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25자)

큰집 고스톱 판을 싹 쓸어 간 예비 사위

명절용 대여 애인 로봇 · 소예찬

추석 당일 오후 세 시⁠, 큰집 식구들이 현관에 신발을 열한 켤레 벗어 놓았다⁠. 큰아버지 옥병규는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자마자 아버지 사진에 고개를 까딱했고⁠, 큰엄마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 해솔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큰엄마는 반백의 짧은 머리를 단단하게 볶았고⁠,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두 줄로 감고 있었다⁠.

“⁠사진보다 낫네⁠. 키가 몇이고⁠?⁠”

“⁠백팔십이입니다⁠.⁠”

“⁠몇 년생이고⁠? 무슨 띠고⁠? 혈액형은⁠?⁠”

해솔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소현은 거실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었다⁠. 「⁠큰엄마 예상 질문 30⁠」⁠. 대본 마지막 장에 붙여 넣은 표였다⁠. 개발자 아홉 해의 버릇대로 질문을 미리 뽑고 답을 달아 두었다⁠. 키⁠, 띠⁠, 혈액형⁠, 연봉⁠, 집⁠, 차⁠, 종교⁠, 담배⁠, 군대⁠, 부모님 직업⁠, 형제⁠, 고향⁠. 큰엄마는 표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 내려왔다⁠. 연봉을 묻자 해솔은 세전으로 말씀드릴지 세후로 말씀드릴지 되물었고⁠, 큰엄마는 둘 다 말하라고 했다⁠. 종교를 묻자 해솔은 어머님 다니시는 교회로 다니겠다고 했다⁠. 군대를 묻자 육군 병장 만기 전역이라고 했다⁠. 해솔은 군대에 간 적이 없었고⁠, 세전과 세후도 대본에 적힌 숫자였다⁠. 거짓말은 전부 소현이 새벽 두 시에 쓴 것이었다⁠. 열한 번째 질문까지 맞혔을 때 소현은 처음으로 큰엄마가 고마웠다⁠.

열두 번째에서 큰엄마가 표를 벗어났다⁠.

“⁠니 우리 소현이 어디가 모자라서 데꼬 가노⁠?⁠”

해솔은 대답하지 않았다⁠. 표에 없었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해솔은 입을 다문 채 큰엄마를 보았다⁠. 큰엄마도 해솔을 보았다⁠. 오 초⁠, 십 초⁠. 큰엄마의 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

“⁠이 사람 봐라⁠. 대답을 안 하네⁠.⁠”

“⁠말 아끼는 사람이다⁠.⁠” 부엌에서 엄마가 갈비 냄비를 들고 나왔다⁠. “⁠소현이 아부지도 저랬다⁠.⁠”

*

거실에 상이 두 개 펼쳐졌다⁠. 갈비찜과 전⁠, 송편⁠, 식혜⁠. 사촌 오빠 옥상길은 구청 공무원답게 상다리를 펴는 손이 반듯했다⁠. 상길의 아내와 막내 사촌 동생 부부⁠, 그리고 조카 둘이 부엌과 거실 사이를 오갔다⁠. 큰엄마는 해솔 옆자리에 앉아 갈비를 해솔 그릇에 얹었다⁠.

“⁠단식한다 카던데 오늘은 묵어라⁠. 추석이다⁠.⁠”

“⁠큰엄마⁠, 해솔이 단식 중이야⁠.⁠”

“⁠니는 가만있어라⁠. 니는 서른여섯에 츄리닝 입고 큰집 식구를 맞이하나⁠? 그 바지는 무릎이 다 나왔네⁠.⁠” 큰엄마의 화살이 해솔에게서 소현에게로 옮겨 갔다⁠. “⁠애는 언제 낳을 끼고⁠? 서른여섯이면 노산이다⁠. 우리 은숙이는 서른에 둘째 낳았다⁠.⁠”

막내 사촌 동생 은숙이 부엌에서 엄마 목소리를 듣고 소리쳤다⁠. “⁠엄마⁠, 나를 와 끌어들이노⁠!⁠”

해솔의 그릇에 쌓인 갈비는 이번에도 소현의 입으로 하나씩 들어갔다⁠. 소현이 네 번째 갈비를 우물거릴 때 일곱 살 조카가 해솔의 무릎에 턱을 괴고 올려다보았다⁠. 조카의 눈이 해솔의 소매 끝에 머물렀다⁠.

“⁠삼촌 손목에 3일이 뭐야⁠?⁠”

소현의 숨이 멎었다⁠. 표의 맨 마지막 줄⁠, 서른 번째 질문이었다⁠. 해솔이 웃었다⁠.

“⁠헬스장 3일권이에요⁠.⁠”

“⁠우리 아빠는 헬스장 한 달 끊는다던데⁠.⁠”

“⁠한 달 끊으면 안 가게 돼서요⁠.⁠”

조카의 아빠인 제부가 갈비를 뜯다가 큰 소리로 웃었다⁠. 제부는 판교 옆 동네 게임 회사에 다녔다⁠. 웃음 끝에 제부의 눈이 해솔의 손목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

다섯 시⁠, 큰아버지가 담요를 깔고 화투를 꺼냈다⁠. 명절에 큰집 사람들이 모이면 고스톱 한 판은 큰아버지의 법이었다⁠. 점에 백 원⁠. 큰아버지는 사위 될 사람 손버릇을 봐야 한다며 해솔을 맞은편에 앉혔다⁠.

첫 판에서 해솔은 광을 셋 먹었다⁠. 둘째 판에서는 피를 스무 장 모았다⁠. 셋째 판에서 해솔이 흔들고 쓰리고를 부르자 큰아버지의 지팡이가 담요 위로 툭 떨어졌다⁠. 해솔은 패가 몇 장 나갔고 몇 장 남았는지⁠, 누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전부 알았다⁠. 바닥에 깔린 패를 한 번 보면 잊지 않았다⁠.

“⁠이 사람 화투 공장에서 왔나⁠?⁠”

소현은 담요 밑으로 해솔의 정강이를 찼다⁠. 해솔은 정강이를 차인 다음 판부터 지기 시작했다⁠. 지는 방법도 반듯했다⁠. 비광을 쥐고도 바닥의 똥피를 먹었고⁠, 다 된 청단을 큰엄마 앞에 내려놓았다⁠. 큰아버지가 패를 내려놓고 해솔을 노려보았다⁠.

“⁠니 지금 나를 놀리나⁠?⁠”

“⁠아닙니다⁠, 큰아버님⁠. 제가 손이 미끄러워서요⁠.⁠”

“⁠손이 미끄러우면 광을 버리나⁠?⁠”

제부가 옆에서 해솔의 손을 보았다⁠. 해솔의 손가락은 미끄러운 데가 하나도 없었다⁠. 제부가 중얼거렸다⁠.

“⁠형님⁠, 카드를 다 외우시네요⁠.⁠”

“⁠외우는 거 아닙니다⁠. 보이는 겁니다⁠.⁠”

소현의 주머니가 떨었다⁠. 「⁠대본 이탈 2/3⁠」⁠. 소현은 화투 담요 위로 고개를 숙였다⁠. 아껴 쓰라고 한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로봇 동반자 등록법⁠, 국민 열 명 중 넷 “⁠찬성⁠”⁠」⁠. 화면 속 맹남희 의원이 명절 귀성객 사이에서 악수를 하고 있었다⁠. 큰아버지가 혀를 찼다⁠.

“⁠로봇이랑 사는 것들한테 무슨 법이고⁠? 요새 사람들은 정을 기계한테 붙인다⁠.⁠”

해솔이 화투를 섞던 손을 잠깐 멈췄다⁠. 다시 섞었다⁠. 화투 마흔여덟 장이 해솔의 손에서 한 장도 어긋나지 않고 포개졌다⁠.

*

일곱 시⁠, 상을 치우는 동안 큰엄마가 엄마를 부엌 구석으로 불렀다⁠.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춘 것이 거실까지 다 들렸다⁠.

“⁠복순아⁠, 니 너무 서두르는 거 아이가⁠? 부모님 직업도 대충 말하고⁠, 대답도 안 하고⁠. 서른여섯에 데꼬 온 사람이면 어디 하자가 있다⁠. 니가 혼자 키워서 애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

엄마의 등이 굳었다⁠. 소현은 행주를 쥐고 부엌 문간에 섰다⁠. 엄마가 돌아섰다⁠. 고무장갑을 벗어 싱크대에 탁 던졌다⁠.

“⁠형님⁠, 말 다 했습니까⁠?⁠”

“⁠내가 틀린 말 했나⁠?⁠”

“⁠우리 소현이 판교서 아홉 해 일했습니다⁠. 지 손으로 지 밥 벌어먹었습니다⁠. 형님 아들 구청 들어갈 때 원서 누가 써 줬습니까⁠? 우리 창수가 밤새 써 줬습니다⁠. 형님이 혼자 키웠다 카는 그 애가 큰집 손주들 생일마다 선물 부치는 거는 압니까⁠?⁠”

부엌이 조용해졌다⁠. 큰엄마의 진주 목걸이가 가슴팍에서 달그락거렸다⁠. 소현은 엄마가 자기 편을 드는 것을 서른여섯 해 만에 처음 보았다⁠. 엄마는 늘 남들 앞에서 딸을 먼저 깎았다⁠. 그래야 남들이 덜 깎는다고 믿었다⁠. 오늘 엄마는 깎지 않았다⁠.

큰엄마가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라믄 신고부터 넣어라⁠. 진짜 날 잡은 사이면 내일이라도 넣을 수 있제⁠.⁠”

“⁠넣지예⁠.⁠”

“⁠엄마⁠!⁠”

“⁠상길이 니 내일 당직이라 캤제⁠?⁠”

거실에서 송편을 집던 상길이 고개를 들었다⁠. 젓가락 끝에서 송편이 떨어졌다⁠.

“⁠예⁠, 작은어머니⁠. 내일 일요일 밤 당직입니다⁠. 규정상 휴일에는 당직실에서 신고서 접수는 받습니다⁠. 수리는 화요일에 담당자가 심사해서 하고요⁠.⁠”

“⁠접수는 받는다 카네⁠.⁠” 엄마가 앞치마를 풀었다⁠. “⁠서식 어디서 뽑노⁠?⁠”

*

안방 프린터는 켜고 나서 데워지는 데 한참 걸렸다⁠. 소현은 엄마를 따라 안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프린터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몸을 푸는 동안 둘은 화장대 앞에 나란히 섰다⁠.

“⁠엄마⁠, 아까 왜 내 편 들었어⁠?⁠”

“⁠니 편 든 거 아이다⁠. 내 편 든 기다⁠.⁠” 엄마는 프린터 덮개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니 키운 게 내다⁠. 니를 깎으면 내를 깎는 기다⁠.⁠”

소현은 대답 대신 화장대 위를 보았다⁠. 로션 병들 뒤에 흰 봉투 하나가 반쯤 숨어 있었다⁠. 대학병원 이름 아래 「⁠심장내과⁠」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엄마가 소현의 눈길을 따라가더니 로션 병 하나를 봉투 앞으로 옮겨 놓았다⁠.

“⁠건강검진 결과다⁠. 나이 묵으면 다 나온다⁠.⁠”

“⁠뭐가 나왔는데⁠?⁠”

“⁠혈압⁠. 약 묵고 있다⁠.⁠” 엄마는 프린터 버튼을 꾹 눌렀다⁠. “⁠니는 니 신고서나 신경 써라⁠.⁠”

상길이 휴대전화로 서식을 찾아 엄마에게 보냈다⁠. 프린터가 덜덜거리며 종이를 한 장 밀어냈다⁠. 「⁠혼인신고서⁠」⁠. 엄마는 종이를 들고 거실로 나와 상 위에 펼쳤다⁠. 증인 칸이 두 개였다⁠. 성인 둘이 서명해야 한다고 상길이 말했다⁠.

큰엄마가 먼저 볼펜을 집었다⁠. 큰아버지가 볼펜을 넘겨받아 이름 옆에 도장 대신 지장을 찍었다⁠. 엄마는 종이를 반으로 접어 꽃무늬 블라우스 앞섶에 넣었다⁠. 해솔은 화투 담요를 개다가 신고서가 엄마 가슴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

설거지는 소현과 은숙이 맡았다⁠. 은숙은 고무장갑을 끼고 접시를 헹구며 거실 쪽을 힐끔거렸다⁠. 해솔이 조카 둘을 양팔에 하나씩 매달고 비행기를 태워 주고 있었다⁠. 팔이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언니⁠, 저 사람 진짜 좋아 보여⁠.⁠” 은숙이 목소리를 낮췄다⁠. “⁠언니 웃는 거 오늘 처음 봤다⁠. 아까 화투 칠 때 언니가 형부 정강이 차면서 웃더라⁠.⁠”

“⁠내가⁠?⁠”

“⁠응⁠. 코에 주름 세 개 잡고⁠.⁠”

소현은 접시를 행주로 닦다가 손을 멈췄다⁠.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똥머리가 풀어져 목덜미에 내려와 있었고⁠, 입꼬리는 아직 올라가 있었다⁠. 사흘짜리 남자 앞에서 웃는 얼굴을 사촌 동생이 먼저 보았다⁠.

*

밤 아홉 시⁠, 큰집 식구들이 신발 열한 켤레를 도로 신었다⁠. 현관에서 큰아버지가 지팡이를 겨드랑이에 끼고 점퍼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흰 봉투 하나를 해솔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까 화투에서 니가 일부러 진 거⁠, 내 다 안다⁠. 첫 명절 용돈이다⁠.⁠”

“⁠큰아버님⁠, 저는 받을 수가⁠…⁠…⁠”

“⁠어른이 주면 받는 기다⁠.⁠” 큰아버지는 해솔의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내 동생 사진 앞에 바나나 놓을 줄 아는 사람은 니가 처음이다⁠.⁠”

해솔은 봉투를 두 손으로 받고 허리를 굽혔다⁠. 봉투에는 큰아버지의 볼펜 글씨로 「⁠사위⁠」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해솔이 봉투를 니트 안주머니에 넣는 동안 소현은 해솔의 손을 보았다⁠. 이틀 뒤 밤이면 판교 반납 창구 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손이었다⁠. 봉투를 받은 손끝이 안주머니 위를 한 번 더 눌렀다⁠. 소현은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동안 다른 식구들은 계단 쪽에서 조카들 신발 끈을 묶었고⁠, 상길만 소현 옆에 섰다⁠. 상길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소현을 보며 말했다⁠.

“⁠손목 띠 바코드 말이다⁠.⁠”

소현은 숫자판만 보았다⁠. 7⁠, 8⁠, 9⁠.

“⁠우리 구청 1층에 민원 안내 로봇이 있다⁠. 손목에 같은 바코드 띠가 있다⁠. 소담이더라⁠.⁠”

10⁠, 11⁠. 소현의 손바닥이 츄리닝 바지에 쓸렸다⁠.

“⁠나는 규정대로 한다⁠. 내일 밤에 신고서 들어오면 받아야 된다⁠. 받는 거는 받는 기고⁠, 수리는 안 될 끼다⁠. 주민등록번호 칸이 비면 화요일에 불수리 통지 나간다⁠.⁠” 상길은 안경을 밀어 올렸다⁠. “⁠작은어머니한테는 내가 말 안 한다⁠. 그라니까 니가 정해라⁠. 내일 밤에 진짜로 들고 올 거가⁠?⁠”

12⁠, 13⁠. 엘리베이터가 14층에 닿았다⁠. 문이 열리고 계단 쪽에서 조카들이 뛰어왔다⁠. 상길은 대답을 기다리며 문 버튼을 누르고 서 있었다⁠.

소현은 거실 쪽을 돌아보았다⁠. 열린 현관 너머로 해솔이 엄마 옆에서 상을 닦고 있었고⁠, 엄마는 블라우스 앞섶을 한 손으로 누른 채 웃고 있었다⁠.

“⁠응⁠.⁠”

상길의 손가락이 버튼에서 떨어졌다⁠.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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