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48자)

사내 예금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토요일 아침 식탁에는 어제 남은 김치찌개가 다시 올라왔다⁠. 금채는 찌개를 뜨면서 용준을 보지 않았다⁠.

“⁠어제 삐삐 봤어⁠?⁠”

“⁠봤어⁠. 4444⁠.⁠”

“⁠무슨 뜻인지 알아⁠?⁠”

“⁠몰라⁠.⁠”

아롬이 숟가락을 들고 손을 들었다⁠. 학교에서 발표할 때처럼 팔을 쭉 폈다⁠.

“⁠죽을래 죽을래 죽을래 죽을래⁠.⁠”

“⁠아롬아⁠, 그건 엄마랑 아빠만 쓰는 말이야⁠.⁠”

금채가 아롬의 팔을 내리게 했다⁠. 아롬은 숟가락을 내리면서 아빠에게 혀를 내밀었다⁠. 용준은 웃음이 나와서 찌개 국물에 사레가 들렸다⁠. 금채가 물컵을 밀어 주었다⁠.

“⁠어젯밤 뉴스 봤지⁠? 학원 원장이 아침에 전화했어⁠. 다음 달부터 강사 월급 이십 프로 깎는대⁠. 다들 학원비 못 낼 거라고⁠.⁠”

“⁠그렇겠지⁠.⁠”

“⁠그렇겠지⁠? 당신은 뭐든 다 아는 사람 같아⁠. 이번 주 내내⁠.⁠”

금채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애 앞에서는 안 물을게⁠. 대신 하나만⁠. 우리 사내 예금 천오백⁠. 월요일에 찾을 수 있어⁠, 없어⁠?⁠”

용준은 물컵을 쥐었다⁠. 찾을 수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고⁠, 없다고 하면 월요일 아침 금채가 창구에 줄을 설 것이었다⁠. 용준은 어느 쪽으로도 대답하지 못하고 물을 마셨다⁠.

“⁠오늘 안산 공장 가야 해⁠. 저녁에 말할게⁠.⁠”

“⁠어제도 저녁에 말한다고 했어⁠.⁠”

“⁠오늘은 진짜야⁠.⁠”

“⁠당신은 진짜라는 말도 이번 주에 처음 써⁠. 결혼하고 십 년 동안 한 번도 안 쓰던 말을⁠.⁠”

현관문을 나설 때 아롬이 신발장 앞에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오른쪽 밑창 앞부분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용준은 아롬의 운동화를 오래 보았다⁠. 그제 밤 2027년의 병실에서 편우곤이 잠꼬대로 말한 운동화였다⁠.

*

안산 봉제공장은 토요일에도 오전 근무를 했다⁠. 공장 문을 열면 미싱 백여 대가 따르르르 하고 한꺼번에 박음질하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미싱 소리가 듬성듬성했다⁠. 봉제반 아주머니들 절반이 미싱 앞이 아니라 공장 마당에 모여 있었다⁠. 다들 작업복 위에 외투를 걸쳤고⁠, 몇은 손에 사내 예금 통장을 쥐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서 자금부 김 상무가 두 손을 들고 있었다⁠. 상무의 짧은 머리가 바람에 눌렸다⁠.

“⁠여러분⁠, 통장 정리는 월요일에 본사에서 합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금고가 안 열립니다⁠.⁠”

“⁠금고가 토요일엔 쉰다꼬⁠? 우리는 토요일에도 일한다⁠.⁠”

“⁠어제 텔레비전 봤지예⁠? 나라가 돈 꾸러 간다는데 회사는 괜찮나⁠?⁠”

“⁠회사는 괜찮습니다⁠. 회장님이 다 막고 계십니다⁠.⁠”

아주머니들은 김 상무의 말을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주 안 믿는 얼굴도 아니었다⁠. 믿고 싶은데 통장을 쥔 손이 먼저 움직이는 얼굴이었다⁠.

용준은 마당 끝에서 상황을 보다가 공장 정문에서 들리는 고함에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대구 사투리였다⁠.

“⁠김 상무님⁠! 김 상무님 여기 계시지예⁠?⁠”

순구였다⁠. 어젯밤 대구에서 막차 고속버스를 탔는지 눈이 벌겠고 턱에 수염이 거뭇했다⁠. 손에 병원 영수증 한 장을 쥐고 있었다⁠.

“⁠순구야⁠, 너 대구에 있어야지⁠.⁠”

“⁠니는 빠져라⁠.⁠”

순구는 용준을 밀치고 김 상무 앞으로 갔다⁠. 영수증을 김 상무 코앞에 들이밀었다⁠.

“⁠우리 엄마 화요일 수술입니더⁠. 병원이 선금 반 달랍니더⁠. 월요일까지 기다린다 캤는데⁠, 월요일에 돈 받아서 대구 내려가면 화요일 아침이라 늦습니더⁠. 지금 주이소⁠. 내 돈입니더⁠. 내 사백⁠.⁠”

“⁠곽 대리⁠, 오늘 금고가⁠.⁠”

“⁠금고가 토요일에 쉬는 거는 아는데⁠, 상무님 지갑은 토요일에도 일하지예⁠?⁠”

아주머니들이 웃었다⁠. 웃음 끝에 누가 말했다⁠.

“⁠저 사람 말이 맞다⁠. 우리도 우리 돈 달라는 기다⁠.⁠”

김 상무의 얼굴이 굳었다⁠. 상무는 순구의 손목을 잡고 영수증을 밀어내려 했다⁠. 순구가 상무의 멱살을 잡았다⁠. 넥타이가 비틀렸다⁠. 아주머니 몇이 비명을 질렀고⁠, 몇은 박수를 쳤다⁠.

용준이 둘 사이에 몸을 끼워 넣었다⁠. 순구의 손목을 잡았다⁠. 순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순구야⁠, 놔⁠.⁠”

“⁠니 또 막나⁠? 니 월요일까지라 캤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내 엄마가 화요일에 칼 댄다⁠.⁠”

“⁠수술비는 내가 구해 줄게⁠.⁠”

“⁠니가 무슨 돈으로⁠? 니 돈도 사내 예금에 다 들어가 있다메⁠. 금채 씨가 우리 엄마한테 다 말했다⁠.⁠”

용준은 순구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순구도 상무의 멱살을 놓지 않았다⁠. 셋이 한 덩어리로 엉켜서 숨을 몰아쉬었다⁠. 다음 순간 공장 정문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들어왔다⁠. 자갈 밟히는 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

탁재황은 차에서 내리면서 이미 웃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트렁크에서 떡 상자 세 개와 인삼 사탕 봉지 한 아름을 내렸다⁠. 탁재황은 멱살을 잡은 순구도⁠, 끼어든 용준도 보지 않은 것처럼 아주머니들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고⁠, 안양댁⁠. 손자 돌잔치는 잘 했나⁠? 사진 보여 준다더니⁠.⁠”

봉제반 맨 앞의 아주머니가 통장을 쥔 채 얼굴이 풀렸다⁠.

“⁠회장님⁠, 그걸 다 기억하십니꺼⁠?⁠”

“⁠기억하지⁠. 사월생 손자⁠. 돌잡이에 돈 잡았다며⁠. 할매 닮아서 손이 야무지다⁠.⁠”

탁재황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렀다⁠. 미싱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던 아주머니에게는 손가락을 보여 달라고 했고⁠, 남편이 허리를 다친 아주머니에게는 한의원 이름을 물었다⁠. 마당 구석에서 공장 진돗개가 꼬리를 흔들자 개 이름까지 불렀다⁠. 개가 달려와 회장 바짓단에 코를 박았다⁠. 아주머니들이 웃었다⁠.

“⁠어제 텔레비전 보고 놀랐지⁠? 나도 놀랐다⁠. 나라가 돈 꾸러 간다니까⁠.⁠”

탁재황은 떡 상자를 열어 손수 한 덩이씩 나눠 주었다⁠.

“⁠그런데 너희 탁산이 언제 너희 돈 안 준 적 있나⁠? 팔십 년에 월급 못 줄 때도 내가 시계 팔아서 줬다⁠. 오일쇼크 때도 줬다⁠. 너희 돈은 너희 돈이다⁠. 달라는 사람은 월요일에 본사 와서 다 찾아가라⁠. 대신 찾아갈 사람은 떡을 반만 먹어라⁠.⁠”

마당에 웃음이 터졌다⁠. 통장을 쥐었던 손들이 떡을 받으려고 통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미싱 앞으로 하나둘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십 분 만에 마당이 반으로 줄었다⁠. 김 상무가 비틀어진 넥타이를 바로잡았다⁠. 순구는 멱살을 놓친 손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탁재황이 순구 앞으로 와서 떡 한 덩이를 손에 쥐여 주었다⁠.

“⁠곽 대리⁠. 어머니 화요일이지⁠? 김 상무⁠, 곽 대리 일은 내가 따로 보자⁠.⁠”

순구는 떡을 쥐고 아무 말도 못 했다⁠. 탁재황은 용준에게 고갯짓을 했다⁠.

“⁠반장은 나랑 창고 좀 보자⁠. 원단 재고가 궁금해서⁠.⁠”

*

탁재황이 공장장과 재고표를 보는 동안 용준은 공장 수돗가로 갔다⁠. 순구가 수도꼭지 밑에 머리를 들이밀고 찬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물이 목덜미로 흘러 와이셔츠 깃이 젖었다⁠. 순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니 봤제⁠? 회장님은 떡 한 상자로 마당을 비웠다⁠. 니는 사흘 뛰어다니면서 뭘 비웠노⁠?⁠”

“⁠순구야⁠.⁠”

“⁠내 엄마가 그라더라⁠. 회장님 믿어라⁠. 회장님은 우리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다꼬⁠. 니는 일찍 일어나서 뭐 하노⁠? 남의 신청서 뺏으러 다니고⁠.⁠”

순구는 젖은 손으로 주머니에서 떡을 꺼냈다⁠. 회장이 쥐여 준 떡이었다⁠. 한 입 베어 물고 오래 씹었다⁠.

“⁠회장님이 내 일은 따로 보자 카시네⁠. 니는 수술비 구해 준다 캤고⁠. 둘 중에 누가 먼저 주는지 보자⁠. 먼저 주는 사람 말 들을 끼다⁠.⁠”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안 물어⁠?⁠”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따지는 거는 돈 있는 사람 일이다⁠.⁠”

순구는 떡을 다 먹고 손바닥을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수돗가 시멘트 턱에 걸터앉아 정문을 보았다⁠. 검은 세단의 운전기사가 차 유리를 닦고 있었다⁠. 순구의 눈이 세단에 오래 머물렀다⁠. 용준은 순구 옆에 앉으려다 창고에서 부르는 소리에 일어났다⁠.

*

원단 창고는 공장 뒤편 슬레이트 지붕 건물이었다⁠. 천장까지 원단 롤이 쌓여 있었고⁠, 높은 창으로 들어온 햇빛에 실먼지가 떠다녔다⁠. 미싱 소리가 벽 너머에서 다시 고르게 돌기 시작했다⁠. 탁재황은 원단 롤 하나에 등을 기댔다⁠. 웃음이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갔다⁠. 이 사람의 웃음이 내려가는 것을 용준은 처음 보았다⁠.

“⁠반장⁠, 마당에서 다 봤지⁠. 저렇게 하는 거다⁠.⁠”

“⁠월요일에 다 찾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사내 예금 칠억⁠, 금고에 있습니까⁠?⁠”

탁재황은 원단 롤의 끝자락을 손끝으로 비볐다⁠. 안산에서 만드는 남방셔츠 원단이었다⁠. 한참 비비다가 손을 뗐다⁠.

“⁠없다⁠.⁠”

창고 안의 실먼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

“⁠칠억⁠, 지난달에 나갔다⁠. 시월 이십오일에 공장 셋 월급 줬고⁠, 원사 어음 한 장 막았다⁠. 은행이 시월부터 돈을 안 내놨다⁠. 그 돈 안 썼으면 지난달에 문 닫았다⁠. 너희 월급으로 나간 거다⁠. 너희 돈으로 너희 월급 준 거다⁠.⁠”

용준은 원단 롤을 짚었다⁠. 2027년의 용준은 부도가 나고 사내 예금을 못 받았다는 것만 알았다⁠. 돈이 부도 날에 사라진 줄 알았다⁠. 부도 한 달 전에 이미 월급 봉투로 바뀌어 직원들 손을 거쳐 갔다는 것은 몰랐다⁠. 서른 해 전 스물여덟 살의 반용준은 시월 월급 봉투를 받고 동대문에서 어머니 내복을 샀다⁠. 내복 값이 자기 사내 예금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소문이 나면 안 된다는 거다⁠. 월요일에 이백 명이 통장 들고 오면 내가 줄 게 없다⁠. 줄 게 없다는 걸 은행이 아는 순간 남창도 운봉도 대서도 그날로 끝이다⁠. 이제 알겠나⁠?⁠”

“⁠그럼 왜 월요일에 찾아가라고 하셨습니까⁠?⁠”

“⁠찾아가라고 해야 안 찾아간다⁠. 사람은 문이 열려 있으면 안 들어간다⁠. 문을 닫아야 두드리지⁠.⁠”

탁재황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마당에서 십 분 만에 사람들이 미싱 앞으로 돌아갔다⁠. 용준은 2027년에 수없이 들은 말을 떠올렸다⁠. 2027년의 동우회 술자리에서 탁재황은 직원 돈을 떼먹고 달아난 도둑이었다⁠. 서른 해 동안 술자리마다 그렇게 불렸다⁠. 도둑은 원단 롤에 기대 손끝으로 남방셔츠 원단을 비비고 있었다⁠.

“⁠회장님 개인 돈은요⁠? 성북동 댁⁠, 구미 공장 땅⁠. 구미 땅은 회장님 이름이지 않습니까⁠?⁠”

탁재황의 눈이 가늘어졌다⁠. 웃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너는 어디까지 아나⁠?⁠”

“⁠월요일에 창구 열지 마십시오⁠. 대신 회장님 집을 은행에 넣고 칠억을 채우십시오⁠. 그러면 줄이 서도 줄 게 있습니다⁠.⁠”

“⁠집을 넣으면 은행이 내가 급하다는 걸 안다⁠. 회장이 집 내놓는 회사에 은행이 돈을 주나⁠? 반장⁠, 너는 직원 돈만 보고 은행 눈은 안 본다⁠.⁠”

탁재황은 원단 롤에서 등을 뗐다⁠. 외투 깃을 세웠다⁠.

“⁠월요일 아침 아홉 시에 본사 사내 예금 창구 연다⁠. 문을 열어야 아무도 안 온다⁠. 그리고 반장⁠, 네가 마당에서 저 사람들 앞에 서서 내가 한 말을 한 번 더 해라⁠. 반장이 하면 더 믿는다⁠.⁠”

“⁠제가 안 하면요⁠?⁠”

“⁠네가 안 하면 줄이 선다⁠. 줄이 서면 하루다⁠. 하루면 네 과 열두 명도⁠, 저 안의 미싱 백 대도⁠, 대구 염색 물도⁠, 구미 하 반장 직기도 다 같이 선다⁠. 네가 고르는 거다⁠.⁠”

탁재황은 창고 문을 밀고 나갔다⁠. 마당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회장이 진돗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용준은 원단 롤 사이에 혼자 남아 미싱 소리를 들었다⁠. 따르르르⁠. 고르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박음질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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