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01자)

총회

제주 한 달 살기 · 석담율

오후 네 시⁠, 나는 춘옥 삼촌 부엌에서 귤을 깠다⁠. 윗밭 맨 위 나무에서 딴 귤 쉰 개였다⁠. 총회에 온 사람들한테 하나씩 나눠 줄 생각이었다⁠. 껍질을 한 줄로 길게 깠다⁠. 마흔세 번째에서 껍질이 끊겼다⁠. 나는 끊긴 귤을 내 입에 넣고 하나를 더 깠다⁠. 선묵처럼⁠.

재온은 지난주에 서울로 올라갔다⁠. 공항에서 귤 다섯 상자를 부치고 비행기에 탔다⁠. 가족 단톡방에 글이 올라와 있었다⁠.

「⁠엄마 오늘 총회지⁠. 라이브 켜 줘⁠. 회사에서 몰래 볼게⁠」

「⁠어머님 화이팅⁠! 저도 볼게요⁠」

「⁠엄마 마이크 메아리 조심⁠」

나는 귤 껍질 묻은 손으로 「⁠알았다⁠」를 쳤다⁠. 화면에 귤 물이 번졌다⁠.

편집자 손님이 노트북과 작은 영사기를 챙겼다⁠. 계획도 영상을 다시 틀 준비였다⁠. 대구 아저씨는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나왔다가 대구 아주머니한테 빼앗겼다⁠. 총회는 회원 일이니 손님은 뒷줄에 조용히 앉으라고 했다⁠. 대구 아저씨는 시무룩해져서 호루라기 대신 박하사탕을 입에 물었다⁠.

*

회관 문 앞에서 양 본부장을 만났다⁠. 양 본부장은 신발을 벗다 말고 나를 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나는 조끼 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체험 실장 제안서였다⁠. 마루에서 귤을 올려놓아 두었던 자리에 귤 물이 동그랗게 배어 있었다⁠.

“⁠고맙지만 못 받아요⁠.⁠”

양 본부장은 종이를 받아 귤 물 자국을 엄지로 쓸었다⁠.

“⁠반대하실 겁니까⁠?⁠”

“⁠네⁠. 말씀드리고 하려고요⁠. 몰래 하면 반칙이니까요⁠.⁠”

“⁠선생님은 반칙을 안 하시는군요⁠.⁠”

“⁠서른 해 동안 아이들한테 반칙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하면 안 되죠⁠.⁠”

양 본부장은 종이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웃으려다 그만두는 얼굴이었다⁠. 양 본부장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먼저 들어갔다⁠. 구두 뒤축이 닳아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 장화처럼 바깥쪽이 더 닳아 있었다⁠.

일곱 시⁠, 마을회관 큰방에 쉰 명 남짓 모였다⁠. 한 집에 한 사람씩이 원칙인데 할망과 하르방이 같이 온 집이 많았다⁠. 이장이 맨 앞 탁자에 앉아 마이크를 두드렸다⁠. 탁자 위에 검은 천을 덮은 나무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옆에 바구니 두 개가 있었다⁠. 한 바구니에는 하얀 조개껍데기가⁠, 다른 바구니에는 검은 현무암 조약돌이 담겨 있었다⁠.

“⁠종이가 모자라서가 아니우다⁠. 우리 마을은 원래 이렇게 했수다⁠. 하얀 건 판다⁠, 검은 건 안 판다⁠. 상자 안에 하나씩 넣읍서⁠.⁠”

이장이 말하자 할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쉰 년 전에도 이렇게 했다고 춘옥 삼촌이 내 귀에 속삭였다⁠. 바닷가 마을은 무엇을 정할 때 바다에서 주운 것으로 정한다고 했다⁠.

나는 손님들과 함께 뒷벽에 붙어 앉았다⁠. 대봉 씨는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 있었다⁠. 밖거리에서 마지막으로 입는 작업복이었다⁠. 미랑 씨가 대봉 씨 옆에 앉아 배를 쓰다듬었다⁠. 대봉 씨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장이 회의를 열자마자 나는 손을 들었다⁠. 서른 해 버릇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손부터 올라갔다⁠. 이장이 나를 보고 웃었다⁠.

“⁠선생님은 손님이우다⁠. 손 내립서⁠.⁠”

회관이 웃음으로 들썩였다⁠. 나는 손을 내렸다⁠. 귀가 뜨거웠다⁠. 뒷줄 할망 하나가 내 등을 두드렸다⁠.

*

양 본부장이 먼저 나왔다⁠. 화면에 숫자를 띄웠다⁠. 일자리⁠, 보상금⁠, 해녀회 지원금⁠. 버스와 리조트에서 보여 준 숫자와 같았다⁠.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양 본부장은 숫자 화면을 끄고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였다⁠.

“⁠모살개 귤 구매 약정서입니다⁠. 리조트가 문을 열면 십 년 동안 마을 귤을 시세보다 높게 사겠다는 약정입니다⁠. 회사 대표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중문에서 수입 오렌지를 쓴다는 걸 선생님이 잡아내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문서로 가지고 왔습니다⁠.⁠”

양 본부장이 뒷벽의 나를 보았다⁠. 할망들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잡아낸 것이 양 본부장의 문서가 되어 돌아와 있었다⁠.

“⁠삼촌들⁠, 저는 이 마을 해녀 아들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불턱에서 덜덜 떨면서 물질한 돈으로 저를 키웠습니다⁠. 그 돈이 모자라서 빚을 지고 가셨습니다⁠. 저는 이 마을 아이들이 저처럼 열여덟에 떠나지 않아도 되게 하고 싶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양 본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박수가 나왔다⁠. 절반쯤 되는 손이 쳤다⁠. 나머지 손은 무릎 위에 있었다⁠.

춘옥 삼촌이 일어났다⁠. 은색 소라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마이크를 받지 않았다⁠. 마이크 없이도 회관 끝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명휘 어멍이 불턱에서 덜덜 떤 건 맞다⁠. 근디 웃기도 했다⁠. 노래도 했다⁠. 해녀회는 안 판다⁠. 바당은 빌려 쓰는 거여⁠. 빌려 쓰는 걸 팔면 우리 손주들이 빌릴 데가 없어⁠.⁠”

춘옥 삼촌이 앉자 평식 씨가 일어났다⁠. 회관이 술렁였다⁠. 평식 씨가 리조트 공사 현장소장이라는 것을 이제 마을 사람이 다 알았다⁠.

“⁠저는 섬바람 하청 현장소장 강평식이우다⁠. 하나만 말하쿠다⁠. 싱가포르 투자사는 18일까지 해안 땅을 못 사면 돈을 뺍니다⁠. 오늘 여기서 안 팔면 모살개점은 없수다⁠. 그럼 우리 하청은 공사비 못 받고 망하우다⁠. 우리 직원 열두 명도 일이 없어지고⁠.⁠”

평식 씨는 숨을 한 번 쉬었다⁠.

“⁠그래도 저는 검은 돌 넣으쿠다⁠. 우리 어멍 불턱을 내 손으로 옮기는 건 못 하쿠다⁠.⁠”

회관이 조용해졌다⁠. 양 본부장이 앞줄에서 평식 씨를 돌아보았다⁠.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오래 같이 일한 사람을 보는 얼굴이었다⁠.

현 삼촌네 할망이 일어났다⁠.

“⁠나는 하얀 거 넣을 거여⁠. 우리 손주 내년에 대학 가⁠. 불턱이 등록금 안 내줘⁠. 춘옥이 니는 손주가 없어서 몰라⁠.⁠”

“⁠나도 손주 있어⁠. 평식이 딸⁠.⁠”

“⁠그럼 더 모르겠다⁠.⁠”

할망 둘이 언성을 높였다⁠. 이장이 마이크를 두드렸다⁠. 현 삼촌이 할망 옆에서 소매를 잡아당겼다⁠. 현 삼촌은 일어나지 않고 앉은 채로 말했다⁠.

“⁠나는 밭 팔고 나서 아침에 갈 데가 없어⁠. 돈은 통장에 있는데 아침이 없어⁠.⁠”

현 삼촌네 할망이 영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앉았다⁠.

*

대봉 씨가 일어났다⁠. 세 번째 줄에서 일어나 회관 앞으로 나가지 않고 선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처음으로 뒷벽의 나를 보았다⁠.

“⁠나는 집을 팔았수다⁠. 다들 알지예⁠. 그러니 내 말은 집 때문이 아니우다⁠.⁠”

대봉 씨는 수건을 벗어 손에 쥐었다⁠.

“⁠이장님⁠, 내 몫 말할 차례를 저 선생한테 주게 해 줍서⁠. 선생은 표가 없지만⁠, 이 마을 귤을 한 달 동안 판 사람이우다⁠. 나보다 많이 팔았수다⁠.⁠”

이장이 회관을 둘러보았다⁠. 춘옥 삼촌이 고개를 끄덕였고⁠, 고추 할망이 박수를 쳤고⁠, 현 삼촌네 할망은 팔짱을 꼈다⁠. 이장이 마이크를 내밀었다⁠.

“⁠대봉이 몫으로 말헙서⁠. 오 분이우다⁠.⁠”

나는 뒷벽에서 일어나 귤 바구니를 들고 앞으로 나갔다⁠. 다리가 떨렸다⁠. 서른 해 동안 수업을 했는데⁠, 오 분이 이렇게 길어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마이크를 받지 않고 귤 바구니를 앞줄 할망에게 내밀었다⁠. 하나씩 돌리라고 했다⁠. 귤이 회관 안을 한 바퀴 돌았다⁠. 껍질이 다 한 줄로 까여 있었다⁠. 할망들이 귤을 한 조각씩 입에 넣었다⁠. 회관에 귤 냄새가 찼다⁠.

“⁠대봉 씨 아버님이 심은 나무예요⁠. 첫날 먹었을 때는 셨어요⁠. 열흘 더 매달아 두니까 끝이 달아졌어요⁠.⁠”

나는 마이크를 들었다⁠. 메아리가 없는 마이크였다⁠.

“⁠제 말대로 하시면 보상금은 없어요⁠. 일자리도 리조트만큼 안 생겨요⁠. 귤 따는 한 달 살기 기다리는 손님이 마흔 팀이고⁠, 빈방 내놓은 집이 넷이에요⁠. 리조트보다 작아요⁠. 거짓말 안 할게요⁠. 대신 할망 집이 할망 집으로 남고⁠, 불턱이 불턱으로 남아요⁠.⁠”

현 삼촌네 할망이 소리쳤다⁠.

“⁠선생은 내일모레 가잖아⁠!⁠”

버스에서 들은 물음이었다⁠. 나는 이번에는 대답을 찾지 않았다⁠. 들고 있었다⁠.

“⁠안 가요⁠. 비행기표 취소했어요⁠. 집도 없고 일자리도 없지만⁠, 여기 남아서 찾을 거예요⁠. 할망들 빈방에 손님 넣는 일⁠, 그거 제가 계속할게요⁠. 돈 받고요⁠. 일이니까⁠.⁠”

회관이 조용했다⁠. 앞줄 하르방 하나가 귤 조각을 씹다가 말했다⁠.

“⁠그럼 육지 삼촌이 아니라 모살개 삼촌이네⁠.⁠”

웃음이 났다⁠. 작게 났다가 크게 번졌다⁠. 나는 마이크를 이장에게 돌려주었다⁠. 오 분이 다 안 되었다⁠.

*

투표가 시작되었다⁠. 회원들이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바구니에서 조개껍데기나 조약돌을 집어 손안에 감추고⁠, 검은 천 덮인 상자 구멍에 넣었다⁠. 딸깍⁠, 딸깍⁠. 조개껍데기와 돌이 상자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달랐다⁠. 조개는 가볍게 짤랑거렸고 돌은 둔하게 굴렀다⁠. 나는 귀를 막고 싶었다⁠. 귀를 막으면 소리가 더 크게 들릴까 봐 막지 않았다⁠.

춘옥 삼촌은 바구니 앞에서 조약돌을 하나 집어 주먹에 꽉 쥐었다⁠. 상자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주먹을 상자 구멍에 넣었다 뺐다가 다시 넣었다⁠. 이장이 헛기침을 했다⁠. 춘옥 삼촌이 이장을 노려보고 그제야 주먹을 폈다⁠. 둔한 소리가 났다⁠. 평식 씨는 어머니 뒤에 서 있다가 망설임 없이 손을 넣었다⁠. 소리가 둔했다⁠.

대봉 씨가 나가서 손을 넣었다⁠. 소리가 둔했다⁠. 미랑 씨는 회원이 아니라 넣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을 넣는 손을 끝까지 보았다⁠.

이장이 상자를 뒤집어 탁자 위에 쏟았다⁠. 하얀 조개껍데기와 검은 조약돌이 탁자 위에 섞였다⁠. 이장이 하나씩 갈라 양쪽으로 밀었다⁠. 하나 밀 때마다 회관 안의 숨이 같이 움직였다⁠. 이장은 소리 내어 세지 않았다⁠. 다 가르고 나서 두 무더기를 손바닥으로 눌러 펴 보였다⁠.

“⁠하얀 거 스물셋⁠. 검은 거 스물여섯⁠. 해안 땅은 안 팝니다⁠.⁠”

검은 돌 무더기가 세 개 더 많았다⁠. 할망 몇이 손뼉을 쳤고⁠, 몇은 울었다⁠. 현 삼촌네 할망은 하얀 조개껍데기 하나를 탁자에서 집어 들고 회관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나를 보지 않았다⁠. 뒷줄 하르방 하나가 일어나며 내 쪽으로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육지 사람 하나 때문에 손주 학비 날아갔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춘옥 삼촌이 하르방의 등을 툭 쳤다⁠.

“⁠느 손주는 검은 돌 던지라고 했다더라⁠.⁠”

*

회관 밖은 캄캄했다⁠. 바다에서 바람이 올라왔다⁠. 대봉 씨와 나는 회관 앞 돌담 아래에 나란히 서 있었다⁠. 미랑 씨가 할망들 사이에서 대봉 씨를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구두 소리가 다가왔다⁠. 양 본부장이었다⁠. 양복 윗도리를 벗어 팔에 걸고 있었다⁠. 넥타이가 풀려 있었다⁠.

“⁠선생님⁠, 잘하셨습니다⁠. 진심입니다⁠.⁠”

양 본부장은 웃지 않았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투자사는 내일 아침에 빠집니다⁠. 그럼 회사에 남는 건 1단계로 산 귤밭 서른 필지와 돌담집과 옛 양식장 땅입니다⁠. 다 빚입니다⁠. 저는 그 빚을 뭐라도 지어서 갚아야 합니다⁠. 양식장 땅에 작은 호텔이라도 세우려면 길이 있어야 하고요⁠.⁠”

양 본부장은 대봉 씨를 보았다⁠. 이제는 대봉 씨 것이 아닌 집의 주인이었다⁠.

“⁠형님⁠, 내일 아침에 굴착기 부르겠습니다⁠. 돌담집을 헐어서 올레를 넓히고 주차장 만들겠습니다⁠. 18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밖거리 짐은 오늘 밤에 빼 주십시오⁠.⁠”

1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