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41자)

셔터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구미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새벽 첫 고속버스에 넷이 나란히 앉았다⁠. 앞줄에 금채와 하소례⁠, 뒷줄에 순구와 용준이었다⁠. 하소례는 무릎 위에 편지지를 펴 놓고 볼펜으로 한 줄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글씨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반장님⁠, 제가 써 드릴까요⁠? 저 학원에서 칠판 글씨 써요⁠.⁠”

“⁠내 글씨로 써야 된다⁠. 미국 사람이 내 글씨 보고 정한다 캤다⁠.⁠”

금채가 고개를 끄덕이고 하소례의 편지지 밑에 자기 핸드백을 받쳐 주었다⁠. 핸드백 바닥이 단단해서 글씨가 덜 흔들렸다⁠. 하소례가 다 쓴 편지를 접기 전에 소리 내어 읽었다⁠.

“⁠「⁠구미 직포반은 탁산 이백 명이 같이 가는 데로 갑니다⁠. 이백 명이 같이 못 가면 우리도 안 갑니다⁠. 1997년 11월 28일⁠. 직포반 반장 하소례⁠.⁠」⁠”

순구가 뒷줄에서 박수를 쳤다⁠. 버스 안의 다른 승객들이 돌아보았다⁠. 하소례가 뒤를 돌아보고 순구를 노려보았다⁠.

“⁠니 박수는 와 맨날 혼자 치노⁠?⁠”

“⁠대구 사람은 감동받으면 박수부터 칩니더⁠.⁠”

“⁠구미 사람은 감동받으면 가만있는다⁠. 박수는 일 끝나고 친다⁠.⁠”

“⁠구미하고 대구가 사십 분 거리인데 와 그래 다릅니꺼⁠?⁠”

“⁠사십 분이면 사투리가 두 번 바뀐다⁠.⁠”

금채가 앞줄에서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용준은 창밖을 보았다⁠. 고속도로 옆 들판이 서리로 하얬다⁠. 열흘째 아침이었다⁠.

*

을지로 본사 1층 로비에는 아홉 시 반부터 낯선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점퍼 차림의 중년 남자들이 소파와 계단참을 차지하고 누런 봉투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원사 업체 사장들이었다⁠. 봉투 안에는 오늘 돌아오는 어음 사본이 들어 있었다⁠. 로비 공중전화 세 대에 줄이 서 있었고⁠, 줄에 선 사람들은 저마다 공장 이름을 대며 다급하게 통화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원사 업체 사장 하나가 용준의 작업복 소매를 잡았다⁠. 영업2과와 십 년 거래한 사람이었다⁠.

“⁠편 과장⁠, 오늘 막히나⁠? 우리도 내일 우리 거래처한테 어음 막아야 된다⁠. 탁산이 안 막으면 우리도 월요일에 같이 간다⁠.⁠”

용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장은 소매를 놓고 봉투를 다시 무릎에 올렸다⁠. 탁산 하나가 넘어지면 줄줄이 넘어질 공장들의 이름이 사장의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

막내가 로비 한구석에서 손을 흔들었다⁠. 정장 넥타이가 반듯했다⁠. 용준이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8282를 쳐 둔 터였다⁠.

“⁠과장님⁠, 아니 아저씨⁠. 원사 업체 사장님들이 아침부터 와 계십니다⁠. 오후에 은행 마감되면 구미하고 대구에 실 걷으러 간다고 하십니다⁠. 트럭도 불러 놨답니다⁠.⁠”

“⁠김 상무는⁠?⁠”

“⁠자금부에서 전화기 세 대를 들고 계십니다⁠. 회장님은 아드님하고 아홉 시에 대서은행 가셨습니다⁠.⁠”

막내는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회장님 서랍 열쇠는 비서실에 있었습니다⁠. 제 신청서⁠, 아침에 찢었습니다⁠. 비서님이 봐주셨습니다⁠.⁠”

용준은 봉투를 받았다⁠. 안에 찢어진 신청서 두 조각이 들어 있었다⁠. 스물여덟 살의 반용준이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쓴 신청서였다⁠. 용준은 봉투를 막내에게 돌려주었다⁠.

“⁠네가 가지고 있어⁠. 서른 해 가지고 있어⁠.⁠”

*

대서은행 지점장실 문 앞에서 그레이슨 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 바지 정장 위에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하소례를 보자 소장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장님이시죠⁠? 견본 짠 분⁠.⁠”

하소례는 작업복 위에 걸친 외투 단추를 다 잠그고 있었다⁠. 소장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거칠었다⁠. 소장이 하소례의 손을 놓지 않고 잠깐 들여다보았다⁠.

“⁠직기 손이네요⁠. 우리 아버지 손이 이랬어요⁠.⁠”

하소례가 편지를 내밀었다⁠. 소장이 읽었다⁠. 한국 글씨를 한 자씩 짚어 가며 천천히 읽었다⁠. 다 읽고 접어서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들어가요⁠.⁠”

지점장실 안에는 탁재황과 아들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엄우택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퍼터는 보이지 않았고⁠, 골프 잡지도 없었다⁠. 책상 위에 본점 전신문 몇 장이 펼쳐져 있었다⁠. 탁재황은 문이 열리자 들어오는 사람을 하나씩 보았다⁠. 소장⁠, 하소례⁠, 금채⁠, 순구⁠, 작업복 차림의 용준⁠. 웃음이 얼굴에서 반쯤 내려갔다가 도로 올라왔다⁠.

“⁠식구들이 다 왔네⁠.⁠”

아들이 서류 봉투를 엄우택 앞에 밀었다⁠.

“⁠지점장님⁠, 그레이슨 어패럴이 탁산텍스에 주문 의향서를 냈습니다⁠. 이걸로 오늘 원사 어음 십이억⁠, 긴급 자금으로 돌려주십시오⁠. 다음 달에 달러로 들어옵니다⁠.⁠”

엄우택이 소장을 보았다⁠. 소장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하소례의 편지를 꺼내 엄우택 책상에 올려놓았다⁠.

“⁠의향서는 의향서예요⁠. 우리 조건은 반장님 서명이었어요⁠. 반장님 서명이 이거예요⁠. 탁산텍스로는 안 간대요⁠. 그럼 우리는 신용장 안 열어요⁠.⁠”

탁재황이 편지를 집어 들었다⁠. 하소례의 글씨를 읽었다⁠. 읽는 동안 지점장실 벽시계 초침 소리가 들렸다⁠. 탁재황은 편지를 접어 책상에 내려놓고 엄우택을 보았다⁠.

“⁠우택아⁠, 탁산텍스 말고 탁산으로 하자⁠. 탁산 이름으로 그레이슨 받고⁠, 오늘 십이억 돌려 다오⁠. 한 달만⁠. 저 친구 말대로면 연말에 환율이 이천 원 간다⁠. 그러면 달러 주문 하나로 다 갚는다⁠. 한 달만 버티면 이백 명 다 산다⁠.⁠”

탁재황이 용준을 가리켰다⁠. 처음으로 용준의 말을 자기 근거로 썼다⁠. 용준은 탁재황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환율은 정말로 연말에 이천 원 가까이 갔다⁠. 한 달만 버틴 회사들 가운데 수출하는 회사는 살아났다⁠.

엄우택이 안경을 벗었다⁠. 금테 안경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콧등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재황아⁠. 은행이 한 달을 못 버텨⁠.⁠”

용준이 이번 주 내내 하던 말이었다⁠. 같은 말이 스무 해 술친구의 입에서 나오자 탁재황은 웃지 않았다⁠.

“⁠본점이 어제 밤에 내려보낸 거다⁠.⁠”

엄우택이 전신문 한 장을 탁재황 쪽으로 돌렸다⁠.

“⁠신규 자금 전면 중단⁠. 만기 연장 중단⁠. 신용장 매입도 본점 승인 건만⁠. 우리 은행도 외국 은행한테 달러 빚이 있어⁠. 그쪽이 걷어 가니까 우리도 걷어야 돼⁠. 너한테 우산 걷는 게 아니라 나도 비 맞고 있는 거야⁠.⁠”

“⁠스무 해다⁠, 우택아⁠.⁠”

“⁠알아⁠. 그래서 내가 직접 말하는 거야⁠. 본점 사람 시키지 않고⁠.⁠”

방 안이 조용했다⁠. 아들이 서류 봉투를 무릎 위에서 접었다 폈다⁠. 하소례는 문 옆에 서서 회장을 보았다⁠. 순구는 바닥을 보았다⁠. 금채는 엄우택 책상 위의 전신문 숫자를 거꾸로 읽고 있었다⁠.

용준이 입을 열었다⁠.

“⁠지점장님⁠, 연대보증은요⁠? 편우곤 보증은 어떻게 됩니까⁠?⁠”

엄우택이 용준을 보았다⁠. 금테 안경을 다시 썼다⁠.

“⁠오늘 탁산이 어음을 못 막으면 보증은 살아 있어⁠. 월요일부터 우리 채권팀이 보증인 재산을 본다⁠. 상계동 아파트⁠.⁠”

금채의 손이 핸드백 끈을 쥐었다⁠. 탁재황이 금채를 보았다⁠. 처음으로 보는 사람처럼 보았다⁠.

“⁠편 차장 부인인가⁠?⁠”

“⁠예⁠, 회장님⁠. 아롬이 엄마예요⁠. 아롬이 피아노 학원 끊은 거 아시죠⁠?⁠”

탁재황은 대답하지 못했다⁠.

*

오후는 길었다⁠. 대서은행 일 층 객장 소파에 탁산 사람들이 흩어져 앉았다⁠. 탁재황은 아들과 지점장실에 남아 본점 사람과 전화를 했다⁠. 객장 벽의 환율 전광판 숫자가 빨갛게 깜박였다⁠. 외환 창구 앞에는 오늘도 줄이 길었다⁠. 아이를 업은 젊은 엄마가 유학 간 남편에게 부칠 달러가 모자란다고 창구 직원에게 사정했다⁠.

막내가 근처 다방에서 커피를 쟁반째 날라 왔다⁠. 설탕 둘 프림 둘⁠. 하소례가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

“⁠서울 커피는 와 이래 다노⁠?⁠”

“⁠서울 사람은 쓴 거 못 먹습니더⁠. 인생이 써서⁠.⁠”

순구가 말했고⁠, 하소례가 순구를 한 번 더 노려보았다⁠. 금채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전광판 숫자를 공책에 받아 적었다⁠. 학원 원장에게 보여 줄 거라고 했다⁠. 소장은 객장 구석 공중전화로 뉴욕에 전화를 걸어 영어로 오래 이야기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소장이 하소례 옆에 와서 앉았다⁠.

“⁠뉴욕 본사는 대구 공장 알아보래요⁠. 나는 일주일만 기다리자고 했어요⁠. 반장님 공장이 누구 이름으로든 살아 있으면⁠.⁠”

하소례는 고개만 끄덕였다⁠. 객장 시계가 네 시를 가리켰다⁠.

*

네 시 십 분⁠, 용준은 화장실에 가려고 지점장실 옆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참에서 탁재황과 아들이 마주 서 있었다⁠. 아들의 목소리가 낮았지만 계단이 소리를 위로 올려 보냈다⁠.

“⁠아버지⁠, 성북동 집이요⁠. 저는 그 집 없어도 됩니다⁠. 미국에서 방 한 칸에서도 살았어요⁠.⁠”

“⁠네 엄마가 그 집 마당에 목련을 심었다⁠. 칠십육 년에⁠.⁠”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목련은 안 죽었다⁠. 해마다 사월이면 핀다⁠.⁠”

탁재황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지 않았다⁠. 오래된 일을 말하는 목소리였다⁠.

“⁠집을 내놓으면 은행이 회장이 급하다는 걸 안다⁠. 회장이 급한 회사에 누가 원사를 대고 누가 주문을 주나⁠. 집은 마지막이다⁠. 마지막을 먼저 쓰면 그다음이 없다⁠.⁠”

“⁠아버지⁠,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탁재황이 아들을 보았다⁠. 아들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탁재황이 무언가 말하려다 계단 아래의 용준을 보았다⁠. 용준은 계단 중간에 멈춰 있었다⁠. 탁재황은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와 용준 옆을 지나갔다⁠. 인삼 사탕 냄새가 났다⁠. 아들은 계단참에 남아 창밖의 대로를 내려다보았다⁠.

*

오후 네 시 반⁠, 객장 정문 위에서 모터 소리가 났다⁠. 위잉⁠. 셔터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쇠살이 한 칸씩 내려올 때마다 철컥⁠, 철컥 소리가 객장 바닥을 울렸다⁠. 셔터 밑으로 대로의 햇빛이 점점 가늘어졌다⁠. 마지막 손님 둘이 허리를 숙이고 셔터 밑으로 빠져나갔다⁠. 셔터가 바닥에 닿았다⁠. 쿵⁠.

서른 해 전 11월 28일 오후⁠, 스물여덟 살의 반용준은 본사 3층 창가에서 길 건너 은행 셔터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소리는 길 건너까지 들리지 않았다⁠. 오늘은 셔터 바로 안쪽에서 들었다⁠. 쇠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발바닥으로 올라왔다⁠.

지점장실 계단에서 엄우택이 내려왔다⁠. 엄우택 뒤로 탁재황과 아들이 따라 내려왔다⁠. 엄우택은 객장 한가운데서 멈추고 탁재황을 보았다⁠.

“⁠재황아⁠. 어음 교환 끝났다⁠. 탁산⁠, 1차 부도다⁠.⁠”

1차 부도는 약속한 날 어음을 막지 못했다는 은행의 판정이었다⁠. 다음 영업일까지 못 막으면 최종 부도가 되었다⁠. 다음 영업일은 월요일이었다⁠. 월요일까지 십이억이 나올 데는 없었다⁠.

원사 업체 사장들의 삐삐가 객장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울렸다⁠. 누군가 공중전화로 뛰어갔다⁠. 막내가 쟁반을 든 채 굳어 있었다⁠. 순구가 의자에서 일어나다 다시 앉았다⁠. 하소례는 눈을 감았다⁠. 금채는 공책을 덮었다⁠.

탁재황은 객장 셔터 앞으로 걸어갔다⁠. 내려온 쇠살 틈으로 대로의 저녁 빛이 가늘게 들어왔다⁠. 탁재황은 셔터에 등을 댔다⁠. 웃음이 없는 얼굴이었다⁠. 열흘 동안 한 번도 내려가지 않던 웃음이 셔터와 함께 내려가 있었다⁠.

용준이 탁재황 앞으로 갔다⁠. 작업복 바짓단이 복사뼈 위에서 흔들렸다⁠.

“⁠보조⁠.⁠”

탁재황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이제 뭐가 남았나⁠?⁠”

용준은 탁재황의 눈을 보았다⁠. 웃음이 걷힌 눈가에 주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웃지 않아도 주름은 귀까지 갔다⁠.

“⁠회장님 댁이 남았습니다⁠.⁠”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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