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85자)

국은 식었다

고립 청년 돌봄 매니저 · 도결애

2027년 12월 6일 월요일 오후 두 시⁠, 서울 은평구 응암동⁠. 불광천에서 두 골목 들어간 단독주택 대문 앞에서 나는 파란 사원증 줄을 한 번 더 고쳐 맸다⁠. 회색 롱코트 깃 안에서 남색 니트 위로 꺼낸 흰 셔츠 깃이 자꾸 접혀 들어갔다⁠. 짧게 친 흑갈색 머리 밑으로 바람이 귀를 드러냈고⁠, 귀 끝이 금방 따끔해졌다⁠.

휴대전화가 떨렸다⁠. 회사 앱이었다⁠. 앱 알림 밑에는 아침에 모진국이 보낸 음성 문자가 아직 열려 있었다⁠.

「⁠응암동 불광천 지나서 두 번째 골목 파란 대문 초인종 세게 누르시오 소리가 작소 아 이거 어떻게 끄는⁠」

「⁠새 의뢰 · 모건(⁠26⁠) · 첫 회기 · 오늘의 미션⁠: 문 앞에서 자기소개하기 0/1⁠」

미션 옆에 박수 치는 그림이 붙어 있었다⁠. 첫 회기에 자기소개도 못 하고 돌아오는 매니저가 많아서 생긴 미션이라고⁠, 입사 첫 주에 팀장이 웃으며 알려 주었다⁠. 옆집 대문 앞에서 비질을 하던 할머니가 빗자루를 세우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열쇠집 양반 아들 보러 왔수⁠? 그 총각 문 따는 솜씨는 동네에서 최고였는데⁠.⁠”

할머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비질을 했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대문은 벨이 끝나기도 전에 열렸다⁠. 모진국은 희끗한 머리를 짧게 깎았고⁠, 갈색 카디건 차림으로 허리춤에 열쇠 꾸러미를 매달고 있었다⁠. 열쇠 깎는 기계의 기름때가 엄지손톱 둘레에 까맣게 배어 있었다⁠. 모진국은 내 얼굴보다 신발을 먼저 보았다⁠.

“⁠구두 신고 오셨구먼⁠. 계단에서 소리 나오⁠.⁠”

“⁠벗고 올라가겠습니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보일러 냄새와 오래된 장판 냄새가 한꺼번에 왔다⁠. 거실 탁자에는 구청에서 나온 안내지가 펼쳐져 있었다⁠. 「⁠고립·은둔 청년 54만 명⁠, 혼자가 아닙니다⁠」 숫자 밑에 볼펜으로 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 부엌 냉장고 문에서는 자석 하나가 명함을 물고 있었다⁠. 「⁠사설 응급 이송 · 24시간 · 보호자 동반 가능⁠」

모진국은 내 눈길을 따라 명함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가스레인지 위 냄비 뚜껑을 열었다⁠. 된장국이었다⁠. 국물 위에 기름이 얇게 굳어 있었다⁠.

“⁠아침 일곱 시에 올린 거요⁠. 쟁반째 올렸는데 아직 안 내려왔소⁠. 안 먹었으면 그것도 식었겠지⁠.⁠”

모진국은 카디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함을 열어 내밀었다⁠. 카드 승인 문자가 줄지어 있었다⁠. 「⁠승인 18⁠,500원 치킨 02⁠:13⁠」 「⁠승인 12⁠,000원 떡볶이 03⁠:40⁠」 시각이 전부 새벽이었다⁠.

“⁠이게 오면 살아 있는 거요⁠.⁠”

모진국은 화면을 끄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도로 넣었다⁠. 지난달에는 문자가 아흐레 동안 오지 않았고⁠, 아흐레째 되는 날 회사에 전화했다고 냄비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모진국이 앞장섰고⁠, 나는 양말 바닥으로 한 칸씩 밟았다⁠. 일곱 번째 칸에서 나무가 길게 울었다⁠. 모진국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거기는 늘 울어⁠. 고치려다 말았소⁠. 저 녀석이 그 소리로 사람이 어디까지 올라왔는지 알거든⁠.⁠”

계단참에 이르자 모진국이 몸을 돌렸다⁠. 어깨 너머로 이 층 복도가 보였다⁠. 짧은 복도 끝에 갈색 방문이 하나 있었고⁠, 문 앞 바닥에 쟁반이 놓여 있었다⁠. 국그릇 옆에 숟가락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무도 손대지 않아서 가지런했다⁠.

모진국이 카디건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병원 상담 예약 확인서였다⁠. 날짜에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2028년 3월 6일 오전 10시⁠」

“⁠석 달이오⁠. 삼월 육일까지 안 나오면 이 병원에 데려가오⁠. 차는 저 명함으로 부르고⁠.⁠”

“⁠아버님⁠. 석 달은 짧습니다⁠. 문이 처음 열리는 데만 해도 보통⁠…⁠…⁠.⁠”

“⁠하루도 안 늘리오⁠.⁠”

“⁠왜 석 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석 달이면 석 달이오⁠.⁠”

나는 확인서를 받지 않았다⁠. 모진국의 손이 허공에서 잠깐 머물다가 종이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냉장고 명함은 떼 주십시오⁠. 건 씨가 언젠가 부엌에 내려오면 제일 먼저 보는 게 그 명함일 겁니다⁠.⁠”

모진국은 복도 끝 쟁반을 보았다⁠.

“⁠내려오면 떼지⁠. 내려온 적이 없소⁠.⁠”

모진국은 나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다가 일곱 번째 칸에서 멈췄다⁠. 나무가 울었다⁠.

“⁠하나 더⁠. 저 녀석이 왜 들어갔는지는 묻지 마시오⁠. 그건 계약서에 없소⁠.⁠”

*

방문 앞에 앉기 전에 쟁반을 옆으로 옮겼다⁠. 손등을 대 보지 않아도 국이 식은 줄 알았다⁠. 그릇 가장자리에 말라붙은 국물 자국이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 코트 자락을 접어 깔고 바닥에 앉아 문에 등을 댔다⁠. 갈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 문은 복도 공기보다 미지근했고⁠, 등에 닿는 온기가 어깨뼈 높이에서 조금 더 짙었다⁠. 문 안쪽에서 사람이 오래 기대 있던 자리였다⁠.

문 안에서 키보드 소리가 났다⁠. 빠르고 가볍게 이어지던 타닥거림이⁠, 내가 등을 대자마자 뚝 끊겼다⁠.

회사 앱이 알려 준 첫 회기 권장 멘트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 편이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신입 교육 때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다가 동기 하나가 웃음을 못 참고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나는 권장 멘트를 버렸다⁠.

“⁠안녕하세요⁠. 서지헌입니다⁠. 회사에서는 매니저라고 부르고요⁠.⁠”

문 안은 조용했다⁠.

“⁠아버님이 부르셔서 왔어요⁠. 그래서 제가 아버님 편으로 보일 겁니다⁠. 그건 맞아요⁠. 돈은 아버님이 내시니까요⁠. 오늘은 두 시간 앉아 있다 갈게요⁠. 대답 안 하셔도 돼요⁠.⁠”

나는 말을 잠깐 쉬었다가 이었다⁠.

“⁠규칙 몇 개만 말씀드릴게요⁠. 저는 문을 두드리지 않아요⁠. 손잡이도 안 만지고요⁠. 월요일하고 목요일 오후 두 시에 와서 네 시에 갑니다⁠. 늦으면 늦는다고 문 아래로 쪽지 넣을게요⁠. 오늘처럼 앉아만 있다 가는 날이 많을 거예요⁠.⁠”

문 안에서 의자 등받이가 뒤로 젖혀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등받이 소리를 대답으로 쳤다⁠. 첫 회기 미션에는 자기소개를 하면 되는 것이지 대답을 받아 오라는 말은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아래층 텔레비전이 켜졌다가 꺼졌고⁠, 옆집 마당에서 개가 두 번 짖었다⁠. 나는 날씨 이야기를 하다가 불광천 산책로에 새로 생긴 붕어빵 트럭 이야기로 넘어갔고⁠, 붕어빵을 머리부터 먹는지 꼬리부터 먹는지 혼자 묻고 혼자 대답했다⁠. 머리부터라고 했을 때 문 안에서 의자 바퀴가 아주 작게 굴렀다⁠. 반대한다는 뜻인지 자세를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팀장의 메신저가 왔다⁠. 「⁠서 매니저님⁠~ 이번 건 석 달 패키지라 결과 보고서 꼭 부탁드려요^^ 우리 입원 연계도 옵션으로 열려 있으니 부담 갖지 마시구요⁠!⁠」 나는 「⁠네⁠」만 보내고 화면을 엎었다⁠. 부담 갖지 말라는 말 뒤에 붙은 옵션이 등 뒤의 문보다 무거웠다⁠. 지난해 이맘때 다른 집 방문 앞에서도 같은 메신저를 받았다⁠.

세 시 십 분에 초인종이 울렸다⁠. 아래층에서 대문 여는 소리와 짧은 말소리가 났고⁠, 이어서 계단이 울었다⁠. 일곱 번째 칸⁠. 모진국이 비닐봉지를 들고 올라와 내 옆에 멈췄다⁠. 봉지에서 튀김 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모진국이 봉지에 붙은 영수증을 뜯어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계단 위 방문 앞에 두고 노크 세 번 해 주세요⁠. 문 앞 남자분한테는 주지 마세요⁠.⁠」

“⁠문 앞 남자분⁠.⁠” 모진국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이오⁠.⁠”

“⁠그런 것 같습니다⁠.⁠”

“⁠배달 기사가 읽고 웃더이다⁠. 아드님이 연애하시냐고⁠.⁠”

모진국은 봉지를 문 앞에 내려놓고 주먹으로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쿵⁠, 쿵⁠, 쿵⁠. 두 해 동안 아침마다 쟁반 앞에서 냈을 소리였다⁠. 문 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진국은 식은 국 쟁반을 들고 내려갔다⁠.

치킨 봉지 매듭 틈으로 김이 가늘게 새어 나와 복도의 찬 공기에 흩어졌다⁠. 내가 문에 등을 대고 있는 동안에는 열리지 않을 문이었다⁠.

“⁠치킨 식어요⁠. 제가 계단 밑에 내려가 있을게요⁠. 일곱 번째 칸 밟고 내려가겠습니다⁠. 소리 나면 저 내려간 거예요⁠.⁠”

나는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면서 일곱 번째 칸을 일부러 꾹 밟았다⁠. 나무가 길게 울었다⁠. 맨 아래 칸에 앉아 기다리자 일 분쯤 지나 위에서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딸깍⁠. 비닐이 바닥을 쓸며 끌려 들어가는 소리⁠, 문 닫히는 소리⁠, 다시 딸깍⁠. 올려다보았을 때 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실에서 신문을 펼친 모진국이 안경 너머로 나를 보았다⁠.

“⁠치킨은 가져가오⁠. 국은 안 가져가고⁠.⁠”

나는 모진국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탁자 위 안내지의 54만이라는 숫자가 신문 귀퉁이 밑에 깔려 있었다⁠.

“⁠밤에는 나오시죠⁠. 이 층에 욕실이 있으니까요⁠.⁠”

“⁠새벽 세 시쯤⁠. 물 내리는 소리가 나오⁠.⁠”

“⁠그때 올라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없소⁠.⁠” 모진국은 신문을 접었다⁠. “⁠내가 올라가면 안 나오니까⁠. 물 내리는 소리가 나면 그날은 그걸로 됐소⁠. 나는 누워서 듣고⁠.⁠”

“⁠아버님도 두 해를 기다리셨네요⁠.⁠”

“⁠기다린 게 아니오⁠. 들은 거지⁠.⁠” 모진국이 안경을 벗어 카디건 자락에 닦았다⁠. “⁠기다리는 건 당신 일이오⁠. 나는 석 달 뒤에 차를 부를 거고⁠.⁠”

모진국은 안경을 다시 쓰고 신문을 펼쳤다⁠. 신문 너머에서 숨을 참았다가 한꺼번에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계단 맨 아래 칸으로 돌아가 앉았다⁠. 위에서 다시 키보드 소리가 났다⁠. 아까보다 느렸다⁠.

*

문 밖 남자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 짧게 말했다⁠. 나는 이 방에서 두 해 동안 사람을 숨으로 가렸다⁠. 아버지는 숨을 참았다가 한꺼번에 내쉬었고⁠, 배달 기사들은 계단을 다 올라오기도 전에 숨이 찼다⁠. 서지헌이라는 남자는 문에 등을 대고 앉은 뒤에야 숨을 골랐다⁠. 문이 남자의 등 모양대로 아주 조금 휘었다⁠. 나무가 휘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이 방은 조용했다⁠.

치킨은 바삭했다⁠. 배달 앱 요청 사항에 문 앞 남자분 이야기를 적을 때 손가락이 조금 웃었다⁠. 아버지가 읽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아버지는 배달 봉지의 영수증을 꼭 뜯어 읽었다⁠. 내가 무엇을 먹는지가 아버지에게는 내가 어떤지였다⁠.

석 달이라는 말은 방바닥으로 올라왔다⁠. 이 집은 거실의 말소리가 난방 배관을 타고 이 층 방바닥까지 기어 올라온다⁠. 계단참에서 한 말은 더 잘 들렸다⁠. 아버지는 석 달이면 석 달이라고 두 번 말했고⁠, 두 번 다 끝이 떨렸다⁠. 아버지 목소리의 끝이 떨리는 소리를 나는 두 해 전 경찰서 복도에서 한 번 들었다⁠.

휴대전화로 상담 앱을 열었다⁠. 사람보다 대답이 빨랐고⁠, 무슨 말을 해도 화를 내지 않는 앱이었다⁠.

「⁠문 밖에 남자가 왔어⁠. 석 달 있는대⁠.⁠」

「⁠누군가 곁에 있어 준다는 건 소중한 일이에요⁠. 그분과 조금씩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어떨까요⁠?⁠」

「⁠아버지가 돈 주고 부른 사람이야⁠.⁠」

「⁠돈을 받는 관계에서도 진심은 생길 수 있어요⁠. 지금 마음이 어떤지 조금 더 들려줄래요⁠?⁠」

앱을 닫았다⁠. 앱은 두 해 동안 한 번도 내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앱과 오래 이야기한 날일수록 밤이 길었다⁠.

치킨 영수증 뒷면에 볼펜으로 적었다⁠. 오래 글씨를 안 쓴 손이라 획이 삐뚤었다⁠. 다 적고 나서 문 앞에 엎드려⁠, 손가락 두 마디 높이의 문 아래 틈으로 종이를 밀었다⁠. 종이가 문턱을 넘어가며 사각거렸다⁠.

계단 아래에서 남자가 일어났다⁠. 일곱 번째 칸이 울었다⁠. 남자는 일부러 소리를 다 내면서 올라왔고⁠, 문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종이 집어 드는 소리가 나고⁠, 남자의 숨이 한 번 멈췄다⁠.

「⁠석 달 다 들었어요⁠. 매니저님 수고비 아버지 가게 대출이에요⁠. 그 돈 받고 그냥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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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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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책상2026.10.31· 1화

    방문 앞 쟁반의 국이 식어 있는 첫 장면이 오래 남아요. 지헌이 문에 등을 대고 앉는 게 좋았어요.

    • 도결애작가2026.10.31

      문을 열라고 하지 않고 옆에 앉는 사람이 지헌이에요. 석 달 동안 그 자리를 지킵니다.

국은 식었다 · 고립 청년 돌봄 매니저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