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550자)

산다화 주머니

객잔을 지키는 고수 노부부 · 하청오

청매는 돌계단 다섯 번째 칸에 앉아 화운의 머리를 빗기고 있었다⁠. 장 보러 사계로 내려가는 마을 사람들이 지나는 시각이었다⁠. 화운의 묶은 흰머리를 풀자 등 한가운데까지 내려왔다⁠. 청매는 서른 해 동안 화운의 머리를 빗겨 준 적이 없었다⁠. 화운은 머리를 제 손으로 묶었고⁠, 묶다가 손이 안 닿으면 아묵을 불렀다⁠.

“⁠아야⁠.⁠”

“⁠가만있으시오⁠.⁠”

“⁠빗이 아니라 검으로 빗는 것 같소⁠.⁠”

“⁠영감 머리에 엉킨 게 서른 해 묵었소⁠.⁠”

콩비지 아낙과 대장간 사내가 지게를 지고 내려오다 걸음을 늦췄다⁠. 청매는 빗질을 멈추지 않고 고개를 들어 웃었다⁠. 이를 다 보이게 웃었다⁠. 대장간 사내가 지게를 고쳐 메다 말고 한 걸음 물러났다⁠.

“⁠마님⁠, 어디 아프세요⁠?⁠”

“⁠아프긴⁠. 영감 머리 빗기고 있소⁠. 금슬이 좋아서⁠.⁠”

“⁠얼굴이 꼭 사람 베기 전 얼굴인데요⁠.⁠”

화운이 큰 소리로 웃었다⁠. 너무 크게 웃어서 등뼈가 또 우두둑 소리를 냈다⁠. 화운이 허리를 잡았고 청매가 화운의 어깨를 잡았다⁠. 잡고 보니 꼭 끌어안은 꼴이 되었다⁠. 콩비지 아낙이 입을 가렸다⁠.

“⁠어머⁠, 어머⁠.⁠”

“⁠아낙⁠, 사계 가면 내 대신 엿 좀 사 오시오⁠.⁠” 화운이 허리를 짚은 채 말했다⁠. “⁠우리 마님이 엿을 좋아하오⁠.⁠”

“⁠마님은 엿 안 드시잖아요⁠. 이에 붙는다고⁠.⁠”

“⁠요즘 드오⁠. 금슬이 좋아서⁠.⁠”

아낙이 고개를 갸웃하며 내려갔다⁠. 대장간 사내는 세 번 뒤돌아보았다⁠. 청매는 사람들이 다음 굽이를 돌 때까지 웃고 있다가 얼굴을 풀었다⁠. 볼이 얼얼했다⁠.

“⁠웃는 게 칼 쓰는 것보다 힘드오⁠.⁠”

“⁠임자⁠, 이를 너무 보였소⁠. 반만 보이시오⁠.⁠”

“⁠영감은 웃을 때 눈썹이 눈을 덮어서 우는지 웃는지 모르겠소⁠.⁠”

계단 아래에서 노새 방울 소리가 올라왔다⁠. 상단의 심부름꾼이었다⁠. 심부름꾼은 비단 보자기에 싼 상자를 청매 앞에 놓고 허리를 굽혔다⁠. 상자 안에는 점창에서만 나는 고산 녹차가 한 근 들어 있었다⁠. 차 위에 접은 쪽지가 있었다⁠. 「⁠사계 장날에 상단 객청으로 오시면 사저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옥교⁠.⁠」

청매는 쪽지를 접어 저고리 소매에 넣었다⁠. 화운이 빗을 받아 제 머리를 마저 빗었다⁠.

“⁠가오⁠?⁠”

“⁠장날은 모레요⁠. 생각해 보겠소⁠.⁠”

“⁠가시오⁠.⁠” 화운이 머리를 묶으며 말했다⁠. “⁠사매라면서⁠. 서른 해 만이면 차 한 잔은 해야 하오⁠.⁠”

청매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운이 묻지 않는 것이 고마웠고⁠, 고마운 것이 싫었다⁠.

*

아묵은 지게에 국수 그릇 서른 개를 지고 고개를 내려갔다⁠. 사부님이 금슬 연습 때문에 천막에 못 가는 날은 아묵이 대신 갔다⁠. 사부님은 그릇마다 국자로 국물을 떠 넣으며 같은 말을 했다⁠. 아이들 먼저⁠, 다음은 일하는 사람⁠, 맨 나중이 우두머리⁠.

천막 어귀에서 사내 하나가 짐꾼을 고르고 있었다⁠. 사내들이 줄지어 서면 하나씩 어깨를 짚어 보고⁠, 등에 소금 자루를 얹어 보고⁠, 무릎을 굽혀 보게 했다⁠. 굽히다 휘청하는 사내에게는 고개를 저었다⁠. 저어진 사내가 울상이 되자 가까이 가서 귓속말을 하고 등을 두드렸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개울로 물을 길으러 갔다⁠.

아묵은 그릇을 나눠 주다가 사내의 허리춤을 보았다⁠.

산다화였다⁠. 붉은 실로 꽃잎 다섯 장을 수놓은 손바닥만 한 주머니⁠. 꽃잎 하나가 덜 수놓아져서 실밥이 늘어진 자리까지 똑같았다⁠. 아묵은 제 허리춤의 주머니를 쥐었다⁠. 열일곱 해 동안 찬 주머니였다⁠. 덜 수놓은 꽃잎 자리를 아묵은 손가락으로 수만 번 만졌다⁠.

아묵은 그릇을 내려놓고 사내 앞으로 갔다⁠.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스물대여섯쯤⁠, 눈썹이 짙고 턱이 각졌다⁠. 볕에 그을린 얼굴이었다⁠. 눈매가 아묵이 우물물에 비춰 본 제 눈매와 닮았다⁠.

“⁠그 주머니⁠.⁠” 아묵이 말했다⁠. “⁠어디서 났습니까⁠?⁠”

사내의 눈이 아묵의 허리춤으로 갔다⁠. 두 개의 산다화가 서로를 보았다⁠.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국수 나르는 놈이 남의 허리춤은 왜 보냐⁠.⁠”

“⁠제 것과 같아서요⁠. 덜 수놓은 꽃잎까지요⁠.⁠”

“⁠산다화 주머니는 대리에 흔해⁠.⁠”

“⁠덜 수놓은 꽃잎도 흔합니까⁠?⁠”

사내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 개울 쪽으로 걸어갔다⁠. 아묵이 따라갔다⁠. 천막 뒤 개울가에서 사내가 멈췄다⁠. 물소리가 컸다⁠. 둘의 말소리가 천막까지 들리지 않을 만큼 컸다⁠.

“⁠아탄⁠.⁠” 아묵이 말했다⁠. “⁠형 이름이 아탄이지요⁠. 엄마가 그렇게 불렀어요⁠. 저는 기억나요⁠. 아탄아⁠, 동생 손 놓지 마라⁠.⁠”

사내가 몸을 돌렸다⁠. 아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는 얼굴이 아니라 화난 얼굴이었다⁠. 화난 얼굴로 울음을 막고 있었다⁠.

“⁠손 놓은 건 엄마였어⁠.⁠”

“⁠형⁠.⁠”

“⁠엄마가 너를 객잔 문 앞에 앉혔어⁠. 산다화 주머니 하나 쥐여 주고⁠. 나한테는 하나를 줬어⁠. 그리고 내 손을 잡고 걸었어⁠. 너는 울었고 엄마는 안 돌아봤어⁠. 객잔은 아이 하나밖에 못 먹인다고⁠, 둘을 두고 가면 둘 다 쫓겨난다고⁠. 엄마는 너를 살렸어⁠. 나는 데리고 갔고⁠.⁠”

“⁠엄마는요⁠?⁠”

“⁠이듬해 흑수곡에서 죽었어⁠. 열병이었어⁠. 나는 흑수곡 짐꾼 집에서 컸어⁠. 방칠 형님이 나를 거뒀어⁠.⁠” 아탄이 개울물에 손을 담갔다가 뺐다⁠. “⁠지난가을에 산이 무너졌을 때 나를 거둔 집도 묻혔어⁠. 방칠 형님이 흙을 파서 나를 꺼냈어⁠. 그러니까 나는 방칠 형님 사람이야⁠.⁠”

아묵은 산다화 주머니를 풀어서 아탄 앞에 내밀었다⁠. 아탄은 보지 않았다⁠.

“⁠객잔 사람들이 나를 키웠어요⁠. 사부님하고 마님이요⁠. 저 위에서 지금 머리 빗고 있어요⁠. 금슬 연습한다고요⁠.⁠”

“⁠알아⁠. 국수 영감하고 칼 할멈⁠.⁠”

“⁠형도 올라와요⁠. 국수 한 그릇 먹어요⁠.⁠”

“⁠객잔은 우리 식구들이 가져갈 땅이야⁠.⁠” 아탄이 말했다⁠. “⁠올라가면 내가 그 땅에서 너를 내쫓는 날이 와⁠. 그 전에 너나 내려와⁠. 아니면 거기 있든가⁠. 형이라고 부르지 마⁠. 여기서는 다들 나를 아탄 형님이라고 불러⁠. 네가 부르면 헷갈려⁠.⁠”

아탄은 개울을 건너가 버렸다⁠. 아묵은 산다화 주머니를 쥔 채 물소리 속에 서 있었다⁠.

*

화운은 해 질 녘에 장작을 패러 고개 중턱 장작더미로 내려갔다⁠. 금슬 연습이 끝나자 청매는 이 층으로 올라가 문을 닫았고⁠, 화운은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을 때는 도끼를 들었다⁠.

장작더미 너머 소나무 밑에 방칠이 앉아 있었다⁠. 가면 구멍으로 화운의 도끼질을 보았다⁠.

“⁠국자로 장작은 안 패오⁠?⁠”

“⁠국자는 사람 패는 데 쓰오⁠. 장작은 도끼로 패오⁠.⁠” 화운이 통나무를 세웠다⁠. “⁠할 말 있소⁠?⁠”

“⁠어젯밤 마당에서 두 분 등 맞대는 거 봤소⁠.⁠”

“⁠알고 있소⁠. 휘파람 불었잖소⁠.⁠”

“⁠처음 보는 합이었소⁠. 서로 막는 칼인데 등만 대니 서로를 지키더구려⁠.⁠” 방칠이 일어났다⁠. 등의 큰 칼이 소나무 가지에 닿았다⁠. “⁠본주 제삿날까지는 두 분이 붙어 있으시오⁠. 마을로 땅이 가면 상단이 사오⁠. 땅은 두 분이 갖고 계시다가⁠, 제삿날 지나서 나한테 파시오⁠.⁠”

“⁠안 판다고 했소⁠.⁠”

“⁠그럼 삼월가 첫날에 관군이 와서 우리를 치오⁠. 그날 내 식구들이 갈 곳은 이 고갯마루 하나요⁠. 관군을 피해 올라온 식구들 앞에서 영감이 문을 닫으면⁠.⁠” 방칠이 잠시 말을 끊었다⁠. “⁠영감이든 할멈이든⁠, 객잔 사람이든⁠, 내 식구 길을 막는 사람은 베오⁠.⁠”

화운은 도끼를 통나무에 박아 두고 방칠을 보았다⁠.

“⁠아묵도⁠?⁠”

“⁠국수 나르는 녀석 말이오⁠?⁠”

“⁠아묵이 오늘 개울가에서 아탄이라는 사내와 이야기하는 걸 봤소⁠. 둘이 같은 주머니를 찼더군⁠.⁠”

가면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아탄은 내 오른팔이오⁠.⁠” 방칠이 말했다⁠. “⁠영감⁠, 내 오른팔의 동생이 객잔에 있는 건 내 사정이 아니오⁠. 길을 막으면 똑같소⁠.⁠”

“⁠그 휘파람⁠.⁠” 화운이 말했다⁠. “⁠길게 하나⁠, 짧게 둘⁠, 끝을 올리는 거⁠. 그건 금사강 뱃사람 아무나 부는 게 아니오⁠. 한 패거리만 그렇게 불었소⁠.⁠”

방칠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을 돌려 비탈을 내려갔다⁠. 몇 걸음 가다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번에는 짧게 하나만⁠. 화운은 도끼 자루를 쥐었다 놓았다⁠.

*

청매는 이 층 안방에서 상단이 보낸 녹차 상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뚜껑을 열자 창산 고산의 찬 냄새가 올라왔다⁠. 점창의 사당 뒤 차밭에서만 나는 냄새였다⁠. 열여섯에 점창에 들어가 스물아홉에 나올 때까지 청매는 아침마다 찻잎 냄새로 눈을 떴다⁠. 옥교는 청매보다 두 해 늦게 들어온 사매였다⁠. 둘은 한 방에서 잤다⁠. 옥교는 잠버릇이 나빠서 자다가 청매의 이불을 걷어찼다⁠.

문이 열리고 화운이 들어왔다⁠. 턱에 무명 수건을 동여매고 있었다⁠. 수건 매듭이 정수리 위에서 토끼 귀처럼 솟았다⁠.

“⁠그게 뭐요⁠?⁠”

“⁠코 안 골려고⁠. 입을 닫아 놓으면 코도 조용해진다고 대장간 사내가 그러더이다⁠.⁠”

“⁠대장간 사내 마누라는 친정 갔소⁠.⁠”

“⁠그래서 대장간 사내가 잘 아오⁠. 안 고쳐서 마누라가 간 거니까⁠.⁠”

화운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청매와 얼굴을 마주 보고 누웠다⁠. 토끼 귀 매듭이 베개 위에서 흔들렸다⁠. 청매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이불로 막았다⁠. 막다가 녹차 상자를 엎었다⁠. 찻잎이 이불 위로 쏟아졌다⁠.

“⁠아이고⁠, 사매 선물을⁠.⁠”

“⁠주우시오⁠. 내가 수건 때문에 고개를 못 숙이오⁠.⁠”

청매는 찻잎을 한 줌씩 주워 상자에 담았다⁠. 담으면서 화운의 얼굴을 보았다⁠. 토끼 귀 수건을 맨 예순넷의 얼굴이 진지했다⁠. 정말로 코를 안 골아 보려는 얼굴이었다⁠. 금슬 좋은 척을 하랬더니 금슬 좋은 부부가 되려고 애쓰는 얼굴이었다⁠.

청매는 입을 열었다⁠. 서른 해 전 창산 밑 사당에서 옥교가 전한 명을 말하려고 했다⁠. 말 대신 찻잎 한 장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화운이 수건 속에서 웅얼거렸다⁠.

“⁠뭐라고 했소⁠?⁠”

“⁠아무 말도 안 했소⁠.⁠”

아래층 부엌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청매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저고리를 걸쳤다⁠.

*

밤이 깊어서 아묵은 부엌에서 국수를 한 그릇 더 말았다⁠. 사부님이 남긴 국물을 데우고 면을 삶고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얹었다⁠. 국자로 국물을 떴다⁠. 사부님이 하던 대로 그릇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려서 떴다⁠.

“⁠어디 가니⁠?⁠”

마님이 부엌 문턱에 서 있었다⁠. 잠옷 위에 매화색 저고리를 걸쳤다⁠. 아묵은 숨기지 않았다⁠.

“⁠형한테요⁠. 천막에 형이 있습니다⁠. 아탄이요⁠. 같은 주머니를 차고 있어요⁠.⁠”

마님은 한참 아묵의 손에 들린 국수 그릇을 보았다⁠. 이어서 아묵의 허리춤의 주머니를 보았다⁠.

“⁠형이 뭐라더냐⁠?⁠”

“⁠올라오면 저를 내쫓는 날이 온대요⁠. 형이라고 부르지 말래요⁠.⁠”

“⁠국수는 받더냐⁠?⁠”

“⁠아직 안 줘 봤습니다⁠.⁠”

마님이 부엌으로 들어와 찬장을 열었다⁠. 유선 한 장을 꺼내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유선을 얇게 썰어 국수 위에 얹었다⁠. 검을 닦지도 않고 칼집에 꽂았다⁠. 아묵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형이 안 먹으면⁠?⁠”

“⁠제가 그릇 들고 앉아 있겠습니다⁠. 형이 먹을 때까지 매일 내려가겠습니다⁠.⁠”

“⁠국수가 불면⁠?⁠”

“⁠불은 국수는 제가 먹고⁠, 새로 말아 가겠습니다⁠.⁠”

마님은 아묵의 어깨에 묻은 밀가루를 털어 주었다⁠.

“⁠그럼 국물은 따로 담아 가라⁠. 영감이 늘 그렇게 하더라⁠. 따로 담아 가면 안 분다⁠.⁠”

아묵은 대나무 통에 국물을 따로 담았다⁠. 지게를 지고 부엌 뒷문으로 나갔다⁠. 장독대 옆에서 사부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부님은 아무 말 없이 등불을 아묵에게 건넸다⁠. 아묵은 등불을 들고 비탈을 내려갔다⁠. 저 아래 천막 어귀에 아탄이 횃불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아묵은 아탄에게서 열 걸음 떨어진 바위에 앉아 국수 그릇을 무릎에 올렸다⁠. 아탄이 보았다⁠. 아묵은 움직이지 않았다⁠. 국물은 대나무 통에서 식지 않고 있었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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