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16자)

빈 곳간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오달래

범벅은 곳간 지붕 끝에 엎드려 늙은 쥐를 내려다보았다⁠. 꼬리가 저 혼자 좌우로 쳤다⁠. 범벅은 꼬리를 깔고 앉았다⁠. 쥐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는 마음이 들킨 고양이였다⁠.

“⁠내가 누군지 알아⁠?⁠”

“⁠알지⁠. 털 색이 뒤범벅인 산사 고양이⁠. 쥐들은 고양이 소문을 사람보다 먼저 듣는다⁠.⁠”

늙은 쥐는 환기 구멍 턱에 앞발을 걸치고 수염을 닦았다⁠. 배가 둥글었고 털에 윤기가 흘렀다⁠. 고을 아이들은 칡뿌리를 씹는데 관아 쥐는 살이 올라 있었다⁠.

“⁠우리 조상이 너희 조상한테 경주 날짜를 하루 늦게 알려 줬다지⁠. 그래서 우리가 첫째를 하고 너희는 빠졌고⁠. 그건 천 년 전 쥐 일이다⁠. 나는 지난달 일만 기억해⁠.⁠”

“⁠지난달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믐 밤에 수레 스무 대가 뒷문으로 들어왔다⁠. 날 밝기 전에 다 실어 나갔지⁠. 곳간에 남은 건 쭉정이 몇 섬하고 우리뿐이다⁠.⁠”

범벅은 쥐의 둥근 배를 보았다⁠.

“⁠거짓말⁠. 쭉정이 먹고 그렇게 살쪄⁠?⁠”

“⁠쭉정이도 세 해를 먹으면 살이 붙는다⁠. 못 믿겠으면 들어와 봐라⁠. 대신 흥정을 하자⁠.⁠”

쥐가 앞니를 드러냈다⁠. 웃는 얼굴이었다⁠.

“⁠문이 부서지면 사람들이 들어와 우리 집을 엎겠지⁠. 쥐 떼는 갈 데가 없어⁠. 그러니 약속해라⁠. 이 곳간 안에서는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는다⁠.⁠”

범벅의 엉덩이 밑에서 꼬리가 꿈틀거렸다⁠. 범벅은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이 곳간 안에서만이야⁠.⁠”

“⁠이 곳간 안에서만⁠. 그리고 하나 더⁠. 수레가 어디로 갔는지는 다음 흥정이다⁠.⁠”

쥐는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범벅은 지붕 위에서 한참 동안 꼬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쥐와 흥정을 한 고양이는 집안에서 처음일 것이다⁠. 어미가 알면 무슨 얼굴을 할지 범벅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새벽에 청울은 대숲에 몸을 감고 부엌 뒷문을 지켜보았다⁠. 범벅이 담을 넘어 돌아왔다⁠. 털에 겨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다⁠. 법운이 부엌에서 나오다가 고양이에게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갔다⁠.

“⁠너 이놈⁠, 쥐 냄새가 진동을 한다⁠. 쥐굴에서 자고 왔냐⁠? 그렇게 쥐 냄새를 묻히고 와서 한 마리도 안 물어 왔어⁠?⁠”

“⁠흥정하고 왔어⁠. 쥐하고⁠.⁠”

“⁠야옹 말고 쥐를 가져와라⁠, 쥐를⁠.⁠”

청울은 대숲에서 숨을 죽였다⁠. 사람의 말은 또렷하게 들렸고⁠, 고양이의 대답도 또렷하게 들렸다⁠. 노승의 귀에만 고양이 말이 닿지 않았다⁠. 노승은 혀를 차며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솔가지가 귀해 짚을 비벼 넣었다⁠. 연기가 뒷문으로 흘러나와 대숲에 찼다⁠. 청울은 연기에 눈을 감았다⁠.

“⁠아랫마을에 물 지고 갔더니 다들 그 얘기다⁠. 이방 놈이 절에 이무기가 산다고 고을에 떠들었단다⁠. 사또 귀에 들어가면 절이 남아나겠냐⁠? 안 그래도 사또한테 빚진 게 많은 절인데⁠.⁠”

노승은 말끝에 허리춤의 열쇠를 손으로 감쌌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쥐었다⁠. 범벅의 귀가 한 번 뒤로 젖혀졌다⁠. 빚이라는 말에서였다⁠. 범벅은 노승의 무릎으로 올라가 몸을 말았다⁠. 노승은 쫓아내지 않았다⁠. 고양이의 꼬리가 노승의 손목을 감았다⁠.

청울은 열쇠를 쥔 노승의 손을 오래 보았다⁠. 천 년 동안 사람의 손을 많이 보았다⁠. 두레박을 내리는 손⁠, 돌을 던지는 손⁠, 우물에 대고 모으는 손⁠. 열쇠를 저렇게 감싸 쥐는 손은 무엇을 숨기는 손이었다⁠. 청울은 범벅에게 말하지 않았다⁠. 고양이가 무릎 위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해가 지자 청울은 고개를 넘어 읍내로 들어갔다⁠. 고을 땅에 몸이 닿는 순간 비늘 끝이 바짝 말랐다⁠. 벌이 걸린 땅은 밤에도 열기를 품었다⁠. 청울은 마른 개천 바닥으로 몸을 내렸다⁠. 개천에는 물 대신 깨진 사기 조각과 짚신 한 짝이 굴러다녔다⁠. 사기 조각이 배 비늘을 긁을 때마다 청울은 숨을 멈췄다⁠.

돌다리 밑을 지날 때 개 한 마리가 다리 위에서 짖기 시작했다⁠. 다른 개들이 따라 짖었다⁠. 청울은 다리 밑 그늘에 몸을 붙이고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 사는 데로 들어올 때마다 청울은 천 년 전 처음 계곡에 들어오던 밤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 뱀이다⁠, 큰 뱀이다⁠, 하고 불을 들고 쫓아왔다⁠. 작은 이무기였던 청울은 아홉 번째 소 바닥까지 숨어들어 사흘을 나오지 않았다⁠.

개들이 잠잠해지자 청울은 개천을 따라 관아 뒷담에 닿았다⁠. 담 너머로 곳간의 새 기와가 보였다⁠. 곳간 문에 쇠 자물쇠가 매달려 있었다⁠. 사람 머리통만 한 자물쇠였다⁠. 청울은 담 그늘에 몸을 감고 범벅의 소리를 기다렸다⁠.

*

범벅은 환기 구멍에 머리를 넣었다⁠. 머리는 들어갔다⁠. 어깨도 들어갔다⁠. 배에서 멈췄다⁠. 범벅은 앞발로 구멍 안쪽 벽을 긁었다⁠. 뒷발이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아⁠, 아⁠. 끼었다⁠.⁠”

구멍 안에서 쥐들이 웃는 소리가 났다⁠. 늙은 쥐의 쉰 목소리가 섞였다⁠.

“⁠북어 대가리를 너무 먹었구나⁠.⁠”

“⁠밀어 줘⁠.⁠”

“⁠쥐가 고양이 엉덩이를 미는 일은 천 년 만에 처음이다⁠.⁠”

쥐 여럿이 구멍 밖으로 돌아 나와 범벅의 엉덩이를 머리로 밀었다⁠. 범벅은 구멍 안으로 쏟아지듯 굴러떨어졌다⁠. 곳간 안은 캄캄했고 마른 겨 냄새와 쥐 오줌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이 어둠에 익자 범벅은 쥐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넓은 곳간 바닥에 가마니 몇 개가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나머지는 비어 있었다⁠. 바닥 판자에 곡식 섬을 쌓았던 자국이 네모나게 남아 있었다⁠. 네모가 벽 끝까지 줄을 지었다⁠.

쥐 수백 마리가 들보와 가마니 위에서 범벅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등불처럼 반짝였다⁠. 범벅은 한 마리도 잡지 않았다⁠. 대신 문 앞으로 가서 고개를 들고 길게 울었다⁠.

“⁠청울⁠! 지금⁠!⁠”

밖에서 쿵⁠, 소리가 났다⁠. 곳간 문짝이 안으로 휘었다⁠. 두 번째 쿵에 자물쇠 고리가 비틀렸다⁠. 세 번째에 빗장이 부러지며 문짝 하나가 안으로 쓰러졌다⁠. 먼지가 일었다⁠. 문틀에 금빛 눈 두 개가 잠깐 비쳤다가 사라졌다⁠. 관아 앞마당에서 야경 돌던 포졸이 소리를 질렀다⁠.

범벅은 쓰러진 문짝을 밟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관아 담을 넘어 골목으로 내달렸다⁠. 집집마다 문 앞에서 멈춰 목청껏 울었다⁠.

“⁠일어나⁠! 곳간 열렸다⁠! 곡식 가지러 와⁠!⁠”

사람들에게는 고양이가 밤에 미친 듯이 우는 소리로만 들렸다⁠. 첫 집에서는 바가지가 날아왔다⁠. 두 번째 집에서는 물 대신 쓰는 오줌 항아리가 날아왔다⁠. 범벅은 몸을 틀어 피하고 세 번째 집 앞에서 더 크게 울었다⁠. 그러는 사이 포졸의 고함이 골목에 퍼졌다⁠. 곳간 문이 부서졌다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하나둘 문을 열었다⁠. 손에 자루를 든 사람이 나왔고⁠, 횃불을 든 사람이 나왔다⁠.

*

청울은 다리 밑 그늘로 물러나 읍내를 올려다보았다⁠. 횃불이 골목마다 켜져 관아로 흘러갔다⁠. 불빛이 개천 둑을 지나갈 때마다 청울은 몸을 더 낮게 붙였다⁠. 머리가 아팠다⁠. 곳간 문을 세 번 들이받은 정수리가 욱신거렸다⁠. 정수리 비늘 몇 개가 깨져 피가 배어 나왔다⁠. 피가 마른 개천 모래에 떨어져 금방 검게 굳었다⁠.

관아에서 함성이 일었다⁠. 곧 함성이 끊겼다⁠. 청울은 귀를 기울였다⁠. 사람 말은 물소리처럼 또렷하게 들려오지 않았지만⁠, 함성이 끊긴 자리에 무엇이 남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웅성거림이었다⁠. 웅성거림이 점점 낮아졌다⁠.

*

범벅은 곳간 들보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횃불을 든 사람들이 곳간 안을 가득 채웠다⁠. 자루를 든 손들이 빈 바닥을 더듬었다⁠. 누군가 쭉정이 가마니를 찢었다⁠. 겨가 쏟아졌다⁠. 한 아낙이 바닥의 네모난 자국 앞에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판자를 쓸었다⁠. 손바닥에 묻은 것은 먼지였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곳간 문 앞이 갈라지며 사또가 들어왔다⁠. 잠옷 위에 도포를 걸쳤고 갓이 한쪽으로 비뚤어져 있었다⁠. 이방과 포졸 넷이 뒤를 따랐다⁠. 사또는 곳간을 둘러보더니 두 팔을 벌리고 소리쳤다⁠.

“⁠보아라⁠! 다들 보아라⁠! 곳간이 비었다⁠! 하늘이 세 해를 가물게 했는데 무엇을 거두어 무엇을 쌓겠느냐⁠? 내가 무엇을 훔쳤느냐⁠? 훔친 것이 있으면 여기서 찾아내 보아라⁠!⁠”

맨 앞의 늙은이 하나가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사또⁠, 환곡은요⁠? 봄에 꾸어 준다던 환곡은 어디 갔습니까⁠?⁠”

“⁠감영에 다 올려 보냈네⁠. 나라가 굶는데 고을만 먹겠는가⁠?⁠”

“⁠구휼미가 내려왔다는 소문은요⁠?⁠”

“⁠헛소문일세⁠. 나도 기다리는 중이야⁠.⁠”

뒤에서 사내 하나가 앞으로 밀고 나왔다⁠. 어제 고개에서 바가지를 들고 비를 맞던 농부였다⁠. 농부의 바지 끝이 아직 흙물에 얼룩져 있었다⁠.

“⁠사또⁠, 어제 고개에 비가 왔습니다⁠. 장승 이쪽에만 안 왔습니다⁠. 제가 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늘이 우리 고을만 미워하는 겁니다⁠. 왜 우리 고을만 미워합니까⁠?⁠”

사또는 농부를 오래 보았다⁠. 웃는 얼굴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무기 탓 아니겠나⁠? 고개 너머 계곡에 이무기가 산다지⁠. 비가 그놈 사는 데까지만 오지 않던가⁠?⁠”

농부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사또의 말에도 맞는 데가 있었다⁠. 비는 계곡까지만 왔다⁠.

사또는 늙은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쓰러진 문짝을 가리켰다⁠.

“⁠그보다 저것을 보게⁠. 쇠 자물쇠가 사람 손으로 휘겠는가⁠? 빗장이 부러졌네⁠. 이방이 산사에서 보았다지⁠. 머리가 부엌 문만 한 이무기를⁠. 고을 물이 왜 말랐겠나⁠? 우물이 왜 바닥났겠나⁠? 저놈이 다 마셨네⁠. 이제는 곳간까지 넘보는 걸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낙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내는 주먹을 쥐었다⁠. 횃불 하나가 문짝을 향해 기울었다⁠.

“⁠이무기를 잡자⁠.⁠”

누군가 말했다⁠. 다른 누군가가 따라 말했다⁠. 범벅은 들보 위에서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사또가 범벅이 있는 들보를 올려다보았다⁠. 범벅은 쥐들 사이에 몸을 묻었다⁠. 쥐들이 범벅을 가려 주었다⁠.

*

청울은 다리 밑에서 같은 말을 여러 목소리로 들었다⁠. 이무기를 잡자⁠. 횃불 몇 개가 개천 둑으로 내려왔다⁠. 청울은 머리를 모래에 묻었다⁠. 불빛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사람들은 다리 밑을 들여다보지 않고 고개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갔다⁠.

머리 위 공기가 뜨거워졌다⁠. 읍내 하늘에 붉은 구름 한 점이 떠 있었다⁠. 휘광이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았느냐⁠? 사람은 제 사또보다 너를 먼저 미워한다⁠.⁠”

“⁠미워하라 하시오⁠.⁠”

“⁠네가 문을 부쉈고⁠, 사또가 이겼다⁠. 사또는 오늘 밤 일로 고을 사람들을 손에 쥐었다⁠.⁠”

휘광의 구름이 흩어졌다⁠. 청울은 정수리의 깨진 비늘을 개천 모래에 문질렀다⁠. 따끔했다⁠. 모래 위로 작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범벅이었다⁠. 털 곳곳에 겨가 붙어 있었고⁠, 등에 늙은 쥐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너⁠, 쥐를 업고 왔소⁠?⁠”

“⁠업힌 거야⁠. 내가 업은 거 아니야⁠.⁠”

늙은 쥐가 범벅의 등에서 뛰어내려 개천 둑으로 올라갔다⁠. 쥐는 관아 뒷문 밖 흙길을 앞발로 가리켰다⁠. 달빛 아래 흙길에 바퀴 자국 두 줄이 깊게 패어 있었다⁠. 짐을 무겁게 실은 수레가 아니면 낼 수 없는 깊이였다⁠. 두 줄은 고을을 빠져나가 고개를 넘었다⁠. 고개 위에서 산길은 둘로 갈렸다⁠. 하나는 능선을 타고 강나루로 내려가는 길이었고⁠, 하나는 아홉 소 계곡을 거슬러 산사로 오르는 길이었다⁠.

“⁠수레가 어디로 갔는지는 다음 흥정이라고 했지⁠?⁠”

늙은 쥐가 말했다⁠. 범벅은 대답하지 않았다⁠. 범벅의 눈이 산사로 오르는 길에 머물러 있었다⁠. 청울의 정수리에서 마른 피 한 조각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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