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73자)

인감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새벽 다섯 시 반⁠, 안방에서 금채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용준은 양말 바람으로 장롱 앞에 쪼그려 앉았다⁠. 두 번째 서랍⁠. 겨울 내복 밑⁠. 편우곤이 잠꼬대로 일러 준 자리였다⁠. 손을 넣자 내복의 보풀이 손등을 간질였다⁠. 손끝에 통장 하나가 먼저 닿았다⁠. 비상금 통장이었다⁠. 용준은 통장을 건드리지 않고 통장 밑을 더듬었다⁠. 딱딱한 원통이 손에 잡혔다⁠. 상아색 인감도장이 빨간 인주 통과 함께 비단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아빠 뭐 해⁠?⁠”

용준은 주머니를 쥔 채 굳었다⁠. 방문 틈에 아롬이 이불을 질질 끌고 서 있었다⁠.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아빠 도장 찾아⁠?⁠”

“⁠응⁠. 회사에서 쓸 데가 있어서⁠.⁠”

“⁠엄마가 도장은 내복 밑에 숨겨⁠. 아빠가 잃어버린다고⁠.⁠”

“⁠아빠가 그렇게 잘 잃어버려⁠?⁠”

“⁠응⁠. 작년에 아빠 도장 잃어버려서 엄마가 동사무소 세 번 갔어⁠.⁠”

아롬은 하품을 하고 이불을 끌고 화장실로 갔다⁠. 용준은 비단 주머니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서랍을 닫는 손이 떨려서 서랍이 끝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한 번 더 밀었다⁠. 내복이 걸려서 서랍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열린 채 남았다⁠. 용준은 서랍 틈을 보고 있다가 현관으로 나갔다⁠. 아롬이 다시 나오기 전에 나가야 했다⁠.

*

동사무소는 아홉 시에 문을 열었다⁠. 「⁠인감증명⁠」 창구 앞에 노인 둘이 먼저 와 있었다⁠. 용준은 편우곤의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창구 직원이 주민등록증의 사진과 용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본인 맞으시죠⁠?⁠”

“⁠예⁠.⁠”

“⁠사진보다 젊어 보이시네요⁠. 요새 다들 늙어 보이는데⁠.⁠”

용준은 주민등록증 사진 속 편우곤을 내려다보았다⁠. 증명사진 속 편우곤은 입을 꾹 다물고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던 날도 무언가를 참고 있었던 얼굴이었다⁠.

직원은 웃으며 도장을 찍었다⁠. 인감증명서 한 장이 나왔다⁠. 편우곤의 도장 자국이 붉게 찍혀 있었다⁠. 용준은 증명서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비단 주머니 옆이었다⁠. 몸이 편우곤이라서 서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서류가 제일 무서웠다⁠.

*

대서은행 지점장실에는 엄우택과 탁재황이 먼저 앉아 있었다⁠. 탁재황은 소파 한가운데서 인삼 사탕을 까고 있었다⁠. 엄우택은 퍼터를 들고 있지 않았다⁠. 책상 위에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연대보증 약정서⁠」

“⁠차장⁠, 왔나⁠. 앉아⁠.⁠”

탁재황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엄우택이 서류를 용준 앞으로 밀었다⁠.

“⁠반장⁠, 아니 차장이지⁠. 본점 조건이야⁠. 탁산 만기를 다음 주 월요일까지 연장한다⁠. 대신 회사 자금 담당 임원 한 사람이 연대보증을 서야 해⁠. 김 상무는 작년에 이미 다른 대출에 섰고⁠. 그래서 대책반장⁠.⁠”

연대보증은 회사가 빚을 못 갚으면 보증 선 사람이 자기 재산으로 대신 갚겠다는 약속이었다⁠. 편우곤의 재산은 상계동 아파트 하나였다⁠. 금채의 친정 돈이 들어 있고 아롬의 학교가 있는 집이었다⁠.

“⁠월요일까지면 금요일 어음은요⁠?⁠”

“⁠금요일 어음은 금요일 일이고⁠. 오늘 대서가 문 닫으면 금요일도 없어⁠.⁠”

탁재황이 사탕을 입에 넣었다⁠. 웃는 얼굴로 용준을 보았다⁠.

“⁠차장⁠, 네가 서면 그레이슨은 네가 맡아라⁠. 계약을 탁산 이름으로 할지 다른 이름으로 할지 네가 정해⁠. 탁산텍스는 보험이다⁠. 부도가 나면 구미가 같이 쓸려 가지 않게 우산 하나 펴 둔 거다⁠.⁠”

“⁠그레이슨 이름은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내가 이 회사 회장이다⁠. 이 회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국 다 듣는다⁠.⁠”

탁재황은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용준은 약정서를 보았다⁠. 보증인 칸에 편우곤의 이름이 타자로 이미 쳐져 있었다⁠. 도장만 찍으면 되었다⁠. 여기서 안 찍으면 오늘 오후에 대서은행이 대출을 거둬들이고⁠, 탁산은 금요일까지 갈 것도 없이 오늘 닫힌다⁠. 견본도⁠, 그레이슨도⁠, 하소례의 사물함 속 쉰두 장도⁠, 젊은 직공의 이백만 원도 오늘 같이 닫힌다⁠. 찍으면 금요일까지 사흘이 생긴다⁠. 사흘 대신 편우곤의 집이 걸린다⁠.

편우곤은 이 자리에 없었다⁠. 2027년 병실에서 아롬의 운동화를 걱정하고 있었다⁠. 집주인이 없는 자리에서 용준은 집을 걸었다⁠.

용준은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도장에 인주를 묻혔다⁠. 인주 통 뚜껑을 여는 소리가 지점장실에서 제일 큰 소리였다⁠. 도장을 보증인 칸에 대고 힘을 주었다⁠.

꾹⁠.

탁재황이 손뼉을 한 번 쳤다⁠. 엄우택이 약정서를 들어 도장 자국을 확인하고 서랍에 넣었다⁠. 엄우택은 용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월요일까지⁠. 본점에 지금 올린다⁠.⁠”

*

회장실로 돌아오자 탁재황은 외투를 벗지 않은 채 책상 서랍을 열었다⁠. 종이 한 장을 꺼내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일주일 전 대책반장 발령장을 쓰던 만년필이었다⁠.

“⁠차장⁠, 수고했다⁠. 오늘부로 대기발령이다⁠.⁠”

용준은 서 있는 채로 탁재황을 보았다⁠. 탁재황은 종이에 몇 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보증 서라고 하시고 바로 내보내십니까⁠?⁠”

“⁠보증은 회사를 위해 선 거고⁠, 대기발령은 회사를 위해 내는 거다⁠. 둘 다 회사 일이다⁠.⁠”

탁재황은 종이를 접어 용준 앞에 밀었다⁠.

“⁠구미 공장하고 그레이슨은 탁산텍스로 간다⁠. 우리 아들 이름이다⁠. 금요일에 탁산이 어음을 못 막아도 구미 쉰두 명은 탁산텍스에서 월급 받는다⁠. 그레이슨 달러로⁠. 네가 바라던 거 아니냐⁠? 사람 살리는 거⁠.⁠”

“⁠대구 쉰여덟⁠, 안산 마흔⁠, 본사 사람들은요⁠? 사내 예금 칠억은요⁠?⁠”

“⁠다 살리려다 다 죽는다⁠.⁠”

탁재황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웃음은 그대로였다⁠.

“⁠팔십 년에 내가 배운 거다⁠. 배에 물이 들어오면 짐을 버린다⁠. 사람을 버리는 게 아니라 짐을 버리는 거다⁠. 대구 염색은 원래 적자였고 안산은 중국 공장한테 이미 졌다⁠. 구미가 살면 탁산이라는 이름은 남는다⁠. 이름이 남으면 언젠가 다시 부른다⁠.⁠”

“⁠사내 예금은 짐입니까⁠?⁠”

탁재황이 처음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차장 대우 명함⁠, 남은 거 다오⁠. 다시 쓸 데가 있을지 모르니까⁠.⁠”

용준은 안주머니에서 명함 통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오백 장 가운데 열두 장이 줄어 있었다⁠. 탁재황은 명함 통을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 막내의 신청서가 들어 있는 서랍이었다⁠.

“⁠곽 대리를 미워하지 마라⁠. 곽 대리는 어머니를 살렸다⁠. 너도 어머니가 있으면 똑같이 했다⁠.⁠”

*

대기발령장을 주머니에 넣은 채 용준은 소공동 호텔 십이 층으로 갔다⁠. 견본 꾸러미는 신문지에 싸인 채 겨드랑이에 있었다⁠. 그레이슨 소장은 팩스 기계 앞에서 종이를 뜯고 있었다⁠. 용준을 보고 팩스 종이를 흔들었다⁠.

“⁠차장님 회사 회장님이 방금 팩스 보내셨어요⁠. 탁산텍스 사업자 등록증⁠. 어제 날짜네요⁠.⁠”

“⁠견본 가져왔습니다⁠.⁠”

용준은 신문지를 풀었다⁠. 소장이 원단을 창가로 가져가 빛에 비춰 보았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원단을 손바닥에 올려 무게를 가늠했다⁠.

“⁠좋네요⁠. 진짜 좋네요⁠. 누가 짰어요⁠?⁠”

“⁠구미 직포반입니다⁠. 반장이 하소례라고⁠, 직기 소리만 듣고 고장을 짚는 사람입니다⁠. 밤새 여덟 대를 돌렸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탁산텍스로 가요⁠?⁠”

“⁠회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차장님은요⁠?⁠”

“⁠저는 오늘 대기발령 받았습니다⁠.⁠”

소장이 원단을 내려놓고 용준을 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우리는 새 회사랑 계약하는 거 흔해요⁠. 어제 생긴 회사라도 공장이 있고 기계가 있고 사람이 있으면 돼요⁠. 재무제표는 깨끗할수록 좋고요⁠. 그런데 차장님이 왜 대기발령이 됐는지는 궁금하네요⁠.⁠”

“⁠직원 돈 이야기를 해서요⁠.⁠”

소장은 대답 대신 수첩을 펼쳤다⁠. 볼펜으로 무언가를 적었다⁠.

“⁠내일 구미 공장에 직접 갈게요⁠. 기계 말고 사람을 보고 싶어요⁠. 이 천을 짠 사람들이 누구 이름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지⁠. 뉴욕 본사는 그런 걸 안 묻는데⁠, 나는 물어요⁠.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거든요⁠. 팔십 년에 우리 아버지 공장도 문 닫았어요⁠.⁠”

용준은 고개를 숙였다⁠. 소장이 견본 원단 끝을 가위로 조금 잘라 봉투에 넣었다⁠.

“⁠나머지는 가져가세요⁠. 내일 반장님한테 직접 받을게요⁠.⁠”

*

영업2과 책상에는 개인 물건이 별로 없었다⁠. 편우곤의 책상 서랍에는 볼펜 한 다스⁠, 위장약⁠, 아롬이 그린 아빠 얼굴 그림 한 장이 있었다⁠. 그림 속 아빠는 머리를 2⁠:8로 가르고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용준은 그림을 서류 봉투에 넣었다⁠.

과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용준을 보았다⁠. 대기발령 소식은 용준보다 먼저 3층에 와 있었다⁠. 순구의 책상은 비어 있었다⁠. 책상 위에 호두과자 부스러기가 몇 알 남아 있었다⁠.

막내가 다가와서 서류 봉투를 받아 들었다⁠.

“⁠차장님⁠, 아니 과장님⁠. 아니⁠.⁠”

“⁠그냥 아저씨라고 해⁠.⁠”

“⁠들어 드리겠습니다⁠.⁠”

막내는 봉투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1층 로비에서 봉투를 돌려주며 막내가 목소리를 낮췄다⁠.

“⁠금요일에 제가 할 일 있으면 삐삐 쳐 주십시오⁠. 8282 치시면 뛰어가겠습니다⁠.⁠”

*

상계동 아파트 현관문은 체인이 채워져 있었다⁠. 문이 손가락 세 마디만큼 열렸고⁠, 틈으로 금채의 얼굴이 반만 보였다⁠. 금채의 눈이 빨갰다⁠.

“⁠대서은행에서 전화 왔어⁠. 오후 세 시에⁠. 편우곤 씨 연대보증 확인 전화래⁠. 보증인 댁이 맞냐고⁠.⁠”

“⁠사모님⁠.⁠”

“⁠아롬이가 그러더라⁠. 아빠가 새벽에 도장 찾았다고⁠. 장롱 서랍이 덜 닫혀 있더라⁠.⁠”

금채는 문틈으로 가방 하나를 밀어 냈다⁠. 편우곤의 출장 가방이었다⁠. 가방이 복도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우곤 씨 와이셔츠 세 벌⁠, 속옷⁠, 양말⁠. 금요일까지 이걸로 살아⁠.⁠”

“⁠이 집은 금요일에 제가⁠.⁠”

“⁠내가 하나만 부탁했어⁠. 이 집 건드리지 말라고⁠. 당신이 이백 명 지키는 거 알아⁠. 근데 당신이 지키는 이백 명 안에 우리 집은 없었어⁠.⁠”

금채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숫자를 불러 주는 목소리였다⁠.

“⁠금요일 밤 열두 시에는 저 공중전화로 와⁠. 우곤 씨 돌려주는 거⁠, 그거 하나는 지켜⁠.⁠”

문이 닫히려다 다시 열렸다⁠. 체인 틈으로 작은 손이 나왔다⁠. 아롬이었다⁠. 아롬의 손에 삐삐가 들려 있었다⁠.

“⁠아빠⁠, 이거 놓고 갔어⁠. 이거 없으면 아빠 못 찾아⁠.⁠”

용준은 삐삐를 받았다⁠. 아롬의 손가락이 차가웠다⁠. 문이 닫히고 체인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

밤 열두 시⁠, 상가 앞 공중전화 부스에 출장 가방을 세워 두고 용준은 전화카드를 꽂았다⁠. 남은 금액 천팔백 원⁠. 삐삐가 떨었다⁠. 「⁠010⁠」

물속 같은 먹먹함이 어제보다 길었다⁠. 삑⁠, 삑⁠. 기계 소리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여보⁠, 오늘 숨이 어제보다 약해⁠. 의사 선생님이 이틀 남았다고⁠. 이틀 안에 깨야 한대⁠.⁠”

2027년의 아내는 울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오래 문지르는 소리가 났다⁠. 손을 주무르는 소리였다⁠. 아내 목소리 밑에서 가는 목소리가 겨우 올라왔다⁠.

“⁠금채야⁠. 집⁠. 집은⁠.⁠”

말이 끊겼다⁠. 딸깍⁠. 액정의 숫자가 이백 원 줄었다⁠.

용준은 부스 밖 벤치에 앉아 출장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가방 옆주머니에 아롬이 그린 아빠 얼굴이 꽂혀 있었다⁠. 2⁠:8 가르마⁠, 커다란 안경⁠. 그림 속 아빠는 웃고 있었다⁠. 위층 어딘가에서 불이 하나 꺼졌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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