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62자)

국제통화기금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구미역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자마자 금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외박을 하고 아침에 전화를 해⁠? 반장은 원래 외박하는 자리야⁠?⁠”

“⁠구미 공장에서 직기 고쳤어⁠.⁠”

“⁠당신이 직기를 고쳐⁠? 당신 형광등도 못 갈잖아⁠. 지난달에 형광등 갈다가 의자에서 떨어져서 내가 갈았어⁠.⁠”

용준은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뗐다⁠. 편우곤이 형광등도 못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다⁠. 금채가 숨을 한 번 고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어젯밤에 대구에서 순구 씨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전화했어⁠. 당신이 공장 사람들 주식 못 사게 하고 다닌다고⁠. 우곤이 정신 차리게 하라고⁠. 오늘 저녁에 들어와⁠. 어제 물어본 거 대답 들어야겠어⁠.⁠”

전화가 끊겼다⁠. 동전 반환구에서 십 원짜리 하나가 굴러 나왔다⁠. 용준은 십 원을 주머니에 넣었다⁠. 편우곤의 주머니에는 이미 십 원짜리가 여덟 개 있었다⁠.

*

대서은행 을지로지점은 본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대로변에 있었다⁠. 일 층 객장에 들어서자 외환 창구 앞에 줄이 길었다⁠. 밍크코트를 입은 부인이 창구 직원에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가씨⁠, 달러 있는 대로 다 줘요⁠. 우리 아들이 이번 겨울에 미국 가요⁠.⁠”

“⁠사모님⁠, 한 분당 바꿔 드릴 수 있는 한도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 운전기사 이름으로 하나 더 해요⁠.⁠”

뒤에 선 넥타이 부대가 쓴웃음을 지었다⁠. 객장 벽의 전광판에서 환율 숫자가 빨갛게 깜박였다⁠. 용준은 전광판 숫자를 보지 않고 이 층 지점장실로 올라갔다⁠. 숫자가 어디까지 가는지는 다 알았다⁠.

지점장 엄우택은 퍼터를 들고 카펫 위에서 골프공을 굴리고 있었다⁠. 오십 남짓⁠, 배가 나왔고 금테 안경을 썼다⁠. 공이 종이컵에 들어가지 않고 책상 다리를 맞혔다⁠.

“⁠어이⁠, 탁 회장네 반장⁠. 회장님 왼팔이 됐다며⁠? 나는 오른팔이야⁠. 스무 해 술 먹은 오른팔⁠.⁠”

엄우택은 퍼터를 소파에 기대 놓고 앉았다⁠. 책상 위에 누런 서류 상자 두 개가 있었다⁠. 상자 옆면에 매직으로 「⁠탁산 대구⁠」「⁠탁산 안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 아침 화물차로 올라왔어⁠. 구미 건 아직이고⁠. 월요일에 한꺼번에 돌릴 거야⁠. 백오십 명이 천만 원씩⁠, 십오억이야⁠. 요새 이만한 대출이 없어⁠. 우리 지점 실적이야⁠.⁠”

“⁠지점장님⁠, 이 서류 월요일에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엄우택이 웃었다⁠. 탁재황과는 다른 웃음이었다⁠. 탁재황은 눈으로 웃었고⁠, 엄우택은 배로 웃었다⁠.

“⁠탁 회장이 그러라면 하지⁠. 반장이 그러라면 못 해⁠. 반장⁠, 은행이 뭐 하는 데인 줄 알아⁠? 우산 장사야⁠. 날 좋을 때 빌려주고 비 오면 걷어 가는 데⁠.⁠”

“⁠지금 비 옵니다⁠.⁠”

“⁠그러니까 걷어 가지⁠.⁠”

엄우택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나서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책상 귀퉁이에 접힌 종이 한 장이 있었다⁠. 본점에서 내려온 전신문이었다⁠. 접힌 틈으로 「⁠단기 여신 회수 계획⁠」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엄우택이 종이 위에 골프 잡지를 올려놓았다⁠.

“⁠농담이야⁠. 탁 회장한테 일러바치지 마⁠. 탁 회장은 내 친구야⁠.⁠”

“⁠친구라서 우산 걷어 가는 날 먼저 알려 주실 겁니까⁠?⁠”

엄우택의 배가 웃음을 멈추었다⁠. 지점장실 벽시계가 째깍거렸다⁠. 엄우택이 퍼터를 다시 집어 들고 공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반장⁠, 나도 위에 사람이 있어⁠. 은행원은 위에서 비 온다면 비 오는 거야⁠. 월요일에 돌린다⁠. 나가 봐⁠.⁠”

공이 굴러가 이번에는 종이컵에 들어갔다⁠. 엄우택은 기뻐하지 않았다⁠. 용준은 계단을 내려오며 객장 전광판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올라올 때 보지 않은 숫자가 내려오는 동안 또 바뀌어 있었다⁠.

*

그레이슨 어패럴 서울 연락사무소는 소공동 호텔 십이 층 끝 방이었다⁠. 미국 의류회사가 아시아에서 원단을 사들이려고 낸 작은 사무실이었다⁠. 문에 영어 이름표가 붙어 있었고⁠, 안에는 책상 둘과 팩스 한 대가 전부였다⁠. 소장은 마흔 남짓의 한국계 미국인 여자였다⁠. 단발머리에 회색 바지 정장을 입었고⁠, 한국말은 또박또박했지만 받침 몇 개가 미끄러졌다⁠.

“⁠탁산섬유요⁠? 우리가 연락한 적 없는 회사인데요⁠.⁠”

“⁠압니다⁠. 제가 먼저 왔습니다⁠.⁠”

용준은 서류 가방에서 원단 한 조각을 꺼냈다⁠. 구미 열일곱 번 직기에서 하소례가 직접 잘라 준 것이었다⁠. 소장은 원단을 손끝으로 비비고 창가로 가져가 빛에 비춰 보았다⁠.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어디서 들으셨어요⁠? 우리가 고밀도 면을 찾는다는 거⁠. 뉴욕 본사에서도 몇 사람만 아는데⁠.⁠”

용준은 이틀 사이에 같은 질문을 몇 번 들었는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2027년의 용준은 이 소장을 1998년 봄 대구 공장 회의실에서 처음 만났다⁠. 소장은 회의실에서 경쟁 회사 상무에게 같은 질문을 했고⁠, 상무는 업계 소문이라고 대답했다⁠.

“⁠업계 소문입니다⁠.⁠”

“⁠업계 소문이 빠르네요⁠. 우리 본사 결정은 다음 주인데⁠.⁠”

소장은 원단을 책상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좋아요⁠. 견본 한 필⁠, 이 사양 그대로⁠. 다음 주 수요일까지⁠. 그리고 회사 재무제표 최근 것⁠. 우리는 큰 주문을 주기 전에 회사가 튼튼한지 봐요⁠. 요즘 한국 회사들 뉴스가 좀 무섭잖아요⁠.⁠”

재무제표⁠. 회사가 돈을 얼마나 벌고 얼마나 빚졌는지 적은 서류였다⁠. 탁산의 재무제표를 미국 사람이 꼼꼼히 들여다보면 단기 빚 숫자에서 눈이 멈출 것이었다⁠.

“⁠견본은 수요일까지 가져오겠습니다⁠. 재무제표는⁠.⁠”

“⁠재무제표는요⁠?⁠”

“⁠회장님 결재를 받아 오겠습니다⁠.⁠”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준은 일어서다가 버릇처럼 말했다⁠.

“⁠그럼 아삽으로 컨펌 부탁드립니다⁠.⁠”

“⁠아삽⁠?⁠”

소장이 눈을 깜박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에이 에스 에이 피⁠? 그걸 그렇게 읽어요⁠? 한국 회사 과장님이 영어를 재밌게 하시네⁠.⁠”

2027년의 사무실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던 말이었다⁠. 용준은 귀가 뜨거워져서 문을 닫고 나왔다⁠.

*

본사 복도에서 탁재황과 마주쳤다⁠. 탁재황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비서에게 서류 가방을 건네고 있었다⁠. 얼굴이 환했다⁠.

“⁠반장⁠, 남창은행 됐다⁠. 한 달 연장⁠. 봐라⁠, 웃으면서 가면 된다⁠.⁠”

탁재황이 주머니에서 인삼 사탕을 꺼내 용준 손에 쥐여 주었다⁠. 용준은 사탕을 받았다⁠.

“⁠대구 공장장이 그러더라⁠. 네 귀가 좋다고⁠. 펌프 소리를 맞혔다며⁠?⁠”

“⁠우연이었습니다⁠.⁠”

“⁠구미 하 반장은 금요일에 서류를 직접 들고 올라온다더라⁠. 비 맞을까 봐⁠. 하 반장이 원래 그렇게 꼼꼼한 사람이야⁠.⁠”

탁재황은 웃었다⁠. 용준도 웃었다⁠. 대구 공장장의 금고 이야기도⁠, 구미 탈의실의 전화도 둘 다 입에 올리지 않았다⁠. 둘은 서로가 무엇을 아는지 알았다⁠. 탁재황이 회장실 문을 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늘 저녁엔 일찍 들어가⁠. 금요일 밤은 식구랑 있는 거다⁠.⁠”

“⁠회장님도요⁠.⁠”

“⁠나는 식구가 이백 명이라 오늘 밤도 바쁘다⁠.⁠”

*

일찍 들어가지 못했다⁠. 삐삐에 상계동 집 번호가 일곱 시에 한 번⁠, 여덟 시에 한 번 찍혔다⁠. 두 번째 번호 끝에는 「⁠4444⁠」가 붙어 있었다⁠. 용준은 「⁠4444⁠」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공중전화를 찾으러 나가려는데 과원들이 양팔을 붙들었다⁠. 금요일 저녁 영업2과 과원들이 을지로 골목 포장마차로 용준을 끌고 갔다⁠. 대책반장 턱을 내라는 것이었다⁠. 비닐 천막 안에 석유난로 냄새와 꼼장어 굽는 연기가 가득했다⁠. 천막 기둥에 매달린 작은 텔레비전에서 주말 연속극이 끝나 가고 있었다⁠.

막내가 소주잔에 맥주를 붓고 소주잔을 맥주잔에 퐁당 떨어뜨렸다⁠. 과원들이 젓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반장님⁠, 이건 반장님 잔입니다⁠. 대책반장주⁠.⁠”

“⁠나는 이제 이런 거 안 마셔⁠. 다음 날 하루가 없어져⁠.⁠”

“⁠과장님 저번 주까지 세 잔 드셨습니다⁠.⁠”

용준은 잔을 받아 반만 마셨다⁠. 서른일곱 살의 간은 반 잔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 냈다⁠. 그것이 또 신기해서 용준은 나머지 반도 마셨다⁠. 과원들이 환호했다⁠.

막내는 볼이 빨개져서 용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왔다⁠.

“⁠과장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과장님 존경합니다⁠. 근데 과장님이 이번 주에 저한테 하시는 말씀은 다 저희 어머니 잔소리 같습니다⁠. 손톱 물지 마라⁠, 넥타이 엄지로 누르지 마라⁠, 컵라면 먹지 마라⁠.⁠”

“⁠네 어머니가 옳아⁠.⁠”

“⁠저희 어머니를 아십니까⁠?⁠”

“⁠알지⁠. 화곡동 반지하⁠, 장마철마다 장판 들고 말리셨지⁠.⁠”

막내가 입을 벌렸다⁠. 막내가 반지하 이야기를 회사에서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용준은 알았다⁠. 막내가 뭔가 물으려는 순간 포장마차 주인이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소리를 키웠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화면에 회색 벽과 마이크 여러 개가 놓인 탁자가 나왔다⁠. 이틀 전 새로 온 경제부총리가 종이를 들고 앉았다⁠. 부총리는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읽었다⁠.

천막 안이 조용해졌다⁠. 꼼장어가 석쇠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누군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옆 탁자에서 넥타이를 반쯤 푼 남자가 중얼거렸다⁠.

“⁠나라가 부도났다는 거 아이가⁠?⁠”

“⁠돈 꾸러 간다는 거지⁠. 부도는 아니고⁠.⁠”

“⁠꾸러 가는 집이 부도 직전이다⁠. 우리 집이 그랬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포장마차 주인이 석쇠의 꼼장어를 뒤집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내일 꼼장어 값 오르겠네⁠.⁠”

용준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다 아는 발표였다⁠. 대신 과원들의 얼굴을 보았다⁠. 영업 3년 차 대리는 잔을 든 채 굳어 있었고⁠, 경리부 출신 대리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막내는 화면이 아니라 용준을 보고 있었다⁠.

“⁠과장님⁠.⁠”

“⁠응⁠.⁠”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용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막내의 눈이 술에 젖어 있었는데 초점은 똑바로 맞아 있었다⁠. 스물여덟 살의 반용준은 영업부에서 사람 얼굴 읽는 것으로 첫 계약을 땄다⁠.

“⁠과장님⁠, 아셨지요⁠? 그래서 신청서 쓰지 말라고 하신 거지요⁠?⁠”

과원들이 하나둘 용준을 보았다⁠. 포장마차 텔레비전에서 앵커가 발표를 다시 읽었다⁠. 용준은 빈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돌렸다⁠.

“⁠월요일에 회장님 서랍에서 네 신청서 꺼내 줄게⁠. 그때 네가 찢어⁠.⁠”

막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끄덕이고 나서 한 번 더 끄덕였다⁠.

*

삐삐가 허리춤에서 떨렸다⁠. 이번에는 「⁠010⁠」이 아니었다⁠. 「⁠02⁠」로 시작하는 서울 번호 끝에 「⁠8282⁠」가 붙어 있었다⁠. 빨리빨리⁠. 용준은 포장마차 주인에게 전화를 빌렸다⁠. 줄이 꼬인 빨간 전화기였다⁠.

“⁠반장⁠, 나야⁠. 엄우택⁠.⁠”

엄우택의 목소리 뒤로 사람들 웅성거림과 전화벨 소리가 섞여 들렸다⁠. 은행 지점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방금 본점에서 전화 왔어⁠. 월요일부터 신규 대출 전부 묶어⁠. 우리사주고 뭐고 다⁠. 그러니까 너희 이십억⁠, 끝났어⁠. 상자째 돌려보낼 거야⁠.⁠”

용준은 수화기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사흘을 뛰어다닌 신청서 백오십 장이 부총리의 종이 한 장으로 끝났다⁠. 공장 사람들 집은 은행이 지켜 주었다⁠. 은행이 제 살길을 찾느라 지켜 준 것이었다⁠.

“⁠그리고 반장⁠. 이건 탁 회장한테 내가 직접 말 못 해서 너한테 하는 말이야⁠.⁠”

엄우택이 숨을 한 번 쉬었다⁠. 골프 이야기는 없었다⁠.

“⁠탁산 만기 연장⁠, 본점이 다시 본대⁠. 다음 주 수요일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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