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406자)

불 탄 간판

객잔을 지키는 고수 노부부 · 하청오

아묵은 능선 바위 뒤에 엎드려 두 번째 굽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래로 횃불이 길게 이어져 올라왔다⁠. 노새 백 마리가 소금 자루를 지고 한 줄로 걸었다⁠. 방울 소리가 산을 울렸다⁠. 행렬 앞뒤로 푸른 옷 점창 호위가 열둘⁠, 상단 마부가 서른 남짓이었다⁠.

형이 아묵의 어깨를 눌렀다⁠. 아묵은 엎드려 있었다⁠. 등불은 이미 껐다⁠.

방칠이 휘파람을 불었다⁠. 길게 하나⁠, 짧게 둘⁠, 끝을 올렸다⁠. 사부님이 가르쳤다는 휘파람이었다⁠.

사내들이 능선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돌이 먼저 굴러 내려갔다⁠. 노새들이 놀라 울었다⁠. 횃불 몇 개가 길에 떨어져 굴렀다⁠. 점창 호위들이 검을 뽑았다⁠. 작대기와 검이 부딪쳤다⁠. 노새 하나가 소금 자루를 진 채 비탈로 뛰어내렸다⁠. 자루가 터져 하얀 소금이 어둠 속으로 쏟아졌다⁠.

아묵은 바위 뒤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객잔 마당에서 본 싸움과 달랐다⁠. 마당에서는 사부님과 마님이 젊은이들의 손목만 쳤다⁠. 여기서는 사람이 사람을 넘어뜨리고 밟았다⁠. 마부 하나가 이마가 터져 쓰러졌다⁠. 흑수곡 사내 하나가 검에 팔을 베였다⁠. 피가 소금 위에 떨어졌다⁠.

형이 맨 앞에서 노새 고삐를 잡아채고 있었다⁠. 노새 열 마리를 한 줄로 묶어 능선 쪽으로 끌었다⁠. 점창 호위 하나가 형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아묵은 바위 뒤에서 일어났다⁠. 들고 있던 것은 꺼진 등불뿐이었다⁠. 아묵은 등불을 던졌다⁠. 등불이 호위의 어깨를 맞고 깨졌다⁠. 호위가 돌아보는 사이 형이 작대기로 호위의 무릎을 쳤다⁠.

“⁠들어가 있으라니까⁠!⁠” 형이 소리쳤다⁠.

“⁠형 등 뒤에 사람이 있었어요⁠!⁠”

형은 대답하지 않고 노새 고삐를 하나 더 잡았다⁠. 아묵은 형의 등 뒤에 붙었다⁠. 마님이 흑수곡에서 시킨 대로⁠. 그냥 붙었다⁠.

*

화운은 두 번째 굽이 위 대숲 어귀에서 청매의 팔을 잡아 세웠다⁠. 아래에서 싸우는 소리가 올라왔다⁠. 늦었다⁠. 둘이 대숲을 헤치고 굽이에 닿았을 때 행렬은 이미 반으로 끊겨 있었다⁠. 상단 마부 여남은 명이 손이 묶인 채 꿇어앉아 있었다⁠. 흑수곡 사내들이 노새 고삐를 쥐고 능선 쪽으로 오르고 있었다⁠.

방칠이 길 한가운데서 큰 칼을 땅에 짚고 있었다⁠. 화운을 보고 가면을 들었다⁠.

“⁠형님⁠, 늦었소⁠.⁠”

“⁠늦었다⁠.⁠” 화운이 숨을 몰아쉬었다⁠. “⁠칠아⁠, 소금은 돌려줘라⁠. 마부들은 풀어 줘라⁠. 사람을 붙잡아 가면 관이 너를 비적이 아니라 역적으로 친다⁠.⁠”

“⁠역적이든 비적이든 굶는 건 같소⁠.⁠”

“⁠네 식구 삼백이 다 죽는다⁠.⁠”

“⁠가만있어도 삼월가 첫날 다 쫓겨나오⁠. 쫓겨나서 굶어 죽나⁠, 싸우다 죽나⁠.⁠” 방칠이 칼을 들었다⁠. “⁠형님⁠, 비키시오⁠.⁠”

청매가 화운 옆으로 다가갔다⁠. 검을 뽑지 않고 칼집째 들었다⁠.

“⁠흑수곡 바위에 구멍 뚫은 사람은 이 마부들이 아니오⁠. 마부들은 노새 끄는 사람들이오⁠.⁠”

“⁠마부들은 상단 사람이오⁠. 상단 행수가 제 사람을 찾으러 와야 내 말을 듣소⁠.⁠”

고개 아래에서 뿔피리 소리가 났다⁠. 길게 세 번⁠. 화운이 고개를 돌렸다⁠. 대리 쪽 길에 횃불이 수십 개 올라오고 있었다⁠. 붉은 깃발이 횃불 빛에 펄럭였다⁠.

“⁠관군이다⁠!⁠” 흑수곡 사내 하나가 외쳤다⁠.

“⁠삼월가 첫날이라더니⁠.⁠” 청매가 말했다⁠.

“⁠행수가 제삿날 본주묘에 사람을 보냈소⁠. 그 사람이 마을에서 뭘 들었겠소⁠?⁠” 화운이 이를 물었다⁠. “⁠칠이가 오늘 밤 친다는 소리는 천막 삼백이 다 들었소⁠. 마을 사람도 들었을 거요⁠.⁠”

방칠이 휘파람을 짧게 두 번 불었다⁠. 사내들이 노새를 몰았다⁠. 큰길이 아니라 능선 옛길로⁠, 객잔 뒷문 쪽으로⁠.

“⁠칠아⁠! 그쪽은 객잔이다⁠!⁠”

“⁠형님이 낸 길이오⁠!⁠” 방칠이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관군 피하려고 낸 길이라면서요⁠!⁠”

화운은 노새 행렬 맨 끝에서 아묵을 보았다⁠. 아묵이 아탄의 등 뒤에 붙어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아묵이 화운을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아묵이 먼저 눈을 내렸다⁠.

*

청매는 객잔 마당에 먼저 닿았다⁠. 뒷문이 열려 있었다⁠. 노새들이 장독대를 넘어뜨리며 마당을 가로질러 앞문으로 빠져나갔다⁠. 방칠의 사내들은 마당에 머물지 않았다⁠. 고갯마루를 지나 반대편 비탈로⁠, 흑수곡 쪽으로 내려갔다⁠. 소금 자루를 진 노새와 묶인 마부들이 따라갔다⁠. 마당에는 깨진 장독과 쏟아진 소금만 남았다⁠.

관군은 노새 행렬을 쫓지 않았다⁠. 고갯마루 객잔을 에워쌌다⁠. 횃불이 담장을 따라 빙 둘러 늘어졌다⁠. 마득곤이 말을 타고 앞문 돌계단 아래로 왔다⁠.

“⁠객잔 안의 비적은 나오라⁠!⁠”

“⁠비적은 다 지나갔소⁠!⁠” 청매가 마당에서 외쳤다⁠. “⁠앞문으로 나갔소⁠! 저리로 쫓으시오⁠!⁠”

“⁠비적이 지나간 길이 객잔이면 객잔이 비적의 길이오⁠!⁠”

마구간에서 아이들 우는 소리가 났다⁠. 청매는 마구간으로 뛰었다⁠. 소추와 아이들이 짚더미 위에서 몸을 붙이고 있었다⁠. 먹보가 문을 걷어차며 울었다⁠.

“⁠나와라⁠. 할머니 손 잡아라⁠.⁠”

“⁠할아버지는요⁠?⁠”

“⁠오고 있다⁠.⁠”

화운이 뒷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숨이 턱에 닿아 있었다⁠. 화운은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 마구간 밖으로 내보냈다⁠. 청매가 아이들을 담장 밑 우물가로 모았다⁠.

“⁠천총 나리⁠! 아이들이오⁠! 아이들이 나가오⁠!⁠” 청매가 외쳤다⁠.

담장 밖에서 마득곤이 무언가를 외쳤다⁠. 명령이었는지 대답이었는지 들리지 않았다⁠. 시위 당기는 소리가 담장을 따라 일제히 났다⁠.

불화살이 날아왔다⁠. 처음 몇 대는 마당에 꽂혔다⁠. 다음 몇 대는 객잔 지붕에⁠, 처마에⁠, 대청 문살에 꽂혔다⁠. 서른 해 묵은 나무가 마른 소리를 내며 불을 받았다⁠.

청매는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화운이 뒤에서 소리쳤다⁠.

“⁠임자⁠! 어디 가오⁠!⁠”

부엌은 연기로 차 있었다⁠. 솥 밑 아궁이에서 불이 그대로 타고 있었다⁠. 서른 해 동안 꺼진 적 없는 불이었다⁠. 청매는 들보 위 대바구니를 검집으로 쳐서 떨어뜨렸다⁠. 대바구니에서 대나무 껍질에 싼 차병이 굴러 나왔다⁠. 청매는 차병을 품에 안고⁠, 탁자 위의 쇠 국자를 허리에 꽂았다⁠.

화운이 부엌 문턱에 나타났다⁠.

“⁠지금 차병을 챙기오⁠?⁠”

“⁠내 몫이오⁠!⁠”

“⁠그게 왜 임자 몫이오⁠?⁠”

“⁠영감이 천막 가면서 두고 갔소⁠. 두고 간 건 내 거요⁠!⁠”

부엌 들보가 불꽃을 떨어뜨렸다⁠. 화운이 청매의 팔을 잡아 끌어냈다⁠. 둘은 마당으로 굴러 나왔다⁠. 마당 한가운데서 청매가 무릎을 짚었다⁠.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담장 위로 다시 시위 소리가 났다⁠.

청매는 불화살이 자기를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 허리를 펴서 피하려 했다⁠. 허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화운이 청매 앞으로 왔다⁠. 청매와 담장 사이로 왔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담장에 등을 보이고⁠, 청매를 향해⁠.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났다⁠. 둔하고 짧은 소리였다⁠. 화운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청매의 어깨에 화운의 이마가 닿았다⁠.

“⁠영감⁠.⁠”

“⁠서른 해 만에⁠.⁠” 화운이 말했다⁠. 숨이 끊겼다 이어졌다⁠. “⁠적한테 등을 보였소⁠.⁠”

*

방칠은 고갯마루 반대편 비탈 중턱에서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노새들이 숨을 몰아쉬었다⁠. 묶인 마부들이 비탈에 주저앉았다⁠. 방칠이 돌아보자 고갯마루가 붉었다⁠. 객잔 지붕에서 불기둥이 올라가고 있었다⁠.

아탄이 옆에 와서 멈췄다⁠. 아탄의 어깨에 피가 배어 있었다⁠.

“⁠형님⁠, 아묵이 없습니다⁠. 능선에서 놓쳤습니다⁠. 객잔 쪽으로 뛰어갔습니다⁠.⁠”

방칠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면 끈을 풀었다⁠. 어둠 속에서 맨얼굴로 불기둥을 보았다⁠. 서른 해 전 금사강 나루에서도 방칠은 비탈에 엎드려 불을 보았다⁠. 서른 해 전에는 배가 탔고⁠, 오늘은 객잔이 탔다⁠. 서른 해 전에는 형님이 불 속에서 이름을 불렀고⁠, 오늘은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형님의 객잔을 태운 불은 방칠이 연 길을 따라 올라온 불이었다⁠.

“⁠형님⁠, 마구간에 애들이 있었습니다⁠.⁠” 아탄이 말했다⁠. “⁠소추하고 여섯⁠.⁠”

“⁠할멈이 데리고 나왔을 거다⁠.⁠”

“⁠어떻게 압니까⁠?⁠”

“⁠할멈은 검을 단번에 뽑게 됐다⁠.⁠” 방칠이 가면을 다시 썼다⁠. 끈을 묶는 손이 빨랐다⁠. “⁠영감은 애들 먼저 퍼 준다⁠. 서른 해 동안 그랬다더라⁠.⁠”

묶인 마부들 가운데 늙은 마부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상단 행렬의 우두머리였다⁠. 소매에 소금 매듭이 수놓여 있었다⁠.

“⁠이보시오⁠, 귀면⁠. 우리를 잡아가 봐야 행수는 안 오오⁠. 행수는 사람보다 길을 먼저 세는 사람이오⁠.⁠”

“⁠그럼 길을 세러 오겠지⁠.⁠” 방칠이 말했다⁠. “⁠흑수곡으로⁠. 길을 낸 자리로⁠.⁠”

방칠은 휘파람을 길게 한 번 불었다⁠.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방칠은 맨 뒤에서 걸었다⁠. 비탈을 다 내려갈 때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화운은 우물가 돌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왼쪽 어깨뼈 아래에 화살대가 꽂혀 있었다⁠. 불은 붙지 않았다⁠. 불화살 촉의 기름 솜이 날아오다 꺼진 화살이었다⁠. 청매가 저고리 소매를 찢어 화살대 둘레를 눌렀다⁠. 소추가 울면서 화운의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 아파요⁠?⁠”

“⁠안 아프다⁠.⁠” 화운이 말했다⁠. “⁠할머니가 더 아프게 누른다⁠.⁠”

“⁠영감⁠, 입 다무시오⁠.⁠”

“⁠입 다물면 코를 고오⁠.⁠”

청매의 손이 떨렸다⁠. 청매는 떨리는 손을 화운의 등에 더 세게 눌렀다⁠. 떨림이 화운의 등으로 넘어갔다⁠. 화운의 등은 떨리지 않았다⁠. 떨림이 화운의 등에 닿아 잦아들었다⁠.

객잔이 탔다⁠. 이 층 지붕이 먼저 무너졌다⁠. 대청 기둥이 따라 무너졌다⁠. 부엌 지붕이 내려앉으면서 큰 쇠솥을 덮었다⁠. 솥 위로 불꽃이 치솟았다⁠. 돌계단 맨 아래 벽에 기대 있던 운매 반쪽 간판에 불똥이 떨어졌다⁠. 느티나무가 천천히 검게 변했다⁠. 운이 먼저 타고 매가 나중에 탔다⁠. 객잔 반쪽은 계단 옆 풀숲에서 함께 탔다⁠.

관군이 불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마득곤이 말에서 내려 우물가로 왔다⁠. 투구 자국이 횃불 빛에 붉었다⁠. 마득곤은 엎드린 화운의 등을⁠, 화살대를⁠, 청매를⁠, 아이들을 차례로 보았다⁠.

“⁠노인은 쏘라고 하지 않았소⁠.⁠” 마득곤이 말했다⁠.

“⁠아이들은 쏘라고 했소⁠?⁠” 청매가 물었다⁠.

마득곤이 입을 다물었다⁠. 잠깐이었다⁠.

“⁠이 땅은 오늘부로 관이 거두오⁠. 비적이 지나간 길이고⁠, 비적에게 밥을 준 객잔이오⁠. 삼월가 마지막 날 관군 이백이 흑수곡을 치오⁠. 소금과 상단 사람들을 찾아오오⁠. 노인 둘은 마을로 내려가시오⁠. 아이들은 관에서 데려가오⁠.⁠”

“⁠아이들은 내가 데려가오⁠.⁠” 청매가 일어났다⁠. 검을 뽑았다⁠. 칼집에서 유선 기름 냄새 대신 연기 냄새가 났다⁠. “⁠천총⁠, 내 검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소⁠?⁠”

마득곤이 청매의 검을 보았다⁠. 우물가의 아이 여섯을 보았다⁠. 화살이 박힌 노인의 등을 보았다⁠. 마득곤은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병사들이 물러났다⁠.

“⁠마을로 데려가시오⁠. 그 아이들이 흑수곡으로 가면⁠, 그때는 비적이오⁠.⁠”

관군이 고개를 내려갔다⁠. 불이 꺼진 자리에서 연기가 올랐다⁠. 청매는 화운 옆에 다시 앉았다⁠. 품에서 차병을 꺼냈다⁠. 대나무 껍질이 그을렸지만 차병은 멀쩡했다⁠. 청매는 차병을 화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영감 몫이오⁠.⁠”

“⁠아까는 임자 몫이라더니⁠.⁠”

“⁠영감이 등을 보였으니까⁠. 등 보인 사람한테 주는 거요⁠.⁠”

동이 트기 전에 아묵이 대숲에서 걸어 나왔다⁠. 혼자였다⁠. 얼굴에 그을음과 소금이 묻어 있었다⁠. 아묵은 무너진 객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부엌 자리에서 큰 쇠솥이 숯 더미에 묻혀 있었다⁠. 솥 밑에서 불씨 하나가 아직 붉었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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