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401자)
먼저 들고 온 사람
망한 아이돌 그룹 막내로 빙의했다 · 윤솔채
수요일 아침, 단톡방에 투표창이 하나 떴다. 랩 담당이 만든 것이었다. 「해체 투표 리허설 (진짜 아님 연습임 대표님 보지 마세요)」 항목은 둘이었다. 「남는다」, 「해체」
나는 위 칸 침대에 누운 채 화면을 봤다. 일 분도 안 돼 「남는다」 옆에 숫자 1이 붙었다. 맏형이었다. 다음은 메인보컬, 다음은 랩 담당. 세 사람이 찍고 나서 화면이 한참 조용했다. 아래 칸에서 맏형이 이를 가는 소리가 멈췄다. 다들 깨어서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여섯 시 사십 분, 「남는다」 옆의 숫자가 4가 되었다. 리더였다.
「해체」 옆에는 0이 붙어 있었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남는다」 위에 올렸다. 누르기만 하면 5였다. 손가락이 화면에 닿지 않았다. 이 몸의 휴대전화 메모장 맨 위에는 아직 「넷 다 해체에 찍게 할 것」이 남아 있었다. 막내의 표를 내 손가락으로 누르는 일이 리허설이라도 가볍지 않았다.
랩 담당이 아래 칸에서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막내 니 왜 안 찍노? 니가 제일 남자고 난리 쳤으면서.”
“저는 마지막에 찍으려고요. 주인공은 원래 마지막에 나와요.”
“니가 주인공이가?” 랩 담당이 베개를 던졌다. 베개는 위 칸까지 못 올라오고 맏형 얼굴에 떨어졌다.
맏형이 베개를 얼굴에 얹은 채로 웅얼거렸다.
“리더가 찍었다.”
다들 맏형의 말을 곱씹었다. 리더는 사흘 동안 말이 없었다. 대표실 문이 끝까지 닫혔던 날 이후로, 리더는 밤마다 이어폰 한쪽을 끼고 거실 소파에서 무언가를 들었다. 오른쪽 귀에만 끼는 이어폰이었다.
*
오전 연습을 마치고 랩 담당이 차트를 새로 고쳤다. 「63위 · 손전등」 비상계단 벌스 영상이 부산에서 크게 돌았고, 마닐라 팬 계정이 영상마다 자막을 달아 다시 올렸다. 마닐라 계정 맨 위에는 내가 막내의 계정으로 보낸 답장이 캡처되어 있었다. 「노란 우비는 지금 조금 쉬고 있어요. 곧 다시 맨 앞에 설 거예요」 밑에 영어 한 줄이 붙어 있었다. 「Until he comes back, we‘ll keep the front row warm」
리더가 휴대전화 화면을 오른쪽 귀 옆에 대고 한참 봤다. 귀로 화면을 보는 사람 같았다.
“막내야. 우비 형이 쉰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DM으로요.”
“너랑 우비 형 진짜 무슨 사이야?”
“…같은 걸 좋아하는 사이요.”
리더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끄고 말했다.
“형도 그 형한테 고마운 거 있어. 언젠가 직접 말할 거야.”
막내의 휴대전화가 떨렸다. 엄마였다. 사진 한 장이 왔다. 링거 거치대에 묶인 슬로건, 「손전등 켜 줄게」 귀퉁이의 사인. 밑에 엄마가 썼다. 「회사 분 사인 덕분인지 오늘 애 눈꺼풀이 한 번 움직였어요」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한참 나오지 않았다.
*
점심을 먹고 옥상에 올라가니 맏형이 혼자 고추 모종에 물을 주고 있었다. 집주인 할머니가 옥상을 쓰는 대신 물은 너희가 주라고 했다. 맏형은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나를 손짓해 불렀다.
“막내, 이리 와 봐. 후렴 동작 한 번만 따로 보자.”
나는 맏형 앞으로 갔다. 맏형이 「손전등」 후렴을 흥얼거렸고, 나는 손바닥을 눈썹 위로 올려 앞을 훑었다. 맏형이 내 손목을 잡아 멈췄다.
“이거 뭐야?”
“손전등이요.”
“손바닥이 왜 앞을 봐?”
내 손바닥은 바깥을 향해 있었다. 무대 위 다섯은 손바닥을 제 눈 쪽으로 대고 객석을 비춘다. 객석의 팬들은 다섯을 따라 하다가 손바닥을 뒤집어 무대를 비춘다. 노란 우비가 세 해 동안 객석에서 했던 손이었다.
“이건 객석 버전이다.” 맏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팬들이 무대 따라 할 때 이렇게 뒤집어. 니가 이걸 어떻게 알아?”
“영상에서 봤어요. 팬들 거.”
“니가 팬 영상을 봐?”
“형들 몰래 봐요. 많이요.”
맏형은 내 손목을 놓고 한참 웃었다. 웃다가 물뿌리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우비 형이 맨날 이렇게 했어. 맨 앞에서 혼자 손바닥 뒤집어서 우리 비추고.” 맏형이 고추 모종 잎에 물을 뿌렸다. 물방울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거 보면서 춤췄다. 객석이 깜깜해도 저기 한 명은 우리를 비추고 있구나 하고. 막내 너는 몰랐지?”
“알았어요.”
“알았다고?”
“그 손 보면서 형들이 춤추는 거, 알았어요.”
맏형이 물뿌리개를 든 채 나를 봤다. 무언가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묻지 않았다. 대신 내 손바닥을 잡아 제 눈 쪽으로 돌려 놓았다.
“무대에서는 이렇게. 이제 니가 비추는 쪽이다.”
*
오후 두 시, 실장이 빌린 소형차가 숙소 앞에 멈췄다. 공유 차량 앱으로 세 시간을 빌렸다고 했다. 뒷좌석에 모성곤이 먼저 타 있었다. 검은 양복 무릎 위에 서류철이 놓여 있었다.
“막내만 타.”
나는 모성곤 옆에 앉았다. 차가 논현동 골목을 빠져나갔다. 모성곤은 한동안 창밖만 봤다.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입을 열었다.
“니들 투표 연습했다며.”
나는 놀라지 않았다. 단톡방에는 실장도 있었다. 운전석의 실장이 백미러로 나를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넷이 남는다고 찍었어요.”
“알아. 넷이 남는다고 찍을 줄 알았어. 니가 삼 주 동안 애들 앞에서 손전등 켜 주고 다니니까.” 모성곤이 서류철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막내야. 2009년에 나 뭐 했는지 아냐?”
“로드매니저요.”
모성곤이 나를 봤다. 팬카페 공지에는 대표 이력 같은 것이 올라오지 않는다. 데뷔 때 나온 기사 한 줄에서 본 이력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남의 회사 로드매니저였다. 오인조 남자 그룹을 맡았지. 데뷔하고 이 년 만에 망했다. 회사는 계속 하자고 했고, 애들도 계속 하자고 했다. 일 년을 더 버텼어. 그 일 년 동안 애들 정산 빚이 두 배가 됐다. 결국 회사가 문을 닫았고, 애들은 빚을 들고 흩어졌어.”
창밖으로 한강이 지나갔다. 모성곤의 목소리는 고르게 낮았다. 맏형이 옥상에서 입영 통지서를 흔들 때의 목소리와 같았다. 오래 생각한 말이었다.
“그중 한 놈은 지금 택배 트럭 몬다. 해마다 새해 첫날에 나한테 문자를 보내.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십오 년째 한 번도 안 빠졌어. 빚 다 갚는 데 십 년 걸렸대.” 모성곤이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켰다가 껐다. “나는 망하는 팀은 빨리 끝낸다. 빚이 늘기 전에. 그게 내가 그 문자한테 하는 답이다.”
운전석의 실장이 백미러를 보지 않고 말했다.
“대표님, 그 문자 받으시는 날은 하루 종일 말씀이 없으세요. 작년 1월 1일에도 사무실에 혼자 나오셔서…….”
“앞이나 봐.”
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콜센터의 연체 상담 전화를 떠올렸다. 카드값이 석 달 밀린 고객들은 처음에는 화를 내다가, 결제일을 하루만 미뤄 달라고 빌다가, 마지막에는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숨소리만 들렸다. 밀린 사람들의 숨소리를 하루 백 통씩 들으며 나는 빚이 사람의 목소리를 어떻게 바꾸는지 알았다. 모성곤은 같은 숨소리를 십오 년 동안 새해 문자로 받고 있었다.
“형들이 정하게 해 주세요.”
“정했잖아. 넷이 남는다고.” 모성곤이 웃었다. 웃음에 숨이 섞였다. “애들한테 물으면 다 남는다고 해. 남는다고 하는 게 애들이야. 그러니까 어른이 계산을 대신 해 주는 거다.”
“대표님이 대신 계산하시는 동안 형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자기 빚이 얼마인지도요.”
모성곤이 나를 오래 봤다.
“그걸 니가 말하냐?”
차가 성수동 골목으로 꺾어 들었다. 유리로 된 높은 건물이 앞을 막았다. 모성곤은 서류철을 집어 들고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차 문을 열었다.
*
유통사 건물 로비 한가운데에는 이 층 높이의 화면이 있었다. 이 유통사가 미는 대형 기획사 그룹의 새 뮤직비디오가 돌고 있었다. 일곱 명이 똑같은 흰 옷을 입고 사막 위에서 춤을 췄다. 화면 아래 글자가 지나갔다. 「월드 투어 서른두 개 도시 매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옆에 선 직원 둘이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마닐라 쪽 숫자 봤어? 오버턴인가 하는 데.”
“그 삑사리? 마닐라에서 왜?”
“몰라. 일주일 사이에 스트리밍이 스무 배야. 상파울루도 붙었어. 해외 팀이 이사님한테 올렸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모성곤은 아무것도 못 들은 얼굴로 먼저 탔다. 나는 직원들을 돌아봤다. 둘은 내 얼굴을 몰라봤다. 이 건물에서 오버턴은 아직 태블릿 속 숫자였다.
유통사 28층 회의실은 벽 세 면이 유리였다. 성수동 공장 지붕들과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유통사 이사는 회의 탁자 끝에 앉아 무선 이어폰 한쪽을 빼서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어폰 케이스가 딸깍 닫혔다.
“막내 씨, 테스트 영상 위에서 다 봤어요. 빈자리 추는 거.” 이사가 화면을 켰다. 지하 스튜디오에서 혼자 「손전등」을 추며 네 자리를 비워 두는 내가 나왔다. “위에서 반응이 좋아요. 사연 있는 얼굴이래요.”
이사가 서류 한 장을 내 앞으로 밀었다.
“조건 다시 말씀드릴게요. 선급금 삼억. 6월 첫 솔로 싱글. 계약 전에 오버턴 해체 공식 발표. 망한 그룹 막내가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솔로 가수로 가야 해요. 그게 위에서 돈 대는 이유예요.”
“곡은요?”
“아직 정하는 중이에요. 몇 곡 받아 봤어요.” 이사가 모성곤을 힐끔 봤다. “대표님이 보내 주신 데모 중에 괜찮은 게 하나 있더라고요. 피아노로 시작해서 여덟 마디째에 반음 내려가는 곡. 막내 씨 목소리에 맞을 것 같아요.”
대표실 벽 너머로 들리던 피아노가 떠올랐다. 리더가 들어가고 문이 끝까지 닫혔던 날의 데모였다. 나는 모성곤을 봤다. 모성곤은 서류철을 펴지도 않고 창밖만 봤다.
“저 솔로 안 해요.”
이사가 눈을 깜빡였다. 모성곤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숨을 내쉬는 소리였다.
“막내야.” 모성곤이 창밖을 본 채 말했다. “회사 빚 이억 사천. 이번 달 이자만 육백이다. 니가 여기서 일어나 나가면, 다음 달에 4층 전화가 다 끊긴다. 경리 이모 월급도.”
“그 빚, 형들이 남아서 같이 갚을 거예요.”
“뭘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형들이 남겠대요. 넷 다요. 저도 남을 거예요. 솔로는 오버턴 안에서라면 생각해 볼게요. 그룹을 접는 조건이면 안 해요.”
이사가 서류를 천천히 거두었다. 서류 끝을 탁자에 톡톡 쳐서 가지런히 맞췄다. 회의실 유리창에 오후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고, 내 얼굴이 유리에 희미하게 비쳤다. 은빛 머리, 오른쪽 귀의 은 고리 귀걸이.
“이상하네요.” 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제안, 처음 들고 온 사람이 막내 씨잖아요.”
나는 숨을 멈췄다.
“지난달에 막내 씨가 혼자 여기 찾아왔어요. 대표님도 모르게요. 솔로 하겠다고, 대신 조건을 하나 꼭 넣어 달라고.” 이사가 모성곤을 봤다. 모성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급금으로 회사 빚 말고 형들 정산 빚부터 다 털어 달라고요. 형들이 빈손이라도 빚 없이 나가게. 그 조건 넣느라 제가 위에다 얼마나 빌었는데요.”
유리창 속에서 막내의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형들에게는 끝까지 말하지 말 것. 메모장의 한 줄이 그제야 제 뜻으로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