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20자)

고개의 비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오달래

청울은 동트기 전 물독 앞에서 고양이와 마주 앉았다⁠. 이방이 엎지른 물이 마당에 얇게 남아 있었고⁠, 비늘에 닿는 흙이 세 해 만에 처음으로 차가웠다⁠.

“⁠이방이 봤소⁠. 구슬은 이제 여기 못 두오⁠.⁠”

“⁠그럼 내가 갖고 있을게⁠.⁠”

“⁠고양이 입에서 하루를 못 버티오⁠.⁠”

“⁠버텨⁠. 나 북어 대가리 물고 영감한테서 반나절 도망 다닌 적도 있어⁠.⁠”

범벅은 물독에 앞발을 넣었다가 빼서 세 번 털고⁠, 다시 넣어 구슬을 굴려 올렸다⁠. 물독 가장자리까지 굴려 놓고 입으로 물었다⁠. 수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범벅은 구슬을 문 채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방울이 청울의 콧잔등에 튀었다⁠.

“⁠고개에 가서 보겠소⁠. 벌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범벅은 구슬을 문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청울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발톱이 비늘 틈에 박혔다⁠. 청울이 움찔하자 고양이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앞발로 정수리를 꾹꾹 눌렀다⁠. 한 번⁠, 또 한 번⁠. 고양이가 기분 좋을 때 하는 짓이었다⁠. 청울의 정수리가 간지러웠다⁠.

“⁠발 좀 가만두시오⁠.⁠”

“⁠흡⁠, 흐읍⁠.⁠”

구슬 때문에 말이 안 나왔다⁠. 청울은 고양이를 머리에 얹은 채 계곡으로 내려갔다⁠. 여덟 번째 소에 이르자 늙은 두꺼비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두꺼비는 이무기 머리 위의 고양이를 보고 눈을 끔벅였다⁠.

“⁠또 무엇을 하시려오⁠?⁠”

“⁠이 소의 물을 띄우겠소⁠. 일곱 번째 소로 옮겨 드리리다⁠.⁠”

“⁠어제 이사 왔소⁠!⁠”

청울은 두꺼비와 버들치와 가재를 다시 입에 담아 한 층 위로 옮겼다⁠. 두꺼비는 입안에서 내내 욕을 했다⁠. 청울은 범벅이 내려놓은 구슬을 혀 밑에 넣고 여덟 번째 소에 숨을 내쉬었다⁠. 물이 안개로 일어나 계곡 위에 두 번째 구름으로 모였다⁠.

*

범벅은 장승 둘 사이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는 계곡이 끝나고 고을이 시작되는 자리였다⁠. 사람 키 두 배는 되는 나무 장승 둘이 길 양편에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장승 뒤로 비탈을 내려가면 갈라진 논이 끝없이 이어졌고⁠, 논 끝에 읍내의 기와지붕이 모여 있었다⁠.

구름이 계곡에서 밀려 내려와 고개 위에 멈췄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범벅의 등에 하나⁠, 귀에 하나⁠, 콧잔등에 하나⁠.

“⁠어⁠, 어⁠, 비다⁠. 비 온다⁠.⁠”

범벅은 꼬리를 바짝 세웠다가⁠, 털이 젖는 것을 깨닫고 장승 밑동으로 뛰어갔다⁠. 장승 그늘로도 비가 들이쳤다⁠. 범벅은 장승을 넘어 고을 땅으로 한 발 내디뎠다⁠. 비가 그쳤다⁠. 머리 위에서는 빗소리가 들리는데 털에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범벅은 뒤를 돌아보았다⁠.

비는 장승 둘을 잇는 선에서 멈춰 있었다⁠. 빗줄기가 선에 닿는 자리에서 하얀 김으로 바뀌어 흩어졌다⁠. 고개 이쪽에는 흙이 검게 젖고 물이 고랑을 따라 흘렀다⁠. 저쪽은 먼지가 일었다⁠. 범벅은 앞발 하나를 들어 선 위에 올려 보았다⁠. 발등은 젖고 발가락은 말랐다⁠.

고개 아래 비탈에서 농부 하나가 바가지를 들고 뛰어 올라왔다⁠. 소리를 듣고 온 것이었다⁠. 농부는 장승 앞에서 바가지를 내밀었다⁠. 바가지 반쪽에만 빗물이 떨어졌다⁠. 농부는 장승을 넘어 비 속으로 들어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웃었다⁠. 웃다가 울었다⁠. 바가지에 물을 받아 들고 다시 장승을 넘어 고을로 돌아가는 동안⁠, 바가지 위로는 비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농부는 장승 아래 웅크린 범벅을 보고 젖은 얼굴로 웃었다⁠.

“⁠고양이야⁠, 너도 비 맞으러 왔냐⁠? 너는 좋겠다⁠. 너는 저쪽 산 짐승이라⁠.⁠”

농부는 바가지를 가슴에 안고 비탈을 내려갔다⁠. 걸음마다 물이 넘칠까 봐 발끝으로 걸었다⁠. 범벅은 농부의 등이 논두렁 너머로 작아질 때까지 보았다⁠.

범벅은 젖은 털을 부르르 털었다⁠. 비가 이렇게 귀한데 왜 젖으면 기분이 나쁜지 범벅은 알 수 없었다⁠.

*

청울은 구름을 장승 너머로 밀었다⁠. 몸 전체로 밀었다⁠. 구름 끝이 선에 닿자 청울의 머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살갗은 알았다⁠. 달군 솥뚜껑에 이마를 댄 것처럼 뜨거운 열이 정수리에서 꼬리까지 내려갔다⁠. 구름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젖은 천을 양쪽에서 잡아당겨 찢는 소리였다⁠. 청울은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밀었다⁠. 찢어진 구름 끝이 김이 되어 날아갔다⁠.

곧 고개의 공기가 바싹 말랐다⁠. 남은 빗방울이 땅에 닿기 전에 김으로 날아갔다⁠. 휘광이 장승 위로 내려와 꼬리 끝을 왼쪽 장승의 머리에 감았다⁠. 장승의 갓 모양 머리에서 연기가 올랐다⁠.

“⁠나무 장승을 태우지 마시오⁠. 고을 사람들이 세운 것이오⁠.⁠”

“⁠고을 사람들이 세운 경계에 하늘이 벌을 그었을 뿐이다⁠.⁠”

휘광은 장승 너머 읍내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 아래 관아 곳간 기와를 보아라⁠. 세 해 전에 새로 얹었다⁠. 고을이 굶는 동안 곳간 지붕은 새것이 되었다⁠. 사또는 환곡을 꾸어 주지 않고 거두기만 했고⁠, 조정의 구휼미가 고을에 들어온 날 곳간 문을 잠갔다⁠. 사또 혼자 한 일이 아니다⁠. 아전이 숫자를 맞췄고 장사꾼이 사 갔고⁠, 고을 사람들은 곳간 앞을 지나며 고개를 숙였다⁠.⁠”

“⁠굶는 사람이 무엇을 하겠소⁠?⁠”

“⁠문을 두드릴 수는 있었다⁠.⁠”

청울은 대답하지 못했다⁠. 휘광의 말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휘광은 구름 아래 젖은 땅과 마른 땅의 선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의 벌은 쌓인 곡식을 따라 내렸다⁠. 곡식이 제 주인에게 돌아가는 날⁠, 재판정이 판결을 다시 본다⁠. 그 전에는 네가 구름을 백 개 띄워도 저 선을 못 넘는다⁠.⁠”

“⁠곳간이 열리면 비가 드오⁠?⁠”

“⁠재판정이 다시 본다고 했다⁠. 비가 든다고는 하지 않았다⁠.⁠”

범벅이 장승 밑에서 털을 부풀린 채 소리쳤다⁠.

“⁠그 곳간⁠, 내가 열면⁠?⁠”

휘광은 고양이를 처음으로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콧김이 내려와 범벅의 수염 끝을 그슬렸다⁠. 범벅은 하악질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고양이가 곳간을⁠? 너는 쥐나 잡아라⁠. 청울⁠, 너는 비만 보면 눈이 먼다⁠. 예전에도 그랬다⁠.⁠”

청울의 비늘이 한꺼번에 오그라들었다⁠. 휘광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 장승 머리에 꼬리가 감겼던 자리가 검게 남았다⁠.

*

범벅은 장승 밑에 앉아 젖은 앞발을 핥았다⁠. 핥고⁠, 핥고⁠, 또 핥았다⁠. 고양이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 털부터 고른다⁠. 청울은 구름을 계곡으로 물려 산허리에 붙잡아 두고 범벅 앞에 머리를 내렸다⁠.

“⁠예전에 무엇을 했는데⁠?⁠”

“⁠지금 할 이야기가 아니오⁠.⁠”

“⁠그래⁠, 됐어⁠. 대신 약속하자⁠. 곳간을 같이 연다⁠. 보름까지⁠.⁠”

“⁠같이⁠?⁠”

“⁠너는 힘이 세고 나는 작아⁠. 곳간은 쥐구멍이 있고 문이 있잖아⁠. 쥐구멍은 내가 들어가고 문은 네가 부수고⁠.⁠”

청울은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고양이는 앞발 핥기를 멈추지 않았다⁠. 핥는 틈틈이 말을 이었다⁠.

“⁠구슬은 낮에는 내가 갖고 밤에는 네가 써⁠. 너 밤마다 웅덩이 하나씩 구름으로 띄우는 거 알아⁠. 곳간 열리면 고을 전체에 비 뿌릴 만큼 모아 둬야 하잖아⁠. 그리고 보름 밤에 구슬을 누가 물지는⁠, 보름 밤에 정해⁠.⁠”

“⁠보름 밤에 내가 구슬을 비에 쓰면 너는 하늘 문을 못 지나오⁠.⁠”

“⁠알아⁠. 내가 물면 너는 비를 못 내리고⁠. 그러니까 보름 밤에 정하자고⁠.⁠”

범벅은 앞발을 들어 청울의 콧잔등에 올려놓았다⁠. 발바닥이 축축하고 따뜻했다⁠. 청울은 꼬리 끝을 둥글게 말아 고양이의 꼬리 끝에 댔다⁠. 범벅은 손을 떼자마자 청울의 콧잔등을 한 번 핥았다⁠.

“⁠퉤⁠, 짜다⁠.⁠”

“⁠핥지 마시오⁠.⁠”

“⁠하나 더⁠. 앞으로 고양이라고 부르지 마⁠. 범벅이라고 불러⁠. 영감이 지어 준 이름이야⁠.⁠”

“⁠범벅⁠.⁠”

“⁠그래⁠. 너는⁠?⁠”

“⁠청울이오⁠.⁠”

“⁠청울⁠. 이름은 멀쩡하네⁠. 하는 짓은 두꺼비 이삿짐꾼인데⁠.⁠”

“⁠버릇이야⁠. 근데 하나만 물어보자⁠. 너는 왜 용이 싫어⁠?⁠”

“⁠높은 데서는 우물이 안 보이오⁠.⁠”

범벅의 귀가 쫑긋 일어났다가 내려갔다⁠. 범벅은 높은 데를 좋아했다⁠. 장독 뚜껑⁠, 용마루⁠, 법운의 무릎⁠. 높은 데서 보면 산이 다 보였다⁠. 어미가 떠난 날에도 범벅은 용마루에 올라가 어미가 사라진 산등성이를 해 질 때까지 보았다⁠.

“⁠나는 높은 데서 보고 싶은 게 있거든⁠.⁠”

청울은 묻지 않았다⁠.

*

밤이 되자 청울은 일곱 번째 소 앞에서 구슬을 혀 밑에 넣었다⁠. 범벅은 구슬을 내주고 혼자 고개로 내려갔다⁠. 고양이의 작은 그림자가 장승 사이를 지나 고을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거기서부터는 청울이 따라갈 수 없었다⁠. 이무기가 읍내 골목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뱀이다⁠」를 외칠 것이고⁠, 다음에는 돌과 불을 들 것이다⁠.

두꺼비가 일곱 번째 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설마 여기도 띄우시오⁠?⁠”

“⁠여섯 번째 소로 모시겠소⁠.⁠”

“⁠내 다리로 가겠소⁠! 입에는 다시 안 들어가오⁠!⁠”

두꺼비는 뒤뚱뒤뚱 비탈을 기어올랐다⁠. 버들치와 가재는 청울이 입으로 옮겼다⁠. 일곱 번째 소의 물이 안개로 떠올라 산허리의 구름에 붙었다⁠. 낮에 띄운 구름은 고개에서 비로 쏟아졌으니⁠, 산허리에 붙잡아 둔 구름은 이제 한 덩이였다⁠. 청울은 비어 버린 웅덩이 바닥에 배를 깔았다⁠. 마른 진흙이 비늘 틈을 긁었다⁠. 청울은 이 구름이 아홉이 될 때까지 계곡이 하나씩 말라 간다는 것을 알았다⁠.

*

범벅은 관아 담 위를 걸었다⁠. 읍내 골목의 돌은 밤이 되어도 낮의 열을 뱉어 냈고⁠, 담 기와가 발바닥에 따끈했다⁠. 담 아래 그늘에 아이 하나가 쭈그려 앉아 칡뿌리를 씹고 있었다⁠. 아이는 씹다가 뱉고⁠, 다시 주워 씹었다⁠.

관아 안채 창호지에 등불이 비쳤다⁠. 범벅은 창 아래 처마로 내려가 창호지에 난 구멍에 눈을 댔다⁠. 흰쌀밥 냄새가 구멍으로 새어 나왔다⁠. 세 해 동안 산사 부엌에서 한 번도 맡지 못한 냄새였다⁠.

사또는 비단 도포 소매를 걷어붙이고 고깃국에 밥을 말고 있었다⁠. 살찐 손가락에 옥가락지가 끼어 있었고⁠, 소매 끝에 밥알이 붙어 있었다⁠. 이방이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정말 보았느냐⁠? 이무기를⁠?⁠”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요⁠. 머리가 부엌 문만 했습니다⁠. 물독에는 붉은 구슬이 있고⁠, 구슬 있는 데서 물이 납니다⁠.⁠”

사또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부채를 폈다⁠.

“⁠감영 실사가 보름 지나 내려온다⁠. 그 전에 일을 끝내야 하네⁠. 물 나는 구슬이 진짜면 관찰사께 바쳐도 되고⁠, 경강 상인에게 팔아도 되지⁠. 이 자리 사느라 진 빚이 얼마인 줄 아는가⁠? 이무기는 포수를 불러 잡게⁠. 고을에는 이무기가 우리 물을 다 먹어 가뭄이 들었다고 소문을 내고⁠.⁠”

“⁠예⁠, 예⁠. 그런데 사또⁠, 곳간 일은 어찌하오리까⁠? 고을 놈들이 곳간 앞에서 수군거립니다⁠.⁠”

“⁠수군거리게 두게⁠. 곳간은 비었다고 하면 되네⁠. 비었지 않은가⁠?⁠”

사또가 웃었다⁠. 이방도 따라 웃었다⁠. 사또는 고깃국 그릇을 기울여 국물까지 마시고⁠, 남은 밥을 이방 앞으로 밀어 주었다⁠. 이방은 두 손으로 그릇을 받았다⁠.

범벅의 꼬리가 저 혼자 부풀었다⁠. 범벅은 처마에서 곳간 지붕으로 건너뛰었다⁠. 새 기와가 달빛에 번들거렸다⁠. 지붕 아래에서 냄새가 올라왔다⁠. 쥐 냄새였다⁠.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냄새였다⁠. 범벅은 지붕 끝에 엎드려 곳간 벽의 환기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구멍에서 늙은 쥐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수염이 하얗게 셌고 배가 둥글었다⁠. 쥐는 고양이를 보고도 달아나지 않았다⁠. 앞니를 드러내고 쉰 목소리로 웃었다⁠.

“⁠고양이 집안 막내로구나⁠. 천 년 만에 곳간에 고양이가 왔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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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발2026.10.31· 3화

    구슬을 입에 물고 부르르 떠는 범벅 너무 귀여워요. 청울 콧잔등에 물 튀는 데서 웃었어요.

    • 오달래작가2026.10.31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가 제일 고양이 같은 순간이라 꼭 넣고 싶었어요.

고개의 비 ·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