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98자)

재판정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오달래

범벅은 재판정 문이 열리자 발바닥부터 놀랐다⁠. 바닥이 차가웠다⁠. 구름을 다져 깐 바닥이 젖은 이끼처럼 서늘하고 푹신했다⁠. 세 해 동안 범벅의 발바닥은 뜨거운 흙과 달군 기와와 마른 바위만 디뎠다⁠. 범벅은 청울의 정수리에서 내려와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렸다⁠. 구슬은 앞발 사이에 두었다⁠. 꺾인 뒷다리가 서늘한 바닥에 닿자 열이 조금 빠졌다⁠.

재판정에는 벽이 없었다⁠. 기둥도 없었다⁠. 사방에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수천⁠, 수만 개의 빗방울이 제자리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빗방울 사이 저 안쪽에 늙은 흰 용이 몸을 서리고 있었다⁠. 비늘이 서리처럼 하얬다⁠. 수염이 바닥까지 늘어져 구름에 묻혔다⁠.

“⁠이 자리에서는 모든 말이 그대로 통한다⁠.⁠”

흰 용이 말했다⁠. 목소리가 빗방울을 하나씩 건드리며 지나갔다⁠. 빗방울들이 작게 울렸다⁠.

범벅의 앞발이 저절로 들렸다⁠. 코앞에 매달린 빗방울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고양이 앞에서 흔들리는 것은 무엇이든 쳐야 했다⁠. 범벅은 빗방울을 쳤다⁠. 빗방울이 터지며 차가운 물이 범벅의 콧잔등에 쏟아졌다⁠. 범벅은 재채기를 했다⁠. 한 번⁠, 두 번⁠. 청울이 고개를 돌렸다⁠. 휘광은 눈을 감았다⁠. 흰 용은 재채기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짐승의 말도 사람의 말도 용의 말도⁠. 고양이⁠, 너는 어찌하여 이무기를 데리고 왔느냐⁠?⁠”

범벅이 대답하려는데 귓속에서 무엇이 꿈틀거렸다⁠. 범벅은 고개를 털었다⁠. 귓속에서 늙은 쥐가 떨어져 나왔다⁠. 쥐는 구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수염을 매만졌다⁠.

“⁠여기가 어디냐⁠? 나는 네 귀에서 자다 깼을 뿐이다⁠. 수레에서 뛰어내려 네 털 속에 숨었는데⁠, 털이 하도 엉켜서⁠.⁠”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능선 길부터⁠. 하늘로 오를 때는 네 귀를 꽉 붙잡고 있었다⁠. 무서워서 오줌이 마려웠다⁠.⁠”

범벅은 귀를 앞발로 문질렀다⁠. 축축했다⁠. 범벅은 쥐를 노려보았다⁠. 흰 용의 수염 끝이 한 번 흔들렸다⁠. 웃음이었다⁠.

*

청울은 흰 용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숙였다⁠. 옆구리의 장삼 천이 피에 젖은 채 구름 바닥에 끌렸다⁠. 휘광이 뒤따라 들어와 청울의 맞은편에 몸을 내렸다⁠.

“⁠아홉 소의 이무기가 고을의 벌을 다시 보아 달라 청하오⁠.⁠”

“⁠말하라⁠.⁠”

“⁠곳간은 열렸소⁠. 사또가 숨긴 곡식을 열쇠 가진 노승이 백성 앞에서 열었소⁠. 절반이 고을로 들어갔소⁠. 나머지 절반은 오늘 밤 쥐들이 길에 쏟아 백성이 주웠소⁠. 벌은 사또에게 내린 것인데 세 해 동안 벌을 받은 것은 아이들이었소⁠. 아이들은 곳간 앞에서 입을 다문 적이 없소⁠. 입을 열 나이도 아니었소⁠.⁠”

청울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고개에 비가 내린 날⁠, 장승 앞에서 농부 하나가 바가지를 내밀었소⁠. 바가지 반쪽에만 비가 떨어졌소⁠. 아랫마을 아이 하나는 물통 옆구리에 맺힌 물방울을 혀로 핥았소⁠. 우물집 할미는 흙탕물을 무명에 걸러 사발 반을 받았소⁠. 그 사람들이 무엇을 훔쳤소⁠?⁠”

흰 용이 바닥의 구름을 수염으로 쓸었다⁠. 구름이 맑아지며 아래가 비쳤다⁠. 땅이었다⁠. 고개의 장승 둘이 보였다⁠. 나루가 보였다⁠. 나루에서 사또가 상인과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섬 몇 개가 배에 실리고 있었다⁠. 고개 너머 큰길에는 깃발 하나가 횃불에 비쳐 다가오고 있었다⁠. 감영의 깃발이었다⁠. 실사관이 날 밝기 전에 고개를 넘으려고 밤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휘광이 고개를 들었다⁠.

“⁠이무기의 말에 거짓은 없습니다⁠. 다만 덜 말했습니다⁠. 이백 년 전 이 이무기의 청으로 제가 동쪽 고을의 벌을 거두었습니다⁠. 이듬해 고을의 반이 죽었습니다⁠. 벌 없는 비는 도둑의 곳간을 채웁니다⁠. 저 나루를 보십시오⁠. 훔친 자는 오늘 밤에도 팔고 있습니다⁠. 곳간이 절반 열렸다고 벌을 거두면⁠, 하늘의 말은 절반짜리가 됩니다⁠.⁠”

“⁠사또는 이제 벌을 받아야 하오⁠.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 머리 위의 하늘과 사또 머리 위의 하늘이 같은 하늘이다⁠.⁠”

청울은 대답하지 못했다⁠. 흰 용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땅의 증인이 있느냐⁠?⁠”

*

범벅은 앞발로 쥐를 밀었다⁠. 쥐가 범벅을 돌아보았다⁠.

“⁠증인이래⁠.⁠”

“⁠나는 쥐다⁠.⁠”

“⁠그러니까 증인이지⁠. 처음부터 다 봤잖아⁠.⁠”

늙은 쥐는 수염을 한 번 닦고 흰 용 앞으로 나아갔다⁠. 앞발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관아 곳간에 사는 쥐이옵니다⁠. 지난 그믐 밤에 수레 스무 대가 곳간 뒷문으로 들어와 섬을 실어 산사 석굴로 갔습니다⁠. 세 해 동안 그랬습니다⁠. 거적마다 관아 먹 글씨가 있습니다⁠. 저희가 다 갉아 보았으니 압니다⁠.⁠”

쥐는 수염을 한 번 더 닦았다⁠. 하늘 한가운데서 쥐 한 마리가 용 앞에 앉아 있었다⁠. 범벅은 쥐가 꼬리를 떠는 것을 보았다⁠. 쥐도 무서운 것이었다⁠. 쥐는 떨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 더 아뢰옵니다⁠. 석굴에 밤마다 늙은 중이 올라와 섬을 만지고 갔습니다⁠. 쌀 한 톨을 꺼내 보고는 도로 넣었습니다⁠. 세 해 동안 한 톨도 입에 넣지 않았습니다⁠. 쥐들은 그런 사람을 처음 보았습니다⁠. 저희는 그 중이 쌀을 세는 줄 알았습니다⁠. 세는 손이 아니었습니다⁠.⁠”

흰 용이 쥐를 내려다보았다⁠.

“⁠쥐로구나⁠. 띠를 정하던 날 고양이에게 날짜를 늦게 알려 준 집안이로구나⁠.⁠”

“⁠그건 천 년 전 쥐 일이옵니다⁠. 저는 지난달 일만 압니다⁠.⁠”

흰 용의 수염이 또 흔들렸다⁠. 범벅은 귀를 세웠다⁠. 재판관이 띠 경주를 기억했다⁠. 범벅은 구슬을 앞발로 꼭 눌렀다⁠.

“⁠하나 더 있어⁠. 사람 증인도 돼⁠?⁠”

“⁠잠든 사람은 부를 수 있다⁠.⁠”

“⁠영감⁠. 관아 옥에서 자고 있어⁠.⁠”

흰 용이 빗방울 하나를 수염 끝으로 건드렸다⁠. 빗방울이 길게 늘어나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자리에서 사람 하나가 일어났다⁠. 찢어진 장삼⁠, 맨발⁠, 가슴에 안은 짚신 한 짝⁠. 노승이었다⁠. 노승은 사방의 빗방울을 둘러보고⁠, 흰 용을 보고⁠, 이무기를 보고⁠, 마지막으로 발치의 고양이를 보았다⁠.

“⁠꿈이 요란하다⁠.⁠”

“⁠영감⁠.⁠”

노승의 눈이 커졌다⁠. 노승은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범벅도 노승을 올려다보았다⁠. 범벅은 다시 불렀다⁠.

“⁠영감⁠.⁠”

“⁠…범벅이냐⁠?⁠”

“⁠응⁠.⁠”

“⁠너⁠, 말을 하는구나⁠. 목소리가 그렇게 굵었냐⁠?⁠”

“⁠원래 굵었어⁠. 영감이 야옹으로 들었지⁠.⁠”

“⁠범벅이라는 이름은 마음에 드냐⁠?⁠”

“⁠별로⁠.⁠”

“⁠그래도 부르면 오지 않았냐⁠?⁠”

“⁠북어 들고 부를 때만⁠.⁠”

노승은 무릎을 꿇었다⁠. 고양이와 눈높이가 같아졌다⁠.

“⁠너 그동안 내 말 다 알아들었냐⁠?⁠”

“⁠다⁠.⁠”

“⁠북어 대가리도 네가 먹은 거 맞지⁠?⁠”

“⁠응⁠.⁠”

“⁠열쇠 끈 갉은 것도 배고파서가 아니었고⁠?⁠”

“⁠응⁠.⁠”

“⁠울던 거⁠, 그거 욕이었냐⁠?⁠”

“⁠욕했어⁠. 많이⁠.⁠”

노승은 웃었다⁠. 웃다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어깨가 떨렸다⁠. 범벅은 노승의 무릎에 머리를 비볐다⁠. 꿈속에서도 노승의 무릎은 뼈가 앙상했다⁠.

“⁠영감이 죽 불어 준 것도 알아⁠. 처음 온 겨울에⁠. 그릇 둘로 나눈 것도⁠.⁠”

노승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양이의 등을 쓸기만 했다⁠. 손바닥이 거칠었다⁠. 꿈속에서도 거칠었다⁠.

*

청울은 노승이 얼굴에서 손을 떼고 흰 용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노승은 짚신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산사의 늙은 중이오⁠. 증언하리다⁠.⁠”

노승의 목소리는 옥에서처럼 쉬지 않았다⁠. 노승은 열두 해 전 상좌 셋을 묻은 일⁠, 사또가 석굴을 빌린 일⁠, 공납을 면제받은 일⁠, 세 해 전부터 섬이 늘어난 것을 알면서 열쇠를 찬 일을 하나씩 말했다⁠. 빼지도 보태지도 않았다⁠.

노승은 증언을 마치고 이무기를 돌아보았다⁠.

“⁠아랫마을 우물을 채워 준 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못 했소⁠.⁠”

“⁠할미가 날마다 했소⁠. 용왕님이라고 불렀소⁠.⁠”

노승은 이무기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말로 들었다⁠. 물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느린⁠, 늙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노승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용왕님⁠, 고맙소⁠.⁠”

“⁠이무기요⁠.⁠”

“⁠이무기님⁠, 고맙소⁠.⁠”

노승은 흰 용에게로 몸을 돌렸다⁠.

“⁠벌을 내리시려면 이 늙은 중에게 내리시오⁠. 열쇠를 차고 잠근 손이 이 손이오⁠. 아이들이 칡뿌리를 씹는 것을 보면서 보름 지나기만 기다린 놈이 이놈이오⁠.⁠”

흰 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한 것은 휘광이었다⁠.

“⁠노승의 손은 열었다⁠.⁠”

청울은 휘광을 보았다⁠. 휘광은 노승을 보고 있었다⁠.

“⁠잠근 손이 열었다⁠. 사람들 앞에서 열고 매를 맞고 끌려갔다⁠. 훔친 손은 따로 있다⁠. 오늘 밤 나루에서 상인과 손을 잡고 있는 손이다⁠. 노승에게 벌을 옮기면 하늘이 도둑을 놓친다⁠.⁠”

청울은 휘광을 오래 보았다⁠. 오백 년 전 여섯 번째 소에서 같이 물을 마시던 이무기가 거기 있었다⁠. 휘광은 벌을 나르는 용이었지만⁠, 벌이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를 끝까지 따지는 용이었다⁠.

*

범벅은 흰 용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사방의 빗방울이 한꺼번에 떨렸다⁠. 범벅의 털이 바닥에서부터 일어났다⁠.

“⁠아홉 소의 이무기는 벌이 아이들에게 떨어졌다 하고⁠, 붉은 용은 벌을 거두면 도둑이 웃는다 한다⁠. 둘 다 옳다⁠.⁠”

흰 용의 목소리가 재판정 끝까지 퍼졌다⁠.

“⁠벌은 거두지 않는다⁠.⁠”

청울의 비늘이 오그라들었다⁠. 휘광은 움직이지 않았다⁠.

“⁠주인에게 옮긴다⁠. 고을의 땅에서 벌을 걷어 훔친 자의 몸에 붙인다⁠. 훔친 자가 서는 자리마다 비가 비켜 갈 것이다⁠. 그 자리가 어디든⁠. 붉은 용⁠, 네가 나르겠느냐⁠?⁠”

“⁠제가 나르겠습니다⁠.⁠”

휘광이 고개를 숙였다⁠. 범벅은 처음으로 붉은 용이 머리 숙이는 것을 보았다⁠. 범벅은 청울을 돌아보았다⁠. 청울의 눈이 젖어 있었다⁠. 이무기는 우는 법을 모른다고 했는데 이무기의 눈가에 빗방울 하나가 맺혀 있었다⁠. 범벅은 이무기가 우는 것인지⁠, 매달린 빗방울 하나가 떨어져 앉은 것인지 가리지 못했다⁠.

늙은 쥐가 범벅의 꼬리 밑에서 찍찍거렸다⁠.

“⁠들었냐⁠, 고양이⁠? 사또 머리 위에만 비가 안 온단다⁠. 사또가 곳간에 들어가면 곳간에만 안 오고⁠, 뒷간에 가면 뒷간에만 안 오고⁠.⁠”

범벅은 쥐를 꼬리로 덮었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느라 수염이 떨렸다⁠. 노승도 입을 손으로 가렸다⁠. 웃음은 금방 걷혔다⁠. 범벅은 고개 너머 하늘을 떠올렸다⁠. 벌이 걷혀도 구름은 저절로 고개를 넘지 않는다⁠.

“⁠그러면 비가 와⁠?⁠”

범벅이 물었다⁠. 흰 용이 범벅을 내려다보았다⁠.

*

청울은 흰 용이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흰 용의 눈이 고양이의 앞발 사이⁠, 붉게 빛나는 구슬에 머물렀다⁠.

“⁠비는 용이 나른다⁠. 붉은 용은 이제 벌을 나르니 비를 나르지 못한다⁠. 재판정의 다른 용들은 저마다 맡은 땅이 있다⁠. 아홉 소 고개 너머로 비를 나를 용이 없다⁠.⁠”

빗방울들이 숨을 죽인 것처럼 멈췄다⁠.

“⁠여의주는 이 자리에서 삼키는 자를 용으로 만든다⁠. 용이 된 자는 재판정의 비를 나르고⁠, 다시는 땅의 짐승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우물에 물을 붓지 못하고⁠, 부엌에서 잠들지 못한다⁠.⁠”

범벅은 노승을 보았다⁠. 노승은 구슬을 보고 있었다⁠. 청울은 범벅을 보았다⁠. 범벅의 꼬리가 구름 바닥을 쓸었다⁠.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고양이가 무엇을 정하지 못할 때 꼬리가 하는 짓이었다⁠.

흰 용이 이무기를 보았다⁠. 고양이를 보았다⁠. 구슬은 둘 사이 구름 바닥에서 빛나고 있었다⁠.

“⁠누가 삼키겠느냐⁠?⁠”

1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재판정 ·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