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61자)

열흘째 밤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회장실에는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다⁠. 창가 분재 소나무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누웠다⁠. 벽에 걸린 흑백 사진 속 직기 네 대와 여공 넷이 스탠드 불빛을 반쯤 받고 있었다⁠. 밤 일곱 시⁠, 회장실 안에 사람이 아홉 있었다⁠. 탁재황과 아들⁠, 김 상무⁠, 엄우택⁠, 하소례⁠, 금채⁠, 순구⁠, 그레이슨 소장⁠, 그리고 작업복 차림의 용준이었다⁠. 소파가 모자라서 순구와 하소례는 비서실 의자를 끌고 왔다⁠. 김 상무는 열흘 내내 조이던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넣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탁재황은 책상 뒤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아들에게 내밀었다⁠. 탁산텍스 고용 승계 동의서였다⁠.

“⁠찢어라⁠. 네 도장 찍힌 거니까 네가 찢어라⁠.⁠”

아들이 동의서를 받아 두 손으로 쥐었다⁠. 종이를 찢는 소리가 방 안에서 제일 큰 소리였다⁠. 아들은 찢은 종이를 반으로 한 번 더 찢고 휴지통에 넣었다⁠.

탁재황이 엄우택을 보았다⁠.

“⁠우택아⁠, 성북동 집 넣으면 얼마 나오나⁠?⁠”

엄우택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서류철을 열었다⁠. 오후에 본점과 통화하며 만든 서류였다⁠.

“⁠회장 개인 담보 대출이면 본점도 막을 명분이 없다⁠. 회사 대출이 아니니까⁠. 칠억은 나온다⁠. 월요일 아침에⁠.⁠”

“⁠그 칠억은 사내 예금 창구로 바로 보내라⁠. 회사 계좌 거치지 말고⁠. 회사 계좌에 들어가면 채권자들이 먼저 잡는다⁠.⁠”

“⁠알았다⁠.⁠”

“⁠그리고 편우곤 보증⁠. 내 보증으로 바꿔라⁠. 집 넣고 남는 거⁠, 구미 공장 땅⁠. 내 이름으로 돼 있는 거⁠. 그것까지 다 넣어라⁠.⁠”

엄우택이 만년필을 멈추었다⁠. 금채가 소파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재황아⁠, 구미 땅까지 넣으면 너한테 남는 게 없다⁠.⁠”

“⁠그 땅에 구미 공장이 있어야 하 반장이 계약을 하지⁠. 공장 땅이 은행에 잡혀 있어도 공장은 돈다⁠. 법원에 화의 신청한다⁠. 빚 갚는 날을 미뤄 달라고 법원에 비는 거다⁠. 화의 받으면 탁산 이름은 살고⁠, 구미는 그레이슨 천을 짠다⁠. 대구하고 안산은 문 닫는다⁠. 그 사람들은 월요일에 예금 받고 퇴직금은 구미 달러 들어오는 대로 순서대로 준다⁠.⁠”

탁재황은 숨을 한 번 쉬었다⁠. 하소례를 보았다⁠.

“⁠하 반장⁠, 이제 서명할 수 있나⁠? 탁산 이름으로⁠.⁠”

하소례는 그레이슨 소장을 보았다⁠. 소장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이미 영어와 한국어로 두 벌 준비되어 있었다⁠. 소장은 오후 내내 객장 공중전화로 뉴욕과 싸웠다⁠. 하소례가 계약서를 받아 탁재황의 책상 위에 펼쳤다⁠. 탁재황이 자기 만년필을 하소례에게 건넸다⁠.

하소례는 만년필을 받아 들고 서명 칸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이름을 썼다⁠.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썼다⁠. 직기 앞에서 실을 잇는 손이었다⁠.

“⁠됐다⁠.⁠”

한마디였다⁠. 구미 직포동에서 견본 한 필을 직기에서 내렸을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순구가 박수를 치려다 하소례를 보고 손을 무릎에 내렸다⁠. 하소례가 순구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제 쳐도 된다⁠. 일 끝났다⁠.⁠”

순구가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금채도 쳤고⁠, 아들도 쳤고⁠, 김 상무도 쳤다⁠. 엄우택은 서류를 덮으며 두 번 쳤다⁠. 탁재황은 치지 않았다⁠.

*

사람들이 하나둘 회장실을 나갔다⁠. 엄우택이 마지막으로 나가다가 문간에서 탁재황을 돌아보았다⁠.

“⁠재황아⁠, 다음 주에 골프나 치자⁠. 내가 낸다⁠.⁠”

“⁠너 퍼터 못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낸다고⁠.⁠”

문이 닫혔다⁠. 회장실에는 탁재황과 용준만 남았다⁠. 탁재황은 창가로 가서 분재 소나무 가지를 손끝으로 만졌다⁠. 가위는 들지 않았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탁재황이 등을 보인 채 말했다⁠.

“⁠소문이 나면 하루였다⁠. 네가 월요일에 책상 위에서 거짓말 안 했으면 탁산은 월요일에 끝났다⁠. 너도 내가 하던 걸 했다⁠. 다음에 또 이런 날이 오면 나는 또 입을 다문다⁠.⁠”

“⁠압니다⁠.⁠”

“⁠틀린 건 하나다⁠.⁠”

탁재황이 몸을 돌렸다⁠. 스탠드 불빛이 탁재황의 얼굴 반쪽을 비추었다⁠. 웃고 있지 않았다⁠.

“⁠너희 돈을 내 돈인 줄 알았다⁠. 이백 명 이름을 다 외워서⁠, 이백 명 통장도 내 것인 줄 알았다⁠.⁠”

탁재황은 책상 서랍을 열고 인삼 사탕 봉지를 꺼냈다⁠. 봉지에 사탕이 세 개 남아 있었다⁠. 하나를 용준에게 내밀었다⁠. 용준이 받았다⁠.

“⁠월요일 아침 아홉 시에 사내 예금 창구는 내가 연다⁠. 내 손으로 준다⁠. 이백 명 이름 하나씩 부르면서⁠.⁠”

“⁠그게 회장님이 제일 잘하시는 일입니다⁠.⁠”

탁재황이 웃었다⁠. 웃음이 귀까지 갔다⁠. 열흘 동안 본 웃음 가운데 처음으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웃음이었다⁠.

“⁠보조⁠, 너는 누구냐⁠? 편우곤이는 거짓말을 못 해서 승진이 늘 한 해씩 늦었다⁠. 너는 아니다⁠.⁠”

“⁠월요일에는 편우곤 과장이 출근합니다⁠. 거짓말 못 하는 사람으로요⁠.⁠”

탁재황은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오래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용준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탁재황이 벽의 흑백 사진을 가리켰다⁠.

“⁠왼쪽에서 두 번째⁠. 곽 대리 어머니다⁠. 스물여덟이었고⁠, 곽 대리는 국민학교 2학년이었다⁠. 실 잇는 손이 제일 빨랐지⁠. 곽 대리한테 말해 줘라⁠. 내가 말하면 또 떡 주는 줄 안다⁠.⁠”

사진 속 왼쪽에서 두 번째 여공은 앞치마를 두르고 직기 옆에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눈매가 순구를 닮아 있었다⁠.

*

영업2과는 불이 꺼져 있었다⁠. 창밖 을지로 골목의 인쇄소 간판 불빛이 사무실 바닥에 네모나게 들어왔다⁠. 맨 끝 책상에서 막내가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찢어진 신청서 두 조각이 든 봉투가 놓여 있었다⁠.

“⁠과장님⁠. 아니⁠, 아저씨⁠.⁠”

“⁠일어나 봐⁠.⁠”

막내가 일어났다⁠. 넥타이 매듭이 아침에 용준이 버스에서 고쳐 준 모양 그대로였다⁠. 용준은 자기 목의 자줏빛 넥타이를 풀었다⁠. 작업복 깃에서 넥타이가 스르르 빠져나왔다⁠. 막내의 남색 넥타이를 풀고 자줏빛 넥타이를 막내 목에 걸었다⁠. 작은 고리를 만들고⁠, 넓은 끝을 두 번 감고⁠, 엄지로 누르지 않고 검지로 보조개를 하나 만들었다⁠.

“⁠좋은 넥타이 하나는 매고 다녀⁠. 큰일 있는 날⁠.⁠”

“⁠이거 사모님이 사 주신 거 아닙니까⁠?⁠”

“⁠사모님한테는 내가 말할게⁠. 월요일에 과장님이 다시 사 달라고 하실 거야⁠.⁠”

막내는 넥타이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넥타이 끝이 허리띠 버클에 꼭 맞게 닿았다⁠. 실이 아직 빳빳했고⁠, 색은 진한 자주였다⁠. 서른 해 뒤의 팥죽 빛은 아직 어디에도 없었다⁠.

“⁠과장님⁠, 월요일에 오시는 분은 오늘 과장님하고 다른 분입니까⁠?⁠”

“⁠같은 얼굴이야⁠. 손톱 물지 말고⁠, 그분 말씀 잘 들어⁠.⁠”

막내가 고개를 숙였다⁠. 한참 숙이고 있다가 들었다⁠. 눈이 젖어 있었는데 웃고 있었다⁠.

“⁠꼰대⁠.⁠”

“⁠응⁠.⁠”

*

밤 열한 시 오십 분⁠, 상계동 상가 앞 공중전화 부스⁠. 금 간 유리 틈으로 휘파람 소리가 났다⁠. 금채가 잠든 아롬을 업고 부스 옆에 서 있었다⁠. 아롬은 잠옷 위에 패딩을 걸쳤고⁠, 발에는 하얀 새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순구는 상가 셔터에 기대어 호두과자 봉지를 쥐고 있었다⁠.

“⁠우곤 씨가 오면⁠, 내가 뭐라고 해야 돼⁠?⁠”

“⁠형광등 갈 줄 아느냐고 물어보세요⁠. 모른다고 하면 과장님입니다⁠.⁠”

금채가 웃었다⁠. 웃다가 아롬이 등에서 미끄러지자 추스르며 웃음을 멈추었다⁠.

“⁠고마워요⁠. 우리 집⁠. 근데 이 말은 우곤 씨한테 할게⁠. 당신한테 하면 우곤 씨가 서운해할 거야⁠.⁠”

순구가 셔터에서 등을 뗐다⁠.

“⁠막내야⁠. 서른 해 뒤에 내 살아 있나⁠?⁠”

“⁠살아 있어⁠. 대구에서 원단 가게 해⁠. 동우회 단톡방에 이모티콘을 제일 많이 보내⁠.⁠”

“⁠단톡방이 뭐꼬⁠?⁠”

“⁠가서 봐⁠.⁠”

삐삐가 떨었다⁠. 「⁠010⁠」 용준은 부스 안으로 들어가 전화카드를 꽂았다⁠. 남은 금액 천사백 원⁠. 열흘 전 삼천 원짜리였던 카드였다⁠. 번호를 눌렀다⁠. 공⁠, 일⁠, 공⁠.

삑⁠, 삑⁠. 기계 소리 사이가 길었다⁠. 2027년의 아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열두 시야⁠.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셨어⁠. 여보⁠.⁠”

부스 밖에서 아롬이 잠결에 고개를 들었다⁠. 눈을 반쯤 뜨고 유리 너머의 아빠를 보았다⁠.

“⁠아빠⁠, 내일 피아노 학원 가⁠?⁠”

“⁠엄마한테 물어봐⁠. 엄마가 보내 준대⁠.⁠”

아롬은 대답을 듣고 만족한 얼굴로 다시 엄마 어깨에 뺨을 묻었다⁠. 금채가 아롬의 등을 토닥였다⁠. 용준은 수화기를 두 손으로 쥐었다⁠.

“⁠반용준입니다⁠.⁠”

목소리가 부스 유리에 부딪혀 돌아왔다⁠.

“⁠1969년생⁠, 쉰여덟 살⁠. 탁산섬유 영업2과 막내 반용준입니다⁠.⁠”

딸깍⁠.

*

삑⁠, 삑⁠, 삑⁠. 박자가 고르게 이어졌다⁠. 소리가 먼저 왔고⁠, 빛은 나중에 왔다⁠. 형광등이 눈꺼풀을 하얗게 물들였다⁠. 용준은 눈을 떴다⁠. 천장 형광등 갓에 날벌레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무릎이 뻣뻣했다⁠. 목이 말랐다⁠. 협탁 위에서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떨고 있었다⁠. 딩동⁠, 딩동⁠, 딩동⁠.

침대 옆 보호자 의자에서 아내가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었다⁠. 창가에는 노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가 2⁠:8로 단정히 갈라져 있었고⁠, 굵은 뿔테 안경을 콧등에 걸쳤다⁠. 예순일곱 살의 편우곤이었다⁠. 무릎 위에 자줏빛 넥타이 하나를 펼쳐 놓고 있었다⁠. 실이 일어나 보풀이 잡혔고⁠, 색은 바래서 팥죽 빛이었다⁠.

“⁠깼나⁠.⁠”

편우곤의 목소리는 갈라졌고⁠, 끝을 흐리지 않았다⁠.

“⁠자네 몸에서 열흘 누워 있었네⁠. 허리가 그렇게 아플 수가 없더구먼⁠. 운동 좀 하게⁠.⁠”

용준은 웃으려다 목이 말라 기침을 했다⁠. 편우곤이 물컵에 빨대를 꽂아 내밀었다⁠. 용준이 물을 마시는 동안 휴대전화가 또 떨었다⁠. 편우곤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돋보기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쓰고⁠, 화면을 팔 길이만큼 밀어 보았다⁠.

「⁠탁산 동우회⁠」 큰절하는 곰이 줄을 이었다⁠. 「⁠막내 깼다메⁠」 「⁠반 부장 축하⁠」 「⁠순구 형님 곰 그만 보내세요⁠」 「⁠내 맘이다⁠」 구미 직포반 사진을 프로필로 쓴 사람이 꽃다발 이모티콘을 하나 올렸다⁠.

“⁠곽순구 이 사람은 서른 해째 곰만 보내⁠.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의자에서 아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용준과 눈이 마주쳤다⁠. 아내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용준의 손을 꽉 쥐었다⁠. 손이 떨렸다⁠. 한참 쥐고 있다가 아내가 첫마디를 했다⁠.

“⁠깼으면 됐어⁠. 근데 금채가 누구야⁠?⁠”

창가의 편우곤이 헛기침을 했다⁠.

“⁠제 집사람입니다⁠.⁠”

아내가 노인을 돌아보았다⁠. 노인과 남편을 번갈아 보았다⁠.

“⁠어르신 부인 이름이 왜 우리 남편 입에서 나와요⁠? 열흘 동안⁠?⁠”

“⁠그게⁠, 말하자면 깁니다⁠. 서른 해쯤⁠.⁠”

아내는 기가 막힌 얼굴로 일어나 간호사실로 뛰어갔다⁠. 복도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선생님⁠, 우리 남편 깼어요⁠! 근데 이상한 할아버지가 있어요⁠!⁠”

편우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넥타이를 집었다⁠. 넥타이를 두 손으로 쥐고 한참 보다가 용준의 손에 올려놓았다⁠.

“⁠이거 내 결혼기념일에 집사람이 사 준 건데⁠, 자네가 막내 목에 매 줬더구먼⁠. 월요일에 출근했더니 막내가 매고 있었네⁠. 집사람한테 한 소리 들었지⁠.⁠”

용준은 넥타이를 쥐었다⁠. 손등에 검버섯이 있었다⁠. 넥타이를 쥔 손 위로 편우곤의 손이 덮였다⁠. 두 손 다 마디가 굵었다⁠. 협탁 위에서 휴대전화가 또 떨었고⁠, 화면에 곰 한 마리가 두 번 절을 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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