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49자)

제가 정한 날

적국 황태자를 인질로 데려왔더니 내 책사가 되었다 · 윤재하

협정문은 열한 줄이었다. 사흘 동안 청령관 군막 안에서 위강과 내가 그것을 썼다. 정확하게는 내가 쓰고 위강이 읽었다. 위강은 한 줄을 읽을 때마다 그 줄이 국경의 어느 고개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물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줄은 지웠다. 처음에 스무 줄이던 것이 열한 줄이 되었다.

맨 끝에 증인 둘이 이름을 적는 자리가 있었다. 한 사람은 감군 곽윤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북방군 부장 맹초였다. 맹초는 그 자리를 보고 얼굴이 하얘졌다.

“내가 이름을 써야 하오?”

“증인이시니까요.”

“…맹 자가 획이 몇 개요?”

맹초는 이틀 동안 군막 구석에서 모래판에 맹 자를 썼다. 손가락으로 쓰고 지우고 또 썼다. 맹수가 옆에서 획 순서를 불러 주었다. 셋째 날 아침에 맹초는 비단 조각에 맹 자를 써서 나에게 내밀었다. 아래쪽 그릇 명 자가 위쪽 맏 맹 자보다 두 배 컸다.

“그릇이 크면 많이 담기니 좋은 글씨입니다.”

“놀리는 거요?”

“칭찬입니다. 하나라 법도에 칭찬은 반만 진심입니다.”

“나머지 반은?”

“놀리는 겁니다.”

맹초가 비단 조각을 구겨 내 무릎에 던졌다. 위강이 서안 너머에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가 웃는 것을 그 한 번 보았다. 소리는 없었다. 어깨가 한 번 흔들렸다.

*

협상 전날 해 질 녘, 곽윤이 군막에 들어왔다. 손난로를 쥐고 있었다. 그는 서안 위의 협정문을 들어 끝까지 읽고,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열한 줄 다음, 빈 자리였다.

“한 줄이 모자랍니다.”

“무엇이 모자랍니까?”

“협정에 서명한 뒤 인질은 연경 재상부로 옮긴다. 이 줄입니다. 감군이 넣으라 하면 넣어야 합니다. 폐하께서 감군을 붙이신 까닭이 그것입니다.”

위강이 일어서려 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를 앉혔다. 그리고 붓을 들어 곽윤 앞에 내밀었다.

“넣으십시오, 낭중.”

곽윤이 붓을 보았다. 받지 않았다.

“직접 넣으십시오. 낭중의 글씨로요. 내일 하나라 대표가 그 줄을 읽으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연나라는 하나라 황태자를 협정이 끝난 뒤에도 놓아줄 생각이 없다. 연나라 재상이 그 황태자를 가져간다. 그럼 하나라 대표는 협정을 찢고 일어설 겁니다. 협정이 찢어지면 장군은 옥에 듭니다. 낭중께서 바라시는 일이지요. 그런데 폐하께서는 찢어진 까닭을 물으실 겁니다. 그 까닭이 낭중의 글씨로 적혀 있을 겁니다.”

곽윤의 손가락이 손난로 위에서 멈췄다.

“폐하는 구경을 좋아하시지만, 구경거리가 깨지는 것은 싫어하십니다. 대전에서 개구리 이야기를 하던 날 보셨지요.”

곽윤은 오래 붓을 보았다. 그다음에 손을 거두었다.

“그 줄은 두지요.”

그가 말했다.

“대신 내일 협상장 장막 안쪽 경비는 병부 군사로 세우겠습니다. 감군이 그것까지는 정할 수 있습니다. 장군의 군사는 장막 바깥에 서십시오.”

위강의 턱이 굳었다. 장막 안에 병부 군사가 서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장군의 칼은 장막 천 한 겹 밖에 있었다. 그것이 내가 그 한 줄을 막은 값이었다. 나는 그 값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값이었다.

“그러십시오.”

곽윤이 나갔다. 휘장이 내려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오늘은 남쪽 나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

자정이 가까워서 위강이 내 군막에 왔다. 갑옷을 벗고 솜옷 하나만 입고 있었다. 그가 갑옷을 벗은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어깨가 갑옷을 입었을 때보다 좁아 보였는데, 그래도 내 군막 입구를 다 막았다.

“남쪽 문 밖에 말 한 필을 매어 두었소.”

그가 서서 말했다. 앉지 않았다.

“석두가 지키고 있소. 남쪽 문 군사들은 내 사람들이오. 오늘 밤 그 문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못 본 거요.”

나는 화로 앞에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가면 장군은 내일 목이 없습니다.”

“그건 내가 정하오.”

“장군.”

“당신은 당신 것만 정하시오. 열쇠는 당신 것이고, 말도 당신 것이오.”

“남쪽 나루에 곽윤의 군사들이 있을 겁니다.”

“있을 수도 있소. 없을 수도 있소. 그래서 말을 맨 거요. 걸어서 가면 붙잡히오. 말이면 붙잡히기 전에 강에 닿소. 그다음은 당신 아우가 배를 정말 댔는지에 달렸소.”

그는 그 말을 하고 휘장을 걷었다. 나가려다가 멈췄다.

“나는 내 군막에 있겠소. 남쪽은 안 보겠소.”

휘장이 내려졌다. 발소리가 옆 군막으로 갔다. 그 군막의 휘장이 걷히고 내려지는 소리가 났다. 그다음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

나는 군막을 나와 남쪽 성벽에 올랐다. 사슬이 성벽 돌계단마다 걸렸다. 성벽 위에는 바람이 칼 같았다. 국경의 마른 바람이 귓바퀴를 베고 지나갔다.

백하가 보였다. 달빛 아래 얼음이 회색으로 누워 있었다. 그 건너편, 남쪽 기슭에 작은 불빛 하나가 있었다. 나루였다. 불빛은 꺼졌다가 켜지고, 꺼졌다가 켜졌다. 세 번씩 끊어서 깜빡였다. 배가 와 있다는 신호였다. 아우가 보낸 배였을 수도 있고, 곽문이 보낸 불이었을 수도 있었다. 밀랍의 사향 냄새는 그 둘이 하나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냈다. 손가락이 곱아서 열쇠 구멍을 두 번 놓쳤다. 세 번째에 들어갔다. 돌렸다. 쇠고리가 벌어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한 달 반 동안 내 걸음마다 따라오던 소리가 그렇게 작게 끝났다.

사슬이 성벽 돌 위에 떨어졌다. 두 발목이 동시에 가벼워졌다. 너무 가벼워서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펠트를 감은 자리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펠트를 풀었다. 벗겨졌다가 아문 자리가 달빛 아래 하얗게 보였다.

나는 걸었다. 사슬 없이 걸으니 걸음이 너무 길었다. 첫걸음에 발이 앞으로 쏠려 몸이 휘청했다. 한 자 반에 맞춰 걷던 다리가 그 길이를 잊지 못했다.

남쪽 문 앞에 석두가 말고삐를 쥐고 서 있었다. 털모자 꼭대기의 붉은 술이 바람에 날렸다. 그가 내 발목을 보았다. 사슬이 없는 발목을 보고 눈이 커졌다.

“가십니까?”

나는 말을 보았다. 검은 말이었다. 콧김을 길게 뿜었다.

“말한테 미안하구나. 오늘 밤엔 안 탄다.”

석두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저 말이 사람을 뭅니다. 저도 두 번 물렸습니다.”

“장군 말이냐?”

“예. 장군만 안 뭅니다.”

나는 웃었다. 사슬 없이 웃으니 웃음도 가벼웠다. 석두에게 말을 마구간에 도로 넣으라고 일렀다. 그리고 남쪽 문을 등지고 걸었다.

*

위강의 군막 안에는 등잔 하나가 켜져 있었다. 그는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 서안 위에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술이 아니라 물이었다. 그는 휘장이 걷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았다. 그다음에 내 발목을 보았다.

그는 일어서지 않았다. 일어서면 무엇인가가 정해질까 봐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풀었소?”

“제가 정한 날입니다.”

나는 휘장을 내렸다. 바람 소리가 휘장 한 겹 밖으로 물러났다. 등잔 불꽃이 한 번 기울었다가 바로 섰다. 군막 안에 마른 가죽 냄새와 먹 냄새와 그의 냄새가 있었다. 말과 바깥바람이 섞인 냄새였다. 장군부에서 그의 이마가 내 어깨에 닿았던 밤의 냄새였다.

나는 걸어가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당에서 곽문에게 술을 따를 때와 같은 자세였다. 그때는 사슬이 무릎 밑에 깔렸다. 지금은 아무것도 깔리지 않았다.

“담연.”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당신을 데려왔소. 쇠사슬을 채워서. 당신이 지금 하려는 것이 그 사슬 때문이라면…”

“사슬은 성벽 위에 두고 왔습니다.”

“후회할 거면…”

“장군.”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열쇠를 내 손바닥에 올려놓던 그 손이었다. 굳은살이 두꺼웠고, 손등에 오래된 칼자국이 있었다.

“저는 스물일곱 해 동안 한 번도 고른 적이 없습니다. 황태자도 아버지가 정했고, 백하로 간 것도 아버지가 정했고, 인질도 아우가 정했습니다. 선은 제가 그었지만 그것도 열둘과 셋 사이에서 고른 것이지 제가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밤 처음 고릅니다. 말이 아니라 이 군막을요.”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성 일곱을 무너뜨린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은 말라 있었다. 국경 바람이 사흘 동안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처음에 움직이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았다. 그다음에 그의 손이 내 등으로 올라왔다. 천천히, 언제든 떼어 낼 수 있게 천천히 올라왔다. 나는 떼어 내지 않았다. 그 손을 내 허리로 끌어내렸다.

등잔을 끈 것은 나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솜옷 끈을 푸는 데 오래 걸렸다. 매듭이 군대식이었다. 그가 낮게 웃었다. 처음으로 소리 내서 웃었다. 그 웃음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그의 손이 내 발목에 닿았다. 사슬이 있던 자리, 벗겨졌다가 아문 자리였다. 그는 그 자리를 오래 쓸었다. 손바닥 전체로 감싸 덥혔다. 그날 밤 그가 가장 오래 머문 자리가 거기였다.

군막 밖에서 바람이 휘장을 쳤다. 화로의 숯이 내려앉았다. 그의 숨과 내 숨이 어둠 속에서 같은 박자를 찾아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사슬 소리에 맞춰 걷던 그의 발소리처럼, 이번에는 그가 내 숨에 맞췄다. 그다음에는 내가 그의 숨에 맞췄다. 그다음에는 누가 누구에게 맞추는지 알 수 없었다.

*

새벽이 오기 전에 나는 일어났다. 그는 자고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도 그렇게 깊이 자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나는 솜옷을 여미고 성벽 위로 다시 올라갔다.

사슬은 내가 두고 간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서리가 내려 쇠가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이 쇠에 쩍 달라붙었다. 펠트를 발목에 다시 감고, 쇠고리를 채우고, 열쇠를 돌렸다. 잠기는 소리는 풀리는 소리보다 컸다.

협정에 서명할 때까지 나는 인질이어야 했다. 쇠사슬 찬 사람이 붓을 들어야 하나라 조정이 뒷날 그 붓을 연나라가 억지로 쥐여 주었다고 우길 수 있었다. 아우가 내일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 문을 하나는 남겨 두어야 했다. 그 문은 이 쇠고리였다. 열쇠는 다시 허리춤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에는 내가 채운 사슬이었다.

동쪽 하늘이 회색으로 밝아 왔다. 백하 건너 나루의 불빛은 꺼져 있었다. 대신 남쪽 기슭 언덕 위로 깃발 하나가 올라가고 있었다. 하나라 황실의 짙은 녹색이었다. 깃발 한가운데에 금실로 수놓은 것이 새벽빛에 번쩍였다.

하나라 대표의 깃발이 아니었다. 하나라 황제의 깃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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