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57자)

마닐라에서 온 DM

망한 아이돌 그룹 막내로 빙의했다 · 윤솔채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모성곤은 휴대전화를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에 표 하나가 떠 있었다⁠. 이름 칸 대신 직책이 적혀 있었다⁠. 맏형⁠, 리더⁠, 메인보컬⁠, 랩 담당⁠. 직책 옆으로 숫자가 이어졌다⁠. 연습생 때 들어간 숙소비와 레슨비⁠, 데뷔 앨범 제작비의 나눠 진 몫⁠.

“⁠넷 합쳐서 일억 칠천이다⁠.⁠”

나는 표를 내려다봤다⁠. 맏형 칸의 숫자가 제일 컸다⁠. 가장 오래 연습생이었던 사람이었다⁠.

“⁠아이돌 정산은 그래⁠. 번 돈에서 들어간 돈을 먼저 빼⁠. 들어간 돈을 다 갚기 전까지 애들 손에는 한 푼도 안 들어가⁠.⁠” 모성곤이 휴대전화를 도로 가져갔다⁠. “⁠회사가 망하면 이 빚은 사라지지 않아⁠. 계약서대로 애들한테 남는다⁠. 막내는 그게 싫다고 했다⁠. 형들이 서른 넘어서 빚 들고 나가는 거⁠.⁠”

“⁠막내⁠, 아니⁠, 제 빚은요⁠?⁠”

모성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봤다⁠. 자기 빚을 남의 빚처럼 묻는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니 건 니가 솔로로 갚는다고 했잖아⁠. 선급금에서 형들 거 먼저 털고⁠, 니 건 니가 벌어서⁠.⁠” 모성곤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물한 살짜리가 그런 계산을 해 왔다⁠. 나는 그 계산이 맞아서 받았다⁠.⁠”

운전석의 실장이 한강 다리 위에서 깜빡이를 켰다⁠. 깜빡이 소리가 딸깍딸깍 차 안을 채웠다⁠.

*

밤 꿈속 연습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나는 노란 우비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안에서 원래 막내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흰 후드티 소매가 손등을 덮고 있었다⁠.

“⁠알았지⁠?⁠”

원래 막내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가 차고 짧았다⁠.

“⁠형들 빚 털어 주려고 그런 거⁠, 이제 알았지⁠? 그러니까 망치지 마⁠.⁠”

“⁠형들한테 물어볼 거야⁠.⁠”

“⁠물으면 남는다고 해⁠. 그게 형들이야⁠.⁠” 원래 막내가 거울 안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형은 그게 듣고 싶은 거지⁠? 남는다는 말⁠. 팬이니까⁠.⁠”

“⁠…⁠…⁠.⁠”

“⁠형은 무대 앞에서만 봤잖아⁠. 맏형 형이 새벽에 화장실에서 무릎에 파스 붙이는 거⁠, 메인보컬 형이 쇼케이스 끝나고 일주일 동안 밥 안 먹은 거⁠, 랩 형이 부산 엄마한테 대기업 인턴이라고 거짓말하는 거⁠. 그런 거 봤어⁠?⁠”

못 봤다⁠. 직캠에는 그런 것이 찍히지 않는다⁠.

“⁠나는 봤어⁠. 그래서 내가 정했어⁠. 형은 보지도 않고 정하려고 하잖아⁠.⁠” 원래 막내가 거울에 손바닥을 댔다⁠. 거울 밖의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댔다⁠. 차가웠다⁠. “⁠내 자리야⁠. 내가 정한 거야⁠.⁠”

“⁠그럼 형들한테 니가 정했다고 말해⁠. 니 입으로⁠.⁠”

“⁠그 입을 형이 쓰고 있잖아⁠.⁠”

잠에서 깼다⁠. 새벽 네 시였다⁠. 아래 칸에서 맏형이 이를 갈았다⁠.

*

다음 날 아침⁠, 식탁에 김밥을 깔아 놓고 다섯이 둘러앉았을 때 나는 말했다⁠. 원래 막내가 형들에게 끝까지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을⁠, 원래 막내의 입으로⁠.

“⁠솔로 제안⁠, 제가 먼저 들고 갔어요⁠. 유통사에⁠. 대표님도 모르게요⁠.⁠”

김밥을 집던 랩 담당의 젓가락이 멈췄다⁠.

“⁠선급금으로 형들 정산 빚 털어 달라고 했어요⁠. 형들이 빚 없이 나가게요⁠. 그래서 메모장에 써 뒀어요⁠. 넷 다 해체에 찍게 할 것⁠. 형들한테는 끝까지 말하지 말 것⁠.⁠”

말을 마치자 식탁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모터가 웅웅거렸다⁠. 맏형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젓가락이 식탁에 닿는 소리가 컸다⁠.

“⁠니가 뭔데⁠.⁠”

맏형의 목소리가 낮았다⁠. 옥상에서 입영 통지서를 흔들 때보다 더 낮았다⁠.

“⁠니가 뭔데 우리 빚을 혼자 갚아⁠? 우리가 니 짐이냐⁠? 스물한 살짜리가 형들 빚 갚아 주겠다고 몸 팔러 가는 걸⁠, 우리는 고맙다고 해체에 손 들어 주면 되는 거였냐⁠?⁠”

“⁠형⁠, 막내도 나름⁠…⁠…⁠.⁠”

메인보컬이 맏형의 팔을 잡았다⁠. 맏형이 팔을 뺐다⁠.

“⁠나름 뭐⁠. 나름 우리 생각해서⁠? 우리한테 물어봤어⁠? 한 번이라도⁠?⁠” 맏형이 나를 봤다⁠. “⁠내 빚이 얼만지 나도 몰랐어⁠. 막내 니가 나보다 먼저 알았네⁠.⁠”

“⁠사천이요⁠.⁠”

말하고 나서야 아차 했다⁠. 맏형의 얼굴이 굳었다⁠.

“⁠…대표님이 차에서 보여 주셨어요⁠.⁠”

랩 담당이 김밥 한 개를 입에 통째로 밀어 넣었다⁠. 우물거리며 말했다⁠.

“⁠와⁠. 막내 니 진짜 독하다⁠. 나는 니가 그냥 얼굴만 잘생긴 앤 줄 알았다⁠.⁠”

“⁠지금 그 말이 나와⁠?⁠” 메인보컬이 랩 담당의 등을 쳤다⁠.

“⁠칭찬이다⁠, 칭찬⁠. 독한 게 어디고⁠.⁠” 랩 담당이 김밥을 삼키고 물을 들이켰다⁠. 컵을 내려놓는 손이 떨렸다⁠. “⁠근데 막내야⁠. 니가 우리 빚 갚아 주면⁠, 나는 평생 니한테 빚진다⁠. 그건 정산서에도 안 나오는 빚이다⁠.⁠”

리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없었다⁠. 김밥 한 줄을 다 먹고 나서야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나를 봤다⁠.

“⁠그럼 지금은 왜 반대로 해⁠? 니가 짠 계획이잖아⁠.⁠”

나는 대답할 말을 오래 골랐다⁠. 원래 막내의 계획이었다⁠. 원래 막내의 입으로 반대를 하는 것은 나였다⁠.

“⁠물어보고 싶어서요⁠. 형들한테⁠. 제가 혼자 정하지 말고⁠.⁠”

맏형이 한참 나를 노려보다가 김밥을 집었다⁠. 우걱우걱 씹었다⁠.

“⁠빚은 우리가 진다⁠. 막내 니 혼자 지지 마⁠. 투표 날 다섯이 다 남는다고 손 들고⁠, 빚도 다섯이 나눠서 진다⁠. 그게 싫으면 니가 해체에 손 들어⁠.⁠”

메인보컬이 고개를 끄덕였다⁠. 랩 담당도 끄덕였다⁠. 리더는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오른쪽 귀에 대고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유리문이 닫히기 직전⁠, 리더의 목소리가 조금 새어 들어왔다⁠. “⁠네⁠, 대표님⁠. 오늘 밤에요⁠.⁠” 막내의 귀는 리더의 짧은 대답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김밥 꼬다리를 집어 든 채 유리문에 비친 리더의 등을 봤다⁠. 리더는 통화를 끝내고도 한참 베란다 난간을 붙잡고 서 있었다⁠.

*

점심때 실장이 숙소 문을 벌컥 열었다⁠.

“⁠음악 방송 섭외 왔다⁠. 다음 주 금요일⁠, 역주행 코너⁠. 생방송이다⁠.⁠”

랩 담당이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맏형이 실장을 끌어안았고⁠, 실장은 김밥 봉지를 떨어뜨렸다⁠. 데뷔하고 열여드레 만에 처음 들어온 음악 방송이었다⁠.

들뜬 다섯이 거실 바닥에 둘러앉아 휴대전화로 음악 방송 영상을 찾아 돌렸다⁠. 랩 담당은 카메라 빨간 불 찾는 연습을 한다며 거실 형광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다녔다⁠. 맏형은 생방송 동선을 그리다 볼펜이 안 나와 볼펜 끝을 혀로 핥았다⁠. 메인보컬은 목캔디를 세 개째 입에 넣었다⁠.

“⁠근데 사전 녹화는 몇 시에 하노⁠?⁠” 랩 담당이 물었다⁠. “⁠관객 들어오나⁠?⁠”

“⁠사전 녹화는 새벽 여섯 시쯤이에요⁠. 팬들은 다섯 시부터 방송국 앞에 줄 서요⁠. 신분증이랑 응원봉 검사받고⁠, 팬카페 출석 순서대로 들어가요⁠. 늦으면 맨 뒤에서 머리만 봐요⁠.⁠”

말이 줄줄 나갔다⁠. 다섯 시 방송국 앞 줄에 서 본 사람만 아는 순서였다⁠. 나는 대형 기획사 그룹의 사전 녹화 줄에 서 본 적이 있었다⁠. 오버턴이 음악 방송에 나오면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미리 연습하러 간 것이었다⁠. 작년 겨울 새벽⁠, 나는 줄 맨 끝에서 남의 그룹 팬들 사이에 끼어 아는 노래 하나 없이 박수를 쳤다⁠.

넷이 동시에 나를 봤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아노⁠?⁠” 랩 담당이 눈을 가늘게 떴다⁠.

“⁠…팬들이 쓴 후기 봤어요⁠.⁠”

“⁠막내 니 요새 팬 후기도 보나⁠? 팬 영상도 보고⁠, 팬카페도 가입하고⁠, 우비 형이랑 DM도 하고⁠.⁠” 랩 담당이 맏형을 돌아봤다⁠. “⁠형⁠, 막내 이거 덕질 아니가⁠? 지 그룹 덕질⁠.⁠”

“⁠지 그룹 덕질하는 놈이 어딨냐⁠?⁠”

“⁠여기 있다 아이가⁠.⁠”

맏형이 웃음을 참다 결국 터뜨렸고⁠, 메인보컬의 입에서 목캔디가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나는 바닥을 구르는 목캔디를 쫓아가며 고개를 숙였다⁠. 귀가 뜨거웠다⁠.

*

같은 시각 그룹 계정에 마닐라 팬 계정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나는 소파 구석에서 한 줄씩 옮겨 읽었다⁠.

「⁠오늘 마닐라에서 오버턴 해시태그가 하루 내내 상위권이었어요⁠. 마닐라에서 케이팝 공연을 여는 기획자 한 분이 저희한테 연락하셨어요⁠. 5월에 오백 석짜리 쇼케이스를 열고 싶대요⁠. 연락처 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노란 우비는 아직 쉬고 계신가요⁠?⁠」

나는 연락처를 받았다⁠. 마지막 물음에는 답하지 못했다⁠.

메시지함을 닫자 엄마의 문자가 와 있었다⁠. 「⁠회사에서 답장 왔어요⁠. 빨리 낫기를 빈대요⁠. 근데 계약은 이달 말까지라고 하네요⁠. 이도가 깨면 뭐라고 해야 할지⁠」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두 해 동안 매일 아침 출근 카드를 찍던 자리가 이달 말에 없어진다⁠. 깨어난 채이도가 돌아갈 자리가 하나 줄었다⁠. 그래도 지금 이 몸이 할 일은 음악 방송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이도 씨는 일 잘하는 사람이었어요⁠. 깨면 다른 데서도 금방 자리 잡을 거예요⁠」라고 보냈다⁠. 남의 이야기처럼 쓰니 쓸 수 있었다⁠.

*

오후 세 시⁠, 대표실⁠. 나는 모성곤 책상 앞에 휴대전화 두 개를 나란히 놓았다⁠. 하나에는 음악 방송 섭외 문자⁠, 하나에는 마닐라 공연 기획자의 연락처⁠.

“⁠음악 방송 의상⁠, 헤어 메이크업⁠, 안무 수정⁠, 리허설 이틀⁠.⁠” 모성곤이 계산기 앱을 두드렸다⁠. 톡톡 소리가 대표실에 울렸다⁠. “⁠사백⁠. 마닐라는⁠? 다섯에 스태프 셋⁠, 비행기 여덟 장⁠, 호텔 사흘⁠, 비자⁠, 장비⁠. 오백 석 매진돼도 남는 게 없다⁠.⁠”

“⁠비행기랑 호텔은 기획자가 내면요⁠?⁠”

“⁠그런 기획자가 어딨냐⁠?⁠”

“⁠물어볼게요⁠. 지금요⁠.⁠”

나는 기획자의 번호를 눌렀다⁠.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신호가 가는 동안 모성곤이 팔짱을 꼈다⁠. 두 해 동안 해외 결제 상담 줄에서 하루 스무 통씩 영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기만 했지⁠, 내가 걸어 본 적은 없었다⁠.

신호가 끊기고 남자 목소리가 영어로 대답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Thank you for calling⁠—⁠”

모성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했다⁠.

“⁠Hello⁠, this is Overturn⁠. 오버턴 막내입니다⁠.⁠”

통화는 이십 분 동안 이어졌다⁠. 나는 콜센터에서 배운 순서대로 했다⁠. 먼저 상대가 원하는 것을 다시 말해 주고⁠, 다음에 이쪽이 못 하는 것을 말하고⁠, 마지막에 둘 다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기획자는 비행기 값은 못 내지만 호텔과 현지 차량은 대겠다고 했다⁠. 개런티도 조금 올렸다⁠. 전화를 끊자 모성곤이 팔짱을 풀었다⁠.

“⁠고객님 소리는 언제 배웠냐⁠?⁠”

“⁠…버릇이에요⁠.⁠”

모성곤이 계산기를 다시 두드렸다⁠.

“⁠호텔 빼도 비행기 여덟 장이 남는다⁠. 마닐라 한 번 다녀오면 빚이 백 준다⁠. 일억 칠천이 언제 다 줄어들까⁠? 니들 마흔 되면⁠?⁠” 모성곤이 계산기를 엎었다⁠. “⁠막내야⁠. 숫자가 오르는 거⁠, 나도 본다⁠. 63위⁠, 마닐라 해시태그⁠, 음악 방송⁠. 나도 좋다⁠. 근데 오르는 숫자는 빚을 못 갚아⁠. 빚은 들어온 돈으로만 갚는다⁠.⁠”

“⁠그럼 음악 방송은요⁠?⁠”

모성곤이 책상 서랍을 열고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유통사 로고가 찍힌 종이였다⁠.

“⁠의상비 사백은 내가 낸다⁠.⁠” 모성곤이 종이를 내 앞에 놓았다⁠. “⁠대신 같은 날⁠, 같은 방송에서 막내 솔로 무대도 하나 올린다⁠. 유통사가 그 조건으로 방송국에 자리를 하나 더 샀다⁠. 곡은 이미 정해졌다⁠.⁠”

“⁠무슨 곡이요⁠?⁠”

“⁠리더가 줬다⁠. 어제 밤에 도장 찍었어⁠.⁠”

종이 맨 아래 칸에 리더의 서명이 있었다⁠. 반듯하고 작은 글씨였다⁠. 베란다에서 휴대전화를 오른쪽 귀에 대고 서 있던 리더의 등이 떠올랐다⁠.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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