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15자)

계약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새벽 첫 기차 옆자리의 노인은 돋보기를 코끝에 걸고 신문을 팔 길이만큼 밀어 읽고 있었다⁠. 용준은 노인의 신문을 곁눈질하다가 버릇처럼 말했다⁠.

“⁠어르신⁠, 돋보기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노인이 돋보기 너머로 용준을 보았다⁠.

“⁠젊은 사람이 돋보기를 와 찾노⁠?⁠”

용준은 그제야 신문 제목이 맨눈으로 다 읽힌다는 것을 알았다⁠. 「⁠외환 시장 불안 계속⁠」 웃음이 나서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신문을 반으로 접어 무릎에 놓았다⁠.

“⁠우리 아들이 서울 무역 회사 다니는데 어제 명예퇴직 하라 카더라⁠. 서른다섯에 명예가 뭐꼬⁠. 명예는 우리 같은 늙은이가 받는 기지⁠.⁠”

“⁠명예는 봉투 겉에만 크게 찍혀 있습니다⁠.⁠”

“⁠니도 받았나⁠?⁠”

“⁠서른 해 뒤에 받습니다⁠.⁠”

노인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얼굴로 돋보기를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닦고 나서 한 번 더 입김을 불어 닦았다⁠. 기차가 대전을 지났다⁠. 창밖 들판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

구미 공장 정문 경비실 앞에서 하소례가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첫 기차로 내려온 용준의 손에는 출장 가방과 견본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하소례는 용준의 위아래를 훑었다⁠. 사흘째 같은 와이셔츠였다⁠.

“⁠대기발령 받았다메⁠.⁠”

“⁠소문이 빠르네요⁠.⁠”

“⁠소문이 직기보다 빠르다 캤제⁠. 니 이제 본사 차장 아이다⁠.⁠”

하소례는 경비실 창문으로 손을 넣어 비닐에 싼 작업복 한 벌을 꺼냈다⁠. 회색 작업복 가슴에 「⁠탁산섬유 구미⁠」라는 글씨가 박혀 있었다⁠.

“⁠갈아입어라⁠. 오늘부터 니는 직포반 보조다⁠. 내 밑이다⁠. 월급은 없다⁠. 점심은 준다⁠.⁠”

탈의실에서 작업복을 입어 보니 바짓단이 복사뼈 위로 올라갔다⁠. 편우곤의 다리가 작업복 주인보다 길었다⁠. 소매도 손목 위에서 끝났다⁠. 직포동으로 들어가자 아주머니들이 직기를 멈추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아이고⁠, 차장님이 보조로 강등됐네⁠.⁠”

“⁠바지가 칠부다⁠. 요새 서울서 저게 유행이가⁠?⁠”

“⁠넥타이는 와 맸노⁠? 작업복에 넥타이 매는 보조는 처음 본다⁠.⁠”

용준은 작업복 깃 사이로 나온 자줏빛 넥타이를 내려다보았다⁠. 벗을 생각을 못 했다⁠. 하소례가 다가와 넥타이 끝을 집어 작업복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직기에 말려 들어가믄 니 목 날아간다⁠. 넥타이는 내가 가질 때까지 니 목에 붙어 있어야 된다⁠.⁠”

아주머니들이 웃었다⁠. 용준도 웃었다⁠. 귀마개를 받아 끼우자 직기 소리가 솜에 싸인 것처럼 멀어졌다⁠. 서른 해 원단을 팔면서 직포반 보조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원사 자루를 어깨에 메고 직기 사이를 오가다 보니 오전이 갔다⁠. 어깨가 뻐근했고⁠, 그게 좋았다⁠.

열일곱 번 직기의 젊은 직공이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 왔다⁠.

“⁠보조님⁠, 커피 드이소⁠. 오늘 회장님이 미국 사람 데리고 오신다꼬 반장님이 아침부터 머리를 두 번 빗었어예⁠.⁠”

“⁠세 번 빗었다⁠.⁠”

직기 사이에서 하소례가 소리쳤다⁠. 직기 소리를 뚫고 들리는 목소리였다⁠. 젊은 직공이 목을 움츠렸고⁠, 실타래 하나가 날아와 직공의 엉덩이에 맞고 굴렀다⁠. 용준은 커피를 마시다 웃음이 터져 종이컵을 놓칠 뻔했다⁠.

*

열한 시⁠, 검은 세단 두 대가 정문으로 들어왔다⁠. 앞차에서 탁재황이 내렸고⁠, 뒤차에서 그레이슨 소장과 서른 남짓한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탁재황과 눈매가 닮았고⁠, 회장보다 비싸 보이는 양복을 입었다⁠. 탁재황의 아들이었다⁠. 탁산텍스 대표 명함을 소장에게 건네며 영어로 인사했다⁠. 발음이 매끄러웠다⁠.

탁재황은 직포동 문간에서 작업복 차림의 용준을 보았다⁠. 한 박자 멈췄다가 웃었다⁠.

“⁠보조가 잘 어울리네⁠. 바지는 좀 짧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덕분은 무슨⁠. 네가 고른 거다⁠.⁠”

탁재황은 직포동 안으로 들어가 아주머니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름을 부르고⁠, 손자 안부를 묻고⁠, 남편 허리를 물었다⁠. 직기 소리 때문에 아주머니들은 회장의 입 모양을 보고 웃었다⁠. 소장은 회장 뒤를 따라가지 않고 열일곱 번 직기 앞에 멈춰서 원단이 나오는 자리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

점심은 공장 식당의 동태찌개였다⁠. 탁재황은 공장장실에서 따로 먹었고⁠, 아들은 식당 구석에서 혼자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비싼 양복을 힐끔거리며 멀찍이 앉았다⁠. 용준은 식판을 들고 아들 맞은편에 앉았다⁠.

“⁠작업복 입은 분이 본사 차장님이셨다면서요⁠.⁠”

“⁠어제까지요⁠.⁠”

아들은 찌개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고 얼굴을 찡그렸다⁠. 맵다는 얼굴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버지는 저한테 회사를 물려주실 생각이 없으셨어요⁠. 섬유는 사양 산업이라고⁠, 너는 은행 가라고⁠. 이번 주에 처음 저를 부르셨어요⁠. 도장 찍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오셨습니까⁠?⁠”

“⁠아버지가 처음으로 저한테 부탁을 하셨어요⁠.⁠”

아들은 찌개를 한 숟가락 더 떠먹었다⁠. 이번에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차장님⁠, 저는 이 공장 직기가 몇 대인지도 몰라요⁠. 저 아주머니들 이름도 몰라요⁠. 아버지는 다 아시죠⁠. 저는 그게 무서워요⁠.⁠”

용준은 대답 대신 김치 접시를 아들 쪽으로 밀어 주었다⁠. 아들이 김치를 집어 먹고 물을 한 컵 다 마셨다⁠. 탁재황의 아들도 이 열흘 안에 처음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

직포반 사무실은 좁았다⁠. 철제 책상 둘⁠, 석유난로 하나⁠, 벽에 붙은 생산 실적표⁠. 탁재황과 아들이 소파에 앉았고⁠, 소장은 철제 의자에 앉았다⁠. 하소례는 서 있었다⁠. 용준은 문간에 작업복 차림으로 기대어 있었다⁠. 하소례가 용준을 증인으로 세웠다⁠. 회장 앞에서 혼자 듣지 않겠다고 했다⁠.

아들이 서류 봉투를 열었다⁠. 「⁠탁산텍스 고용 승계 동의서⁠」

“⁠구미 직포반 쉰두 명 모두 이번 주말부터 탁산텍스 소속이 됩니다⁠. 월급은 지금 그대로⁠, 공장도 그대로⁠, 하시는 일도 그대로입니다⁠. 그레이슨 주문은 탁산텍스가 받습니다⁠. 달러로 들어옵니다⁠.⁠”

탁재황이 아들의 말을 받았다⁠.

“⁠하 반장⁠, 쉽게 말하마⁠. 탁산은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라가 저 모양이다⁠. 내일 탁산이 넘어지면 구미도 같이 넘어진다⁠. 그 전에 구미를 옆 배로 옮겨 태우는 거다⁠. 쉰두 명 일자리가 산다⁠.⁠”

하소례는 동의서를 집지 않았다⁠. 대신 문간의 용준을 보았다⁠.

“⁠보조⁠, 니 할 말 있나⁠?⁠”

용준은 귀마개를 빼서 작업복 주머니에 넣었다⁠.

“⁠동의서에 사내 예금 얘기가 없습니다⁠.⁠”

아들이 눈썹을 찡그렸다⁠. 탁재황은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쉰두 명 사내 예금은 탁산에 남습니다⁠. 탁산텍스로 가는 건 일자리입니다⁠. 열다섯 해 모은 예금은 넘어지는 배에 두고 내리는 겁니다⁠. 일자리만 옆 배로 옮기고 돈은 두고 가는 거예요⁠.⁠”

“⁠일자리가 돈보다 무겁다⁠.⁠”

탁재황이 처음으로 웃음을 걷고 말했다⁠.

“⁠차장⁠, 아니 보조⁠. 너는 돈 얘기만 한다⁠. 사내 예금 칠억은 이미 너희 월급으로 나갔다⁠. 없는 돈을 두고 가는 거다⁠. 있는 일자리를 들고 가는 거고⁠. 열다섯 해 예금을 찾겠다고 쉰두 명이 탁산이랑 같이 가라앉으면 그건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거냐⁠?⁠”

탁재황의 말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용준은 그것이 제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럼 대구 염색 쉰여덟 명하고 안산 마흔 명은요⁠? 그 사람들은 옆 배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따로 본다⁠.⁠”

“⁠어떻게요⁠?⁠”

탁재황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들이 서류를 정리하는 척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석유난로 위 주전자가 덜컹거렸다⁠.

*

소장이 철제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수첩을 덮었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저는 원단을 사러 왔지 회사 싸움을 보러 온 게 아니에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소장은 하소례를 보았다⁠.

“⁠어제 견본 봤어요⁠. 뉴욕에 사진 보냈는데 다들 좋다고 해요⁠. 그런데 이 천은 기계가 짠 게 아니라 사람이 짠 거잖아요⁠. 밤새 바닥에 물 뿌리면서⁠.⁠”

하소례가 용준을 흘끗 보았다⁠. 소장은 계속 말했다⁠.

“⁠그래서 조건을 하나 걸게요⁠. 반장님 서명이요⁠. 이 천을 짠 반장님이 탁산텍스에서 일하겠다고 서명하시면⁠, 그날로 신용장 열어요⁠. 외국 바이어 은행이 대금을 보증하는 서류요⁠. 반장님이 서명 안 하시면 우리는 다른 공장 찾을 거예요⁠. 대구에도 좋은 공장 있다고 들었어요⁠.⁠”

대구의 좋은 공장⁠. 서른 해 전 이 주문을 받아 살아난 경쟁 회사였다⁠. 용준이 서른 해를 다닌 회사였다⁠. 용준은 문틀을 짚었다⁠.

탁재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이 돌아와 있었다⁠.

“⁠좋은 조건이네⁠. 하 반장⁠,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

탁재황은 하소례와 단둘이 이야기하려 했다⁠. 하소례가 고개를 저었다⁠.

“⁠보조도 같이 듣습니더⁠. 지 혼자 들으면 나중에 우리 반 아지매들한테 뭐라 캐야 할지 모릅니더⁠.⁠”

탈의실이었다⁠. 철제 사물함 맨 끝⁠, 하소례의 사물함 문 안쪽에 남편 사진이 붙어 있었다⁠. 탁재황은 사진 앞에 서서 한참 보았다⁠. 사진 속 남자는 스패너를 들고 웃고 있었다⁠.

“⁠이 사람 장례 때 비가 왔지⁠. 팔십구 년 칠월⁠.⁠”

“⁠예⁠. 회장님이 우산 들고 산까지 올라오셨습니더⁠.⁠”

“⁠올라갔지⁠.⁠”

탁재황은 사진에서 눈을 떼고 하소례를 보았다⁠. 목소리가 낮았다⁠. 회장실에서도⁠, 마당에서도 듣지 못한 목소리였다⁠.

“⁠하 반장⁠, 구미 쉰두 명 사내 예금⁠. 내 돈으로 준다⁠. 내일 아침⁠, 탁산텍스 동의서에 반장 서명이 들어가면 그날 오후에 쉰두 명 통장에 다 넣어 주마⁠. 성북동 집 말고 내가 따로 둔 돈이 있다⁠. 쉰두 명 몫은 된다⁠.⁠”

하소례의 어깨가 조금 흔들렸다⁠. 탁재황은 말을 이었다⁠.

“⁠대구하고 안산까지는 안 된다⁠. 이백 명 몫은 내 주머니에 없다⁠. 구미만이다⁠. 반장이 고르면 쉰두 명은 일자리도 살고 예금도 산다⁠. 열다섯 해 모은 돈⁠, 딸 등록금 하고 남은 돈⁠, 다 산다⁠.⁠”

탁재황은 하소례 딸의 등록금까지 알고 있었다⁠. 직원 이백 명의 집안일을 다 외우는 사람이었다⁠. 외운 것을 이렇게 쓸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하소례는 사물함 문을 손으로 짚었다⁠. 남편 사진이 하소례의 손바닥 바로 옆에 있었다⁠. 하소례는 오래 말이 없다가 용준을 보았다⁠.

“⁠보조⁠, 니 같으면 우짜겠노⁠?⁠”

용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쉰두 명의 열다섯 해와 백사십팔 명의 열다섯 해였다⁠. 서른 해 원단을 팔면서 이런 숫자를 놓고 골라 본 적은 없었다⁠. 2027년의 용준은 명예퇴직 봉투 하나를 받았을 뿐이었다⁠.

“⁠제가 고를 일이 아닙니다⁠.⁠”

“⁠니가 끌고 온 일이다⁠.⁠”

하소례는 사물함 문을 닫았다⁠. 자물쇠가 딸깍 잠겼다⁠. 남편 사진이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회장님⁠, 내일 아침까지 생각하겠습니더⁠.⁠”

“⁠그래⁠. 내일 아침 아홉 시에 아들이 서류 들고 온다⁠.⁠”

탁재황은 탈의실 문을 열다가 돌아보았다⁠. 용준을 보았다⁠.

“⁠보조⁠. 너는 지금 나보다 나쁜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쉰두 명이라도 살리자고 하고⁠, 너는 이백 명 다 아니면 다 죽자고 한다⁠. 네가 이기면 아무도 안 산다⁠.⁠”

문이 닫혔다⁠. 직포동에서 직기 소리가 벽을 넘어왔다⁠. 하소례는 사물함에 이마를 대고 서 있었다⁠. 용준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귀마개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지금은 아무 소리도 막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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