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402자)

수레 자국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오달래

청울은 동트기 전 고개 위 갈림길에서 능선 길을 골랐다⁠. 산사로 오르는 길은 범벅에게 맡겼다⁠. 고양이는 산사 길을 제가 보겠다고 했다⁠. 말하는 동안 고양이는 청울의 눈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능선 길은 바위가 드러난 등성이를 따라 이어졌다⁠. 해가 오르자 바위가 금세 달아올랐다⁠. 청울은 배를 바위에 대고 미끄러질 때마다 비늘로 길의 무게를 읽었다⁠. 무거운 수레가 지나간 흙은 단단하게 다져져 배에 닿는 느낌이 달랐다⁠. 능선 길의 바퀴 자국은 얕았다⁠. 빈 수레가 오간 자국이었다⁠. 몇 번이고 오간 자국이었다⁠.

능선이 끝나는 곳에서 강이 보였다⁠. 강도 말라 있었다⁠. 물줄기가 강바닥 한가운데로 가늘게 흘렀고 양쪽 모래톱이 하얗게 드러났다⁠. 나루에 큰 배 한 척이 매여 있었다⁠. 돛을 내리고 짐칸을 비운 배였다⁠. 청울은 나루 위 솔숲에 몸을 감고 귀를 열었다⁠.

배 위에서 비단 저고리를 입은 사내가 사공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경강 상인이었다⁠. 한양 한강 나루를 오가며 곡식을 사고파는 장사꾼을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보름 밤이다⁠. 백 섬⁠. 날 밝기 전에 떠야 한다⁠.⁠”

“⁠물이 이렇게 얕은데 백 섬을 싣고 뜨겠습니까⁠?⁠”

“⁠띄워야지⁠. 감영 실사가 보름 지나 내려온다지 않나⁠. 그 전에 다 실어야 사또도 살고 나도 산다⁠. 한양 쌀값이 지금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가뭄 든 고을에서 쌀을 사면 한양에서는 금이다⁠.⁠”

사공이 웃었다⁠. 상인도 웃었다⁠. 청울은 솔숲에서 비늘을 바싹 붙였다⁠. 백 섬⁠. 고을 사람들이 곳간 바닥에서 손바닥으로 쓸던 네모난 자국이 떠올랐다⁠. 자국은 벽 끝까지 줄을 지었었다⁠. 백 섬으로는 다 채우지 못할 자국이었다⁠. 곡식은 아직 어딘가에 쌓여 있었다⁠. 보름 밤에 곡식 일부가 이 배에 실린다⁠.

상인이 배에서 내려 나루 움막으로 들어가자 청울은 솔숲에서 강바닥으로 몸을 내렸다⁠. 가는 물줄기에 배를 대자 비늘 사이로 물이 스몄다⁠. 강물은 벌이 걸린 땅을 지나는데도 차가웠다⁠. 하늘의 벌은 비를 막았지 먼 데서 흘러오는 물까지 막지는 못했다⁠. 청울은 눈을 감고 물줄기에 턱을 담갔다⁠. 갈라진 정수리 비늘이 물에 닿아 따끔거렸다⁠.

모래톱에서 작은 발소리가 났다⁠. 나루터 아이 하나가 빈 물통을 끌고 강바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는 물줄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물속에 잠긴 긴 등을 보았다⁠. 청울은 숨을 멈췄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 나루의 사내들이 몰려올 것이다⁠. 아이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물통을 내려놓고 쭈그려 앉아 청울의 등 비늘 하나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돌이 왜 이렇게 매끈해⁠?⁠”

청울은 물줄기를 따라 천천히 미끄러져 갔다⁠. 아이의 손가락 밑에서 돌이 움직였다⁠. 아이는 엉덩방아를 찧고 물통을 안은 채 오래 앉아 있었다⁠.

*

범벅은 법당 마루 밑에서 구슬을 입에 문 채 엎드려 있었다⁠. 사또가 왔기 때문이었다⁠.

사또는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마당을 둘러보았다⁠. 이방과 포졸 넷이 뒤를 따랐다⁠. 사또의 비단 도포가 마당의 먼지를 쓸었다⁠. 사또는 물독 앞에 멈췄다⁠. 물독은 이방이 엎지른 뒤로도 구슬 없이 반쯤 차 있었다⁠. 땅속에서 끌려온 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스님⁠, 이게 무엇이오⁠?⁠”

“⁠물독이오⁠.⁠”

“⁠가뭄 셋째 해에 산꼭대기 물독에 물이 반이나 있소⁠. 아랫마을에 물지게를 졌다는 소문도 들었소⁠. 물 나는 구슬이 있다지⁠?⁠”

“⁠사리라면 있었소⁠. 아궁이에서 나왔다가 사라졌소⁠.⁠”

법운의 목소리는 고르게 낮았다⁠. 사또가 부채를 접었다⁠.

“⁠뒤져라⁠.⁠”

포졸들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솥뚜껑이 바닥에 떨어지고⁠, 아궁이 재가 마당까지 날렸다⁠. 쌀독 대신 보리 한 됫박이 든 독이 쓰러졌다⁠. 포졸 하나가 물독을 들여다보다가 창 자루로 독을 쳤다⁠. 물독에 금이 갔다⁠. 두 번째에 깨졌다⁠. 물이 마당으로 쏟아져 사또의 가죽신을 적셨다⁠. 사또는 젖은 신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범벅은 마루 밑에서 물이 흘러오는 것을 보았다⁠. 물은 마당의 마른 흙에 스며들었다⁠. 범벅의 앞발 밑까지 흘러왔다⁠. 범벅은 앞발을 들어 물을 피했다⁠. 입안의 구슬이 뜨거워졌다⁠. 구슬이 물을 부르고 있었다⁠. 물줄기가 마루 밑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포졸 하나가 마루 밑을 들여다보았다⁠. 범벅은 눈을 크게 뜨고 포졸을 마주 보았다⁠. 고양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순한 얼굴을 했다⁠. 포졸은 마루 밑의 젖은 흙과 고양이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고양이밖에 없습니다요⁠.⁠”

사또는 깨진 물독 조각을 신 끝으로 밀어내다가 마루 밑의 범벅과 눈이 마주쳤다⁠.

“⁠절 고양이가 살이 쪘구려⁠. 중이 고양이한테 고기를 먹이시오⁠?⁠”

“⁠북어 대가리를 훔쳐 먹소⁠.⁠”

“⁠고을 사람들은 북어 꼬리도 못 보는데⁠, 절 고양이 팔자가 사또보다 낫구려⁠.⁠”

사또가 껄껄 웃었다⁠. 이방과 포졸들이 따라 웃었다⁠. 법운은 웃지 않았다⁠. 범벅은 사또의 웃음소리에 귀를 뒤로 눕혔다⁠. 사또는 법운을 법당 뒤로 데려갔다⁠. 범벅은 마루 밑을 기어 법당 뒤편 기둥 아래로 갔다⁠. 사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스님⁠, 이무기든 구슬이든 고을 사람들이 잡으면 되오⁠. 스님 일은 따로 있소⁠. 보름 전날 밤 수레를 보내겠소⁠. 스님은 열쇠만 챙기시오⁠. 올해도 종이 공납은 면해 드리리다⁠.⁠”

법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또는 웃으며 노승의 어깨를 두드렸다⁠. 범벅은 구슬을 물고 있어서 숨을 코로만 쉬었다⁠. 열쇠라는 말이 귓속에서 울렸다⁠. 부엌 광 열쇠라고 했다⁠. 부엌 광은 오늘 포졸들이 다 뒤졌다⁠. 보리 한 됫박밖에 없었다⁠.

범벅은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더 생각하지 않으려고 구슬을 더 세게 물었다⁠.

*

밤에 청울은 여섯 번째 소 앞에서 구슬을 받았다⁠. 범벅은 구슬을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청울은 고양이의 꼬리가 땅에 끌리는 것을 보았다⁠. 범벅의 꼬리는 늘 하늘을 향해 있었다⁠.

두꺼비가 여섯 번째 소에서 머리를 내밀었다가 청울과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비탈을 기어올랐다⁠. 다섯 번째 소로 가는 길이었다⁠. 이번에는 욕도 하지 않았다⁠. 청울은 여섯 번째 소를 구름으로 띄웠다⁠. 산허리에 모인 구름이 두 덩이가 되었다⁠.

열기가 내려왔다⁠. 휘광이 여섯 번째 소의 빈 바닥에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몸을 작게 말았다⁠. 청울과 머리를 나란히 할 만큼만⁠.

“⁠오백 년 전 여기서 같이 물을 마셨지⁠. 이 소는 그때도 여섯 번째였다⁠.⁠”

“⁠기억하오⁠.⁠”

“⁠나는 하늘 문 앞에서 오백 년을 기다렸다⁠.⁠”

“⁠기다리라 한 적 없소⁠.⁠”

휘광의 비늘이 한 번 붉게 일렁였다⁠. 화가 났을 때 휘광의 비늘은 늘 저랬다⁠. 오백 년이 지나도 같았다⁠.

“⁠보름이 지나면 다음 구슬은 천 년 뒤에 내린다⁠. 그때 너는 이 계곡에 없다⁠. 이무기는 이천 년을 못 산다⁠.⁠”

“⁠그래서 오늘 왔소⁠? 위협하러⁠?⁠”

“⁠부탁하러 왔다⁠.⁠”

청울은 휘광을 보았다⁠. 휘광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올라와라⁠. 위에서는 땅의 일이 작게 보인다⁠. 작게 보면 덜 아프다⁠.⁠”

“⁠나는 크게 보고 싶소⁠.⁠”

휘광은 대답하지 않고 날아올랐다⁠. 날아오르는 바람에 여섯 번째 소 바닥의 마른 진흙이 갈라졌다⁠. 청울은 갈라진 틈에서 버들치 한 마리를 혀로 건져 다섯 번째 소로 옮겼다⁠.

*

이튿날 아침⁠, 범벅은 고개에 내려갔다가 장승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왼쪽 장승의 몸통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휘광이 그슬린 자국 바로 아래였다⁠. 범벅은 사람들 다리 사이로 머리를 넣었다⁠. 범벅은 글을 읽지 못했다⁠. 사람들이 소리 내어 읽었다⁠.

「⁠계곡의 이무기를 잡아 오는 자에게 쌀 다섯 섬을 내린다⁠. 고을 사또⁠.⁠」

“⁠쌀 다섯 섬⁠.⁠”

누군가 침을 삼켰다⁠. 아이 하나가 어미 치마를 잡아당기며 쌀이 뭐냐고 물었다⁠. 세 해 동안 쌀을 못 본 아이였다⁠. 어미는 대답하지 않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 고개에서 비를 맞던 농부가 팔짱을 끼고 방을 노려보았다⁠.

“⁠곳간이 비었다면서 쌀 다섯 섬은 어디서 나오는데⁠?⁠”

옆의 사내가 농부의 옆구리를 쳤다⁠.

“⁠주겠다면 받으면 되지⁠. 이무기 잡아서 쌀 받고⁠, 이무기 없어지면 물도 돌아오고⁠.⁠”

“⁠이무기가 물을 먹었다고 누가 그래⁠?⁠”

“⁠사또가⁠.⁠”

범벅은 사람들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 장승을 타고 올라갔다⁠. 방 귀퉁이를 앞발로 긁었다⁠. 종이가 반쯤 찢어졌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쫓으며 웃었다⁠.

“⁠저 고양이도 쌀 다섯 섬이 탐나는가 보다⁠.⁠”

“⁠고양이가 이무기를 잡으면 쌀은 고양이 주나⁠?⁠”

범벅은 찢어진 종잇조각을 입에 물고 장승에서 뛰어내려 계곡으로 달아났다⁠. 달리는 동안 꼬리가 다시 하늘로 솟아 있었다⁠. 고양이의 꼬리는 기쁠 때도 솟고 화가 날 때도 솟는다⁠. 지금은 어느 것인지 범벅도 알 수 없었다⁠.

*

청울은 다섯 번째 소 옆 바위 그늘에서 범벅의 이야기를 들었다⁠. 쌀 다섯 섬⁠. 청울의 목에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천 년을 살고 쌀 다섯 섬이 되었다⁠.

“⁠웃을 일이야⁠?⁠”

“⁠나루에 배가 있소⁠. 경강 상인의 배요⁠. 보름 밤에 백 섬을 싣고 뜬다 했소⁠.⁠”

범벅의 귀가 앞으로 쏠렸다⁠.

“⁠백 섬이 어디 있는데⁠?⁠”

“⁠그걸 묻고 싶소⁠. 능선 길에는 빈 수레 자국뿐이었소⁠. 무거운 수레는 산사 길로 갔소⁠. 산사 길의 자국은 어디서 끊겼소⁠?⁠”

범벅은 앞발을 핥기 시작했다⁠.

“⁠돌계단 밑에서⁠. 돌계단엔 자국이 안 남잖아⁠.⁠”

“⁠돌계단을 수레가 오르오⁠?⁠”

“⁠몰라⁠. 끊겼다니까⁠.⁠”

청울은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범벅은 앞발을 핥고⁠, 핥고⁠, 또 핥았다⁠. 털이 젖어 살갗이 보일 지경이었다⁠.

“⁠범벅⁠. 노승이 허리에 찬 열쇠는 무엇을 여는 열쇠요⁠?⁠”

범벅이 고개를 들었다⁠. 털이 한꺼번에 부풀었다⁠. 하악 소리가 났다⁠. 청울을 향한 하악질은 처음이었다⁠.

“⁠영감 건드리지 마⁠.⁠”

“⁠아직 건드리지 않았소⁠.⁠”

“⁠건드리지 마⁠. 영감은 사리가 나왔다고 아궁이에 절한 사람이야⁠. 물독 물을 지고 아랫마을에 내려간 사람이야⁠. 바가지마다 똑같이 나눠 담았어⁠. 내가 봤어⁠.⁠”

“⁠나도 보았소⁠.⁠”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산허리의 구름 두 덩이가 바람 없이 제자리에 떠 있었다⁠. 범벅이 먼저 몸을 돌렸다⁠.

“⁠밤에 구슬 가지러 와⁠. 낮에는 내가 갖고 있을게⁠.⁠”

*

범벅은 밤이 깊도록 부엌에서 잠들지 못했다⁠. 깨진 물독 조각이 아궁이 옆에 모여 있었다⁠. 범벅은 조각 하나에 턱을 올리고 노승의 숨소리를 들었다⁠. 노승은 늘 코를 골았다⁠. 오늘은 코를 골지 않았다⁠.

달이 기울 무렵 노승이 일어났다⁠. 범벅은 눈을 감은 척했다⁠. 노승은 짚신을 신고 등잔에 불을 붙였다⁠. 기름이 아까워 섣달 그믐에도 켜지 않던 등잔이었다⁠. 노승은 고양이를 한 번 내려다보고 부엌 뒷문으로 나갔다⁠.

범벅은 노승이 대숲 사이 오솔길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오솔길 끝에는 석굴이 있었다⁠. 범벅이 새끼였을 때 노승이 말했다⁠. 저기 들어가면 귀신이 고양이 수염을 하나씩 뽑는다⁠. 범벅은 열 해 동안 석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한 해 전부터 석굴에서 바람이 내려올 때마다 겨 냄새와 쥐 냄새가 섞여 왔지만⁠, 범벅은 이 냄새를 귀신 냄새라고 생각하기로 했었다⁠.

등잔 불빛이 대숲 사이로 흔들리며 올라갔다⁠. 불빛은 석굴 앞에서 멈췄다⁠. 쇠문에 불빛이 비쳤다⁠. 쇠가 쇠에 닿는 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내려왔다⁠. 짤랑⁠, 붉은 술 달린 열쇠가 흔들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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