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77자)

용마루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오달래

새벽에 범벅은 아궁이 재를 앞발로 파헤치고 구슬을 묻었다⁠. 어젯밤 지핀 불의 온기가 재 속에 남아 있어 발바닥이 따뜻했다⁠. 재를 덮고⁠, 다시 덮고⁠, 꼬리로 한 번 쓸었다⁠. 고양이는 숨긴 것을 세 번 덮어야 마음이 놓인다⁠.

해가 중천에 오르자 범벅은 구슬을 다시 꺼내 물고 부엌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 꼭대기⁠, 기와를 길게 엎어 쌓은 마루를 사람들은 용마루라고 불렀다⁠. 이름부터 용이 오를 자리였다⁠. 범벅은 용마루 한가운데 구슬을 내려놓고 구슬 위에 턱을 괴었다⁠.

기와가 달아올라 있었다⁠. 앞발 바닥이 익어서 범벅은 발을 번갈아 들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몸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비늘도 돋지 않았다⁠. 수염만 볕에 꼬불꼬불해졌다⁠.

“⁠범벅아⁠!⁠”

마당에서 법운이 지붕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용마루에서 내려와라⁠, 이놈아⁠! 기와 깨진다⁠. 용마루라고 앉으면 용 되는 줄 아냐⁠?⁠”

범벅은 노승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도 우연이었다⁠. 범벅은 구슬을 입에 물고 지붕에서 뛰어내려 부엌 아궁이로 들어갔다⁠. 구슬을 도로 재에 묻으며 생각했다⁠. 구슬만으로는 안 된다⁠. 보름 밤 하늘 문이 열려야 한다⁠. 붉은 용은 하늘 문이 이무기에게만 열린다고 했다⁠. 누가 정했는데⁠? 범벅은 재를 네 번 덮었다⁠.

*

청울은 한낮의 볕 아래에서 아홉 번째 소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구름으로 띄운 물은 돌아오지 않았다⁠. 웅덩이는 거북 등처럼 갈라졌고⁠, 갈라진 틈마다 버들치가 하얀 배를 드러내고 펄떡였다⁠. 가재들은 젖은 데를 찾아 진흙을 파고들었다⁠. 늙은 두꺼비는 마른 바닥 한가운데서 청울을 노려보았다⁠.

“⁠이무기 양반⁠. 내가 뭐랬소⁠? 하늘에 구름 하나 띄우고 우리 집을 날렸소⁠.⁠”

청울은 대답 대신 입을 벌렸다⁠. 버들치를 한 마리씩 혀로 쓸어 담고⁠, 가재를 담고⁠, 마지막으로 두꺼비를 담았다⁠. 두꺼비가 입안에서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놓으시오⁠! 이무기 배 속은 싫소⁠!⁠”

청울은 계곡을 한 층 거슬러 올라가 여덟 번째 소에 입을 대고 천천히 내려놓았다⁠. 여덟 번째 소에는 무릎까지 오는 물이 남아 있었다⁠. 두꺼비는 물에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내밀고 침을 뱉었다⁠.

“⁠이사를 시키려면 미리 말이나 하시오⁠.⁠”

머리 위가 뜨거워졌다⁠. 하늘 한가운데로 붉은 비늘 빛이 지나갔다⁠. 휘광은 내려오지 않았다⁠. 목소리만 열기와 함께 떨어졌다⁠.

“⁠구슬을 고양이에게 빼앗기고 두꺼비 이사나 시키는구나⁠.⁠”

“⁠구슬은 찾아오겠소⁠.⁠”

“⁠찾아서 물고 올라오너라⁠. 땅에 둘 생각이면 내가 가져간다⁠.⁠”

열기가 걷혔다⁠. 청울은 턱을 들어 산 위를 보았다⁠. 비늘 끝이 저절로 산사를 향해 기울었다⁠. 구슬이 있는 곳은 몸이 먼저 알았다⁠. 천 년 동안 청울은 계곡 밖 사람 사는 데를 밤에만⁠, 우물까지만 갔다⁠. 오늘 밤에는 돌계단을 올라야 했다⁠.

*

해 질 녘⁠, 법운은 보리죽을 끓이려고 부지깽이로 아궁이 재를 긁어냈다⁠. 재 속에서 붉은 빛이 굴러 나왔다⁠. 노승은 부지깽이를 떨어뜨렸다⁠.

“⁠이게 뭐냐⁠?⁠”

범벅은 물독 뒤에서 온몸이 굳었다⁠. 노승은 무릎을 꿇고 앉아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손끝으로 건드렸다가 뜨거워서 손을 털었다⁠.

“⁠사리다⁠. 사리가 아궁이에서 나왔다⁠.⁠”

법운은 아궁이를 향해 세 번 절했다⁠. 범벅은 귀를 뒤로 눕혔다⁠. 노승은 절을 마치더니 장삼 소매로 구슬을 감싸 들고⁠, 뜨거우니 식혀야 한다며 물독에 퐁당 넣었다⁠. 구슬은 물독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바닥에 남은 손바닥만 한 물속에서 붉은 빛이 일렁였다⁠.

노승은 물독 옆에 등을 기대고 앉아 범벅을 무릎으로 끌어당겼다⁠. 범벅은 버둥거리다가 말았다⁠. 노승의 무릎은 뼈가 앙상했지만 이 절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리였다⁠.

“⁠범벅아⁠. 사십 년 이 절에 있으면서 사리 구경은 처음이다⁠. 열두 해 전 종이 뜨다가 상좌 셋을 묻은 해에도 부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이제 와서 아궁이에 사리를 주시나⁠?⁠”

노승의 손이 범벅의 등을 쓸었다⁠. 손바닥이 거칠었다⁠. 범벅은 구슬이 사리가 아니라고 말했다⁠. 노승은 고양이가 그르릉거린다고 좋아했다⁠.

법운이 잠들자 범벅은 물독 가장자리로 뛰어올랐다⁠. 물독 안을 들여다본 범벅의 수염이 떨렸다⁠.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저녁에는 바닥을 겨우 적셨는데⁠, 지금은 한 뼘이 넘었다⁠. 범벅은 앞발을 물속에 넣었다⁠. 차가웠다⁠. 범벅은 발을 빼서 세 번 털었다⁠. 다시 넣었다⁠. 또 털었다⁠.

“⁠아⁠, 젖는 건 싫은데⁠.⁠”

물은 계속 차올랐다⁠. 앞발이 구슬에 닿지 않았다⁠. 범벅은 물독 가장자리에 엎드려 물에 비친 제 얼굴을 노려보았다⁠. 물에 비친 고양이도 범벅을 노려보았다⁠.

*

청울은 산사로 오르는 돌계단을 배로 밀며 올라갔다⁠. 계단 돌 모서리가 갈라진 비늘 틈을 하나씩 긁었다⁠. 계단은 이무기를 위해 놓은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발 하나 너비였다⁠. 청울은 몸을 계단 옆 비탈에 걸치고 마른 칡덩굴을 붙잡으며 올라갔다⁠.

산사 마당에 머리를 넣었을 때⁠, 부엌 앞 물독 가장자리에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물독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물이 독 위로 넘치기 직전이었다⁠. 독 밑의 마른 흙이 검게 젖어 있었다⁠. 청울은 물 냄새에 혀가 저절로 나왔다⁠.

“⁠구슬을 돌려주시오⁠.⁠”

고양이가 털을 부풀리고 하악 소리를 냈다⁠. 몸집은 청울의 눈알 하나만 했다⁠.

“⁠못 줘⁠. 그리고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이게 무슨 일이냐⁠?⁠”

청울은 물독 위로 머리를 기울였다⁠. 구슬은 독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고⁠, 독 안의 물은 구슬을 중심으로 천천히 돌았다⁠. 땅속 어딘가에서 물을 끌어오고 있었다⁠.

“⁠여의주는 곁에 물을 부르오⁠.⁠”

“⁠그럼 됐네⁠. 영감 물독에 두면 되잖아⁠. 영감이 이 물 아랫마을에 퍼 주면 되고⁠.⁠”

“⁠물독 하나로 고을 하나를 못 살리오⁠. 고개 너머에는 사람이 천이 넘소⁠.⁠”

“⁠그럼 너는 뭘로 살리는데⁠? 어제 봤잖아⁠. 네 구름 찢어졌어⁠.⁠”

청울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양이는 물독 가장자리에서 꼬리를 감아 앞발을 덮었다⁠.

“⁠나는 보름 밤에 이걸 물고 하늘 문으로 갈 거야⁠. 그때까지는 여기 둬⁠. 물도 나오고 좋잖아⁠.⁠”

“⁠보름 밤에 나도 이 구슬이 있어야 하오⁠.⁠”

“⁠그건 보름에 싸우자⁠.⁠”

“⁠용이 무엇인지 아시오⁠?⁠”

“⁠구슬 물고 하늘 날아다니는 거⁠.⁠”

“⁠용은 하늘 재판정이 시키는 대로 물을 나르오⁠. 비를 내리라 하면 비를 내리고⁠, 거두라 하면 거두오⁠. 제 뜻으로는 우물 하나 못 채우오⁠. 어젯밤 휘광을 보았지요⁠? 휘광은 이백 년째 벌만 나르오⁠.⁠”

범벅의 귀가 한쪽만 돌아갔다⁠. 생각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래도 용은 용이잖아⁠. 우리 집안은 천 년 동안 쥐 밑이었어⁠. 띠 자리 열둘에 쥐는 맨 앞이고 고양이는 없어⁠. 사람들이 쥐띠 해에 태어난 아이는 부지런하다고 해⁠. 고양이띠는 아예 없어서 아무 말도 안 해⁠.⁠”

청울은 고양이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고양이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꼬리 끝만 저 혼자 탁탁 물독을 쳤다⁠. 청울은 한숨을 쉬었다⁠. 물독 위로 물결이 일었다⁠.

“⁠보름까지만이오⁠. 그동안 물이 사람에게 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가져가겠소⁠.⁠”

청울은 부엌 뒤 대숲으로 몸을 숨겼다⁠. 대나무 그늘 아래 흙이 물독에서 넘친 물로 축축했다⁠. 천 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 사는 곳에서 밤을 지냈다⁠.

*

새벽에 법운은 물독 앞에서 주저앉아 울었다⁠. 물이 독 입구까지 차서 가장자리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노승은 물을 손으로 떠서 얼굴을 씻고⁠, 한 번 더 떠서 마셨다⁠.

“⁠부처님⁠, 이 늙은 중이 무얼 했다고⁠.⁠”

법운은 물지게를 지고 물통 둘에 물을 가득 채웠다⁠. 등이 굽은 노승에게 물지게는 버거웠다⁠. 그래도 노승은 돌계단을 한 칸씩 내려가 아랫마을로 갔다⁠. 범벅은 장독 뚜껑에서 뛰어내려 노승을 따라갔다⁠. 고양이가 개처럼 중을 따라간다고 아랫마을 사람들이 웃을 것을 알았다⁠. 그래도 따라갔다⁠.

아랫마을 고샅에 물지게가 들어서자 집집마다 문이 열렸다⁠. 바가지를 든 아낙들이 줄을 지었다⁠. 우물집 할미는 물통에 이마를 대고 한참 있다가 바가지를 받았다⁠. 아이 하나가 물통 옆구리에 맺힌 물방울을 혀로 핥았다⁠. 법운은 바가지마다 물을 똑같이 나눠 담았다⁠. 마지막 바가지에는 물이 반밖에 돌아가지 않았다⁠. 노승은 빈 물통을 지고 다시 돌계단을 올랐다⁠. 범벅은 앞서 뛰어가다가 돌아보고⁠, 또 앞서 뛰어가다가 돌아보았다⁠. 대숲 가장자리에서 이무기의 금빛 눈 하나가 같은 등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가 오르자 고을 이방이 포졸 하나를 데리고 올라왔다⁠. 이방은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물독 밑의 젖은 흙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손가락으로 흙을 찍어 혀에 대 보았다⁠.

“⁠스님⁠. 이게 웬 물이오⁠?⁠”

“⁠우물을 깊게 팠소⁠.⁠”

“⁠산꼭대기 절에서 무슨 우물이 이렇게 나오오⁠? 아랫마을 우물도 두레박 끈을 두 번 이어야 닿는다던데⁠.⁠”

이방은 물독을 들여다보려다가 독 가장자리에 앉은 범벅과 눈이 마주쳤다⁠. 범벅은 이방의 콧잔등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이방이 뒤로 물러났다⁠.

“⁠고얀 고양이로세⁠.⁠”

“⁠용건이나 말하시오⁠.⁠”

“⁠종이 공납 말씀이오⁠. 감영에서 독촉이 왔소⁠. 그리고 사또 분부가 있소⁠. 가뭄에 물 나는 데가 있으면 관아에 고하라 하셨소⁠. 가뭄에는 물도 나라 것이오⁠.⁠”

이방은 말을 마치고 법운의 허리를 보았다⁠. 붉은 술 달린 열쇠를 오래 보았다⁠. 법운이 장삼 자락으로 열쇠를 가렸다⁠. 이방은 웃으며 몸을 돌렸다⁠. 범벅은 둘이 주고받은 눈길을 보았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수염 끝이 따끔했다⁠.

*

밤이 깊어 달이 산마루에 올라앉았을 때 부엌 뒷문이 조용히 열렸다⁠. 범벅은 물독 옆에서 눈을 떴다⁠. 이방이었다⁠. 이방은 신을 벗어 손에 들고 맨발로 부엌에 들어와 물독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소매를 걷고 팔을 물속에 넣었다⁠. 물독 바닥에서 붉은 빛이 이방의 팔뚝을 비췄다⁠.

“⁠이거로구나⁠. 물 나는 구슬⁠.⁠”

범벅은 이방의 종아리를 물었다⁠. 이방이 비명을 삼키고 발로 범벅을 걷어찼다⁠. 범벅은 아궁이 앞으로 굴렀다⁠. 이방은 다시 팔을 물에 넣었다⁠. 손끝이 구슬에 닿는 순간⁠, 물독 뒤 벽 너머에서 대숲이 크게 흔들렸다⁠. 부엌 뒷문으로 금빛 눈 두 개가 들어왔다⁠. 눈 하나가 이방의 머리통만 했다⁠. 이무기의 머리가 뒷문 문틀을 꽉 채우고 이방을 내려다보았다⁠. 이방의 귀에는 물소리 같은 낮은 울음이 들렸다⁠.

이방은 팔을 물독에서 빼지도 못하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물독이 기울며 물이 쏟아졌다⁠. 이방은 젖은 바닥을 네발로 기어 앞문으로 나가더니⁠, 마당을 가로질러 돌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며 소리쳤다⁠.

“⁠뱀이다⁠! 이무기다⁠! 절에 이무기가 산다⁠!⁠”

소리가 계곡을 따라 고을로 내려갔다⁠. 아랫마을 개들이 차례로 짖기 시작했다⁠. 범벅은 쏟아진 물 웅덩이에서 젖은 발을 털다가 이무기를 올려다보았다⁠.

“⁠들켰다⁠. 너 방금 뱀이라는 소리 들었지⁠? 사람이 뱀이라 하면 못 오른다며⁠. 잘됐네⁠. 구슬은 이제 내 거다⁠.⁠”

“⁠나는 원래 안 오르오⁠.⁠”

“⁠그러니까 내 거라고⁠.⁠”

청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뒷문에 머리를 걸친 채 고개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읍내에서 등불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이방이 고을에 닿기도 전에 개 짖는 소리가 먼저 읍내에 닿았다⁠. 청울의 비늘 위로 물독에서 튄 물방울이 하나씩 굴러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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