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429자)

도장 냄새

남편 옷에서 다른 개 냄새가 난다 · 윤새벽

월요일 저녁⁠, 우리 집 거실에 낯선 가방이 놓였다⁠. 검은 가죽 가방이었다⁠. 가죽 냄새 밑에 종이 냄새가 겹겹이 있었다⁠. 복사기에서 막 나온 따뜻한 종이와 오래 묵어 누레진 종이⁠, 남의 손을 수백 번 탄 종이⁠. 가방 주인은 안경을 쓴 남자였다⁠. 시어머니는 남자를 변호사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가방에 코를 대고 오래 맡았다⁠. 종이 냄새가 이렇게 많이 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시어머니의 왼쪽 손목에는 흰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붕대에서 소독약과 아물어 가는 살 냄새가 났다⁠. 시어머니는 오늘도 소파 맨 끝에 앉았다⁠. 나를 보는 눈이 지난번과 달랐다⁠. 지난번에는 내 털을 보았고⁠, 오늘은 내 이빨을 보았다⁠.

변호사가 종이를 펼쳤다⁠.

“⁠인지 신고가 되셨으니 이제 아버님 명의로 양육자 변경을 청구하실 수 있습니다⁠. 사유는 충분합니다⁠. 개 물림 사고가 아이 앞에서 있었고⁠, 어머니가 새벽마다 아이를 혼자 둡니다⁠. 아이의 천식이 악화된 기록도 있고요⁠. 아버님 댁은 환경이 안정적입니다⁠.⁠”

“⁠안 해요⁠.⁠”

경모가 말했다⁠. 변호사는 놀라지 않았다⁠. 다음 종이를 펼쳤다⁠.

“⁠그러시면 할머님께서 진행하시는 다른 건만 남습니다⁠. 사고견 처분 요청 진술서요⁠. 기질 평가 위원회가 다음 주 금요일에 열립니다⁠. 피해자 진술은 평가에 크게 반영됩니다⁠.⁠”

시어머니가 붕대 감은 손목을 무릎 위에 올렸다⁠.

“⁠경모야⁠. 네가 청구서에 도장 찍으면 진술서는 내가 고친다⁠. 처분 요청 거둘게⁠. 그 개 살려 줄게⁠. 안 찍으면 그 개는 끝이야⁠. 열네 살 먹은 개가 사람을 물었어⁠. 평가 위원들이 뭐라고 하겠니⁠.⁠”

“⁠어머님⁠.⁠”

예리가 부엌 입구에서 말했다⁠.

“⁠그건 협박이에요⁠.⁠”

“⁠거래야⁠. 나는 손목을 내줬어⁠. 열한 바늘⁠. 너희는 뭘 내줄 거니⁠?⁠”

시어머니의 목소리에 쇳소리가 없었다⁠. 쇳소리 없이 하는 말이 더 무거웠다⁠. 경모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시간 주세요⁠.⁠”

“⁠금요일까지다⁠.⁠”

변호사가 가방을 닫았다⁠. 가방 지퍼가 닫히는 소리에 나는 귀를 눕혔다⁠. 사람들이 일어났고⁠, 시어머니는 현관에서 구두를 신다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관문이 닫히자 예리가 경모 앞으로 갔다⁠.

“⁠찍을 거야⁠?⁠”

“⁠몰라⁠.⁠”

“⁠모르면 찍는 거야⁠. 자기는 늘 모른다고 하다가 하나를 골랐어⁠.⁠”

“⁠안 찍으면 할매가 죽어⁠. 찍으면 애가 우리 집에 와⁠. 애가 오면 범돌이 가⁠. 예리야⁠, 어느 걸 골라도 누가 하나 없어져⁠.⁠”

경모가 나를 보았다⁠. 나는 경모를 보았다⁠. 어느 걸 골라도 누가 없어진다는 말을 나는 모른다⁠. 경모의 숨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알았다⁠. 경모는 누가 대신 골라 주기를 바랐다⁠. 개는 골라 주지 않는다⁠. 개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나는 소파 위 내 자리에 올라가 앉았다⁠.

*

화요일 오후⁠, 예리는 나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갔다⁠. 구청이 정한 병원이라고 했다⁠. 내 예방접종 날이기도 했다⁠. 예리는 일부러 이 병원으로 예약을 옮겼다⁠.

병원 문을 열자 냄새가 한꺼번에 덤볐다⁠. 소독약⁠, 겁먹은 고양이⁠, 수술한 개의 실밥⁠. 그리고 맨 안쪽⁠, 진료실 뒤 닫힌 문 너머에서 연고 냄새와 오래 누운 털 냄새가 왔다⁠. 늙은 개였다⁠. 나는 대기실 바닥에 엉덩이를 박고 닫힌 문을 향해 앉았다⁠.

“⁠범돌⁠, 이리 와⁠. 몸무게부터 재자⁠.⁠”

간호사가 체중계를 가리켰다⁠. 나는 체중계에 올라갔다⁠. 앞발 하나는 체중계 밖에 두었다⁠. 간호사가 숫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 범돌이 살이 빠졌나⁠? 발 하나 내려놨네⁠. 범돌⁠, 발 올려⁠.⁠”

나는 발을 올리지 않았다⁠. 내 몸무게는 내가 정한다⁠. 간호사가 웃으며 내 발을 들어 올리려 하자 나는 다른 발을 내렸다⁠. 예리가 이마를 짚었다⁠.

“⁠얘가 원래 이래요⁠. 그냥 대충 적어 주세요⁠.⁠”

주사는 아프지 않았다⁠. 아픈 척은 했다⁠. 진료실을 나오면서 나는 다시 닫힌 문 앞에 앉았다⁠. 수의사가 문 앞에 앉은 나를 보았다⁠. 수의사 손에서 고무장갑과 소독약과 늙은 개 냄새가 났다⁠. 수의사는 예리를 보았다⁠.

“⁠혹시 격리 중인 할머니 개 아시는 분이세요⁠?⁠”

“⁠네⁠. 저희가⁠… 아는 개예요⁠.⁠”

“⁠밥을 안 먹어요⁠. 사흘째⁠. 물만 조금⁠. 문 쪽만 보고 누워 있어요⁠. 잠깐 얼굴만 보시겠어요⁠? 원래는 안 되는데⁠, 보호자분도 지금 와 계셔서요⁠.⁠”

문이 열렸다⁠. 철망 우리가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우리마다 개가 하나씩 있었다⁠. 입마개를 한 누런 수컷은 철망에 몸을 붙인 채 꼬리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있었고⁠, 귀 한쪽이 찢어진 검은 개는 우리 안을 끝없이 돌았다⁠. 수의사가 예리에게 설명했다⁠. 사람을 문 개들이 기질 평가를 기다리는 방이라고 했다⁠. 개가 사람에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수의사와 훈련사들이 모여 따져 보는 일이 기질 평가라고 했다⁠. 평가 날까지 개들은 여기서 기다린다⁠. 기다리는 개들의 냄새는 다 같았다⁠. 집이 아닌 데서 자는 개의 냄새⁠. 맨 끝 우리 안에 늙은 개가 엎드려 있었다⁠. 열흘 사이에 몸이 줄어 있었다⁠. 흰빛 도는 회색 털이 등뼈 위에서 갈라져 있었다⁠. 늘어진 귀가 바닥에 닿아 있었다⁠. 늙은 개는 문 쪽으로 고개를 두고 있었다⁠. 문 앞에 눕는 개였다⁠. 여기에서도 문 앞에 누웠다⁠.

우리 앞에 애 엄마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에 사료 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릇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우리 앞으로 갔다⁠. 철망 사이로 코를 넣었다⁠. 늙은 개가 고개를 들었다⁠. 늙은 개의 코가 철망을 사이에 두고 내 코에 닿았다⁠. 따뜻하지 않았다⁠. 코가 말라 있었다⁠. 늙은 개는 내 주둥이 옆을 맡았다⁠. 예리의 손 냄새와 우리 집 냄새와 경모 냄새를 맡았다⁠. 경모 냄새에서 오래 멈췄다⁠. 그리고 다시 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철망 앞에 엎드렸다⁠. 늙은 개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두었다⁠. 문을 향해서⁠.

*

애 엄마가 일어났다⁠. 예리를 보았다⁠.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그 집 어머니 변호사가 전화했어요⁠. 당신 남편이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할매 살려 준대요⁠. 대신 애를 달래요⁠. 할매 목숨이랑 우리 애를 바꾸재요⁠. 당신 남편⁠, 찍을 거예요⁠?⁠”

“⁠안 찍게 할게요⁠.⁠”

“⁠언니가 무슨 수로요⁠? 언니도 몇 주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잖아요⁠.⁠”

예리가 입을 다물었다⁠. 애 엄마가 사료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릇이 철망에 부딪혀 소리가 났다⁠.

“⁠알아요⁠. 언니 탓 아닌 거⁠. 그 집 어머니 탓이고 저 사람 탓이고 내 탓이에요⁠. 팔 년 동안 애한테 아빠 죽었다고 한 거⁠, 내 탓이에요⁠. 근데 그 대가를 왜 할매가 치러요⁠? 할매는 애 붙잡은 손 하나 물었어요⁠. 그게 다예요⁠.⁠”

애 엄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애 엄마는 갈라진 목소리를 오래 두지 않았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바꿨다⁠.

“⁠할매가 밥을 안 먹어요⁠. 애 냄새가 없어서요⁠. 집에서는 애 방 앞에서 먹었거든요⁠.⁠”

예리가 철망 안을 보았다⁠. 늙은 개의 콧구멍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무것도 맡을 것이 없는 공기를 맡고 있었다⁠.

“⁠애가 베던 베개⁠, 베개 껍데기 갖다 놓으면 안 될까요⁠? 냄새 나는 거로⁠.⁠”

수의사가 문가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애 엄마가 예리를 오래 보았다⁠.

“⁠내일 가져올게요⁠.⁠”

“⁠같이 와요⁠. 범돌도요⁠.⁠”

애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사료 그릇을 철망 안으로 한 뼘 더 밀어 넣었다⁠. 늙은 개는 그릇을 보지 않았다⁠. 나를 보았다⁠. 나는 그릇에 코를 대고 사료 한 알을 집어 먹는 시늉을 했다⁠. 개들은 그렇게 서로를 먹인다⁠. 한 마리가 먹으면 다른 한 마리도 먹는다⁠. 늙은 개가 고개를 들어 그릇에 코를 댔다⁠. 한 알을 먹었다⁠. 애 엄마가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

화요일 밤 열한 시⁠, 경모가 늦게 들어왔다⁠. 현관에서부터 손가락 냄새가 났다⁠. 붉은 인주였다⁠. 도장을 꾹 누른 손가락 끝에서 인주 냄새가 짙게 났다⁠. 예리가 거실 불을 켰다⁠.

“⁠찍었어⁠?⁠”

“⁠찍었어⁠.⁠”

경모의 귀 뒤는 조용했다⁠. 경모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예리는 경모의 얼굴을 보았고⁠, 나는 경모의 손가락을 보았다⁠.

“⁠할매 살리려고⁠. 엄마가 진술서 고치는 거 내 눈으로 봤어⁠. 처분 요청 뺐어⁠. 청구서는 법원에 들어가도 바로 결정 안 나⁠. 조정부터 해⁠. 조정에서 내가 아니라고 하면 돼⁠. 시간 버는 거야⁠.⁠”

“⁠애 엄마한테는 뭐라고 해⁠? 애 데려가는 서류에 도장 찍었다고⁠?⁠”

“⁠할매 죽게 둘 수 없잖아⁠. 애가 할매 없으면 숨을 못 쉬어⁠. 예리야⁠, 나 이번엔 진짜로 고른 거야⁠. 둘 다 지키려고 한 게 아니야⁠. 할매를 골랐어⁠.⁠”

“⁠자기가 고른 게 할매야⁠? 자기 엄마야⁠?⁠”

경모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경모의 인주 묻은 손가락을 맡았다⁠. 붉은 냄새 밑에 시어머니의 머리 굳히는 약 냄새가 묻어 있었다⁠. 시어머니 앞에서 찍은 도장이었다⁠.

예리가 안방에 들어가 가방을 꺼냈다⁠. 옷 몇 벌과 내 사료 봉지와 내 밥그릇을 넣었다⁠. 내 가슴줄을 들고 나왔다⁠. 나는 예리 앞으로 가서 등을 내밀었다⁠. 고리가 딸깍딸깍 두 번 잠겼다⁠.

“⁠엄마 집에 가 있을게⁠. 자기가 고른 거 자기가 지켜 봐⁠.⁠”

경모가 현관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문턱을 넘다가 한 번 돌아보았다⁠. 경모는 거실 한가운데 혼자 서 있었다⁠. 경모의 손가락이 붉었다⁠.

*

예리 어머니 집은 화정에 있다⁠. 오래된 아파트 3층⁠, 베란다에 해가 드는 집⁠. 내가 강아지 때 두 해를 산 집이다⁠. 예리 어머니가 베란다 구석의 방석을 털어 주었다⁠. 방석에서 다섯 해 전의 내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강아지 때의 젖내였다⁠.

예리 어머니가 내 밥그릇에 사료를 붓고⁠, 사료 위에 들기름에 구운 북어 껍질을 잘게 찢어 얹었다⁠. 예리가 보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나는 밥그릇 앞에 앉아 냄새만 맡았다⁠. 북어 냄새가 좋았다⁠. 먹지 않았다⁠. 예리 어머니가 그릇을 내 코앞으로 밀었다⁠.

“⁠얘가 북어를 안 먹어⁠? 범돌이 북어를 안 먹어⁠?⁠”

“⁠걔도 속이 불편한가 봐⁠.⁠”

예리가 말했다⁠. 철망 우리 안의 사료 그릇이 생각났다⁠. 가득 찬 그릇이었다⁠. 문 앞을 보며 엎드린 개의 그릇이었다⁠.

나는 방석에 눕지 않았다⁠. 현관으로 가서 현관문 앞 타일 위에 엎드렸다⁠. 타일이 차가웠다⁠.

“⁠얘가 왜 문 앞에서 자니⁠.⁠”

예리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오며 말했다⁠. 예리는 거실 바닥에 앉아 대답하지 않았다⁠. 예리 어머니가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내 등을 쓸었다⁠. 들기름 냄새가 났다⁠.

“⁠여기 너 어릴 때 아빠 기다리던 자리다⁠. 출장 간다던 날마다⁠.⁠”

예리가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왜 말 안 했어⁠? 내가 여기서 기다리는 거 보면서⁠.⁠”

“⁠말하면 네가 안 기다릴까 봐⁠. 아빠 기다리는 것도 못 하게 될까 봐⁠.⁠”

예리 어머니가 내 등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 엄마도 시어머니도 경모도 똑같은 말을 했다⁠. 아이가 다칠까 봐⁠. 숨기는 사람들은 다 누군가를 지킨다고 했다⁠. 숨긴 것이 나중에 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타일 위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문 너머 복도에서 누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났다⁠. 경모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귀만 세웠다가 내렸다⁠. 문 앞에 눕는 개는 문 너머의 발소리를 다 듣는다⁠. 다 듣고⁠, 기다리는 발소리가 아니면 귀를 내린다⁠. 늙은 개도 오늘 밤 그렇게 귀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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