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84자)

염색 물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서울역 새벽 승강장은 기차가 숨을 내쉬는 소리로 가득했다⁠. 새마을호 객차 문이 쉭 하고 열렸다⁠. 용준은 3호차 계단에 발을 올리다가 뒤에서 들리는 비닐봉지 소리에 돌아보았다⁠. 순구가 삶은 달걀 한 망과 사이다 두 병을 들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니 혼자 가믄 길 잃는다⁠. 대구는 내 동네다⁠.⁠”

“⁠휴가 냈어⁠?⁠”

“⁠엄마 병원 간다꼬 냈다⁠. 니 따라가는 거 아이다⁠.⁠”

순구는 용준 옆자리가 아니라 통로 건너 자리에 앉았다⁠. 기차가 한강 철교를 건널 때까지 둘은 말이 없었다⁠. 수원을 지날 무렵 순구가 달걀 하나를 통로 건너로 내밀었다⁠. 껍질이 반쯤 까져 있었다⁠.

“⁠묵어라⁠. 니 아침에 아무것도 안 묵었제⁠.⁠”

용준은 달걀을 받아 소금을 찍었다⁠. 창밖으로 서리 앉은 논이 지나갔다⁠. 용준이 손목시계를 보고 혼잣말을 했다⁠.

“⁠고속철이면 한 시간 사십 분인데⁠.⁠”

“⁠고속 뭐⁠?⁠”

“⁠아니⁠. 네 시간이 길다고⁠.⁠”

“⁠네 시간이 뭐가 기노⁠. 우리 아부지는 완행 타고 열두 시간 걸려 서울 갔다⁠. 니 요새 와 그래 급하노⁠?⁠”

용준은 대답 대신 사이다를 마셨다⁠. 탄산이 코로 올라와서 기침이 났다⁠. 순구가 등을 두드려 주다가 손을 멈췄다⁠.

“⁠내 엄마가 그 공장에서 처음 일했다⁠. 니 알제⁠?⁠”

“⁠처음⁠?⁠”

“⁠회장님이 비산동 판자 공장 할 때⁠. 직기 네 대⁠. 여공 넷 중에 하나가 우리 엄마다⁠. 내 국민학교 월사금이 거기서 나왔다⁠.⁠”

용준은 어제 회장실 벽에서 본 흑백 사진을 떠올렸다⁠. 앞치마를 두른 여공 넷⁠. 넷 중 누가 순구의 어머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는 니가 공장 가서 무슨 말을 할지 듣고 싶다⁠. 우리 엄마 공장에서⁠.⁠”

*

대구 염색공장은 금호강 가까운 공단 끝에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귀가 먹먹해졌다⁠. 높은 굴뚝에서 하얀 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공장 벽 너머에서 쇠 드럼 돌아가는 소리가 쿵쿵 울렸다⁠. 염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큼하고 쇠붙이 같은 냄새였다⁠. 장화를 신은 사람들이 물이 흥건한 바닥을 철벅거리며 오갔다⁠.

공장장은 쉰다섯쯤 된 사람이었다⁠. 키가 작고 목이 굵었으며⁠, 손등까지 남색 물이 들어 있었다⁠. 공장장은 용준이 내민 대책반장 발령 종이를 한 번 보고 접어서 돌려주었다⁠.

“⁠본사 반장님이 염색 물 구경하러 오셨소⁠?⁠”

“⁠우리사주 2차 신청서 쉰여덟 장⁠,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그거는 금요일 아침 화물차로 은행 갑니더⁠. 회장님 지시요⁠.⁠”

“⁠회장님이 저를 대책반장에 앉히셨습니다⁠. 그 서류도 대책반이 봅니다⁠.⁠”

공장장이 웃었다⁠. 웃을 때 앞니 하나가 금니였다⁠.

“⁠보시이소⁠. 보는 건 마음대로 보시고⁠, 가져가는 건 안 됩니더⁠.⁠”

공장장은 앞장서서 염색기 사이로 걸었다⁠. 거대한 쇠 통 여섯 개가 나란히 돌아가고 있었다⁠. 통마다 원단 수백 미터가 뜨거운 물 속에서 감겼다 풀렸다 했다⁠. 증기 때문에 안경이 금방 뿌옇게 흐려졌다⁠. 용준은 뿔테를 벗어 넥타이 끝으로 닦았다⁠. 자줏빛 넥타이에 하얀 김이 서렸다⁠.

세 번째 염색기 앞을 지나다 용준이 걸음을 멈추었다⁠. 드럼 도는 소리 밑에 다른 소리가 있었다⁠. 끼익⁠, 끼익⁠. 일정한 박자로 쇠가 쇠를 긁었다⁠. 서른 해 원단 회사를 다니며 공장 기계 소리를 귀로 익힌 용준에게는 낯익은 소리였다⁠.

“⁠공장장님⁠, 삼 번 염색기 순환 펌프 베어링이 나갔습니다⁠. 오늘 안에 섭니다⁠.⁠”

공장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서 호스를 정리하던 염색반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웃었다⁠.

“⁠본사 양반이 펌프 소리를 우째 듣노⁠? 우리는 귀가 다 먹어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한 시간에 한 번 끼익 소리가 길어집니다⁠. 들어 보세요⁠.⁠”

아주머니가 장갑 낀 손을 귀에 대고 몸을 기울였다⁠. 공장장은 손을 휘저었다⁠.

“⁠어제 정비했소⁠. 반장님은 서류나 보이소⁠.⁠”

염색반 아주머니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다들 장화를 신고 고무 앞치마를 둘렀다⁠. 한 아주머니가 용준의 넥타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반장님⁠, 우리 주식 사는 거 막으러 왔다메⁠?⁠”

소문은 용준보다 먼저 와 있었다⁠. 공장장이 전화로 흘린 것인지⁠, 본사에서 흘러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막내딸 내년 봄에 시집간다⁠. 주식 오르면 장롱 하나 더 해 줄라 캤다⁠. 회장님이 오른다 캤는데⁠, 반장님은 와 안 오른다 카노⁠?⁠”

용준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열흘 뒤에 부도가 난다고 말하면 오늘 오후에 사내 예금 창구로 전화가 갈 것이었다⁠. 탁재황의 말이 맞았다⁠. 말하면 하루였다⁠.

“⁠제가 주식이 안 오른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 빚내서 사지 말자는 겁니다⁠.⁠”

“⁠빚 아이믄 우리가 무슨 돈으로 사노⁠? 반장님은 넥타이가 비싸 보이는데⁠.⁠”

아주머니들이 웃었다⁠. 공장장도 웃었다⁠. 용준은 웃을 수가 없어서 안경을 다시 닦았다⁠.

*

순구의 어머니는 시장 옆 정형외과 의원 이 층 육인실에 누워 있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손마디가 굵었고⁠, 손톱 밑에 오래된 남색 물이 빠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순구가 귤 봉지를 침대 옆 서랍장에 올려놓자 어머니가 아들보다 용준을 먼저 반겼다⁠.

“⁠우곤이 왔나⁠. 니는 갈수록 서울 사람 된다⁠. 얼굴이 하얗네⁠.⁠”

“⁠어머니⁠, 허리는 좀 어떠세요⁠?⁠”

“⁠어머니⁠? 니가 언제부터 날 어머니라 캤노⁠. 맨날 아지매라 카더니⁠.⁠”

순구가 귤을 까다가 용준을 흘겨보았다⁠. 용준은 편우곤이 순구의 어머니를 아지매라 불렀다는 것도 몰랐다⁠. 어머니는 침대 손잡이를 짚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순구 니⁠, 회사 일 들었다⁠. 공장 아지매들이 다 전화로 떠든다⁠. 본사에서 높은 사람이 주식 사지 말라꼬 내려왔다꼬⁠. 그게 우곤이가⁠?⁠”

“⁠엄마⁠, 그건⁠.⁠”

“⁠니 회사 돈 빼지 마래이⁠. 회장님이 우리 살렸다⁠. 내 스물여덟에 비산동 판자 공장에서 직기 돌릴 때⁠, 회장님은 우리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월급 못 준 달에는 자기 시계 팔아서 줬다⁠.⁠”

어머니의 눈이 용준에게로 왔다⁠. 아들 친구를 보는 눈이 아니라 공장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우곤이 니는 와 회장님을 못 믿노⁠?⁠”

용준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서른 해 뒤의 일을 말할 수는 없었다⁠. 부도 다음 해 겨울 이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용준은 몰랐다⁠. 원래의 1997년에 순구는 대구로 내려간 뒤 연락이 끊겼다⁠.

“⁠회장님을 못 믿는 게 아닙니다⁠. 은행을 못 믿습니다⁠.⁠”

“⁠은행⁠?⁠”

“⁠은행이 회장님보다 먼저 지쳐요⁠.⁠”

어머니는 한참 용준을 보다가 귤 한 조각을 용준 손에 쥐여 주었다⁠. 순구가 의원 복도로 나가 공중전화로 원무과에 전화를 걸었다⁠. 수술비 이야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다음 주 화요일⁠, 수술비 삼백팔십만 원⁠. 순구의 사내 예금이 사백만 원 남짓이었다⁠.

*

저녁 여섯 시⁠, 용준과 순구가 공장으로 돌아왔을 때 삼 번 염색기가 멈춰 있었다⁠. 드럼 안에 원단이 반쯤 감긴 채 식어 가고 있었고⁠, 바닥에는 뜨거운 물이 흥건했다⁠. 정비공 둘이 펌프 덮개를 열어 놓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베어링 알이 깨져서 기름 범벅이 된 채 바닥에 굴러 나와 있었다⁠.

염색반 아주머니가 용준을 보고 장갑 낀 손으로 자기 귀를 가리켰다⁠.

“⁠반장님⁠, 다섯 시 십 분에 끼익이 길어지더니 딱 섰다⁠. 우리 귀는 다 먹은 줄 알았는데 들리긴 들리더라⁠.⁠”

정비공들이 용준을 쳐다보았다⁠. 아주머니들이 수군거렸다⁠. 공장장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와 깨진 베어링을 내려다보았다⁠. 공장장의 금니가 보이지 않았다⁠.

“⁠반장님⁠, 사무실로 좀 오이소⁠.⁠”

공장장 사무실에는 석유난로가 켜져 있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보리차가 끓었다⁠. 공장장은 창가 금고를 등지고 앉아 종이컵에 보리차를 따라 용준에게 내밀었다⁠. 금고 다이얼 위에 「⁠우리사주 2차⁠」라고 적힌 쪽지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반장님 귀는 어디서 배운 귀요⁠?⁠”

“⁠오래 들었습니다⁠.⁠”

“⁠본사 영업부에서 십 년 들어 가지고는 그 소리 못 듣소⁠. 내가 이 공장 이십 년이오⁠.⁠”

공장장은 보리차를 후후 불었다⁠.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회장님이 어젯밤 열 시에 우리 집으로 전화하셨소⁠. 내일 본사 편 과장이 내려올 거라고⁠. 편 과장 오면 웃으면서 대접하고⁠, 서류는 손도 못 대게 하고⁠, 금요일 첫 화물차로 올려 보내라꼬⁠.⁠”

용준은 종이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젯밤 열 시⁠. 탁재황이 회장실에서 용준에게 만년필로 발령장을 써 준 지 여섯 시간 뒤였다⁠. 대책반장 발령장은 서류를 보라는 종이였고⁠, 같은 날 밤의 전화는 서류에 손을 대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저한테 말씀하십니까⁠?⁠”

“⁠펌프 때문이오⁠.⁠”

공장장은 금고를 돌아보았다⁠.

“⁠내도 사내 예금이 이천 있소⁠. 우리 공장 쉰여덟 명이 거의 다 넣었고⁠. 반장님 귀가 펌프 소리를 맞혔으니⁠, 내는 반장님이 회사 소리도 맞히는 사람인가 싶어 무섭소⁠. 그래도 서류는 못 줍니더⁠. 내는 회장님 사람이오⁠. 이십 년을⁠.⁠”

난로 위 주전자가 덜컹거렸다⁠. 용준은 보리차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대구에서는 더 할 일이 없었다⁠. 쉰여덟 장은 금고 안에 있었고⁠, 금고 앞에는 회장의 사람이 이십 년을 앉아 있었다⁠.

*

공장 정문 앞에서 순구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번에는 용준이 손사래를 치기 전에 순구가 먼저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니 어디 가노⁠?⁠”

“⁠구미⁠. 직물공장 야간조가 열 시에 들어가⁠.⁠”

“⁠니 미칫나⁠. 오늘 서울서 내려와서 염색 물 다 뒤집어쓰고 또 구미 가나⁠?⁠”

“⁠금요일 아침이면 백오십 장이 은행에 가⁠. 구미 쉰두 장은 반장이 걷었대⁠. 하소례라고⁠.⁠”

순구가 하소례라는 이름에 피식 웃었다⁠.

“⁠하 반장⁠? 니 그 아지매한테 가믄 뼈도 못 추린다⁠. 본사 사람이 직포반 문지방 넘으면 북 날아온다는 소문 있다⁠.⁠”

“⁠북⁠?⁠”

“⁠직기 북⁠. 실 싣고 날아다니는 거⁠. 그거 맞으면 이마에 혹 난다⁠.⁠”

용준은 웃었다⁠. 오늘 들어 처음 웃었다⁠. 순구도 따라 웃다가 웃음을 거두었다⁠.

“⁠내는 엄마 옆에 있는다⁠. 화요일 수술이다⁠. 월요일까지 니가 뭘 내놓는지 기다릴 끼다⁠. 그라고⁠.⁠”

순구는 남은 삶은 달걀 두 개를 비닐봉지째 용준 손에 쥐여 주었다⁠.

“⁠구미 가는 버스 안에서 묵어라⁠. 하 반장한테 맞으면 이거 이마에 굴려라⁠. 혹 빠진다⁠.⁠”

용준은 달걀 봉지를 받아 들고 시외버스 정류장 쪽으로 뛰었다⁠. 공단 하늘에서 굴뚝 증기가 저녁 바람에 옆으로 누웠다⁠.

구미 가는 시외버스는 반쯤 비어 있었다⁠. 운전기사가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았다⁠. 저녁 뉴스가 오늘 환율이 하루에 오를 수 있는 끝까지 올랐다고 전했다⁠. 맨 앞자리의 할머니가 운전석 등받이를 두드렸다⁠.

“⁠기사 양반⁠, 환율이 오르믄 우리 같은 사람은 뭐가 비싸지노⁠?⁠”

“⁠할매요⁠, 기름값부터 오릅니더⁠. 그라믄 버스비도 오르고예⁠.⁠”

“⁠아이고⁠, 그라믄 내는 걸어 댕길란다⁠. 다리는 아직 공짜다⁠.⁠”

버스 안 사람들이 웃었다⁠. 용준도 웃다가 달걀 껍질을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창밖으로 공단의 불빛이 길게 이어지다가 끊겼다⁠. 2027년의 용준은 이 길을 고속도로 휴게소 커피를 마시며 수백 번 지났다⁠. 1997년의 버스는 국도를 따라 느리게 흔들렸고⁠, 흔들릴 때마다 비닐봉지 속 달걀이 서로 부딪혀 딸깍거렸다⁠. 열흘 가운데 사흘째 밤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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