄 처음 알았어요.

    • 석담율작가2026.11.01

      귤 꼭지를 한 번에 자르면 다른 귤을 찔러요. 그래서 두 번 자릅니다. 대봉 씨한테 배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