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41자)

서른일곱 번째 초식

객잔을 지키는 고수 노부부 · 하청오

아묵은 의자 장대 앞쪽을 어깨에 메고 비탈을 올랐다⁠. 뒤쪽은 대장간 사내가 멨다⁠. 의자에는 사부님이 앉아 있었다⁠. 등받이 높은 대장간 의자에 장대 두 개를 동여매 가마처럼 꾸몄다⁠. 사부님은 무릎에 쇠 국자를 얹고⁠, 어깨에는 마님이 덮어 준 솜이불을 둘렀다⁠.

“⁠아묵⁠, 왼쪽으로 기운다⁠.⁠”

“⁠사부님이 왼쪽으로 기우셔서 그렇습니다⁠.⁠”

“⁠등이 아파서 그렇다⁠.⁠”

“⁠그럼 제가 오른쪽으로 기울겠습니다⁠.⁠”

“⁠그럼 대장간 사내가 넘어진다⁠.⁠”

“⁠넘어져도 영감님 의자는 안 넘어갑니다⁠.⁠” 대장간 사내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내가 만든 의자요⁠. 소 한 마리가 앉아도 안 부서져요⁠.⁠”

“⁠나는 소가 아니오⁠.⁠”

“⁠소보다 무거우세요⁠. 국자 때문에요⁠.⁠”

마님은 의자 옆에서 걸었다⁠. 검을 차고⁠, 허리에 무명 띠를 단단히 감았다⁠. 마을 의원이 감아 준 띠였다⁠. 허리를 펴 주는 띠라고 했다⁠. 마님은 띠를 감고 나서 한 번도 허리를 짚지 않았다⁠.

흑수곡 어귀에 이르자 천막 사람들이 비탈 아래에 모여 있었다⁠. 삼백이 다 나와 있었다⁠. 아이들은 앞줄에⁠, 사내들은 뒷줄에⁠. 소추가 아묵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마부 열둘이 한쪽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늙은 마부의 이마에 무명이 감겨 있었다⁠. 아묵이 사흘 동안 내려와 꿰맨 이마였다⁠.

형이 비탈 중간에 서 있었다⁠. 형은 아묵을 보고⁠, 아묵이 멘 장대를 보고⁠, 장대 위의 사부님을 보았다⁠. 형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묵도 끄덕였다⁠.

방칠은 무너진 비탈 꼭대기⁠, 흰 천 조각들이 꽂힌 자리 바로 위에 서 있었다⁠. 등에서 큰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묵과 대장간 사내가 의자를 비탈 한가운데 평평한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마님이 의자 뒤로 돌아갔다⁠. 마님의 등이 의자 등받이에 닿았다⁠. 등받이 너머에 사부님의 등이 있었다⁠.

“⁠아묵⁠.⁠” 사부님이 말했다⁠. “⁠의자 돌리는 거 잊지 마라⁠. 내가 부르면 반 바퀴⁠.⁠”

“⁠예⁠.⁠”

“⁠틀리면 네 마님이 칼을 맞는다⁠.⁠”

“⁠예⁠.⁠”

“⁠그리고 틀리면 내가 국수를 안 준다⁠.⁠”

“⁠사부님⁠, 그게 더 무섭습니다⁠.⁠”

*

방칠은 의자 위의 형님을 내려다보았다⁠. 솜이불을 두른 예순넷의 노인이 국자를 무릎에 얹고 있었다⁠. 서른 해 전 나룻배 위에서 장대를 휘두르던 형님의 어깨는 반으로 줄어 있었다⁠. 눈썹만 길어졌다⁠.

“⁠형님⁠, 의자에 앉아서 칼을 받겠다는 거요⁠?⁠”

“⁠국자다⁠.⁠”

“⁠국자로 칼을 받겠다는 거요⁠?⁠”

“⁠서른 해 동안 국자로 다 받았다⁠. 외상도 받고 욕도 받고 마누라 잔소리도 받았다⁠. 칼이 제일 쉽다⁠.⁠”

비탈 아래에서 천막 아낙 몇이 웃음을 삼켰다⁠. 방칠은 웃지 않았다⁠.

“⁠형님⁠, 나는 형님을 베려고 이러는 게 아니오⁠. 내 식구들이 봐야 하오⁠. 내가 졌는지 이겼는지⁠. 졌으면 왜 졌는지⁠. 산이 무너지고 나서 삼백이 나만 보고 왔소⁠. 내가 상단한테 지든 관한테 지든⁠, 그냥 지면 안 되오⁠. 다 보는 데서 져야 다음 사람이 덜 지오⁠.⁠”

“⁠그럼 다 보는 데서 해라⁠.⁠” 청매가 등받이 너머에서 말했다⁠. “⁠우리도 이 나이에 남 보는 데서 지면 망신이오⁠. 마을에서 짚신 걸고 내기하는 사람이 있소⁠.⁠”

방칠은 청매의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 몰랐다⁠. 대장간 사내가 비탈 아래에서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방칠은 비탈을 내려오며 칼을 낮게 끌었다⁠. 칼끝이 흙을 긁었다⁠. 금사방 칼잡이들이 나룻배 바닥을 긁으며 상대를 재던 걸음이었다⁠. 형님이 가르쳤다⁠.

방칠은 서른 해 동안 두 개의 초식을 보았다⁠. 하나는 형님의 금사 십팔 탄이었다⁠. 열여섯까지 나룻배에서 배웠다⁠. 다른 하나는 창산 열아홉 봉의 점창 검이었다⁠. 나루가 불탄 뒤 방칠은 점창 검객들이 소금 길을 지키는 것을 스무 해 동안 보았다⁠. 짐을 지고 지나가면서 보았다⁠. 점창 검이 어디서 꺾이는지⁠, 금사 칼이 어디서 끊기는지⁠. 방칠의 칼은 두 초식의 틈을 찾아 다니며 컸다⁠.

첫 칼은 청매에게 갔다⁠. 위에서 아래로⁠. 청매의 검이 운롱으로 올라와 받으려 했다⁠. 방칠은 칼을 반 치 꺾었다⁠. 운롱이 막는 자리를 비켜 갔다⁠. 칼등이 청매의 어깨를 스쳤다⁠. 저고리 소매가 찢어졌다⁠.

“⁠사양⁠!⁠” 의자에서 화운이 외쳤다⁠.

의자가 반 바퀴 돌았다⁠. 아묵이 장대를 밀었다⁠. 화운이 앞으로 오고 청매가 뒤로 갔다⁠. 화운의 국자가 탄두로 올라왔다⁠. 방칠은 탄두를 알았다⁠. 탄두가 끊기는 자리도 알았다⁠. 방칠의 칼이 국자 손잡이를 쳤다⁠. 국자가 화운의 손에서 비틀렸다⁠. 화운이 이를 물고 국자를 놓지 않았다⁠. 등의 상처가 당겼다⁠. 화운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형님⁠, 탄두는 내가 형님한테 배운 거요⁠. 형님이 아는 건 나도 다 아오⁠.⁠”

방칠은 다시 돌았다⁠. 의자를 따라 돌았다⁠. 청매 앞으로 가면 청매가 점창 초식을 냈고⁠, 방칠은 점창 초식의 틈으로 들어갔다⁠. 화운 앞으로 가면 화운이 금사 초식을 냈고⁠, 방칠은 금사의 틈으로 들어갔다⁠. 아묵이 의자를 반 바퀴씩 돌릴 때마다 방칠은 한 바퀴를 돌았다⁠. 열아홉 봉 가운데 일곱이 막혔다⁠. 열여덟 탄 가운데 여섯이 막혔다⁠.

비탈 아래에서 천막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아이들은 소리 없이 손을 쥐었다⁠. 형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형의 팔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

청매는 등받이에 등을 대고 숨을 골랐다⁠. 등받이 나무를 사이에 두고 화운의 숨이 넘어왔다⁠. 화운의 숨이 거칠었다⁠. 상처가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청매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방칠이 고개 돌린 틈으로 들어올 것이었다⁠.

“⁠영감⁠.⁠” 청매가 등 뒤로 말했다⁠. “⁠칠이는 내 검을 다 아오⁠. 영감 칼도 다 아오⁠.⁠”

“⁠알고 있소⁠.⁠”

“⁠칠이가 모르는 게 딱 하나 있소⁠.⁠”

“⁠뭐요⁠?⁠”

“⁠우리가 뭘 할지⁠. 우리도 모르니까⁠.⁠”

등받이 너머에서 화운이 웃었다⁠. 웃다가 기침을 했다⁠.

“⁠마당에서 눈 감고 했던 거 기억나오⁠?⁠” 청매가 말했다⁠. “⁠내가 운롱을 내면 영감 국자가 저절로 탄두로 왔소⁠. 영감 국자가 내 검을 막았소⁠. 서른 해 동안 서로 막으려고 만든 초식이라⁠.⁠”

“⁠그랬소⁠.⁠”

“⁠그럼 막지 마시오⁠. 이어 주시오⁠. 내 운롱이 끝나는 데서 영감 탄두를 시작하시오⁠. 막는 자리 말고⁠, 운롱이 끝나는 자리⁠. 영감은 거기를 아오⁠. 서른 해 전에 거기서 날 막았으니까⁠.⁠”

방칠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청매 앞이었다⁠. 청매가 운롱을 냈다⁠. 검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방칠의 칼이 반 치 꺾여 비켜 들어왔다⁠. 운롱이 막는 자리였다⁠. 청매는 막지 않았다⁠. 검을 끝까지 내렸다⁠. 운롱이 끝나는 자리까지⁠.

“⁠지금⁠!⁠”

의자가 돌지 않았다⁠. 아묵이 장대를 쥔 채 멈췄다⁠. 사부님이 돌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사부님이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비틀었다⁠. 등받이 옆으로 국자가 나왔다⁠. 운롱이 끝난 자리⁠, 청매의 검끝이 땅에 닿기 직전의 자리에서 국자가 탄두로 올라왔다⁠. 청매의 검이 내려간 길을 국자가 그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방칠의 칼은 운롱이 막을 자리를 비켜 들어왔다⁠. 거기엔 운롱이 없었다⁠. 비켜 들어온 칼이 국자를 만났다⁠. 국자 바닥이 칼날 옆면을 쳤다⁠. 방칠의 손목이 꺾였다⁠.

방칠이 물러났다가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화운 앞이었다⁠. 화운이 열다섯 번째 여울인 호도를 냈다⁠. 국자가 옆으로 흘렀다⁠. 방칠은 호도가 끊기는 자리를 노렸다⁠. 화운은 호도를 끊지 않았다⁠. 국자를 끝까지 흘렸다⁠. 호도가 끝나는 자리에서 등받이 너머 청매의 검이 나왔다⁠. 사양봉이었다⁠. 해 지는 봉우리⁠, 아래로 내려가는 걸음을 밀어 주는 검⁠. 방칠의 칼이 내려가는 길을 청매의 검이 밀어 주었다⁠. 방칠의 칼이 제 무게에 끌려 흙에 박혔다⁠.

방칠이 칼을 뽑으려 했다⁠. 국자가 칼등을 눌렀다⁠. 검끝이 방칠의 손등에 닿았다⁠. 둘이 한꺼번에⁠.

*

화운은 의자에 앉은 채 국자로 방칠의 칼등을 누르고 있었다⁠. 등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무명 띠 아래로 무언가 따뜻한 것이 흘렀다⁠. 화운은 등을 무시했다⁠.

등받이 너머에서 청매의 검이 방칠의 손등 위에 멈춰 있었다⁠. 방칠의 손은 칼자루를 놓지 않았다⁠. 셋은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비탈 아래 삼백이 숨을 쉬지 않았다⁠. 흰 천 조각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서른일곱 번째요⁠.⁠” 청매가 말했다⁠. 숨이 찼다⁠.

“⁠그런 초식은 없소⁠.⁠” 화운이 말했다⁠. 숨이 더 찼다⁠.

“⁠방금 생겼소⁠.⁠”

“⁠이름은⁠?⁠”

“⁠영감이 지으시오⁠. 나는 초식 이름 짓는 사람들이 싫소⁠.⁠”

방칠이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손을 펴서 흙 위에 놓았다⁠. 가면 구멍으로 화운을 보고⁠, 등받이 너머의 청매를 보았다⁠.

“⁠베시오⁠.⁠”

“⁠안 베오⁠.⁠” 청매가 검을 거두었다⁠.

“⁠왜⁠?⁠”

“⁠베면 서른 해 전이랑 똑같소⁠. 누가 누구를 붙잡아 두고⁠, 누가 누구를 치고⁠. 서른 해 동안 나는 그걸 안 하려고 유선을 검으로 잘랐소⁠.⁠”

“⁠형님은⁠?⁠”

화운이 국자를 칼등에서 거두었다⁠. 국자를 무릎에 얹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상처가 등받이에 닿아 화운이 이를 악물었다⁠.

“⁠칠아⁠, 가면 벗어라⁠.⁠”

방칠이 화운을 보았다⁠.

“⁠벗어라⁠. 네 식구들 앞에서⁠. 오늘은 아이들이 안 운다⁠. 내가 보장한다⁠.⁠”

방칠의 손이 가면 끈으로 갔다⁠. 끈이 풀렸다⁠. 가면이 방칠의 손으로 내려왔다⁠. 비탈 아래 삼백이 처음으로 우두머리의 맨얼굴을 보았다⁠. 덴 반쪽과 성한 반쪽⁠. 아이들 가운데 몇이 소리를 냈다⁠. 우는 소리가 아니었다⁠. 소추가 맨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얼굴 반만 타셨네요⁠!⁠”

“⁠반만 탔다⁠.⁠”

“⁠나머지 반은 멀쩡하시네요⁠!⁠”

“⁠멀쩡하다⁠.⁠”

“⁠그럼 반반이네요⁠. 할아버지 할머니처럼요⁠!⁠”

비탈 아래에서 누군가 웃었다⁠. 늙은 사공이었다⁠. 다음에 아낙 하나가 웃었다⁠. 묶인 마부들 가운데 늙은 마부까지 웃었다⁠. 방칠은 가면을 손에 든 채 웃지 않았다⁠. 대신 가면을 비탈 아래 흰 천 조각들 사이에 꽂았다⁠. 나뭇가지 하나에 걸쳐서⁠.

형이 비탈을 올라왔다⁠. 형은 아묵 옆에 와서 장대를 같이 쥐었다⁠. 아묵의 손 옆에 형의 손이 있었다⁠. 둘 다 장대를 놓지 않았다⁠.

“⁠형님⁠.⁠” 방칠이 화운에게 말했다⁠. “⁠약속대로 하겠소⁠. 마부를 풀고 소금을 돌려주고⁠, 관에 가겠소⁠.⁠”

“⁠관에 가면 너는 죽는다⁠.⁠”

“⁠형님이 이겼소⁠.⁠”

“⁠둘이 이겼다⁠.⁠” 화운이 말했다⁠. “⁠둘이 이겼으면 둘이 정한다⁠. 아직 안 정했다⁠.⁠”

골짜기 어귀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화운이 고개를 들었다⁠. 아침 안개 속에서 횃불이 열 남짓 올라오고 있었다⁠. 해가 떴는데도 꺼지지 않은 횃불이었다⁠. 맨 앞에 비단 가마 하나와 푸른 옷 검객들이 있었다⁠. 뒤에 붉은 깃발 하나⁠.

청매가 의자 등받이 뒤로 손을 넣어 화운의 등을 짚었다⁠. 손바닥에 피가 묻었다⁠.

“⁠영감⁠, 등이 터졌소⁠.⁠”

“⁠알고 있소⁠. 아까부터 따뜻하더이다⁠.⁠”

“⁠그런데 왜 말 안 했소⁠?⁠”

“⁠말하면 임자가 이기니까⁠.⁠”

청매는 피 묻은 손바닥을 저고리 자락에 닦았다⁠. 매화색 위에 붉은 자국이 번졌다⁠. 청매는 눈을 들어 골짜기 어귀를 다시 보았다⁠.

“⁠행수다⁠.⁠” 청매가 말했다⁠.

“⁠천총도 있다⁠.⁠” 화운이 말했다⁠.

아묵과 형이 장대를 함께 들어 올렸다⁠. 의자가 바위에서 떴다⁠. 화운은 의자 위에서 국자를 고쳐 쥐었다⁠. 청매가 의자 옆으로 와서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방칠이 흙에서 제 칼을 뽑아 등에 꽂았다⁠. 넷이 골짜기 어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등을 맞대지 않았다⁠. 다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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