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472자)

구로의 병실

망한 아이돌 그룹 막내로 빙의했다 · 윤솔채

월요일 아침 여덟 시의 칠호선은 사람으로 빽빽했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올리고 문 옆 손잡이를 잡았다⁠. 콜센터로 출근하던 두 해 동안 매일 이 시간에 이호선을 탔다⁠. 사람들 틈에 끼어 가면 남의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노래가 귀에 들어온다⁠. 세 해 동안 나는 사람들 틈에서 「⁠손전등⁠」이 새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옆에 선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올려다봤다⁠. 모자 밑으로 은빛 머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총각⁠, 머리가 왜 그래⁠? 젊은 사람이 벌써 셌어⁠?⁠”

“⁠일부러 한 거예요⁠, 할아버지⁠.⁠”

“⁠일부러 세게 했다고⁠? 요새 젊은 사람들은 별걸 다 하네⁠.⁠”

맞은편 의자의 직장인이 휴대전화를 보다가 푸흡 웃었다⁠. 화면이 슬쩍 보였다⁠. 노을 아래 붉은 머리⁠. 여섯 번째 마디⁠.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 어두운 터널을 봤다⁠. 어둠 속 유리에 은빛 머리가 비쳤다⁠.

*

성수동 유통사 건물 지하 스튜디오는 벽 두 면이 거울이었다⁠. 거울 두 면이 만나는 모서리에 서면 내가 끝없이 겹쳐 보였다⁠. 유통사 이사는 커피를 든 채 카메라 뒤에 앉아 있었다⁠.

“⁠자유롭게 춰 봐요⁠. 「⁠손전등⁠」이든 뭐든⁠. 혼자 서 있을 때 얼굴이 어떻게 나오나 보는 거예요⁠.⁠”

음악이 나왔다⁠. 나는 입속으로 응원법을 웅얼거렸다⁠. 몸이 움직였다⁠. 첫 여덟 박이 지나고 동선이 옆으로 이동하는 자리에서 나는 오른쪽으로 두 걸음 비켜났다⁠. 원래 맏형이 들어오는 자리였다⁠. 후렴에서는 한가운데를 비우고 가장자리로 갔다⁠. 리더가 서는 자리였다⁠. 랩 파트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박자만 짚었고⁠, 브리지에서는 거울 쪽으로 돌아서서 메인보컬이 서던 빈 바닥을 봤다⁠.

음악이 끝났다⁠. 이사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혼자 추는데 네 사람 자리를 비워 두네요⁠.⁠”

“⁠버릇이에요⁠.⁠”

“⁠고쳐야 할 버릇이죠⁠. 솔로는 가운데에 서는 거예요⁠.⁠” 이사는 웃으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근데 재밌네요⁠. 빈자리가 보여요⁠. 사람들이 빈자리를 보면 누가 있었는지 궁금해하거든요⁠. 다음 주에 성곤 대표님이랑 같이 위층으로 와요⁠. 제대로 얘기하죠⁠.⁠”

*

성수역에서 이호선을 탔다⁠. 구로디지털단지역까지 갈아타지 않고 한 번에 갔다⁠. 출근길 반대 방향이었다⁠.

대학병원 육인실의 창가 침대였다⁠. 커튼을 반쯤 걷자 침대 위에 내가 누워 있었다⁠.

스물셋 채이도는 생각보다 작았다⁠. 볼이 홀쭉했고⁠, 턱에 수염이 거뭇하게 올라와 있었고⁠, 링거 줄이 왼손등에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이불이 조금씩 오르내렸다⁠. 막내의 몸으로 서서 내 몸을 내려다보니⁠, 세 해 동안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람이 이렇게 생겼었다⁠. 비 오는 날에도 우비만 쓰고 서 있던 사람⁠. 무대 위에서 보면 이렇게 작았겠구나⁠.

보조 의자에 앉아 귤을 까던 엄마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세요⁠?⁠”

“⁠이도 씨 회사 동료요⁠. 전에 전화드렸던⁠.⁠”

엄마가 귤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아래위로 나를 훑었다⁠. 모자⁠, 마스크⁠, 은빛 머리⁠.

“⁠아이고⁠, 회사 분이 가수 같으시네⁠. 앉으세요⁠, 앉으세요⁠. 귤 드세요⁠.⁠”

엄마가 귤 반쪽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엄마 손에서 귤껍질 냄새가 났다⁠. 보조 침대 위에 노란 우비가 반듯하게 개켜져 있었고⁠, 우비 위에 둘둘 만 천이 놓여 있었다⁠. 내가 직접 만든 슬로건이었다⁠. 검은 천에 형광 노란 실로 박은 글씨⁠. 「⁠손전등 켜 줄게⁠」

“⁠애가 맨날 이거 들고 다녔어요⁠. 무슨 가수 좋아한다고⁠.⁠” 엄마가 슬로건을 펼쳐 보였다⁠. “⁠오버뭐라던가⁠. 나는 잘 몰라요⁠. 근데 회사 분⁠.⁠”

엄마가 내 얼굴을 다시 봤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을 오래 봤다⁠.

“⁠우리 애가 좋아하던 애들이랑 닮으셨네⁠.⁠”

“⁠…자주 들어요⁠.⁠”

“⁠그럼 여기다 사인 하나만 해 주실래요⁠? 닮은 사람 사인이라도 있으면 애가 깨서 좋아할 것 같아서요⁠.⁠” 엄마가 웃었다⁠. 웃는데 눈가가 빨갰다⁠. “⁠가짜라도 괜찮아요⁠.⁠”

엄마가 볼펜을 내밀었다⁠. 나는 슬로건 귀퉁이에 사인을 했다⁠. 막내의 사인이었다⁠. 팬 사인회에서 열 번 넘게 받아 본 사인이라⁠, 손이 먼저 알았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끝을 위로 튕기고 밑에 작은 손전등 하나⁠. 엄마가 사인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짜치고는 진짜 같네요⁠.⁠”

엄마는 슬로건을 링거 거치대에 묶었다⁠. 침대 위 내 얼굴 바로 위에서 「⁠손전등 켜 줄게⁠」가 펄럭였다⁠.

“⁠우리 애는 혼자 사는 게 편하다고 했어요⁠. 전화해도 늘 바쁘다고 하고⁠, 명절에도 근무라고 안 내려오고⁠.⁠” 엄마가 이불 끝을 여몄다⁠. “⁠근데 저 노란 우비만 입으면 사람 있는 데로 나갔어요⁠. 아무도 안 오면 무대 선 애들이 추울 거라고⁠.⁠”

엄마가 가방에서 지퍼백 하나를 꺼냈다⁠.

“⁠원룸 정리하다 서랍에서 나왔어요⁠. 이게 뭔가 했더니⁠.⁠”

지퍼백 안에 작은 은 고리 귀걸이 한 짝이 들어 있었다⁠. 지퍼백에 붙은 포스트잇에 내 글씨로 적혀 있었다⁠. 「⁠막내 거⁠. 돌려줄 것⁠」

“⁠아는 사람 거면 갖다줘요⁠. 우리 애가 돌려준다고 써 놨는데⁠, 못 돌려주고 누워 있으니까⁠.⁠”

나는 지퍼백을 받았다⁠. 귀걸이는 가벼웠다⁠. 세 해 동안 서랍에 넣어 두기만 하고⁠, 돌려주러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돌려주는 날 막내와 나를 잇는 것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고 믿었다⁠. 나는 지퍼백을 후드티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엄마의 가방 속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내 휴대전화였다⁠. 엄마가 꺼내서 화면을 보고는 내게 내밀었다⁠.

“⁠회사 분이니까 아시겠네⁠. 이거 뭐라고 온 거예요⁠? 눈이 침침해서⁠.⁠”

화면에 팀장의 문자가 떠 있었다⁠. 「⁠채이도 씨⁠, 연락 바랍니다⁠. 무단결근이 계속되면 계약 갱신이 어렵습니다⁠」 같은 문자가 날짜만 바꿔 세 통이었다⁠. 나는 팀장의 목소리를 알았다⁠. 화가 날수록 존댓말이 깍듯해지는 사람이었다⁠.

“⁠병원에 있다고 회사에 알리셨어요⁠?⁠”

“⁠누구한테 알려야 하는지 몰라서요⁠. 애가 회사 얘기를 통 안 해서⁠.⁠”

나는 내 휴대전화로 팀장에게 문자를 썼다⁠. 「⁠팀장님⁠, 채이도 어머니입니다⁠. 이도가 4월 1일부터 구로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의식이 없습니다⁠」 쓰는 동안 엄지손가락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내가 쓰는 내 소식이었다⁠. 보내기를 누르고 엄마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옆 침대의 할머니가 커튼 너머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화면에서 노을 아래 붉은 머리가 고음을 지르고 있었다⁠. 할머니가 화면 속 박수 치는 할머니를 따라 손뼉을 쳤다⁠.

“⁠이 총각 잘 부르네⁠. 요새 이게 그렇게 돈대⁠.⁠”

엄마가 커튼 너머를 힐끔 보더니 내게 속삭였다⁠.

“⁠저 총각 옆에 있는 은발 총각⁠, 회사 분이랑 진짜 닮았네⁠.⁠”

*

숙소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룹 공식 계정의 메시지함을 열었다⁠. 영상이 퍼진 뒤로 메시지가 하루 수백 통씩 쌓였다⁠. 대부분은 하트였고⁠, 몇은 욕이었고⁠, 하나는 길었다⁠. 마닐라의 팬 계정이었다⁠. 영어로 쓴 글을 한 줄씩 옮기며 읽었다⁠.

「⁠저희는 마닐라에서 오버턴 영상을 타갈로그어와 영어로 옮기는 팬 계정입니다⁠. 회원이 일주일 만에 서른 명에서 사천 명이 됐어요⁠. 옥상 영상 세 개 다 자막 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예전 무대 직캠마다 맨 앞줄에 노란 우비를 입은 분이 계셨는데⁠, 앨범 나온 뒤로 안 보이세요⁠. 저희끼리 그분을 ‘⁠노란 우비⁠’라고 불러요⁠. 그분 괜찮으신가요⁠?⁠」

나는 손잡이를 쥔 채로 화면을 오래 봤다⁠. 바다 건너 마닐라에서⁠, 직캠 귀퉁이에 찍힌 내 노란 우비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세 해 동안 혼자라고 믿었다⁠.

답장 칸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이렇게만 썼다⁠. 「⁠노란 우비는 지금 조금 쉬고 있어요⁠. 곧 다시 맨 앞에 설 거예요⁠」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막내의 계정으로 보낸 말이었다⁠.

랩 담당이 단톡방에 캡처 하나를 올렸다⁠. 「⁠81위 · 손전등⁠」 밑에 한 줄을 달았다⁠. 「⁠사투리 먹힌다 ㅋㅋㅋ 부산 사람들 다 스밍 돌리는 중⁠」

*

밤 아홉 시⁠, 옥상은 바람이 셌다⁠. 빨래 건조대가 덜컹거렸고 고추 모종 잎이 한쪽으로 누웠다⁠. 다섯은 2절 동선을 맞추고 있었다⁠.

“⁠리더⁠, 들어가⁠!⁠”

맏형이 왼쪽에서 신호를 줬다⁠. 리더가 반 박자 늦게 들어왔다⁠. 랩 담당과 어깨가 부딪쳤다⁠. 다시⁠. 맏형이 또 왼쪽에서 신호를 줬고⁠, 리더가 또 늦었다⁠.

나는 동선을 바꿨다⁠. 리더를 맨 왼쪽 끝에 세우고⁠, 나머지 넷을 모두 리더의 오른쪽에 두었다⁠. 신호는 내가 리더의 오른쪽에서 줬다⁠. 리더가 정확히 들어왔다⁠.

세 번째도 정확했다⁠. 네 번째에서 리더가 춤을 멈췄다⁠.

“⁠너 왜 자꾸 내 오른쪽에 서⁠?⁠”

“⁠동선이 그게 나아서요⁠.⁠”

“⁠아니⁠. 너 어제도 그랬어⁠. 그제도⁠. 밥 먹을 때도 내 오른쪽에 앉고⁠, 계단 올라갈 때도 오른쪽으로 와⁠.⁠” 리더가 한 걸음 다가왔다⁠. 금발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왜⁠?⁠”

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빨래 건조대가 덜컹거렸다⁠. 다른 셋이 숨을 죽이고 우리를 봤다⁠.

“⁠형 왼쪽 귀요⁠.⁠”

리더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리더가 내 후드티 앞섶을 잡았다⁠. 세게는 아니었다⁠. 손이 떨렸다⁠.

“⁠누가 그래⁠?⁠”

“⁠아무도요⁠. 제가 봤어요⁠.⁠”

“⁠뭘 봤는데⁠?⁠”

“⁠형은 말을 들을 때 늘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요⁠. 단체 인터뷰에서 왼쪽 사람이 말하면 대답이 한 박자 늦어요⁠. 인이어도 오른쪽만 꽉 끼우고 왼쪽은 헐렁하게 걸쳐요⁠. 그래서 형은 늘 맨 오른쪽 끝에 서고 싶어 했는데⁠, 리더라서 늘 가운데 섰어요⁠.⁠”

리더가 내 옷을 놓았다⁠. 옥상 난간에 등을 기댔다⁠. 랩 담당이 무슨 말을 하려다 맏형에게 팔을 잡혔다⁠.

“⁠연습생 때⁠.⁠” 리더가 낮게 말했다⁠. “⁠돌발성 난청이래⁠. 아침에 일어났는데 왼쪽이 먹먹했어⁠. 병원에 늦게 가서 못 돌아왔어⁠. 지금 왼쪽은 거의 안 들려⁠. 오른쪽도 작년부터 조금씩⁠.⁠”

맏형이 숨을 들이켰다⁠. 메인보컬은 제 손바닥을 쥐었다⁠. 셋 다 몰랐다⁠.

“⁠대표님 알면 나 바로 잘려⁠. 귀 안 들리는 리더를 누가 써⁠? 귀 안 들리는 작곡가는 또 누가 쓰고⁠.⁠” 리더가 나를 봤다⁠. “⁠말하지 마⁠. 아무한테도⁠. 형들도 지금 들은 거 잊어⁠.⁠”

“⁠말 안 해요⁠.⁠”

“⁠막내야⁠.⁠” 리더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오른쪽 귀가 나를 향했다⁠. “⁠너 진짜 막내 맞아⁠? 막내는 내 귀 몰랐어⁠. 삼 년 동안 한 번도 내 오른쪽에 선 적 없어⁠.⁠”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었다⁠. 빨래 건조대가 쓰러지려는 것을 랩 담당이 붙잡았다⁠. 붙잡으면서 랩 담당이 소리쳤다⁠.

“⁠귀 얘기는 됐고⁠, 건조대나 같이 잡아라⁠! 할매 내복 날아간다⁠!⁠”

*

자정이 넘어 실장에게 노트북을 빌렸다⁠. 실장은 하품을 하며 노트북을 건네고 거실 소파에 쓰러졌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변기 뚜껑 위에 노트북을 놓았다⁠. USB를 꽂았다⁠. 파일이 하나 있었다⁠. 「⁠대표님께⁠」

재생을 눌렀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원래 막내의 목소리였다⁠. 꿈속 거울에서 들은 목소리⁠,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똑같았다⁠.

「⁠대표님⁠. 유통사 쪽 솔로 제안⁠, 제가 받을게요⁠. 형들한테는 아직 말하지 말아 주세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형들⁠—⁠」

소리가 뚝 끊겼다⁠. 재생 막대는 사십일 초에서 멈춰 있었다⁠. 다시 눌러도⁠, 처음으로 돌려도 사십일 초에서 끊겼다⁠. 파일이 깨져 있었다⁠.

나는 변기 뚜껑 위의 노트북을 내려다봤다⁠. 화장실 거울에 막내의 얼굴이 비쳤다⁠. 막내는 형들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막내의 입을 빌려⁠, 나는 오늘 리더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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