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610자)

붉은 구슬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오달래

산사 부엌의 흙바닥은 해가 기울어도 식지 않았다⁠. 범벅은 물독 옆 그늘에 배를 깔고 엎드려⁠,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뱃가죽으로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었다⁠. 물독 밑동만 겨우 서늘했다⁠. 범벅은 거기에 턱을 붙였다⁠. 수염 끝에 북어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범벅아⁠.⁠”

부엌 문간으로 법운의 그림자가 길게 들어왔다⁠. 노승은 빈 바가지를 들고 물독 앞에 쭈그려 앉았다⁠. 바가지가 독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고⁠, 물은 바가지 절반도 차지 않았다⁠.

“⁠북어 대가리 어디 갔냐⁠? 보름 백중에 올릴 거였다⁠.⁠”

백중은 음력 칠월 보름⁠, 절에서 돌아간 이들을 위해 재를 올리는 날이었다⁠. 범벅은 눈만 떴다⁠. 사람은 짐승 말을 울음소리로만 듣고⁠, 짐승은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다⁠. 이 산에서 열 해를 사는 동안 범벅이 배운 가장 쓸모 있는 이치였다⁠.

“⁠먹었지⁠. 재에 올릴 거면 높은 데 뒀어야지⁠.⁠”

“⁠야옹은 무슨 야옹이냐⁠, 이 도둑놈아⁠. 너 털 색깔부터 도둑놈 색깔이다⁠. 누런 거⁠, 검은 거⁠, 흰 거 다 뒤범벅이라 이름도 범벅이라 지었더니⁠, 하는 짓까지 범벅이다⁠.⁠”

법운은 바가지 물을 솥에 붓고 보리 한 줌을 털어 넣었다⁠. 허리에 찬 쇠 열쇠가 솥전에 부딪혀 짤랑 울렸다⁠. 열쇠 끝에 붉은 술이 달려 있었다⁠. 범벅이 새끼였을 때 저 술을 잡겠다고 노승의 다리를 타고 오르다 장삼을 세 번이나 찢었다⁠. 부엌 광 열쇠라고 했다⁠. 부엌 광에는 쥐 한 마리 먹을 것도 없는데 노승은 저 열쇠를 잘 때도 풀지 않았다⁠.

“⁠아침에 고을 이방이 또 왔다⁠. 종이 공납을 채우라더라⁠. 닥나무가 다 말라 죽었는데 종이를 무엇으로 뜨냐⁠? 조정에서 구휼미를 내렸다는 소문은 파다한데 고을에는 한 톨도 안 왔단다⁠.⁠”

법운은 솥뚜껑을 닫고 아궁이 앞에 주저앉았다⁠. 노승의 혼잣말은 늘 고양이를 향했다⁠. 범벅은 노승의 말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들었다⁠. 대답도 늘 했다⁠. 노승이 못 알아들을 뿐이었다⁠.

“⁠영감⁠, 걱정 마⁠. 내가 용이 되면 비부터 내려 줄게⁠.⁠”

“⁠또 운다⁠. 배고프다고 우는 거면 밥은 저녁에 없다⁠.⁠”

법운이 부지깽이로 아궁이 재를 뒤적이며 혼잣말을 이었다⁠.

“⁠옛날에는 아홉 소에서 이무기가 올랐다더라⁠. 오를 때 사람이 보고 ‘⁠용이다⁠’ 해 주면 용이 되고⁠, ‘⁠뱀이다⁠’ 하면 도로 떨어진다지⁠. 요새 사람들은 뭘 보든 ‘⁠뱀이다⁠’ 하고 돌부터 들 테니⁠, 이무기도 못 오르겠다⁠.⁠”

범벅은 귀를 세웠다가 도로 눕혔다⁠. 노승이 고양이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혼잣말이 우연히 맞았을 뿐이었다⁠.

*

청울은 아홉 번째 소 바닥의 진흙에 몸을 반쯤 묻고 밤을 기다렸다⁠. 웅덩이에 남은 물은 몸통 한 마디를 덮지 못했다⁠. 등의 비늘이 볕에 마르면서 가장자리부터 하나씩 들떴다⁠. 몸을 틀 때마다 갈라진 비늘이 서로 긁히며 마른 갈대 꺾이는 소리를 냈다⁠.

계곡 위에서부터 첫 번째 소⁠, 두 번째 소⁠, 아래로 아홉 번째 소까지 웅덩이가 계단처럼 이어져 있었다⁠. 세 해 전만 해도 소마다 물이 넘쳐 아래 소로 흘러내렸다⁠. 지금은 여덟 개의 소에 손바닥만 한 물만 고였고⁠, 아홉 번째 소에만 청울이 누울 만한 물이 남아 있었다⁠.

웅덩이 가장자리의 젖은 진흙에는 위의 소에서 쫓겨 내려온 것들이 모여 살았다⁠. 버들치 몇 마리와 가재 한 무리⁠, 등에 이끼를 얹은 늙은 두꺼비였다⁠. 두꺼비는 청울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물이 출렁인다고 불평했다⁠.

“⁠이무기 양반⁠, 좀 가만히 누워 계시오⁠. 내 집이 반 뼘 줄었소⁠.⁠”

“⁠밤에 물 길으러 나가오⁠. 비켜 주시오⁠.⁠”

“⁠또 우물이오⁠? 사람한테 다 퍼 주면 우리는 무얼 마시오⁠? 사람들이 이무기 고맙다고 할 줄 아시오⁠? 보면 돌부터 던지오⁠.⁠”

청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꺼비의 말에 틀린 데가 없었다⁠.

달이 계곡 위로 올라오자 청울은 물을 한입 가득 머금었다⁠. 입천장에 닿는 물이 미지근했다⁠. 청울은 마른 개울 바닥을 따라 산 아래로 미끄러졌다⁠. 돌이 아직 낮의 열을 품고 있어 배 비늘이 데었다⁠. 아랫마을 어귀 우물에 닿자 청울은 머리를 우물 속으로 넣고 머금은 물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물이 돌벽을 타고 내려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깊은 데서 울렸다⁠.

세 번을 오갔다⁠. 세 번째에 우물집 할미가 문을 열고 나왔다⁠. 청울은 담장 그늘에 몸을 붙였다⁠. 할미는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어 올리더니 물을 손바닥에 따라 맛을 보았다⁠. 할미는 우물에 대고 두 손을 모았다⁠.

“⁠용왕님⁠, 고맙습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청울은 용왕이 아니었다⁠. 이무기였다⁠. 천 년 동안 물속에서 몸을 닦아 이제 하늘로 오를 일만 남은⁠, 그러나 오를 마음은 없는 큰 뱀이었다⁠. 할미가 돌아가자 청울은 다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홉 번째 소로 돌아와 몸을 눕혔을 때⁠, 하늘 한복판이 붉게 갈라졌다⁠. 불붙은 무엇이 긴 꼬리를 끌며 계곡으로 떨어졌다⁠. 물이 튀었다⁠. 웅덩이에 남은 한 뼘의 물이 끓듯이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진흙 속에서 주먹 둘만 한 구슬 하나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구슬에서 나오는 열기가 청울의 턱 비늘을 데웠다⁠. 청울은 이 열을 알았다⁠. 천 년 전 이 계곡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어른 이무기들에게 들어 온 열이었다⁠.

여의주였다⁠. 청울은 구슬을 내려다보며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

범벅은 장독 뚜껑 위에서 자다가 붉은 빛에 눈을 떴다⁠. 장독 뚜껑은 산사에서 가장 높고 가장 반반한 자리였다⁠. 빛줄기가 계곡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범벅은 꼬리부터 먼저 부풀었다⁠.

“⁠떨어졌다⁠.⁠”

어미의 말이 떠올랐다⁠. 열두 띠를 정하던 날⁠, 하늘 앞에서는 짐승 말도 사람 말도 하나로 들렸다고 했다⁠. 고양이는 쥐에게 날짜를 속아 경주에 늦었고⁠, 쥐는 소 등에 올라타 있다가 결승점 앞에서 뛰어내려 맨 처음 자리를 차지했다고 했다⁠. 어미는 범벅을 산사 부엌 뒷문에 데려다 놓고 떠나기 전날 밤 이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안에서 용이 하나 나면 띠 자리 하나는 도로 찾는다⁠. 범벅은 어미의 말을 수염 하나하나에 새기고 열 해를 컸다⁠. 용은 구슬을 물고 오른다고 했다⁠.

범벅은 돌계단을 세 칸씩 뛰어 계곡으로 내려갔다⁠. 마른 풀이 발바닥에 바스락거렸다⁠. 아홉 번째 소에 닿았을 때 진흙 속에서 붉은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범벅은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앞발로 구슬을 짚었다⁠.

같은 순간⁠, 구슬 위에 무엇이 내려앉았다⁠. 턱이었다⁠. 범벅의 몸통보다 넓은 턱이었다⁠. 비늘이 덮인 턱 밑에서 금빛 눈 두 개가 범벅을 내려다보았다⁠.

“⁠발 치우시오⁠.⁠”

목소리가 물속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낮았다⁠. 범벅의 털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앞발은 치우지 않았다⁠.

“⁠먼저 짚은 건 나야⁠.⁠”

“⁠내 웅덩이에 떨어졌소⁠.⁠”

“⁠웅덩이에 이름 써 놨냐⁠? 너 뱀이지⁠? 무슨 뱀이 이렇게 커⁠?⁠”

“⁠이무기요⁠. 천 년을 이 물에서 살았소⁠.⁠”

범벅은 구슬과 이무기의 눈을 번갈아 보았다⁠. 이무기가 무엇인지는 노승의 옛이야기로 알았다⁠. 천 년 물속에서 지낸 큰 뱀이 구슬을 받으면 하늘로 올라 용이 된다⁠. 범벅은 앞발에 힘을 더 주었다⁠.

“⁠그럼 넌 올라가겠네⁠. 축하해⁠. 근데 나도 올라가야 하거든⁠.⁠”

“⁠나는 안 올라가오⁠.⁠”

범벅의 귀가 뒤로 젖혀졌다가 앞으로 돌아왔다⁠.

“⁠뭐⁠?⁠”

“⁠이 구슬로 비를 부를 거요⁠. 고개 너머 고을이 세 해째 굶소⁠.⁠”

“⁠안 올라갈 거면 나 줘⁠. 용 하나가 아까워서 그래⁠? 나는 고양이 집안에서 처음 나는 용이 될 거라고⁠. 쥐한테 속은 지 천 년이야⁠, 천 년⁠.⁠”

이무기의 콧구멍에서 바람이 새어 나왔다⁠. 웃음이었다⁠. 콧바람에 수염이 휘날리자 범벅은 더 화가 났다⁠.

“⁠웃지 마⁠. 나 진지해⁠.⁠”

*

청울이 고양이의 앞발 밑에서 구슬을 빼내려고 턱을 기울이는데⁠, 계곡의 공기가 바뀌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웅덩이 위의 습기가 한꺼번에 말랐다⁠. 청울의 등 비늘 끝이 오그라들었다⁠. 고양이의 털끝에서 탁⁠, 탁⁠, 작은 소리가 났다⁠.

하늘에서 붉은 몸이 내려왔다⁠. 비늘 하나하나가 잉걸불 빛이었고⁠, 몸이 계곡을 두 번 감고도 남았다⁠. 쇠가 달궈지는 냄새가 났다⁠. 붉은 용은 아홉 번째 소 위의 바위에 앞발을 걸치고 청울을 내려다보았다⁠.

“⁠오백 년 만이구나⁠, 청울⁠.⁠”

“⁠휘광⁠.⁠”

“⁠나는 하늘 재판정의 벌을 나르는 용이다⁠. 그 구슬을 네게 내린 것도 재판정이다⁠. 칠월 보름 밤⁠, 이 계곡 위에 하늘 문이 열린다⁠. 구슬을 물고 올라오너라⁠.⁠”

“⁠나는 안 올라가오⁠. 이 구슬로 고을에 비를 내리겠소⁠.⁠”

휘광의 눈이 가늘어졌다⁠. 계곡의 열기가 한 겹 더 올라왔다⁠.

“⁠그 고을의 가뭄은 하늘이 내린 벌이다⁠. 고을 사또가 세 해 동안 환곡을 빼돌렸다⁠. 봄에 꾸어 준다는 곡식을 꾸어 주지 않고⁠, 가을에 거둔다는 곡식은 두 배로 거두었다⁠. 조정이 내린 구휼미까지 제 곳간에 넣었다⁠. 하늘은 사람의 곳간을 보고 비를 정한다⁠. 벌이 걸린 땅에 네 비는 한 방울도 못 든다⁠.⁠”

청울은 대답 대신 구슬을 혀 밑에 밀어 넣었다⁠. 고양이가 앞발을 휘저으며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혀 밑이 뜨거웠다⁠. 청울은 웅덩이에 남은 물을 향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물이 바닥에서 떨어져 올라왔다⁠. 한 뼘의 물이 안개가 되고⁠, 안개가 모여 계곡 위에 구름 한 덩이로 떴다⁠. 세 해 만에 이 계곡에서 생긴 구름이었다⁠.

청울은 구름을 고개 너머로 밀었다⁠. 구름이 계곡을 빠져나가 고을 경계의 고개에 닿았다⁠. 장승 둘이 서 있는 자리에서 구름이 멈췄다⁠. 바위에 부딪힌 물처럼 두 갈래로 찢어졌다⁠. 찢어진 구름은 고개 너머로 넘어가지 못하고 하늘에서 흩어졌다⁠.

“⁠보았느냐⁠?⁠”

휘광이 말했다⁠. 목소리에 웃음이 없었다⁠.

“⁠사또가 훔쳤으면 사또를 치시오⁠. 고을 아이들이 무슨 죄요⁠?⁠”

“⁠사람들은 제 수령을 제가 고르지 못한다고 하겠지⁠. 그래도 곳간 앞에서 입을 다문 것은 고을 사람들이다⁠.⁠”

휘광이 바위에서 앞발을 거두었다⁠. 앞발이 닿았던 자리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보름까지 열이틀 남았다⁠. 그 안에 구슬을 물고 올라오지 않으면 구슬은 내가 거둔다⁠. 하늘의 물건이 땅에서 사람 손을 타면 일이 커진다⁠.⁠”

*

범벅은 구름이 찢어지는 것을 보지 않았다⁠. 이무기가 숨을 내쉬다가 입을 벌린 틈에 구슬이 진흙으로 굴러떨어졌고⁠, 범벅은 구슬만 보고 있었다⁠. 두 큰 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로에게 말을 던지고 있었다⁠. 오백 년 만이라고 했다⁠. 아는 사이였다⁠.

범벅은 몸을 낮추고 진흙에 배를 붙였다⁠. 꼬리 끝만 저 혼자 흔들렸다⁠. 붉은 용이 이무기에게 무어라 꾸짖는 동안 범벅은 한 발⁠, 또 한 발 구슬로 기어갔다⁠. 구슬은 생각보다 컸다⁠. 입을 있는 대로 벌려 송곳니를 걸었다⁠. 쇠 맛과 빗물 맛이 함께 났다⁠.

범벅은 구슬을 물고 뛰었다⁠.

“⁠고양이⁠!⁠”

이무기가 몸을 틀었다⁠. 범벅은 바위 위로 튀어 올랐다가 마른 덤불 사이로 뛰어들었다⁠. 등 뒤에서 붉은 용의 웃음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천둥처럼 큰 웃음이었다⁠.

“⁠고양이가 용이 되겠다고⁠? 하늘 문은 이무기에게만 열린다⁠. 문턱도 못 넘는다⁠.⁠”

범벅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답하려면 입을 벌려야 했고⁠, 입을 벌리면 구슬이 떨어졌다⁠. 돌계단을 세 칸씩 뛰어오르는 동안 입안의 구슬이 뜨겁게 뛰었다⁠. 이무기가 쫓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덩치가 저렇게 크면 돌계단은 못 오를 것이다⁠. 범벅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산사 마당에 닿았을 때 범벅의 수염 끝이 축축했다⁠. 범벅은 장독 뚜껑 위에 올라가 그제야 구슬을 내려놓고 수염을 핥았다⁠. 세 해 동안 맡아 보지 못한 냄새가 혀에 닿았다⁠. 비 냄새였다⁠. 계곡 아래에서 이무기의 낮은 목소리가 올라왔다⁠. 물소리처럼 들렸다⁠. 범벅은 귀를 한 번 털었다⁠. 장독 뚜껑 위에서 구슬이 붉게 빛났고⁠, 부엌에서 법운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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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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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귤까는중2026.10.31· 1화

    범벅이 북어 대가리를 어디 뒀는지 법운 스님만 모르는 거죠?

    • 오달래작가2026.10.31

      법운 스님도 알아요. 백중까지 모르는 척해 주는 겁니다.

붉은 구슬 ·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