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447자)

열쇠 끈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오달래

범벅은 아궁이 앞에서 노승이 보리죽을 젓는 소리를 들었다⁠. 주걱이 솥 바닥을 긁을 때마다 보리 냄새가 부엌에 퍼졌다⁠. 노승은 밤새 한숨도 자지 않은 얼굴이었다⁠. 목에 건 열쇠가 장삼 앞섶 안에서 불룩했다⁠.

노승은 죽 그릇 둘을 떠서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열 해 동안 그래 왔듯이 입으로 불어 식혀 주었다⁠. 범벅은 그릇에 코를 대지 않았다⁠.

“⁠안 먹냐⁠? 그래⁠, 먹지 마라⁠.⁠”

노승은 제 그릇을 들고 아궁이 앞에 주저앉았다⁠. 죽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가 삼키지 못하고 오래 물고 있었다⁠.

“⁠열두 해 전 겨울이었다⁠. 감영에서 종이를 갑절로 올리라 했다⁠. 닥나무 껍질을 삶고 찧고 물에 풀어 발로 떠야 종이가 된다⁠. 겨울 개울물에 손을 넣고 하루 종일 종이를 떴다⁠. 상좌 셋이 그 겨울에 갔다⁠. 하나는 얼어서⁠, 둘은 기침하다가⁠. 봄에 땅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셋을 뒷산에 묻었다⁠.⁠”

노승은 숟가락을 그릇에 걸쳤다⁠.

“⁠이듬해 새로 온 사또가 절에 올라왔다⁠. 공납을 면해 주겠다더라⁠. 대신 석굴을 빌려 달라더라⁠. 처음 몇 해는 감영에 올릴 세곡을 잠깐 쌓아 둔다고 했다⁠. 나는 믿었다⁠. 믿고 싶었다⁠. 세 해 전부터 섬이 늘었다⁠. 가뭄이 들었는데 섬이 늘었다⁠. 그때는 알았다⁠.⁠”

범벅의 털이 일어났다⁠. 범벅은 노승의 무릎 앞까지 다가가 소리쳤다⁠.

“⁠알았으면 열었어야지⁠! 고을 애들 칡뿌리 씹는 거 영감도 봤잖아⁠! 물지게 지고 내려갔잖아⁠!⁠”

“⁠그래⁠, 운다⁠. 울어라⁠.⁠”

“⁠우는 거 아니야⁠! 욕하는 거야⁠!⁠”

“⁠욕하는 거냐⁠? 그래⁠, 욕해라⁠. 너라도 욕해라⁠.⁠”

범벅은 입을 다물었다⁠. 노승은 고양이를 보지 않고 아궁이 불만 보았다⁠.

“⁠열쇠를 사또한테 돌려주면 이 절은 끝이다⁠. 공납이 갑절로 돌아오고⁠, 이무기가 산다는 소문까지 났으니 절을 헐라는 명이 떨어질 거다⁠. 이 절이 없어지면 백중에 누가 재를 올리냐⁠? 굶어 죽은 사람들 넋을 누가 달래냐⁠?⁠”

노승은 제 말에 스스로 웃었다⁠. 웃음 끝이 갈라졌다⁠.

“⁠굶긴 놈이 넋을 달랜다⁠. 부처님이 웃으시겠다⁠.⁠”

노승은 남은 죽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빈 그릇을 내려놓고 범벅의 그릇을 보았다⁠. 죽이 식어 표면에 얇은 막이 앉아 있었다⁠.

“⁠사또가 그러더라⁠. 보름 지나 감영 실사가 오면 곡식은 다 팔리고 없다고⁠. 섬 하나 안 남으니 아무도 모른다고⁠. 사또는 그 돈으로 빚 갚고 한양 가서 다른 고을을 산다더라⁠. 그럼 끝이다⁠. 나는 이 절만 남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밤마다 석굴에 올라가 섬을 만져 본다⁠. 무엇을 확인하는지도 모르고⁠.⁠”

범벅은 그릇 앞에 앉았다⁠. 식은 죽에 코를 댔다⁠. 한 번 핥았다⁠. 보리 냄새 뒤로 노승의 입김 냄새가 났다⁠. 범벅은 죽을 다 먹었다⁠. 먹으면서도 꼬리로 바닥을 쳤다⁠. 노승은 고양이가 죽을 먹는 것을 보다가 눈을 비볐다⁠. 연기 때문이라고 했다⁠.

*

청울은 해 질 녘 네 번째 소 앞에서 범벅을 기다렸다⁠. 산허리의 구름은 아직 세 덩이였다⁠. 네 번째 소에는 정강이 높이의 물이 남아 있었다⁠. 두꺼비는 다섯 번째 소가 마른 뒤로 이곳에 와 있었다⁠. 이제 두꺼비는 청울이 오면 묻지도 않고 비탈을 기어오를 채비를 했다⁠.

범벅이 구슬을 물고 내려왔다⁠. 털이 엉망이었다⁠. 하루 종일 핥지 않은 털이었다⁠. 범벅은 구슬을 청울의 턱 앞에 내려놓고 앉았다⁠.

“⁠영감이 다 말했어⁠. 나한테⁠. 내가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청울은 고양이가 들은 것을 하나씩 들었다⁠. 상좌 셋⁠, 공납⁠, 석굴⁠, 백중⁠. 고양이가 말을 마치자 공기가 말랐다⁠. 휘광이 네 번째 소 위 바위에 내려앉았다⁠.

“⁠노승의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약해졌느냐⁠, 고양이⁠?⁠”

범벅이 하악질을 했다⁠. 휘광은 고양이를 보지 않고 청울을 보았다⁠.

“⁠고양이는 모르는구나⁠. 네가 무엇을 했는지⁠.⁠”

“⁠휘광⁠.⁠”

“⁠이백 년 전⁠, 고개 너머 동쪽 고을에도 가뭄이 들었다⁠. 수령이 곳간을 채우고 백성을 굶겼다⁠. 재판정이 벌을 내렸다⁠. 그때 청울이 내 앞에 와서 빌었다⁠. 아이들이 죽는다고⁠. 나는 재판정 몰래 구름을 끌고 가 비를 뿌렸다⁠.⁠”

범벅의 귀가 청울을 향했다⁠. 청울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비가 와서 그해 농사가 되었다⁠. 수령은 그 농사를 다 거두어 갔다⁠. 벌이 없으니 겁날 것이 없었다⁠. 이듬해 고을의 반이 굶주림과 돌림병으로 죽었다⁠. 나는 재판정에 불려 가 그 뒤로 이백 년 동안 벌만 나르게 되었다⁠. 비 나르는 일을 빼앗긴 용이 되었다⁠.⁠”

휘광은 바위 위에서 몸을 낮췄다⁠.

“⁠청울⁠, 네 비가 사람을 더 죽였다⁠. 벌 없는 비는 도둑에게 내리는 비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이번에는 곳간부터 열겠소⁠.⁠”

“⁠노승이 잠근 곳간을⁠? 고양이가 보는 앞에서 노승을 묶어 가게 하겠느냐⁠?⁠”

청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휘광은 날아오르며 마지막 말을 떨어뜨렸다⁠.

“⁠보름 밤에 와라⁠. 아직 늦지 않았다⁠.⁠”

열기가 걷혔다⁠. 범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발을 핥으려다 그만두었다⁠.

“⁠진짜야⁠?⁠”

“⁠진짜요⁠. 동쪽 고을 어귀에서 짚더미를 태우는 냄새가 한 달 동안 났소⁠. 돌림병으로 죽은 사람의 옷과 이부자리를 태우는 냄새였소⁠. 나는 강 건너에서 연기를 보았소⁠. 우물에 물을 부어 주러 갈 수도 없었소⁠. 우물마다 사람들이 금줄을 쳐 놓았소⁠.⁠”

범벅은 구슬을 앞발로 밀어 청울의 턱 밑에 붙였다⁠.

“⁠밤이잖아⁠. 네 차례야⁠.⁠”

“⁠이 말을 듣고도 주오⁠?⁠”

“⁠약속했잖아⁠. 그리고 너 비 좋아하는 거 알아⁠. 비 맞을 때 네 비늘이 다 일어나는 거 봤어⁠. 고양이가 기분 좋을 때 털이 서는 거랑 똑같아⁠.⁠”

청울은 구슬을 혀 밑에 넣었다⁠. 밤이 깊어 네 번째 소가 구름이 되었다⁠.

*

범벅은 밤이 깊도록 노승의 가슴 위에 앉아 있었다⁠. 열쇠 끈은 노승의 목을 한 바퀴 돌아 앞섶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끈만 끊으면 되었다⁠. 범벅은 앞발로 끈을 살살 끌어당겼다⁠. 끈이 조금씩 앞섶 밖으로 나왔다⁠. 붉은 술이 보였다⁠. 범벅은 술을 입에 물었다⁠.

노승이 잠결에 돌아누웠다⁠. 범벅은 노승의 겨드랑이 밑에 깔렸다⁠.

“⁠읍⁠, 읍⁠.⁠”

노승의 팔이 범벅을 끌어안았다⁠. 노승은 고양이를 베개처럼 끌어안고 다시 코를 골았다⁠. 범벅은 새벽까지 노승의 겨드랑이 냄새를 맡으며 꼼짝하지 못했다⁠.

이튿날 밤⁠, 범벅은 방법을 바꿨다⁠. 노승이 잠들자 끈을 이빨로 갉기 시작했다⁠. 삼베 끈은 질겼다⁠. 반쯤 갉았을 때 노승이 눈을 떴다⁠.

“⁠이놈이 끈을 먹네⁠. 배가 그렇게 고프냐⁠?⁠”

노승은 일어나 끈을 풀더니 열쇠를 속곳 허리춤 안쪽에 매달았다⁠. 범벅은 속곳을 내려다보고 귀를 눕혔다⁠. 속곳 안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다⁠. 고양이에게도 염치가 있었다⁠.

“⁠어디 한번 먹어 봐라⁠.⁠”

노승은 돌아누웠다⁠. 범벅은 노승의 등에 대고 한참 하악거렸다⁠. 노승의 어깨가 들썩였다⁠. 웃는 것이었다⁠.

낮에 범벅은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우물집 할미가 우물 앞에서 두레박을 내리고 있었다⁠. 두레박 끈이 다 풀리도록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두레박에는 흙탕물이 바닥에 조금 고여 있었다⁠. 청울이 웅덩이 물을 구름으로 띄우기 시작한 뒤로 우물에 부을 물이 없었다⁠. 할미는 흙탕물을 무명 천에 걸러 사발에 받았다⁠. 사발 반도 차지 않았다⁠. 할미는 사발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아이의 기침 소리가 났다⁠.

범벅은 할미네 담 위에서 기침 소리를 오래 들었다⁠. 이무기는 구름을 모으느라 우물을 비웠다⁠. 노승은 절을 지키느라 석굴을 잠갔다⁠. 고양이는 영감을 지키느라 이무기 앞을 막았다⁠. 다들 무엇 하나를 지키느라 무엇 하나를 비우고 있었다⁠.

산사로 돌아오니 이방이 올라와 있었다⁠. 이방은 마당에서 노승에게 귓속말을 했다⁠. 범벅은 장독 뚜껑에서 귀를 세웠다⁠.

“⁠스님⁠, 보름 전날 밤 수레 다섯 대요⁠. 사또께서 포수를 불렀소⁠. 계곡 이무기 잡으라고⁠. 그 사이 절에 얼씬도 마시라고 사람들한테도 일러 두었소⁠.⁠”

“⁠포수⁠?⁠”

“⁠화승총을 가진 포수요⁠. 심지에 불을 붙여 쏘는 총이오⁠. 이무기 비늘이 아무리 두꺼워도 뚫는다더이다⁠.⁠”

노승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범벅은 장독 뚜껑에서 뛰어내려 계곡으로 달렸다⁠.

*

청울은 사흘째 밤에 석굴로 올라갔다⁠. 범벅에게 준 사흘이 다 갔다⁠. 산허리의 구름은 네 덩이가 되었다⁠. 어젯밤 네 번째 소를 띄웠고⁠, 두꺼비는 이제 세 번째 소에 살았다⁠. 청울은 대숲 오솔길을 배로 밀며 올라갔다⁠. 대나무 줄기가 양옆에서 비늘을 긁었다⁠. 쇠문이 달빛에 검게 빛났다⁠.

올라오는 동안 청울은 우물을 생각했다⁠. 구름을 모으기 시작한 뒤로 우물집 할미의 우물에 물을 한 번도 붓지 못했다⁠. 소 하나를 띄울 때마다 할미의 두레박이 한 뼘씩 더 내려갔을 것이다⁠. 비를 부르겠다고 모은 구름이 산허리에 네 덩이로 떠 있는 동안 아랫마을은 더 말라 갔다⁠. 청울은 이 무게를 비늘로 알았다⁠. 오늘 밤 쇠문을 부수지 않으면 구름은 다섯이 되고 우물은 더 내려간다⁠.

청울은 쇠문 앞에서 머리를 뒤로 당겼다⁠. 정수리의 깨진 비늘이 아직 아물지 않았다⁠. 다섯 번이면 될 것이었다⁠. 청울이 머리를 내지르려는 순간⁠, 작은 그림자가 쇠문 앞으로 뛰어들었다⁠. 범벅이었다⁠. 고양이는 쇠문에 등을 붙이고 네 발을 벌렸다⁠.

“⁠비켜라⁠, 범벅⁠.⁠”

“⁠못 비켜⁠.⁠”

“⁠사흘이 갔소⁠. 노승은 열지 않았소⁠.⁠”

“⁠포수가 와⁠. 화승총 가진 포수야⁠. 네가 이 문 부수면 소리가 산 아래까지 들려⁠. 포수가 바로 올라와⁠.⁠”

“⁠포수는 내가 피하겠소⁠.⁠”

“⁠영감은⁠? 영감은 누가 피하게 해 주는데⁠?⁠”

청울은 머리를 거두지 않았다⁠. 고양이도 비키지 않았다⁠. 쇠문에 붙은 고양이의 등이 떨렸다⁠. 털이 다 일어나 몸이 두 배로 부풀어 있었다⁠. 그래도 이무기의 눈알 하나만 했다⁠.

“⁠이백 년 전 일은 휘광 말이 맞소⁠. 내 비가 사람을 죽였소⁠. 그래서 이번에는 곳간부터 열려는 거요⁠. 비켜 주시오⁠.⁠”

“⁠네가 열면 사또가 다시 잠가⁠. 영감을 묶고⁠, 절을 태우고⁠, 남은 섬은 수레로 실어 가⁠. 그러면 휘광 말이 또 맞아⁠. 벌은 그대로고 사람은 더 죽어⁠.⁠”

“⁠그러면 누가 열어야 하오⁠?⁠”

“⁠영감이 열어야 해⁠. 고을 사람들 앞에서⁠. 영감이 열면 그건 도둑질이 아니잖아⁠. 열쇠 가진 사람이 연 거잖아⁠.⁠”

청울은 고양이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고양이의 말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청울의 말에도 틀린 데가 없었다⁠. 둘 사이에 쇠문이 있었다⁠.

“⁠하루요⁠. 열이틀 밤까지⁠. 그 밤이 지나면 수레가 오기 전에 부수겠소⁠.⁠”

*

범벅은 쇠문 앞에 남아 이무기가 오솔길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비늘이 대나무를 긁는 소리가 멀어졌다⁠. 범벅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다리가 떨렸다⁠. 이무기 앞을 막은 고양이는 집안에서도 처음일 것이다⁠. 범벅은 앞발을 핥았다⁠. 하루 만에 처음 털을 골랐다⁠.

석굴 앞에서는 산허리가 내려다보였다⁠. 구름 네 덩이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부풀어 있었다⁠. 구름이 아홉이 되면 고개를 넘을 수 있을까⁠? 넘으려면 쇠문이 먼저 열려야 했다⁠. 쇠문을 열 열쇠는 영감의 속곳 허리춤에 있었다⁠. 범벅은 하늘에서 떨어진 구슬보다 노승의 속곳 허리춤이 더 멀다고 생각했다⁠.

대숲 아래에서 바람이 올라왔다⁠. 바람에 낯선 냄새가 섞여 있었다⁠. 기름 먹인 삼 심지가 타는 냄새였다⁠. 범벅은 털을 핥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대숲 사이로 작은 불씨 하나가 흔들렸다⁠. 불씨는 오솔길 아래⁠, 이무기가 내려간 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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