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77자)

말뚝

제주 한 달 살기 · 석담율

캐리어 바퀴 하나가 돌담 골목 세 번째 굽이에서 빠졌다⁠. 공항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모살개 정류장에 내린 지 이십 분째였다⁠. 검은 현무암 담이 내 어깨 높이로 양옆을 막았고⁠, 골목은 뱀처럼 휘어 올라갔고⁠, 담 위로 넘어온 귤나무 가지마다 푸른 기가 덜 가신 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빠진 바퀴를 주워 조끼 주머니에 넣고 캐리어를 두 손으로 들었다⁠. 서른 해 동안 교실 책걸상을 옮긴 팔이라 아직은 쓸 만했다⁠.

이 골목을 제주에서는 올레라고 부른다는 것을 선묵에게서 들었다⁠. 세 해 전 저녁 식탁에서 선묵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화면에 돌담집 사진이 있었고⁠, 사진 밑에 「⁠모살개 돌담집 · 한 달 살기 · 안거리 독채⁠」라는 글자가 있었다⁠.

“⁠당신 퇴직하면 여기 가자⁠. 귤 딸 때 딱 한 달⁠.⁠”

선묵은 사진을 즐겨찾기에 넣었고⁠, 내 퇴직을 기다리지 못했다⁠. 아침에 출근한 사람이 점심때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심장이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사흘 동안 손님 신발을 정리했고⁠,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지난봄 명예퇴직 서류에 도장을 찍던 날⁠, 선묵의 휴대전화를 충전해 즐겨찾기를 열었다⁠. 돌담집은 아직 거기 있었다⁠.

골목 끝에 돌기둥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다⁠. 기둥에 뚫린 구멍마다 굵은 나무 막대가 땅으로 내려져 있었다⁠. 대문 대신 막대를 가로질러 집주인이 어디 갔는지 알리는 제주의 옛 문⁠, 정낭이었다⁠. 막대를 다 내려 두면 집에 사람이 있다는 말이라고 사진 설명에 쓰여 있었다⁠. 나는 막대 사이로 들어가며 괜히 발을 높이 들었다⁠.

마당은 비어 있었다⁠. 안거리라 부르는 안채의 툇마루에 귤 한 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 밖거리 문은 열려 있었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엄마 도착⁠? 인증샷⁠」

아들 재온이었다⁠. 나는 마당을 한 바퀴 돌며 찍을 것을 골랐다⁠. 돌하르방은 없었고⁠, 귤나무는 담 너머에 있었다⁠. 마침 집 뒤 귤밭에서 남자 하나가 내려왔다⁠. 볕에 그을린 얼굴에 짧은 회색 머리⁠, 무릎이 하얗게 닳은 작업복⁠,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셔터를 눌렀고⁠, 사진은 남자의 등을 찍은 채로 단톡방에 올라갔다⁠.

「⁠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

「⁠어머님 ㅋㅋㅋ 멋지세요⁠」

며느리까지 깨어 있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조끼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문은영 씨우꽈⁠?⁠”

“⁠네⁠, 사장님⁠. 오늘부터 한 달 신세 지겠습니다⁠.⁠”

“⁠사장 아니우다⁠. 고대봉이우다⁠. 여기선 다 삼촌이라 헙서⁠.⁠”

“⁠제가 삼촌이라고 부르면 동네에서 저를 조카로 보실 텐데요⁠.⁠”

대봉 씨가 수건 끝을 잡아당겨 고쳐 썼다⁠. 웃음을 참는 사람의 손이었다⁠. 대봉 씨는 툇마루의 바구니에서 귤 하나를 집어 내 손에 놓았다⁠. 껍질이 손바닥에 서늘했고⁠, 엄지로 누르자 향이 확 올라왔다⁠.

“⁠극조생이우다⁠. 올해 첫물⁠.⁠”

껍질을 까서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혀끝이 오그라들고 어금니 뒤에서 침이 솟았다⁠. 신맛이 먼저 오고⁠, 신맛이 다 빠진 다음에야 혀 가운데에 단맛이 엷게 남았다⁠. 아이들 받아쓰기 공책에서 맞춤법은 엉망인데 마지막 문장 하나가 기막힌 아이를 만났을 때와 비슷했다⁠.

“⁠열흘만 더 달아 두면 끝맛이 꿀이 되겠는데요⁠.⁠”

대봉 씨가 나를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열흘 기다릴 여유가 없수다⁠.⁠”

*

오후 세 시쯤 골목에 승합차가 들어왔다⁠. 내린 사람은 다섯이었다⁠. 형광 조끼를 입은 측량 기사 셋⁠, 맨 뒤에서 빨간 깃발 단 말뚝을 한 자루 메고 오는 키 큰 남자⁠, 그리고 맨 앞에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양복 남자는 정낭 앞에서 구두를 털고⁠, 막대가 다 내려진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들어왔다⁠.

“⁠고대봉 삼촌⁠, 오늘 측량 들어갑니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양복 남자는 툇마루에 앉은 나를 보고 명함을 꺼냈다⁠. 나는 동그란 안경을 벗고 조끼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 쓰고⁠, 명함을 읽고⁠, 돋보기를 벗고⁠, 다시 안경을 썼다⁠. 양복 남자는 내가 안경을 두 번 바꿔 쓰는 동안 손을 모으고 기다렸다⁠.

「⁠섬바람리조트 개발본부장 양명휘⁠」

“⁠한 달 살기 손님이시죠⁠?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마당하고 텃밭에 표시만 해 두고 가겠습니다⁠.⁠”

측량 기사들이 삼각대를 펼쳤다⁠. 키 큰 남자가 우영팟이라 부르는 집 옆 작은 텃밭에 말뚝을 박았다⁠. 쇠망치가 말뚝 머리를 칠 때마다 무밭의 흙이 튀었다⁠. 깃발이 바닷바람에 탁탁 소리를 냈다⁠.

“⁠여기 제가 묵는 마당인데요⁠.⁠”

“⁠잔금이 11월 18일입니다⁠. 선생님 한 달 살기가 끝나는 다음 날로 날짜를 맞췄습니다⁠. 손님 계시는 동안에는 집에 손 하나 안 댑니다⁠. 오늘은 땅에 금만 긋습니다⁠.⁠”

양 본부장의 표준어는 다리미로 민 셔츠처럼 매끈했다⁠. 나는 대봉 씨를 보았다⁠. 대봉 씨는 밖거리 문턱에 서서 수건 끝만 만지고 있었다⁠.

“⁠팔리는 집이에요⁠?⁠”

“⁠모살개 해안 관광단지의 첫 필지입니다⁠. 객실이 이백 개 들어가고 마을에 일자리가 백 개 생깁니다⁠. 이 마을 귤값이 세 해째 생산비 밑입니다⁠. 젊은 사람은 다 나갔고요⁠. 저도 열여덟에 나간 사람입니다⁠.⁠”

“⁠여기 분이세요⁠?⁠”

“⁠어머니가 이 마을 해녀였습니다⁠.⁠”

“⁠그럼 아시겠네요⁠. 한 달 살겠다고 온 사람 마당에 말뚝부터 박는 게 이 마을 인사예요⁠?⁠”

양 본부장이 웃음을 거두었다⁠. 측량 기사들이 삼각대 너머로 우리를 힐끔거렸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 한 달을 지켜 드리려고 날짜를 맞춘 겁니다⁠. 대봉 삼촌 사정은 대봉 삼촌이 아십니다⁠.⁠”

“⁠사정이 뭔데요⁠?⁠”

“⁠제가 말씀드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이 집을 안 사면⁠, 이 집은 다른 사람한테 더 싸게 넘어갑니다⁠.⁠”

양 본부장은 말을 마치고 대봉 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봉 씨는 고개를 숙여 받지 않았다⁠. 나는 교실 뒷문에서 싸움을 말리러 들어갈 때처럼 양쪽 얼굴을 번갈아 보았는데⁠, 두 사람 다 싸우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래 미뤄 둔 숙제를 같이 들고 있는 얼굴이었다⁠.

양 본부장은 웃었다⁠. 웃음이 짧았다⁠. 측량 기사 하나가 싱가포르 투자 회사 사람들이 다음 주에 현장을 보러 온다고 보고했고⁠, 양 본부장은 도청 경관 심의 날짜부터 챙기라고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의 말을 아이들 쉬는 시간 소리처럼 흘려들으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말뚝 일곱 개가 마당과 우영팟과 올레 입구에 박혔다⁠. 승합차가 떠날 무렵 골목 아래에서 할망 하나가 접시를 들고 올라왔다⁠. 꼬부라진 허리에 몸빼 바지⁠, 머리에는 꽃무늬 수건이었다⁠. 할망을 본 키 큰 남자가 모자챙을 눌러쓰고 먼저 차에 올랐다⁠.

“⁠명휘 이놈⁠, 또 왔다 감서⁠?⁠”

“⁠삼촌⁠, 건강하시지요⁠?⁠”

양 본부장은 할망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고 차에 탔다⁠. 할망은 차 꽁무니에 대고 혀를 찼고⁠, 접시를 내 앞에 내밀었다⁠.

“⁠육지 삼촌⁠, 이거 먹어 봐⁠. 빙떡⁠.⁠”

메밀 반죽을 얇게 부쳐 무채를 말아 낸 떡이었다⁠. 한 입 베자 메밀이 혀에 까슬했고 무채는 슴슴했다⁠. 간이 거의 없어서⁠, 씹을수록 메밀 냄새와 무의 단물이 천천히 나왔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웃을 다 삼촌이라 부른다더니⁠, 나도 오자마자 삼촌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어르신 말고 춘옥 삼촌이라 해⁠. 부춘옥⁠.⁠”

춘옥 삼촌은 말뚝 하나를 발로 툭 차 보고⁠, 대봉 씨를 올려다보았다⁠.

“⁠대봉아⁠, 느 아방 심은 나무도 팔 거냐⁠?⁠”

대봉 씨는 대답 대신 빙떡 하나를 집어 통째로 입에 넣었다⁠. 볼이 불룩해져서 말을 할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춘옥 삼촌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고⁠, 나한테만 들리게 “⁠저놈 어릴 때도 저랬어⁠.⁠” 하고는 골목을 내려갔다⁠.

*

해가 지자 마당이 금세 파래졌다⁠. 대봉 씨가 밖거리 앞에서 귤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툇마루에서 내려가 대봉 씨 앞으로 갔다⁠. 교실에서 반장 선거 비리를 잡던 날처럼 손을 앞으로 모았다⁠.

“⁠왜 미리 말씀 안 하셨어요⁠?⁠”

“⁠예약은 딸이 받수다⁠. 딸이 말한 줄 알았지⁠.⁠”

“⁠따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대봉 씨가 대답하기 전에 작업복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렸다⁠. 대봉 씨는 등을 돌렸지만 마당은 좁았고 딸의 목소리는 컸다⁠.

“⁠아빠⁠, 측량 왔지⁠? 도장 찍는 날 내가 내려갈게⁠. 아빠 혼자 찍지 마⁠.⁠”

“⁠기여⁠, 기여⁠.⁠”

대봉 씨가 전화를 끊고 한참 뒤에야 나를 돌아보았다⁠.

“⁠돈은 돌려 드리쿠다⁠. 다른 집 알아봐 드리고⁠.⁠”

“⁠이 집은 남편이 골랐어요⁠.⁠”

남편 이야기가 내 입에서 먼저 나올 줄 몰랐다⁠. 대봉 씨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선묵의 휴대전화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즐겨찾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대봉 씨도 빚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둘 다 말하지 않은 것을 마당 가운데 내려놓고 서 있었다⁠.

안거리로 들어오자 재온이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 가득 아들의 콧구멍이 먼저 나왔다⁠. 서른셋이 되어도 휴대전화를 턱 밑에 드는 버릇은 그대로였다⁠.

“⁠엄마⁠, 그 아저씨 누구냐니까⁠.⁠”

“⁠집주인⁠.⁠”

“⁠집주인이 왜 엄마 사진에 있어⁠?⁠”

“⁠내가 찍었으니까 있지⁠.⁠”

“⁠엄마⁠, 요즘 오륙십대 노리는 사기꾼 많대⁠. 제주에서 만난 남자가 갑자기 돈 얘기 하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

“⁠엄마가 사기를 당하려면 사기꾼이 받아쓰기부터 통과해야 돼⁠. 맞춤법 틀리면 바로 끊어⁠.⁠”

화면 뒤에서 며느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재온은 웃지 않았다⁠. 재온은 한참 화면 밖 어딘가를 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빠가 가자던 데라며⁠. 혼자 괜찮아⁠?⁠”

“⁠여기 귤이 시다⁠. 열흘은 더 있어야 달겠어⁠.⁠”

“⁠엄마는 아빠 얘기만 나오면 꼭 딴 데로 돌리더라⁠.⁠”

재온은 잘 자라는 말 없이 통화를 끊었다⁠. 까만 화면에 동그란 안경을 쓴 늙은 여자가 비쳤다⁠. 나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고 텔레비전을 켰다⁠. 지역 뉴스였다⁠. 「⁠감귤 경락가 세 해째 생산비 밑돌아⁠… 도⁠, 비상품 감귤 산지 폐기 검토⁠」 귤을 실은 트럭이 밭에 귤을 쏟는 화면이 나왔다⁠. 나는 낮에 먹다 남긴 극조생 세 조각을 마저 먹었다⁠. 신맛이 아까보다 덜했다⁠. 혀가 벌써 이 귤에 길이 든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밖거리 불빛이 보였다⁠. 대봉 씨가 식탁에 서류 몇 장을 펼쳐 놓고 돋보기를 쓰고 있었다⁠. 한 장을 들었다가 놓고⁠, 다시 들었다가 뒤집어 놓았다⁠. 서른 해 동안 가정 방문을 다녔다⁠. 식탁에 뒤집혀 있는 종이가 무엇인지는 대개 알았다⁠.

밤 열 시가 넘어 마당에 나갔다⁠. 대봉 씨가 올레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승합차가 돌아 나가며 담 모서리를 긁고 갔는지 돌 몇 개가 길에 굴러 있었다⁠. 대봉 씨는 돌을 하나씩 들어 손바닥에 굴려 보고⁠, 구멍이 맞는 자리를 찾아 끼웠다⁠. 돌과 돌 사이로 바람이 빠지는 틈이 남았다⁠. 일부러 남기는 틈이었다⁠.

나는 우영팟으로 가서 말뚝 하나를 잡았다⁠. 무밭의 흙이 축축해서 생각보다 쉽게 뽑혔다⁠. 깃발에 흙이 묻어 있었다⁠. 말뚝을 들고 올레로 가서 대봉 씨 앞에 내밀었다⁠.

“⁠이거 내일 양 본부장님한테 돌려주세요⁠. 잔금 날까지는 제 마당이니까요⁠.⁠”

대봉 씨가 돌을 쥔 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귤⁠, 제가 팔아 드릴게요⁠. 한 달 동안⁠.⁠”

“⁠선생님이 귤을 팔아 마씸⁠?⁠”

“⁠서른 해 동안 열두 살짜리들한테 받아쓰기를 팔았어요⁠. 받아쓰기보다는 귤이 쉽겠죠⁠.⁠”

대봉 씨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담 틈으로 빠져나가 골목 아래로 굴러갔다⁠. 대봉 씨는 쥐고 있던 돌을 담에 끼우고⁠, 흙 묻은 손으로 말뚝을 받아 들었다⁠. 한참을 들고 있다가 깃발을 돌돌 말아 작업복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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