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65자)

실물이 더 낫다

망한 아이돌 그룹 막내로 빙의했다 · 윤솔채

환풍기 소리에 눈을 떴다⁠. 천장 구석에서 날개 하나가 덜 맞물린 채 돌았고⁠, 한 바퀴마다 딸깍 하고 쇠가 쇠를 긁었다⁠. 콜센터에서 두 해를 일하면 소리부터 듣는 버릇이 생긴다⁠. 수화기 너머에서 고객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만 들어도 다음 말이 욕인지 사과인지 안다⁠. 나는 누운 채로 딸깍을 세 번 듣고 나서야 여기가 내 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신림의 내 원룸에는 환풍기가 없다⁠.

뺨에 닿은 바닥이 딱딱했다⁠. 장판이 아니라 나무 마루였고⁠, 마루에서 땀과 고무 밑창 냄새가 올라왔다⁠. 고개를 들자 벽 하나가 통째로 거울이었다⁠. 맞은편 통유리 창으로 아침 해가 쏟아져 들어와 거울에 부딪혔고⁠, 되튄 빛이 눈을 찔렀다⁠. 나는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일어나 앉았다⁠.

거울 속에서 은발 청년이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손을 내리자 거울 속 청년도 손을 내렸다⁠. 은빛으로 탈색한 짧은 머리가 한쪽으로 눌려 뻗쳤고⁠, 오른쪽 귓불에서 작은 은 고리 귀걸이 하나가 반짝였다⁠. 헐렁한 흰 후드티 소매가 손등을 반쯤 덮었고⁠, 검은 트레이닝 바지 옆선을 따라 흰 줄 두 개가 내려갔다⁠. 나는 이 얼굴을 안다⁠. 세 해 동안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넣고 다닌 얼굴⁠, 오인조 보이그룹 오버턴의 막내였다⁠.

“⁠실물이 더 낫네⁠.⁠”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맑았고⁠, 끝이 조금 갈라졌다⁠. 거울 속 막내의 입이 내 말에 맞춰 움직였다⁠. 뺨을 꼬집자 거울 속 막내가 제 뺨을 꼬집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팠다⁠. 오늘이 4월 1일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만우절이었다⁠. 누가 이렇게 큰돈을 들여 콜센터 계약직 하나를 속인단 말인가⁠.

거울 오른쪽 아래 구석에 노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매직으로 굵게 「⁠4/22 투표⁠」라고 적혀 있었다⁠.

*

어젯밤 일은 또렷했다⁠. 야간 상담 근무를 마치고 원룸에 들어온 것이 새벽 두 시 반이었다⁠. 오버턴의 데뷔 앨범이 나온 지 열하루째였고⁠, 타이틀곡 「⁠손전등⁠」은 전날 음원 차트 98위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휴대전화 두 대로 「⁠손전등⁠」을 돌렸다⁠. 세 시가 되면 차트가 새로 고쳐진다⁠. 백 위 밖으로 떨어지는지 보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화면이 바뀌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세 해 전 봄⁠, 홍대 앞 골목에서 비를 맞으며 버스킹을 하던 다섯을 처음 봤다⁠. 데뷔하기도 전이었고⁠, 관객은 노란 우비를 입은 나 하나였다⁠. 스피커가 빗물에 먹통이 되자 다섯은 마이크 없이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막내가 나를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는데⁠, 숙이다가 왼쪽 귀걸이가 빠져 보도블록 틈으로 굴렀다⁠. 막내는 몰랐다⁠. 귀걸이를 주워 들고 뛰어갔을 때는 다섯이 탄 승합차가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은 귀걸이 한 짝은 지금도 내 원룸 서랍의 지퍼백 안에 있다⁠. 다음 버스킹부터 다섯은 나를 우비 형이라고 불렀다⁠.

문이 열리고 비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어왔다⁠.

“⁠막내 또 여기서 잤냐⁠?⁠”

맏형이었다⁠. 검은 머리를 짧게 쳤고⁠, 어깨가 넓었고⁠, 편의점 봉지를 쥔 손가락 마디가 굵었다⁠. 맏형은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오른발 뒤꿈치를 제 어깨에 올리고 천천히 몸을 숙이자 허벅지 뒤가 찢어지게 당겼다⁠.

이 장면도 안다⁠. 맏형의 개인 브이로그 「⁠맏형의 아침⁠」 세 번째 영상에서 맏형은 매일 아침 막내의 다리를 이렇게 풀어 준다고 했다⁠. 영상 댓글은 일곱 개였고⁠, 다섯 개가 내 계정이었다⁠.

“⁠형⁠, 아파요⁠.⁠”

“⁠엄살은⁠. 어제는 안 아프다며⁠.⁠”

“⁠어제는 어제고요⁠.⁠”

맏형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막내는 형에게 이렇게 말대꾸를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천장의 환풍기만 쳐다봤다⁠.

계단에서 운동화 끄는 소리가 났고⁠, 문이 벌컥 열렸다⁠.

“⁠차트 봤나⁠? 우리 이제 전설이다⁠. 백 위 밖이다⁠, 백 위 밖⁠.⁠”

초록빛으로 물들인 머리가 먼저 들이밀어졌다⁠. 랩 담당이었다⁠. 부산 사투리가 카메라 앞에서만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뒤따라 붉은 머리의 메인보컬이 이어폰을 낀 채 말없이 들어와 구석에 앉았고⁠, 마지막으로 금발의 리더가 들어왔다⁠. 맏형이 뭐라고 하자 리더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려 들었다⁠. 이 버릇도 안다⁠. 팬 영상 서른 개를 돌려 보며 찾아낸 버릇이었다⁠. 리더는 늘 오른쪽 귀를 사람에게 내준다⁠.

메인보컬이 이어폰 한쪽을 빼며 나를 봤다⁠.

“⁠막내 얼굴이 왜 그래⁠?⁠”

“⁠고⁠, 고음⁠…⁠…⁠.⁠”

팬들 사이에서 메인보컬의 별명은 고음 요정이었다⁠. 데뷔 쇼케이스에서 고음이 갈라진 뒤로는 아무도 이 별명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는 남은 말을 꿀꺽 삼켰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형⁠.⁠”

연습실이 조용해졌다⁠. 랩 담당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니 어제 어디 머리 박았나⁠?⁠”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렸다⁠. 막내의 휴대전화였다⁠. 화면을 들여다보자 얼굴 인식이 풀렸다⁠. 막내의 얼굴이니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손이 떨렸다⁠. 단톡방 「⁠오버턴 다섯⁠」에 실장이 올린 글이 맨 위에 있었다⁠. 「⁠대표님 열 시에 연습실 올라오심⁠. 다들 씻고 있어⁠」 밑에 랩 담당이 「⁠씻으면 차트 올라가나요⁠」라고 달았고⁠, 실장은 「⁠씻어라⁠」 한 줄로 답했다⁠.

*

아홉 시 반⁠, 리더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거울 앞에 놓았다⁠.

“⁠대표님 오시기 전에 한 번만 맞추자⁠. 처음부터⁠.⁠”

「⁠손전등⁠」 전주가 흘렀다⁠. 다섯이 거울 앞에 줄을 맞췄고⁠, 나는 맨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막내 자리는 늘 맨 오른쪽이었다⁠. 무대 직캠을 수백 번 돌려 봤으니 동작은 눈에 박혀 있었다⁠. 눈에 박힌 것이 팔다리로 내려오지 않았다⁠. 첫 여덟 박에서 왼팔과 오른팔이 서로 다른 노래를 추었다⁠. 랩 담당이 박자를 놓치고 내 어깨에 부딪혔다⁠.

“⁠막내 니 지금 뭐 하노⁠?⁠”

“⁠몸 푸는 중이에요⁠.⁠”

리더가 노래를 처음으로 돌렸다⁠. 두 번째에도 나는 후렴 앞에서 엉켰다⁠. 세 번째⁠, 맏형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다시⁠. 막내 따라와⁠.⁠”

네 번째 후렴에서 다섯이 손바닥을 눈 위에 대고 객석을 비추듯 훑는 동작이 나왔다⁠. 「⁠손전등⁠」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동작이었다⁠. 손바닥을 눈썹에 대는 순간⁠, 거울 속 막내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동작 한가운데서 멈췄다⁠. 손바닥 그늘 아래로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세 해 동안 화면으로 본 얼굴인데 눈빛만 낯설었다⁠. 눈빛만 나였다⁠.

음악이 끝났다⁠. 뒤에서 털썩 소리가 연달아 났다⁠. 맏형은 마루에 대자로 누웠고⁠, 랩 담당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메인보컬은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묻었고⁠, 리더는 스피커 옆에 앉아 숨을 골랐다⁠. 다섯이 같이 지쳐 있는 모습을⁠, 나는 팬 시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영상에는 늘 지치기 전까지만 나왔다⁠.

구두 소리가 계단을 올라온 것은 열 시 정각이었다⁠. 굽 한쪽이 닳았는지 두 번에 한 번씩 소리가 끌렸다⁠. 나는 손바닥을 눈썹에 댄 채로 거울을 봤다⁠. 거울 속 문가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서 있었다⁠.

모성곤 대표였다⁠. 검은 양복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서류철을 가슴께로 들고 있었다⁠. 팬 사인회 때마다 맨 뒤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사람이었다⁠. 나는 세 해 동안 모성곤의 얼굴을 열 번쯤 봤다⁠. 모성곤이 맨 앞줄의 노란 우비를 기억할 리는 없었다⁠.

“⁠다들 그대로 앉아 있어⁠. 막내도 앉아⁠.⁠”

나는 손을 내리고 마루에 앉았다⁠. 막내 자리가 어디인지 몰라 맏형 옆에 엉덩이를 붙였는데⁠, 맏형이 누운 채로 몸을 굴려 자리를 내주었다⁠.

모성곤은 서류철을 펴지 않고 휴대전화 계산기 앱부터 켰다⁠. 숫자를 누를 때마다 계산기가 톡톡 울었다⁠.

“⁠숙소 월세⁠, 연습실⁠, 실장 월급⁠, 보컬 선생⁠, 니들 밥⁠. 한 달에 이천이 나간다⁠. 앨범 만드느라 빌린 돈은 이억이 넘고⁠.⁠”

“⁠대표님⁠, 나온 지 아직 열하루밖에⁠…⁠…⁠.⁠”

리더가 입을 열자 모성곤이 화면을 돌려 보였다⁠.

“⁠열하루면 안다⁠. 오늘 새벽에 백 위 밖으로 나갔다⁠. 떨어졌다가 다시 들어오는 팀은 열에 하나도 없어⁠.⁠” 모성곤이 서류철을 폈다⁠. “⁠삼 주 뒤⁠, 4월 22일에 투표한다⁠. 니들 다섯이 해체할지 말지 정해⁠. 셋이 해체에 손을 들면 위약금 없이 계약 정리하고 보내 준다⁠. 그리고 막내는 솔로로 간다⁠. 유통사에서 막내 하나만 받겠다고 했다⁠.⁠”

다섯 가운데 넷이 막내를 봤다⁠. 나만 모성곤을 봤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마루에서 무릎이 떨어지며 뚝 소리가 났다⁠. 스물한 살 무릎에서 나는 소리였다⁠.

“⁠해체 안 해요⁠.⁠”

모성곤이 눈썹을 올렸다⁠.

“⁠막내 니가⁠?⁠”

“⁠네⁠. 저희 아직 안 끝났어요⁠. 「⁠손전등⁠」 뮤직비디오 댓글 보셨어요⁠? 브라질에서도 달렸어요⁠. 포르투갈어로⁠, 이 노래가 왜 안 뜨냐고요⁠.⁠”

“⁠봤다⁠. 하나⁠.⁠”

“⁠하나도 하나예요⁠. 저희 첫 버스킹 때 관객이 한 명이었어요⁠.⁠”

모성곤이 나를 오래 봤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낮게 말했다⁠.

“⁠댓글로 월세 내냐⁠?⁠”

콜센터에서 이런 목소리를 수천 번 들었다⁠. 화난 사람의 목소리보다 지친 사람의 목소리였다⁠. 지친 고객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다 정해 놓고 전화를 건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두 해 동안 입에 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고객님⁠, 아니 대표님⁠. 삼 주만 주세요⁠.⁠”

랩 담당이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맏형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메인보컬은 이어폰을 도로 꽂으면서도 어깨가 들썩였다⁠.

“⁠삼 주 준다고 했다⁠. 투표는 투표대로 한다⁠.⁠” 모성곤은 서류철을 덮었다⁠. “⁠막내야⁠, 너랑 나랑은 얘기 다 끝난 거 아니었냐⁠?⁠”

“⁠무슨 얘기요⁠?⁠”

모성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거울 구석의 메모지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날짜 까먹지 마라⁠.⁠”

구두 소리가 계단을 내려갔다⁠. 두 번에 한 번씩 끌렸다⁠.

*

모성곤이 나가자 연습실에 환풍기 소리만 남았다⁠. 맏형이 편의점 봉지에서 삼각김밥을 꺼내 하나씩 던졌다⁠. 나는 참치마요를 받았다⁠. 막내가 참치마요를 좋아한다는 것은 팬카페 공지에도 나와 있었다⁠.

“⁠막내야⁠.⁠” 맏형이 김밥 비닐을 벗기며 말했다⁠. “⁠너 방금 대표님한테 고객님이라고 했다⁠.⁠”

“⁠긴장해서요⁠.⁠”

“⁠니가 긴장을 해⁠?⁠” 랩 담당이 김밥을 반쯤 문 채 끼어들었다⁠. “⁠대표님 앞에서 하품하던 놈이⁠?⁠”

다들 웃었는데 웃음이 오래가지 않았다⁠. 맏형은 김밥을 다 먹고 나서 점퍼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빼냈다⁠. 안주머니가 봉투 모양으로 불룩했다⁠. 랩 담당의 휴대전화에서 알림이 울렸고⁠, 랩 담당은 화면을 보더니 엎어 놓았다⁠. 엎기 직전에 「⁠래퍼 서바이벌 지원 마감 D-7⁠」이라는 글자가 스쳤다⁠. 메인보컬은 이어폰을 낀 채 창밖만 봤다⁠. 리더는 아무 말 없이 연습실을 나갔다⁠.

다들 숙소로 씻으러 간 뒤⁠, 나는 연습실에 혼자 남아 막내의 휴대전화를 다시 열었다⁠. 남의 휴대전화를 뒤지는 일은 처음이었다⁠. 상담원은 고객 카드 번호도 끝 네 자리만 본다⁠. 그래도 알아야 했다⁠. 이 몸의 주인이 어젯밤 무엇을 하다 잠들었는지⁠.

메모장 맨 위에 새벽 두 시 오십 분에 쓴 메모가 있었다⁠. 제목은 「⁠4/22⁠」였다⁠.

「⁠넷 다 해체에 찍게 할 것⁠. 형들한테는 끝까지 말하지 말 것⁠. 대표님하고 약속한 대로⁠.⁠」

나는 거울을 봤다⁠. 거울 속 막내가 휴대전화를 쥐고 서 있었다⁠. 세 해 동안 나는 이 얼굴이 무대에 오래 남기를 빌었다⁠. 이 얼굴의 주인은 어젯밤 이 자리에서⁠, 무대를 끝낼 계획을 쓰고 있었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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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세시2026.10.31· 1화

    콜센터 상담원이 최애 몸으로 깨어나다니요. 해체 투표까지 삼 주라는 데서 벌써 숨이 막혀요.

    • 윤솔채작가2026.10.31

      이도는 전화 받던 목소리로 해체는 없다고 해요. 삼 주가 생각보다 빨리 갑니다.

실물이 더 낫다 · 망한 아이돌 그룹 막내로 빙의했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