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20자)

한 사람 몫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저녁 여섯 시⁠, 공장 담벼락 밑 가로등이 깜박거리다 켜졌다⁠. 순구가 사과 상자를 어깨에 메고 정문으로 걸어왔다⁠. 대구 사과였다⁠. 상자 옆면에 「⁠청송⁠」이라고 찍혀 있었다⁠. 순구는 경비실 앞에 상자를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사흘 사이에 볼이 홀쭉해져 있었다⁠.

“⁠막내가 삐삐 쳤다⁠. 8282⁠. 니 대기발령 받고 구미 갔다꼬⁠.⁠”

“⁠어머니는⁠?⁠”

“⁠밥 잘 드신다⁠. 의사가 걸으라 카니까 복도를 열 바퀴 돈다⁠. 회장님 덕이라꼬 하루에 세 번 말한다⁠.⁠”

순구는 사과 상자 뚜껑을 열고 하나를 꺼내 작업복 소매에 문질러 용준에게 내밀었다⁠.

“⁠사과 가져왔다⁠.⁠”

“⁠고마워⁠.⁠”

“⁠먹는 사과하고⁠, 말하는 사과⁠. 둘 다다⁠.⁠”

용준은 사과를 받아 들었다⁠. 순구가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공장 안에서 직기 소리가 담을 넘어왔다⁠.

“⁠월요일 아침에 회장님이 니 요새 어디 다니냐 물으셨다⁠. 내가 니 서류 가방에서 본 걸 말했다⁠. 소공동 호텔⁠, 미국 회사⁠, 그레이슨⁠. 회장님은 그 이름 하나 듣고 봉투를 꺼내셨다⁠. 아무것도 안 물었다꼬 서울역에서 니한테 거짓말했다⁠.⁠”

“⁠알아⁠.⁠”

“⁠알았나⁠?⁠”

“⁠너는 거짓말할 때 대답이 빨라⁠.⁠”

순구가 피식 웃었다⁠.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엄마 수술하는 동안 복도 의자에 앉아서 생각했다⁠. 내가 판 거는 니가 아이라 공장 사람들이더라⁠. 니는 대기발령 받으면 그만이다⁠. 대구 아지매들은 아이다⁠. 내 엄마 후배들이다⁠.⁠”

용준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단물이 턱으로 흘렀다⁠. 서른 해 전 부도 난 뒤 순구는 대구로 내려가 연락이 끊겼다⁠. 원단 가게를 했다가 접었다는 소식만 동우회 술자리에서 건너 들었다⁠. 순구가 사과를 들고 이 담벼락 밑까지 온 일은 원래의 1997년에는 없었다⁠.

“⁠순구야⁠. 서울역에서 물었지⁠. 내가 진짜 우곤이냐고⁠.⁠”

“⁠그래⁠.⁠”

“⁠아니야⁠.⁠”

순구가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불빛에 순구의 눈이 커다랗게 보였다⁠.

“⁠우곤이는 금요일 밤 열두 시에 돌아와⁠. 나는 영업2과 막내야⁠. 서른 해 뒤의 막내⁠.⁠”

순구는 한참 용준을 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길었다⁠. 웃음이 끝나자 순구의 얼굴이 굳었다⁠.

“⁠막내⁠? 손톱 물어뜯는 아⁠?⁠”

“⁠응⁠.⁠”

“⁠그 아가 서른 해 뒤에 이래 되나⁠? 니 지금 서른일곱 얼굴인데⁠.⁠”

“⁠쉰여덟이야⁠. 무릎 아프고⁠, 돋보기 쓰고⁠, 명예퇴직 했어⁠.⁠”

순구는 사과를 하나 더 꺼내 들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크게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씹으면서 말했다⁠.

“⁠어쩐지 니가 설거지를 한다 카더라⁠. 금채 씨가 우리 엄마한테 다 일렀다⁠. 우곤이는 결혼하고 십 년 동안 숟가락 하나 안 씻었다⁠.⁠”

“⁠그건 몰랐어⁠.⁠”

“⁠그라믄 진짜 우곤이 아이네⁠.⁠”

순구는 사과를 씹으면서 웃었고⁠, 웃으면서 눈가를 소매로 문질렀다⁠.

*

하소례는 탈의실 사물함 앞 긴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탁산텍스 동의서가 놓여 있었다⁠. 펜 뚜껑은 닫혀 있었다⁠. 순구가 사과 두 개를 들고 탈의실 문을 두드렸다⁠.

“⁠반장님⁠, 지는 본사 영업2과 곽순구입니더⁠. 대구 사람입니더⁠.⁠”

“⁠사투리 들으니까 알겠다⁠.⁠”

순구는 사과 하나를 긴 의자 끝에 놓고 하소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모자를 벗듯 고개를 숙였다⁠.

“⁠지 엄마가 육십팔 년에 회장님 비산동 판자 공장에서 직기 돌렸습니더⁠. 여공 넷 중에 하나였습니더⁠. 그다음에 대구 염색으로 옮겨서 거기서 허리가 나갔습니더⁠. 지금 대구 염색 아지매들은 다 지 엄마 후배들입니더⁠. 명절 때마다 우리 집에 떡 들고 오는 아지매들입니더⁠.⁠”

하소례는 동의서에서 눈을 들었다⁠.

“⁠그래서⁠?⁠”

“⁠회장님이 지 엄마 수술비를 주셨습니더⁠. 지는 그 돈 받고 친구를 팔았습니더⁠. 친구가 미국 회사 찾아간 거를 회장님한테 일렀습니더⁠. 그래서 오늘 회장님이 그 동의서를 반장님 무릎에 올려놓은 겁니더⁠.⁠”

순구의 목소리가 떨렸다⁠. 순구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반장님은 팔지 마이소⁠. 반장님이 구미만 살리면⁠, 지 엄마 후배들은 대구 시장에서 반장님 이름 들을 때마다 침 뱉습니더⁠. 지는 압니더⁠. 지는 벌써 그렇게 됐습니더⁠.⁠”

탈의실이 조용했다⁠. 벽 너머 직기 소리만 들렸다⁠. 하소례가 동의서를 무릎에서 내려 긴 의자 위에 놓았다⁠. 순구가 놓은 사과를 집어 작업복 소매에 문질렀다⁠.

“⁠니 친구는 어디 있노⁠?⁠”

“⁠밖에서 사과 먹고 있습니더⁠.⁠”

“⁠그 아도 사과 해야 된다⁠. 우리 반 아지매들 잠 못 자게 만든 거⁠.⁠”

*

밤 아홉 시⁠, 정문에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걸어온 여자가 나타났다⁠. 패딩 점퍼에 핸드백을 멨고⁠, 한 손에 보온 도시락 가방을 들고 있었다⁠. 금채였다⁠. 경비가 수상한 눈으로 보다가 이름을 듣고 직포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용준이 작업복 차림으로 뛰어나오자 금채가 칠부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뭐야⁠?⁠”

“⁠직포반 보조입니다⁠.⁠”

“⁠차장 대우에서 보조로⁠? 우리 집안에 이런 출세가 없네⁠.⁠”

금채는 도시락 가방을 용준 손에 쥐여 주었다⁠. 김치볶음밥 냄새가 지퍼 틈으로 새어 나왔다⁠.

“⁠아롬이가 울었어⁠. 아빠가 도장 가지고 도망갔다고⁠. 그래서 데리러 왔어⁠. 금요일 밤 열두 시에 상계동 공중전화까지 오려면 내가 끌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집은⁠.⁠”

“⁠집 얘기는 나중에⁠. 지금은 밥⁠.⁠”

직포반 사무실 석유난로 앞에서 용준은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하소례와 순구가 둘러앉았다⁠. 순구가 사과를 깎아 금채에게 내밀었다⁠.

“⁠제수씨⁠, 대구 사과입니더⁠. 청송⁠.⁠”

“⁠순구 씨⁠, 우리 남편 대구 데려가서 염색 물 뒤집어씌웠다면서요⁠? 넥타이에 남색 물 든 거 내가 다 봤어요⁠.⁠”

순구가 사과 조각을 목에 걸린 사람처럼 삼키고 기침을 했다⁠. 하소례가 순구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 번 내리쳤다⁠. 순구의 기침이 멈췄고⁠, 하소례의 손바닥 소리가 석유난로 위 주전자 소리보다 컸다⁠. 금채가 처음으로 웃었다⁠. 금채는 벽에 붙은 생산 실적표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철제 책상 위의 탁산텍스 동의서를 집어 들고 읽었다⁠. 학원에서 학생 답안지를 보는 얼굴이었다⁠.

“⁠회장님 집이 성북동이라고 했지⁠? 몇 평인데⁠?⁠”

“⁠마당 있는 이 층 집입니다⁠. 대지가 백오십 평쯤⁠.⁠”

“⁠성북동 그 정도면 요새 시세로 십억은 넘어⁠. 우리 학원 원장 언니가 작년에 성북동 집 보러 다녔어⁠. 마당 있는 집은 부르는 게 값이래⁠. 은행에 넣으면 칠억은 그냥 나와⁠. 경매로 넘어가도 칠억은 돼⁠.⁠”

하소례와 순구가 동시에 금채를 보았다⁠. 금채는 동의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회장님이 구미 쉰두 명 몫은 따로 둔 돈이 있다고 하셨다며⁠. 그럼 따로 둔 돈하고 집하고 합치면 이백 명이야⁠. 산수로는 돼⁠. 회장님이 안 하시는 거지⁠, 못 하시는 게 아니야⁠.⁠”

용준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일주일 동안 이 숫자를 머릿속에서 굴렸다⁠. 소리 내어 말한 사람은 금채가 처음이었다⁠.

*

밤 열한 시⁠, 직포동 문이 열리고 탁재황이 들어왔다⁠. 아들은 데려오지 않았다⁠. 외투 깃을 세우고 혼자였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고 서명을 받으러 온 것이었다⁠. 직기 백 대가 돌아가는 소리 사이로 탁재황이 하소례에게 걸어갔다⁠. 하소례는 열일곱 번 직기 앞에 서 있었다⁠. 금채와 순구와 용준이 하소례 뒤에 있었다⁠.

“⁠하 반장⁠, 늦게 미안하다⁠. 아침까지 기다리면 반장 마음이 더 무거울 것 같아서⁠.⁠”

탁재황이 동의서와 만년필을 내밀었다⁠. 하소례는 받지 않았다⁠.

“⁠회장님⁠, 이백 명 다 아니면 서명 안 합니더⁠.⁠”

“⁠반장⁠.⁠”

“⁠구미만 살면 우리 반 아지매들은 대구 시장 못 갑니더⁠. 안산 봉제 아지매들하고 명절에 떡 못 나눕니더⁠. 회장님이 팔십구 년에 우리 신랑 장례 때 산에 우산 들고 올라오셨지예⁠. 그때 산에 대구 염색 아지매들도 다 왔습니더⁠.⁠”

탁재황의 얼굴에서 웃음이 내려가지 않았다⁠. 웃는 얼굴 그대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반장⁠, 그럼 쉰두 명도 못 산다⁠. 내일 탁산이 넘어지면 반장 반 사람들도 다 같이 넘어진다⁠. 반장이 이백 명 손잡고 같이 물에 빠지자는 거냐⁠?⁠”

하소례가 대답하기 전에 소리 하나가 빠졌다⁠. 맨 끝 직기였다⁠. 쉭⁠, 탁 소리가 멈추고 빨간 등도 켜지지 않았다⁠. 직공이 단추를 눌러 직기를 세운 것이었다⁠. 이어서 옆 직기가 멈췄다⁠. 다음 직기가 멈췄다⁠. 직기 소리가 한 대씩 빠져나갔다⁠. 열 대⁠, 스무 대⁠. 쉭⁠, 탁의 벽이 한 장씩 허물어졌다⁠. 직공들이 직기 옆에서 귀마개를 빼고 회장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열일곱 번 직기가 멈췄다⁠. 김천에 어머니가 사는 스물한 살 직공의 손이었다⁠. 직포동이 조용해졌다⁠. 천장 형광등의 지지직 소리가 들렸다⁠. 실먼지가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하소례가 말했다⁠.

“⁠이백 명 다 아니면 안 합니더⁠.⁠”

탁재황은 조용해진 직포동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직기 백 대와 직기마다 붙어 있는 쉰두 명을 보았다⁠. 사람들의 이름을 다 아는 사람이었다⁠. 누구 손자가 돌잡이에 무엇을 잡았는지까지 아는 사람이었다⁠. 탁재황은 동의서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딸깍 소리가 직포동 끝까지 갔다⁠.

“⁠알았다⁠.⁠”

탁재황은 돌아서 걸었다⁠. 문 앞에서 멈추고 용준을 보았다⁠. 웃고 있지 않았다⁠.

“⁠보조⁠. 내일 열 시⁠, 대서은행⁠.⁠”

직포동 문이 닫혔다⁠. 아무도 직기를 다시 돌리지 않았다⁠. 순구가 먼저 손뼉을 쳤다가 아무도 따라 치지 않자 손을 내렸다⁠. 하소례가 열일곱 번 직기 단추를 눌렀다⁠. 쉭⁠, 탁⁠. 한 대가 돌기 시작했다⁠. 옆 직기가 따라 돌았다⁠. 소리가 한 대씩 돌아왔다⁠.

*

자정을 앞두고 공장 정문 수은등 아래서 금채가 패딩 지퍼를 올렸다⁠. 마지막 버스는 이미 끊겼다⁠. 금채는 오늘 밤 기숙사 빈방에서 하소례와 자기로 했다⁠.

“⁠내일이 금요일이에요⁠.⁠”

“⁠알아⁠. 열두 시⁠.⁠”

금채는 정문 옆 공중전화 부스를 보았다⁠. 금 간 데 없는 깨끗한 유리였다⁠.

“⁠오늘은 저 전화로 걸어⁠. 나도 들을래⁠. 우곤 씨가 집 얘기 또 하는지⁠.⁠”

삐삐가 떨었다⁠. 「⁠010⁠」 전화카드 남은 금액은 천육백 원이었다⁠. 용준이 번호를 누르고 수화기를 둘 사이에 들었다⁠. 금채가 수화기에 귀를 바짝 붙였다⁠.

삑⁠, 삑⁠. 기계 소리 사이가 어제보다 더 벌어져 있었다⁠. 2027년의 아내 목소리가 작았다⁠.

“⁠내일 밤 열두 시까지래⁠. 그때까지 안 깨면 기계를 어떻게 할지 우리가 정해야 한대⁠. 여보⁠, 나 그런 거 못 정해⁠.⁠”

금채가 입술을 깨물었다⁠. 용준은 수화기를 쥔 손이 떨리지 않게 부스 벽에 팔꿈치를 붙였다⁠. 아내 목소리 밑에서 가는 목소리가 올라왔다⁠. 어제보다 또렷했다⁠.

“⁠금채야⁠. 집은 괜찮다⁠. 집은 내 손으로 다시 산다⁠. 아롬이 피아노⁠.⁠”

딸깍⁠. 선이 끊겼다⁠.

금채는 끊긴 수화기를 한참 귀에 대고 있다가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형광등도 못 가는 사람이 집을 다시 산대⁠.⁠”

금채는 수화기를 걸고 부스 문을 밀었다⁠. 수은등 불빛 아래서 금채가 용준의 작업복 소매를 잡았다⁠. 처음으로 잡은 소매였다⁠. 작업복 소매가 짧아서 금채의 손가락이 용준의 손목에 닿았다⁠.

“⁠내일 열두 시 전에 끝내⁠. 우곤 씨가 저렇게 말하는 집이면⁠, 나도 걸 수 있어⁠.⁠”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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