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10자)

불 난 부엌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오달래

범벅은 종각 들보 위에서 종이 울리는 것을 온몸으로 받았다⁠. 노승이 당목을 당겼다 놓을 때마다 종이 울었고⁠, 울림이 들보를 타고 올라와 범벅의 발바닥과 수염과 꼬리 끝까지 떨게 했다⁠. 범벅은 들보를 발톱으로 꽉 붙들었다⁠. 내려갈 생각은 없었다⁠. 여기가 오늘 산사에서 가장 높은 자리였다⁠.

“⁠이놈아⁠, 거기서 내려와라⁠. 귀청 떨어진다⁠.⁠”

노승은 당목을 놓지 않았다⁠. 열 번⁠, 스무 번⁠. 새벽 예불 때 치는 수를 한참 넘겼다⁠. 종소리가 계곡을 타고 고개까지 내려갔다⁠. 고개 너머 읍내에서 개들이 짖었다⁠. 아랫마을 지붕에서 연기 대신 사람들이 나왔다⁠.

해가 산마루에 닿을 무렵 마당에 사람들이 모였다⁠. 우물집 할미가 지팡이를 짚고 맨 앞에 있었다⁠. 고개에서 비를 맞던 농부⁠, 그물을 멨던 사내⁠, 아이를 업은 아낙들⁠. 모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절에 이무기가 나왔다는 절이었다⁠. 종이 이렇게 울린 적은 없었다⁠.

노승은 말없이 사람들을 대숲 오솔길로 이끌었다⁠. 범벅은 들보에서 뛰어내려 노승의 발치에 붙었다⁠. 쇠문 앞에서 노승은 속곳 허리춤의 열쇠를 꺼냈다⁠. 이번에는 한 번에 들어갔다⁠. 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노승은 쇠문을 양손으로 밀어 열었다⁠.

굴 안에서 겨 냄새가 쏟아져 나왔다⁠. 아침 햇살이 굴 입구에서 첫 번째 섬을 비췄다⁠. 뒤로는 섬⁠, 섬⁠, 섬이 천장까지 이어졌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이 하나가 업힌 채로 손을 뻗었다⁠. 할미가 굴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 섬 하나에 손바닥을 댔다⁠. 손바닥으로 거적을 쓸었다⁠. 관아 곳간 판자를 쓸던 아낙의 손과 같은 손짓이었다⁠. 이번에는 손바닥에 쌀알이 묻어 나왔다⁠.

“⁠가져가시오⁠.⁠”

노승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았다⁠.

“⁠이 쌀은 고을 사람들 것이오⁠. 세 해 동안 내가 잠갔소⁠. 열쇠를 차고 잠갔소⁠. 가져가시오⁠.⁠”

함성은 한참 뒤에 터졌다⁠. 사람들이 굴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섬을 등에 지고⁠, 둘이서 들고⁠, 자루에 퍼 담았다⁠. 쥐 떼가 섬 꼭대기에서 비명을 지르며 바위 틈으로 흩어졌다⁠. 범벅은 쥐 꼬리 하나가 코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앞발이 저절로 들렸다⁠. 범벅은 앞발을 내려놓고 꼬리를 깔고 앉았다⁠. 굴 안에서는 쥐를 안 잡기로 했다⁠.

그물을 멨던 사내가 섬 하나를 지고 나오다 범벅을 보았다⁠. 사내는 섬 위에 범벅을 얹었다⁠.

“⁠너도 타라⁠. 이 절 고양이⁠.⁠”

범벅은 쌀 섬 위에 올라앉아 대숲 오솔길을 내려갔다⁠. 사내의 걸음마다 섬이 흔들렸다⁠. 범벅은 거적에 발톱을 박고 버텼다⁠. 높았다⁠. 기분이 좋았다⁠. 꼬리가 하늘로 솟았다⁠.

*

청울은 대숲 깊은 데서 옆구리를 감싸고 사람들을 보았다⁠. 노승이 찢은 장삼 천이 피에 젖어 비늘에 말라붙어 있었다⁠. 섬을 진 사람들이 줄을 지어 오솔길을 내려갔다⁠. 줄이 마당을 지나 돌계단으로⁠, 돌계단에서 고개로 이어졌다⁠.

청울은 고개를 보았다⁠. 산허리의 구름 다섯 덩이를 보았다⁠. 곡식이 고개를 넘어 고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구름은 움직이지 않았다⁠. 장승 둘 사이의 공기는 여전히 먼지 빛으로 흔들렸다⁠. 우물집 할미가 쌀 한 줌을 치마폭에 싸 들고 돌계단을 내려가다 고개를 돌아보았다⁠. 할미도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어제와 같은 색이었다⁠. 청울은 비늘로 바람을 읽었다⁠. 고개 너머 땅의 열기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재판정이 다시 본다고 했다⁠. 비가 든다고는 하지 않았다⁠. 휘광의 말이 귓속에서 되살아났다⁠.

고개 아래 산길로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내려가는 줄과 반대였다⁠. 가마 하나⁠, 창을 든 포졸 열⁠, 총을 멘 포수 하나⁠. 가마 옆에서 이방이 종종걸음을 쳤다⁠. 섬을 진 사람들이 산길 가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였다⁠. 가마는 멈추지 않았다⁠.

*

범벅은 섬에서 뛰어내려 마당으로 되돌아갔다⁠. 사또의 가마가 산사 마당에 내려앉았다⁠. 사또는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부채로 굴 입구를 가리켰다⁠.

“⁠무엇들 하느냐⁠? 그 쌀은 감영에 바칠 세곡이다⁠!⁠”

섬을 지고 있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사또는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 두 팔을 벌렸다⁠.

“⁠세 해 동안 고을 곳간이 빈 까닭을 이제 알겠구나⁠. 중놈이 세곡을 훔쳐 석굴에 숨겼다⁠. 이무기와 짜고 물 나는 구슬까지 숨겼다⁠. 이방이 제 눈으로 보았다⁠.⁠”

이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섬을 내려놓는 사람이 하나 나왔다⁠. 둘이 되었다⁠. 노승이 굴 앞에서 사또를 마주 보았다⁠.

“⁠사또⁠, 석굴을 빌려 달라 한 분이 누구요⁠? 이 열쇠를 내게 맡긴 분이 누구요⁠?⁠”

“⁠증좌가 있는가⁠? 중의 말 한마디로 수령을 도둑으로 만들 텐가⁠?⁠”

“⁠있소⁠. 공납을 면해 주겠다는 말을 이방이 세 해 동안 전하러 왔소⁠. 섬마다 거적에 관아 창고의 먹 글씨가 있소⁠. 세곡이면 감영으로 가야지⁠, 왜 절 뒤 석굴에 있소⁠?⁠”

사람들의 눈이 거적으로 쏠렸다⁠. 글을 아는 농부가 거적의 먹 글씨를 읽고 얼굴이 굳었다⁠. 사또의 웃는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묶어라⁠.⁠”

포졸 둘이 노승의 팔을 뒤로 꺾었다⁠. 다른 포졸이 몽둥이로 노승의 등을 쳤다⁠. 노승이 무릎을 꿇었다⁠. 몽둥이가 다시 올라갔다⁠.

“⁠스님을 왜 치오⁠!⁠”

할미가 지팡이를 들고 포졸에게 달려들었다⁠. 포졸이 할미를 밀쳤다⁠. 할미는 마당에 넘어졌다⁠. 농부가 등에 진 쌀 섬을 내려놓지 않고 할미를 일으켰다⁠. 다른 사내 몇이 섬을 진 채로 사또를 노려보았다⁠. 섬을 내려놓은 사람들은 발끝만 보았다⁠. 마당이 둘로 갈라졌다⁠. 섬을 진 사람과 섬을 내려놓은 사람⁠. 몽둥이가 노승의 어깨에 떨어졌다⁠.

범벅은 생각하기 전에 뛰었다⁠. 장독 뚜껑을 디딤돌 삼아 사또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발톱이 사또의 뺨을 긁었다⁠. 갓이 날아가 마당에 굴렀다⁠. 사또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 고양이가⁠!⁠”

포졸의 발이 범벅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범벅은 마당을 가로질러 날아가 석굴 앞 바위에 부딪혔다⁠. 뒷다리에서 무엇이 꺾이는 소리가 났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범벅은 바위 밑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뒷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사또는 피 흐르는 뺨을 손수건으로 누르며 소리쳤다⁠.

“⁠중은 관아 옥으로⁠! 쌀 섬은 다 내려놓게 하라⁠! 그리고 이 도둑 절⁠, 부엌부터 태워라⁠!⁠”

*

청울은 부엌 지붕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았다⁠. 포졸 하나가 아궁이의 불씨를 짚단에 옮겨 부엌 벽에 던졌다⁠. 마른 나무와 마른 짚이 세 해의 가뭄을 먹고 한꺼번에 타올랐다⁠. 불길이 용마루를 타고 올라갔다⁠. 열기가 대숲까지 밀려와 청울의 비늘을 말렸다⁠.

불이 법당 처마로 옮겨붙으려 하고 있었다⁠. 청울은 대숲에서 빠져나와 비탈 아래 첫 번째 소로 몸을 던졌다⁠. 물을 입 가득 머금었다⁠. 옆구리의 상처가 당겨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청울은 비탈을 거슬러 올라 마당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무기가 마당 한가운데로 들어오고 있었다⁠. 청울은 사람들을 보지 않았다⁠. 법당 처마로 머리를 들어 올려 머금은 물을 뿜었다⁠. 물이 처마에 붙은 불을 덮었다⁠. 김이 솟았다⁠. 청울은 다시 첫 번째 소로 내려갔다⁠. 물을 머금고 올라왔다⁠. 다시 뿜었다⁠. 천 년 동안 아랫마을 우물까지 물을 나르던 몸이었다⁠. 우물보다 가까웠다⁠. 상처가 벌어져 피가 마당 흙에 줄을 그었다⁠.

“⁠뱀이다⁠! 쏴라⁠!⁠”

사또가 소리쳤다⁠. 포수가 화승에 불을 붙였다⁠. 총구가 청울의 머리를 향하는 순간⁠, 그물을 멨던 사내가 포수의 팔을 쳤다⁠. 총이 하늘로 터졌다⁠. 사내는 포수의 팔을 붙든 채 소리쳤다⁠.

“⁠불을 끄고 있잖소⁠!⁠”

우물집 할미가 마당에 주저앉아 두 손을 모았다⁠.

“⁠용왕님이 불을 끄신다⁠. 용왕님이 절을 살리신다⁠.⁠”

다섯 번째 물을 뿜었을 때 법당 처마의 불이 꺼졌다⁠. 부엌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용마루가 내려앉아 아궁이를 덮었다⁠. 청울은 마당 한가운데서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들이 이무기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무도 돌을 들지 않았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청울은 비탈로 몸을 돌려 대숲으로 돌아갔다⁠.

*

범벅은 해 질 녘에 뒷다리를 끌며 부엌 터로 갔다⁠. 사람들은 다 내려갔다⁠. 노승은 묶여서 끌려갔다⁠. 마당에 남은 것은 굴 앞에 도로 쌓인 쌀 섬과 쇠문⁠, 쇠문에 새로 매단 관아 자물쇠⁠, 사또가 남긴 포졸 둘이었다⁠. 열쇠는 사또가 가져갔다⁠. 사람들이 먼저 지고 내려간 섬은 고을로 들어갔다⁠. 굴에는 아직 절반이 남아 있었다⁠. 포졸들은 내일 밤 수레가 와서 남은 섬을 나루로 실어 간다고 했다⁠. 보름 밤이었다⁠.

부엌은 숯이 되어 있었다⁠. 기둥 둘만 검게 남아 연기를 피웠다⁠. 아궁이 위로 무너진 기와가 쌓였다⁠. 물독 조각들이 열에 터져 더 잘게 부서져 있었다⁠. 장독 뚜껑은 가운데가 쩍 갈라졌다⁠. 범벅이 열 해 동안 자던 자리였다⁠.

범벅은 갈라진 장독 뚜껑 위로 올라가려다 뒷다리 때문에 미끄러졌다⁠. 다시 올라갔다⁠. 올라가서 엎드렸다⁠. 뚜껑이 아직 따뜻했다⁠. 불이 남긴 온기였다⁠. 노승이 죽을 불어 식혀 주던 아궁이에서 연기가 가늘게 올라왔다⁠.

“⁠영감⁠.⁠”

범벅은 불러 보았다⁠.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원래 대답을 알아듣는 사람도 아니었다⁠.

석굴 앞에서 포졸 둘이 쌀 섬에 기대어 수군거렸다⁠.

“⁠사또 뺨 봤나⁠? 고양이 발톱 자국이 세 줄이야⁠. 감영 실사관이 보름 지나자마자 내려온다는데 그 얼굴로 맞이하겠네⁠.⁠”

“⁠실사관이 오기 전에 남은 섬은 나루로 간다⁠. 내일 밤에⁠. 중은 내일 아침에 다시 매를 친다더라⁠.⁠”

범벅의 귀가 포졸들을 향해 돌아갔다⁠. 범벅은 장독 뚜껑에서 내려와 뒷다리를 끌며 종각으로 갔다⁠. 종 밑⁠,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돌 틈에 새벽에 숨겨 둔 것이 있었다⁠. 범벅은 앞발을 넣어 구슬을 굴려 냈다⁠. 구슬은 불 난 날에도 식지 않았다⁠. 범벅은 구슬을 물고 다시 장독 뚜껑으로 기어 올라갔다⁠. 뚜껑 위까지 한참을 버둥거렸다⁠.

*

청울은 밤이 되어 부엌 터로 올라왔다⁠. 범벅은 갈라진 장독 뚜껑 위에서 몸을 말고 있었다⁠. 청울은 고양이 곁에 머리를 내렸다⁠. 범벅은 눈을 뜨지 않았다⁠. 꼬리 끝만 한 번 움직였다⁠. 고양이의 앞발 사이에 구슬이 끼여 있었다⁠. 고양이는 구슬을 안고 자는 새끼처럼 몸을 말고 있었다⁠. 청울은 고양이의 꺾인 뒷다리에 혀를 댔다⁠. 범벅이 움찔하며 하악 소리를 냈다⁠. 소리에 힘이 없었다⁠.

공기가 말랐다⁠. 휘광이 무너진 용마루 위에 내려앉았다⁠. 붉은 비늘에 불탄 부엌의 연기가 휘감겼다⁠.

“⁠곳간은 열렸다⁠.⁠”

휘광이 말했다⁠.

“⁠노승이 열었고⁠, 사람들이 지고 갔다⁠. 그러나 훔친 자는 뺨에 손수건을 대고 웃으며 내려갔고⁠, 연 자는 묶여 갔다⁠. 곡식의 절반은 다시 잠겼다⁠. 고개를 보아라⁠.⁠”

청울은 고개를 보았다⁠. 장승 둘 사이의 먼지 빛은 그대로였다⁠. 구름 다섯 덩이는 산허리에 그대로였다⁠.

“⁠벌은 그대로다⁠.⁠”

“⁠재판정이 다시 본다 했소⁠.⁠”

“⁠재판정은 하늘 문 너머에 있다⁠. 땅에서는 아무것도 다시 보지 않는다⁠.⁠”

휘광은 범벅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고양이를 오래 보았다⁠. 고양이의 뒷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내일 밤 하늘 문이 열린다⁠. 판결을 다시 보게 하고 싶으면 와라⁠. 둘 중 하나는 여의주를 물고⁠.⁠”

휘광이 날아올랐다⁠. 날개 바람에 부엌 터의 재가 한꺼번에 일어났다가 갈라진 장독 뚜껑 위로 내려앉았다⁠. 범벅의 등에⁠, 청울의 정수리에 잿빛 가루가 덮였다⁠.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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