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566자)

용이다

용이 되기 싫은 이무기와 용이 되고 싶은 고양이 · 오달래

청울은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천 년을 물속에서 기다려 받은 구슬이었다⁠. 구름 바닥 위에서 붉은 빛이 숨 쉬듯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청울은 턱을 내려 구슬을 범벅의 앞발 앞으로 밀었다⁠.

“⁠범벅이 삼키시오⁠.⁠”

범벅의 꼬리가 멈췄다⁠.

“⁠나는 땅에 남겠소⁠. 비가 그친 뒤에도 우물은 마르오⁠. 누군가 물을 부어야 하오⁠.⁠”

휘광이 몸을 일으켰다⁠. 붉은 비늘에서 열기가 확 퍼져 매달린 빗방울 몇 개가 김이 되어 사라졌다⁠.

“⁠고양이를 용으로⁠? 물을 질색하는 고양이가 재판정의 비를 나른다고⁠? 재판정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고양이를 막는 법은 없다⁠.⁠”

흰 용이 말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을 뿐이다⁠.⁠”

휘광은 흰 용에게 대꾸하지 못하고 청울을 보았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구슬을 내주면 다음 구슬은 천 년 뒤다⁠. 너는 다시는 오르지 못한다⁠. 오백 년을 기다렸다⁠, 청울⁠.⁠”

“⁠더 기다리지 마시오⁠.⁠”

청울은 휘광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휘광의 비늘이 한 번 붉게 일렁였다가 가라앉았다⁠. 오백 년 동안 화가 날 때마다 일렁이던 비늘이었다⁠. 이번에는 다시 일렁이지 않았다⁠.

“⁠고양이에게 주는 것이 아니오⁠, 휘광⁠. 고개 너머에 주는 것이오⁠. 범벅은 문을 지날 때 나를 데려왔소⁠. 이번에는 구름을 데려갈 것이오⁠.⁠”

*

범벅은 구슬을 보았다⁠. 앞발로 건드렸다⁠. 뜨거웠다⁠. 범벅은 고개를 돌려 노승을 보았다⁠. 노승은 꿈속에서도 짚신을 가슴에 안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용이 되면 부엌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궁이 앞에서 잠들지 못한다⁠. 노승의 무릎에도 다시 오르지 못한다⁠. 노승은 늙었고⁠, 매를 맞았고⁠, 부엌은 탔다⁠.

“⁠영감⁠.⁠”

“⁠오냐⁠.⁠”

“⁠나 가도 돼⁠?⁠”

노승은 고양이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입술이 몇 번 달싹였다⁠. 노승은 짚신을 바닥에 내려놓고⁠, 사십 년 동안 하던 대로 혀를 찼다⁠.

“⁠가라⁠, 이 도둑놈아⁠.⁠”

범벅의 귀가 뒤로 젖혀졌다⁠.

“⁠부엌은 다 탔다⁠. 돌아와도 잘 데가 없다⁠. 아궁이는 내가 다시 짓는다⁠. 장독 뚜껑도 하나 얻어 놓으마⁠. 너는 비 올 때마다 지나가거라⁠. 지붕 위로 낮게⁠. 내가 보마⁠. 보고 ‘⁠용이다⁠’ 해 주마⁠.⁠”

“⁠도둑고양이다⁠, 하지 마⁠.⁠”

“⁠그건 장담 못 한다⁠.⁠”

노승은 고양이의 머리를 쓸었다⁠.

“⁠너 용마루에 올라가 해 질 때까지 산등성이 보던 거 안다⁠. 네 어미 간 데를 보던 거지⁠? 높이 올라가면 다 보이겠다⁠. 보이거든 비나 좀 비켜 뿌려 줘라⁠. 고양이는 비 맞는 걸 싫어하니까⁠.⁠”

범벅은 노승의 손바닥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꿈속의 손바닥이 따뜻했다⁠.

범벅은 웃었다⁠. 고양이가 웃으면 수염이 앞으로 쏠린다⁠. 범벅의 수염이 앞으로 쏠렸다⁠. 범벅은 구슬 앞에 앉아 입을 벌렸다⁠. 구슬은 범벅의 머리보다 컸다⁠. 입을 있는 대로 벌렸다⁠. 턱이 뻐근했다⁠.

“⁠안 들어가⁠.⁠”

“⁠삼키는 자의 입에 맞춘다⁠.⁠”

흰 용이 말했다⁠. 범벅이 다시 입을 벌리자 구슬이 작아졌다⁠. 대추알만 해졌다⁠. 범벅은 구슬을 혀에 얹었다⁠. 쇠 맛과 빗물 맛이 났다⁠. 첫날 밤 아홉 번째 소에서 물었을 때와 같은 맛이었다⁠. 범벅은 삼켰다⁠.

목구멍으로 불이 내려갔다⁠. 배 속에서 불이 퍼지고⁠, 불이 지나간 자리마다 털이 들떴다⁠. 털이 한 올씩 빠져 민들레 씨처럼 날아올랐다⁠. 누런 털⁠, 검은 털⁠, 흰 털이 재판정의 빗방울 사이로 흩어졌다⁠. 털 빠진 살갗 아래에서 비늘이 돋았다⁠. 비늘도 누렇고 검고 희었다⁠. 뒤범벅이었다⁠.

꺾인 뒷다리가 우둑 소리를 내며 펴졌다⁠. 다리가 길어지고 발톱이 매처럼 굽었다⁠. 꼬리가 늘어나 재판정 바닥을 한 바퀴 휘감았다⁠. 수염이 길어져 바닥에 끌렸다⁠. 몸이 커지며 머리가 매달린 빗방울들 사이로 솟았다⁠. 귀는 그대로였다⁠. 끝이 뾰족한 고양이 귀 두 개가 용의 머리 위에 쫑긋 서 있었다⁠.

범벅은 제 앞발을 내려다보았다⁠. 비늘 덮인 발이었다⁠. 범벅은 발등의 비늘을 혀로 핥았다⁠. 한 번⁠, 두 번⁠.

“⁠퉤⁠, 짜다⁠.⁠”

늙은 쥐가 범벅의 발치에서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천 년 만에 고양이 집안에서 용이 났다⁠. 핥는 버릇은 그대로네⁠.⁠”

*

청울은 휘광이 재판정 끝으로 몸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휘광은 떠나기 전에 한 번 청울에게 머리를 내렸다⁠. 둘의 머리가 여섯 번째 소에서처럼 나란히 놓였다⁠.

“⁠너는 이제 영영 이무기다⁠.⁠”

“⁠그래서 우물이 보이오⁠.⁠”

휘광은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말했다⁠.

“⁠벌을 나르는 길에 아홉 소를 지나가마⁠. 가끔⁠.⁠”

“⁠물 한 모금 드리리다⁠.⁠”

“⁠이무기가 용에게 물을 준다고⁠?⁠”

“⁠천 년 동안 사람에게도 주었소⁠.⁠”

휘광의 콧김이 청울의 얼굴을 쓸었다⁠. 뜨겁지 않았다⁠. 여섯 번째 소의 여름 바람만큼 미지근했다⁠.

휘광은 재판정 밖으로 날아 나갔다⁠. 붉은 몸이 하늘 문 아래로 내려가더니 나루로 곧장 꺾였다⁠. 휘광이 지나간 하늘에 붉은 구름 한 점이 남아 휘광을 따라갔다⁠. 작고 둥근 구름이었다⁠. 사람 하나 머리 위만 덮을 크기였다⁠.

흰 용이 청울에게 말했다⁠.

“⁠데려온 자가 데려간다⁠. 내려가거라⁠.⁠”

범벅이 청울 앞에 머리를 내렸다⁠. 얼룩 비늘이 덮인 커다란 머리에 고양이 귀가 붙어 있었다⁠. 청울은 범벅의 정수리에 턱을 얹었다⁠. 처음 고개로 내려가던 날 고양이가 청울의 정수리에 앉았던 것처럼⁠.

“⁠꾹꾹 누르지 마시오⁠.⁠”

“⁠이제 발이 안 닿아⁠.⁠”

노승은 꿈속에서 짚신을 안은 채 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 하나가 노승의 이마에 떨어졌다⁠. 노승의 모습이 빗방울처럼 흐려졌다⁠. 옥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

범벅은 하늘 문을 거꾸로 지났다⁠. 문 아래에서 구름 아홉 덩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청울이 아홉 소에서 하나씩 띄운 구름이었다⁠. 범벅은 구름을 앞발로 끌어모았다⁠. 구름은 무거웠고⁠, 젖어 있었다⁠. 범벅은 진저리를 쳤다⁠. 비늘이 되었는데도 젖는 것은 싫었다⁠.

“⁠싫으면 다시 내놓으시오⁠.⁠”

정수리에서 청울이 말했다⁠.

“⁠싫다고 안 했어⁠.⁠”

범벅은 구름 아홉 덩이를 끌고 고개로 내려갔다⁠. 장승 둘이 보였다⁠. 범벅은 숨을 들이쉬고 장승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처음 이 선 앞에 섰을 때는 고양이 발등만 젖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막지 않았다⁠. 열기가 없었다⁠. 찢어지는 소리도 없었다⁠. 구름 아홉 덩이가 범벅을 따라 고개를 넘었다⁠.

비가 쏟아졌다⁠.

고개 아래 갈라진 논에 비가 떨어지자 흙이 한숨처럼 김을 뿜었다⁠. 논두렁으로 물이 흘렀다⁠. 읍내 지붕에 빗소리가 덮였다⁠. 골목마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맨발로 뛰어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들이 사발과 바가지를 들고 빙빙 돌았다⁠. 고개에서 비를 맞던 농부가 논 한가운데에 드러누웠다⁠. 우물집 할미는 우물 앞에 앉아 두 손을 모으다가⁠, 하늘에 지나가는 얼룩 몸을 보고 손을 멈췄다⁠.

“⁠용왕님이 아니네⁠. 얼룩이네⁠.⁠”

범벅의 얼굴로 빗물이 쏟아졌다⁠. 범벅은 공중에서 머리를 부르르 털었다⁠. 털 대신 비늘에서 물이 튀어 아래로 흩어졌다⁠. 고을 사람들은 비가 갑자기 한 번 굵어졌다고 했다⁠.

나루에서는 사또가 배 앞에 서 있었다⁠. 사방에 비가 내리는데 사또가 선 자리만 말라 있었다⁠. 사또의 머리 위에 붉은 구름 한 점이 떠 있었다⁠. 사또가 움직이면 구름도 따라 움직였다⁠. 사또가 처마 밑으로 뛰어가자 처마 밑의 흙이 마른 채로 드러났다⁠. 상인이 사또에게서 세 걸음 물러났다⁠. 사공도 물러났다⁠. 젖은 사람들 한가운데서 사또 하나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날이 밝으며 고개를 넘어온 감영의 깃발이 나루에 닿았다⁠. 실사관이 말에서 내려 배에 실린 섬을 보았다⁠. 거적의 관아 먹 글씨를 보았다⁠. 마른 사또를 보았다⁠. 실사관은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포졸에게 손짓했다⁠. 포졸이 사또의 팔을 뒤로 묶는 동안에도 사또의 머리 위에서는 붉은 구름이 비를 막고 있었다⁠.

범벅은 고을을 지나 산등성이 위로 높이 올랐다⁠. 용의 눈으로 보니 산이 끝없이 겹쳐 있었다⁠. 열 해 전 어미가 넘어간 산등성이도 저 가운데 있었다⁠. 비가 산등성이마다 고르게 내렸다⁠. 먼 등성이 하나의 바위 위에서 누런 산고양이 하나가 비를 피해 바위 밑으로 뛰어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너무 멀어서 털 색이 누런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범벅은 앞발을 들어 구름 한 자락을 걷었다⁠. 고양이가 숨은 바위 위로만 비가 비켜 갔다⁠.

범벅은 관아 옥 위를 낮게 지났다⁠. 창살 구멍으로 빗물이 들이쳤다⁠. 짚 위에 엎드린 노승의 얼굴에 빗물이 떨어졌다⁠. 노승이 눈을 떴다⁠. 범벅은 거기까지 보고 하늘로 올라갔다⁠. 정수리에서 청울이 내려갈 자리를 말했다⁠. 아홉 소 계곡이었다⁠.

*

청울은 이튿날 해 질 녘 산사 부엌 터에 올라와 있었다⁠. 아홉 소는 밤새 내린 비로 다시 찼다⁠. 첫 번째 소부터 아홉 번째 소까지 물이 넘쳐 아래 소로 흘러내렸다⁠. 진흙 속에서 두꺼비가 기어 나와 첫 번째 소에서 울었다⁠. 목이 쉬도록 울었다⁠. 청울은 두꺼비 울음을 등 뒤에 두고 돌계단을 올랐다⁠. 비에 젖은 계단은 비늘을 긁지 않았다⁠.

부엌은 검은 기둥 둘과 무너진 기와와 아궁이만 남아 있었다⁠. 아궁이 돌은 비에 씻겨 검은 물을 흘렸다⁠. 청울은 아궁이 곁에 몸을 말고 턱을 아궁이 돌 위에 얹었다⁠. 돌이 차가웠다⁠. 세 해 만에 처음 차가운 돌이었다⁠.

돌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한 짝은 짚신⁠, 한 짝은 맨발이었다⁠. 노승이 지팡이를 짚고 올라왔다⁠. 실사관이 고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옥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을⁠, 청울은 노승이 중얼거리는 소리로 알았다⁠. 노승은 마당에 멈춰 부엌 터를 보았다⁠. 아궁이 곁의 이무기를 보았다⁠.

“⁠너는 또 뭐냐⁠.⁠”

노승은 혀를 찼다⁠. 사십 년 동안 하던 대로였다⁠.

“⁠부엌 자리 차지하지 마라⁠. 거기는 고양이 자리다⁠. 비늘 떨어뜨리지 마라⁠. 아궁이 다시 놓아야 한다⁠.⁠”

청울은 대답했다⁠. 재판정 밖으로 나온 이무기의 말은 다시 물소리였다⁠. 노승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정에서 들은 목소리를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노승은 아궁이 앞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사또는 감영으로 끌려갔다⁠. 고개를 넘는 동안 사또 머리 위에만 해가 쨍쨍하더란다⁠. 포졸들이 사또 곁에 안 서려고 서로 밀더란다⁠. 실사관이 석굴 열쇠를 나한테 도로 주더라⁠. 이제 무엇을 잠그라고⁠.⁠”

노승은 허리춤에서 붉은 술 달린 열쇠를 꺼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아궁이 재를 손으로 파고 열쇠를 묻었다⁠. 재를 덮고⁠, 다시 덮었다⁠. 세 번 덮었다⁠.

노승은 바랑에서 이 빠진 사발 하나를 꺼냈다⁠. 아랫마을에서 얻어 온 사발이었다⁠. 노승은 사발을 아궁이 앞 바닥에 내려놓았다⁠. 열 해 동안 고양이의 죽 그릇을 놓던 자리였다⁠. 사발은 비어 있었다⁠. 노승은 빈 사발에 대고 입으로 후 불었다⁠. 불다가 멈췄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낮게 울렸다⁠. 구름 아래로 긴 몸 하나가 산사 지붕 위를 낮게 지나갔다⁠. 누런 비늘⁠, 검은 비늘⁠, 흰 비늘이 뒤범벅이었고⁠, 머리 위에 뾰족한 귀 두 개가 쫑긋 서 있었다⁠. 몸이 지나가는 동안 빗발이 굵어졌다⁠. 얼룩 용은 무너진 용마루 위에서 한 번 머리를 털었다⁠.

노승은 지팡이를 짚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물이 노승의 얼굴로 흘러내렸다⁠. 노승은 빗물을 닦지 않았다⁠.

“⁠용이다⁠.⁠”

노승은 한참 있다가 덧붙였다⁠.

“⁠도둑놈이 용이 됐다⁠.⁠”

얼룩 꼬리가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 아궁이 앞의 빈 사발에 빗물이 떨어졌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사발이 차올라 이 빠진 자리로 물이 넘쳤다⁠. 넘친 물이 아궁이 돌을 타고 흘러 청울의 턱 밑으로 들어왔다⁠. 청울은 턱을 들지 않았다⁠. 비늘마다 빗방울이 맺혔다⁠. 노승은 사발 곁에 쭈그려 앉아 넘치는 물을 오래 보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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