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21자)

잔금

제주 한 달 살기 · 석담율

미랑 씨가 빌린 차는 작은 하얀 승용차였다⁠. 미랑 씨는 운전석 의자를 끝까지 뒤로 빼고도 배가 운전대에 닿을락 말락 했다⁠. 나는 조수석에서 손잡이를 붙잡았다⁠. 미랑 씨는 해안 도로를 시속 사십 킬로미터로 달렸다⁠. 뒤에서 귤 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추월해 갔다⁠.

“⁠아빠한테 전화해 보세요⁠.⁠”

“⁠열한 번 했어요⁠. 안 받아요⁠.⁠”

미랑 씨는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손톱 옆 살갗을 엄지로 뜯고 있었다⁠.

“⁠어젯밤에 아빠가 선생님 수표 얘기만 했어요⁠. 그 돈 받으면 안 된다고⁠. 받으면 선생님이 서울 못 간다고⁠.⁠”

“⁠제가 왜 서울을 못 가요⁠?⁠”

“⁠돈 준 사람이 돈 받은 사람 곁을 떠나면⁠, 돈만 남는다고요⁠. 아빠 말이에요⁠. 저는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나는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무슨 말인지 나는 알았다⁠. 춘옥 삼촌이 어젯밤 행주를 짜며 한 말과 같은 말이었다⁠.

미랑 씨가 운전대를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선생님⁠, 저 이거 바랐어요⁠. 아빠가 집 팔고 빚 없어지는 거⁠. 근데 왜 이렇게 숨이 차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랑 씨는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미랑 씨는 가속 페달을 조금 더 밟았다⁠. 시속 사십오 킬로미터가 되었다⁠.

*

서귀포 법무사 사무실은 상가 건물 삼층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미랑 씨가 두 번 쉬었다⁠. 나는 미랑 씨 팔을 붙잡고 올라갔다⁠. 사무실 문을 열자 긴 탁자에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법무사⁠, 조합 직원⁠, 양 본부장⁠, 그리고 대봉 씨였다⁠. 대봉 씨는 작업복 대신 하나뿐인 양복을 입고 있었다⁠. 소매가 짧아서 손목이 다 나와 있었다⁠. 수건은 없었다⁠. 짧은 회색 머리가 낯설었다⁠.

탁자 위에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대봉 씨 손에 도장이 쥐여 있었고⁠, 도장 끝이 인주에 붉게 젖어 있었다⁠.

“⁠아빠⁠!⁠”

미랑 씨가 먼저 소리쳤다⁠. 대봉 씨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둘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올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선생⁠, 앉읍서⁠.⁠”

“⁠안 앉아요⁠.⁠”

나는 탁자 끝을 붙잡고 서 있었다⁠. 서른 해 동안 교탁 앞에 서던 다리였다⁠. 양 본부장이 일어나 의자를 내밀었다⁠. 나는 의자를 보지 않았다⁠.

“⁠대봉 씨⁠, 18일까지 열사흘 남았어요⁠. 총회도 남았고요⁠. 왜 지금이에요⁠?⁠”

“⁠18일까지 기다리면 선생이 그 수표를 내 마루에 또 놓고 갈 거우다⁠.⁠”

대봉 씨는 도장을 쥔 손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선생⁠, 내가 오늘 팔면 내 빚은 오늘 끝나우다⁠. 선생 돈은 선생 거로 남고⁠. 미랑이 걱정도 끝나고⁠. 경매로 넘어가서 반값에 팔리는 것보다 낫수다⁠.⁠”

“⁠그럼 바다는요⁠? 이 집 올레가 포구 가는 유일한 길이잖아요⁠. 이 집이 넘어가면 2단계는⁠…⁠”

“⁠바당은 마을 땅이우다⁠. 내 집이 아니라⁠. 총회에서 마을이 지킵서⁠. 내 집이랑 바당은 따로우다⁠.⁠”

양 본부장이 끼어들었다⁠.

“⁠선생님⁠, 형님 뜻입니다⁠. 저는 형님한테 강요한 적 없습니다⁠. 어젯밤 전화도 형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나는 양 본부장을 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대봉 씨를 보았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고쳐 쓰던 수건이 오늘은 없었다⁠.

“⁠제가 지키려던 집이에요⁠.⁠”

“⁠선생이 지키려던 건 집이 아니우다⁠.⁠”

대봉 씨 목소리는 낮았다⁠.

“⁠서방님이 즐겨찾기에 넣어 둔 사진이우다⁠. 첫날 선생이 말했잖수과⁠. 남편이 고른 집이라고⁠. 나는 그 사진 속 집이 못 되우다⁠. 빚 있는 집이우다⁠.⁠”

사무실이 조용했다⁠. 법무사가 헛기침을 했다⁠. 조합 직원은 서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처음엔 그랬어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킨 것이 서른 해 만에 처음이었다⁠.

“⁠처음엔 선묵이 고른 집이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대봉 씨가 바퀴 고쳐 준 캐리어 끌고 올라간 집이에요⁠. 춘옥 삼촌이 빙떡 들고 들어오는 집이고⁠, 할망들 손등에 도장 찍은 집이에요⁠.⁠”

대봉 씨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뜨고 도장을 서류 위에 내리눌렀다⁠. 탁 소리가 났다⁠. 두 번째 서류에 한 번 더 눌렀다⁠. 미랑 씨가 내 팔을 붙잡았다⁠. 미랑 씨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빠⁠, 진짜 괜찮아⁠?⁠”

대봉 씨는 딸을 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칭찬 도장 같은 끄덕임이었다⁠. 첫날 귤밭에서 내 바구니를 보고 하던 끄덕임이었다⁠.

*

양 본부장이 잔금을 보냈다는 확인을 받고⁠, 조합 직원이 빚을 갚았다는 확인을 받았다⁠. 조합 직원이 「⁠임의경매 신청 취하⁠」라는 종이를 대봉 씨 앞에 놓았다⁠. 대봉 씨는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접어서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귤 상자 마지막 하나를 트럭에 올린 사람의 숨이었다⁠. 미랑 씨가 아버지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그렇게 숨 쉬는 것을 처음 들은 얼굴이었다⁠.

양 본부장이 서류를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윗밭은 계약에서 뺐습니다⁠. 형님이 아버님 나무는 안 판다고 하셔서요⁠. 회사 계획에도 윗밭은 필요 없습니다⁠. 밖거리는 18일까지 쓰시면 됩니다⁠. 형님⁠, 고맙습니다⁠.⁠”

양 본부장 휴대전화가 울렸다⁠. 양 본부장은 창가로 가서 영어로 짧게 통화했다⁠. 몇 마디가 귀에 들어왔다⁠. 열쇠가 되는 땅을 확보했다는 말이었다⁠. 통화를 끊고 돌아온 양 본부장은 웃지 않았다⁠. 숙제 하나를 끝낸 얼굴이 아니라 더 큰 숙제를 받은 얼굴이었다⁠.

양 본부장은 대봉 씨에게 허리를 숙였다⁠. 대봉 씨는 받지 않았다⁠. 양 본부장이 나가면서 문간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총회는 아직 남았습니다⁠. 저도 압니다⁠.⁠”

*

대봉 씨가 법무사와 마지막 서류를 정리하는 동안 미랑 씨와 나는 계단참에 나와 있었다⁠. 미랑 씨는 계단에 앉아 배를 쓰다듬었다⁠. 둘째가 또 찬다고 했다⁠.

“⁠선생님⁠, 저 원하는 대로 됐어요⁠.⁠”

“⁠축하해요⁠.⁠”

“⁠그런데 왜 선생님한테 미안하죠⁠?⁠”

미랑 씨는 나를 보지 않고 계단 아래를 보았다⁠.

“⁠아빠가 저렇게 숨 쉬는 거 처음 들었어요⁠. 빚 갚아서 쉬는 숨인지⁠, 집을 놓아서 쉬는 숨인지 모르겠어요⁠. 둘 다면 어떡해요⁠?⁠”

“⁠둘 다일 거예요⁠.⁠”

미랑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모양이 대봉 씨와 똑같았다⁠. 나는 미랑 씨 옆에 앉았다⁠. 계단이 차가웠다⁠. 우리는 대봉 씨가 내려올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

돌아오는 길에 나는 대봉 씨 트럭에 탔다⁠. 미랑 씨가 하얀 승용차로 뒤를 따라왔다⁠. 대봉 씨는 양복 넥타이를 풀어 대시보드에 던졌다⁠. 조수석 앞 사물함 위에 낡은 수건이 개켜 있었다⁠. 대봉 씨가 한 손으로 수건을 집어 머리에 둘렀다⁠. 그제야 대봉 씨 같았다⁠.

“⁠18일에 미랑이 따라 서울 가쿠다⁠.⁠”

대봉 씨가 앞을 보고 말했다⁠. 해안 도로 오른편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 위에 귤빛 햇살이 깔려 있었다⁠.

“⁠윗밭은요⁠?⁠”

“⁠현 삼촌한테 맡기쿠다⁠. 밭 팔고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하니까⁠.⁠”

“⁠대봉 씨가 서울에서 뭘 하세요⁠?⁠”

“⁠손주 보지⁠. 미랑이 둘째 낳을 때 큰애 볼 사람이 없수다⁠. 기저귀 가는 건 귤 꼭지 자르는 것보다 쉬울 거우다⁠.⁠”

“⁠두 번씩 갈아야 해요⁠.⁠”

대봉 씨가 웃었다⁠. 웃다가 멈췄다⁠.

“⁠한 달 손님은 한 달 뒤에 가는 거우다⁠. 이제 나도 손님이우다⁠. 내 집에⁠.⁠”

나는 창밖을 보았다⁠. 바다가 너무 밝아서 눈이 시렸다⁠. 눈이 시린 것은 바다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모살개에 돌아오자 소문이 먼저 와 있었다⁠. 올레 입구에 할망들이 모여 있었다⁠. 고추 할망은 대봉 씨를 보자마자 등을 때렸고⁠, 현 삼촌네 할망은 아무 말 없이 대봉 씨 손을 잡았다⁠. 할망네도 밭을 판 집이었다⁠. 대구 아저씨는 호루라기를 불려다가 대구 아주머니가 고개를 젓자 입에서 뺐다⁠.

편집자 손님이 휴대전화를 들고 뛰어왔다⁠. 도청 경관 심의 결과가 올라왔다고 했다⁠. 1단계 객실동은 높이를 한 층 낮추는 조건으로 통과⁠, 2단계 해안 계획은 마을 총회 결과를 보고 다시 심의한다고 했다⁠. 할망들이 무슨 말인지 물었다⁠. 편집자 손님이 한마디로 줄였다⁠. 귤밭은 넘어갔고 바다는 아직이라고⁠.

춘옥 삼촌이 맨 뒤에서 걸어 나왔다⁠. 대봉 씨 앞에 서서 올려다보았다⁠. 꼬부라진 허리 때문에 대봉 씨 가슴께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이 멍청한 놈아⁠.⁠”

춘옥 삼촌은 대봉 씨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주먹이 펴졌다⁠. 펴진 손바닥이 대봉 씨 양복 가슴에 머물렀다⁠.

“⁠빚은 다 갚았냐⁠?⁠”

“⁠다 갚았수다⁠, 삼촌⁠.⁠”

“⁠그럼 됐다⁠.⁠”

춘옥 삼촌은 손을 거두고 집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등이 아까보다 더 꼬부라져 있었다⁠.

저녁에 나는 밖거리에서 대봉 씨 짐 싸는 것을 거들었다⁠. 짐이 많지 않았다⁠. 작업복 몇 벌⁠, 장화⁠, 가위 세 자루⁠, 미랑 씨 어릴 때 사진 한 장⁠, 낡은 라디오⁠. 대봉 씨는 가위를 하나씩 수건으로 닦아 신문지에 쌌다⁠. 나는 진피차를 끓여 두 잔 따랐다⁠. 대봉 씨가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

“⁠쓰다⁠.⁠”

“⁠끝에 단맛 와요⁠. 기다리세요⁠.⁠”

대봉 씨는 기다렸다⁠. 나도 기다렸다⁠. 단맛은 왔다⁠. 아주 조금 왔다⁠. 둘 다 말하지 않았다⁠.

짐을 다 싸고 나서 대봉 씨가 작업복 가슴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돌돌 만 빨간 깃발이었다⁠. 첫날 밤 내가 우영팟에서 뽑아 건넨 말뚝의 깃발이었다⁠. 보름 넘게 주머니에 들어 있어서 천이 구겨지고 귤 물이 들어 주황빛이 돌았다⁠.

“⁠양 본부장한테 돌려주라더니⁠, 돌려줄 데가 없어졌수다⁠. 이제 그 사람 마당이니까⁠.⁠”

대봉 씨는 깃발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천에서 대봉 씨 작업복 냄새가 났다⁠. 귤껍질과 흙과 땀⁠.

“⁠선생이 가져갑서⁠. 서울 가서 버리든지⁠.⁠”

나는 깃발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에는 첫날 빠졌던 캐리어 바퀴가 아직 들어 있었다⁠. 빠진 바퀴는 처음부터 내 주머니에 있었다⁠. 대봉 씨는 새 바퀴를 사다 끼워 놓고 고친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바퀴와 깃발을 같이 쥐었다⁠. 둘 다 이 집에 와서 생긴 것이었다⁠. 하나는 빠졌고 하나는 뽑혔다⁠.

*

해가 진 뒤 춘옥 삼촌 집으로 내려왔다⁠. 대문 없는 마당 앞⁠, 돌담 아래에 누군가 캐리어를 세워 두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회색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쓰고 휴대전화 불빛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불빛에 비친 콧구멍부터 알아보았다⁠. 서른셋이 되어도 휴대전화를 턱 밑에 드는 버릇은 그대로였다⁠.

“⁠재온아⁠.⁠”

“⁠엄마⁠, 세 시간 기다렸어⁠.⁠”

“⁠들어와 있지 그랬어⁠.⁠”

“⁠들어가면 그 할머니가 밥 먹으라고 해서⁠. 벌써 국 세 그릇 먹었어⁠. 안 먹으면 안 놔줘⁠.⁠”

부엌 창으로 춘옥 삼촌이 고개를 내밀었다⁠. 재온을 턱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소리쳤다⁠.

“⁠은영아⁠, 니 아들 국 세 그릇 먹고도 마당에 앉아 있겠대⁠. 서울 애들은 고집도 세다⁠.⁠”

재온이 벌떡 일어났다⁠. 무릎에 붙은 모래를 털지도 않고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인쇄한 비행기표였다⁠. 휴대전화로 보내면 내가 안 볼까 봐 종이로 뽑아 왔다고 했다⁠. 돋보기 없이도 큰 글씨가 보였다⁠. 「⁠11월 17일 제주 → 김포 · 문은영 · 황재온⁠」

“⁠엄마⁠, 17일 비행기⁠. 같이 가⁠.⁠”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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