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548자)

사직서는 내가 먼저 냈다

면접관 속마음이 들린다 · 피오담

2026년 12월 2일 수요일 아침 여섯 시 오십 분⁠, 문래동 합주실 B의 문을 열자 드럼 옆 바닥에 침낭이 펴져 있었다⁠. 지원은 침낭 속에서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쓴 채 스틱 한 짝을 쥐고 자고 있었다⁠. 나는 쇼핑백에서 수분크림 한 통을 꺼내 베이스 드럼 위에 올려놓았다⁠. 뚜껑이 드럼 가죽에 닿아 둥⁠, 하고 낮게 울렸다⁠.

지원이 눈을 떴다⁠. 나를 보았고⁠, 재었다⁠.

‘⁠진짜 왔네⁠. 크림 들고⁠.⁠’

“⁠손 튼 데 발라요⁠. 스틱 쥐는 데⁠.⁠”

지원은 침낭에서 팔만 꺼내 크림을 받았다⁠.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더니 오른손 검지 굳은살에 한 번 문질렀다⁠.

“⁠어젯밤에 큰아버지한테 말했어요⁠. 회사 안 다닌다고⁠. 큰아버지가 그러면 집안 사람도 그만두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울지 말자⁠. 아침부터⁠.⁠’

“⁠지원 씨⁠.⁠”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전무님이 나한테 면접 전에 뭘 보냈는지 알아요⁠?⁠”

전무의 속에서 지나가던 말이 떠올랐다⁠. 지원이한테 보낸 것⁠.

“⁠뭔데요⁠?⁠”

지원이 휴대전화를 침낭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직 안 말할래요⁠. 내가 할 거예요⁠. 내 입으로⁠. 내 차례가 오면⁠.⁠”

‘⁠이번엔 남이 터뜨려 주는 거 말고⁠.⁠’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지원은 다시 침낭에 들어갔다가 크림 뚜껑을 덜 닫은 것을 알고 팔을 뻗어 꽉 닫았다⁠.

*

열 시⁠, 7층 사장실⁠. 법무팀 면담이라던 포스트잇과 달리 소파에는 마상구 대표와 도형석 전무와 법무팀장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의자 하나가 있었다⁠. 지원자 의자처럼 혼자 놓인 의자였다⁠. 나는 앉았다⁠.

귀가 또 넓어졌다⁠. 건물 밖까지 들렸다⁠. 사옥 앞 보도에서 출근하던 사람들이 휴대전화로 기사를 읽으며 7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A 씨가 여기 있다는 거지⁠.⁠’ ‘⁠협박 입사자⁠.⁠’ 보도 위의 속까지 내 귀로 들어왔다⁠.

“⁠백윤아 씨⁠.⁠” 마 대표가 말했다⁠. 염주가 손목에서 조용했다⁠. “⁠기사 봤죠⁠.⁠”

“⁠네⁠.⁠”

“⁠회사는 고소를 취하할 수 있어요⁠. 정규직도 그대로 둘 수 있고⁠. 일 잘한다고 들었어요⁠. 진급도 빨리 시켜 줄 수 있어요⁠.⁠” 마 대표가 법무팀장을 보았다⁠. 법무팀장이 종이 한 장을 탁자에 올렸다⁠. 「⁠진술서⁠」⁠.

“⁠한 문장만 써 주면 돼요⁠. 소경민 팀장이 개인적인 판단으로 순위를 조정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소 팀장이 가져간 회사 문서는 돌려주고⁠.⁠”

‘⁠소경민 하나로 막고 상장 간다⁠. 실사는 미뤘다⁠. 소경민이 혼자 했으면 회사는 피해자다⁠.⁠’

마 대표의 속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원이가 어젯밤 내 앞에서 스틱을 내려놓고 갔다⁠. 동생 놈 빚은 내가 다 갚았는데⁠. 자식이 없어서 조카를 붙들었더니 조카가 회사를 버린다⁠. 이 회사를 누구한테 주나⁠.⁠’

나는 진술서를 보았다⁠. 「⁠소경민 팀장이 개인적인 판단으로⁠」⁠. 경민 팀장의 딸 이야기를 전무에게 한 사람이 없었는데 전무는 알고 있었다⁠. 이 종이 한 장이면 경민 팀장의 딸은 등록금 고지서를 엄마 없이 받을 것이었다⁠.

에코백에서 봉투를 꺼냈다⁠. 어젯밤 백조세탁 다리미판 위에서 쓴 것이었다⁠. 엄마가 다리미를 들고 지나가다 봉투 겉면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지나갔다⁠.

「⁠사직서⁠」

“⁠제 자리부터 내려놓을게요⁠.⁠”

법무팀장이 눈을 크게 떴다⁠. 전무는 그대로였다⁠. 마 대표가 봉투를 보았다⁠.

“⁠저도 정해진 자리에 앉았어요⁠. 사장님 앞에서⁠, 이 소파에서⁠, 제가 정했어요⁠. 들은 걸로 거래했고요⁠. 그 자리 들고 남한테 정해진 자리라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잖아요⁠.⁠”

‘⁠이 애가 미쳤나⁠.⁠’ 법무팀장이었다⁠. ‘⁠아니다⁠. 이 애가 맞다⁠.⁠’ 마 대표였다⁠. 둘은 동시에 다른 말을 속으로 했다⁠.

“⁠이 자리 나가면 다시는 이 업계 못 들어와요⁠.⁠” 마 대표가 말했다⁠. 위협이라기보다 사실을 말하는 목소리였다⁠. ‘⁠협의회에 한 줄이면 끝이다⁠.⁠’

“⁠마흔한 번 떨어져 봤어요⁠. 그중에 몇 번은 협의회 줄 때문이었고요⁠. 마흔두 번째가 그렇게 무섭지는 않아요⁠.⁠”

전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고소는 그대로 갑니다⁠.⁠”

“⁠네⁠. 저도 신고하러 가요⁠.⁠”

“⁠어디에요⁠?⁠”

“⁠노동청이요⁠. 채용절차법 위반이요⁠. 점수 고친 건 업무방해라 경찰에도 가고요⁠. 전무님이 면접 날 말씀하셨잖아요⁠. 법을 잘 안다고⁠.⁠”

‘⁠끝까지 간다⁠. 그래도 증거는 서명뿐이다⁠. 내 목소리는 없다⁠.⁠’

나는 사원증을 목에서 빼서 사직서 봉투 위에 얹었다⁠. 사진 속 나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

열한 시⁠, 6층 내 자리에서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 봐야 한 달 치였다⁠. 머그잔 하나⁠, 기획전 문구를 적은 포스트잇 뭉치⁠, 지원이 두고 간 스틱 한 짝⁠. 서른 명의 속이 내 등 뒤에서 소란스러웠다⁠. ‘⁠진짜 나가네⁠.⁠’ ‘⁠협박해서 들어왔다더니 왜 제 발로 나가⁠.⁠’ ‘⁠기사가 틀렸나⁠.⁠’ 소문이 처음으로 방향을 잃고 있었다⁠.

차동만 팀장이 빈 복사지 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에 내 짐을 하나씩 옮겨 담았다⁠. 팀장이 담는 동안 나를 재었다⁠.

‘⁠나도 서명했다⁠. 내가 준 점수 그대로가 원본에 있다⁠. 1등한테 1등 점수⁠. 경찰이 부르면 그대로 말하자⁠. 모르는 일이었다고는 하지 말자⁠.⁠’

“⁠팀장님⁠.⁠”

“⁠네⁠.⁠”

“⁠성수역 뒤 칼국수는 화요일만 쉬어요⁠. 나머지는 다 열고요⁠. 뼈해장국 집은 일요일만 쉬어요⁠. 냉면은 3월부터 하고요⁠.⁠”

차 팀장이 상자를 내려놓았다⁠. 넥타이 끝이 상자 모서리에 닿았다⁠.

“⁠점심은 앞으로 누가 골라요⁠?⁠”

“⁠팀장님이 고르세요⁠. 고르시는 동안은 아무 생각이 안 나잖아요⁠.⁠”

차 팀장이 웃었다⁠. 웃으면서 속으로 한 말은 웃음과 달랐다⁠. ‘⁠이 친구가 1등이었다⁠. 내가 준 점수가 맞았다⁠.⁠’ 팀장은 상자를 들고 1층까지 같이 내려왔다⁠. 회전문 앞에서 상자를 넘겨주며 소리 내어 한 말은 하나였다⁠. “⁠화요일은 쉰다⁠. 외웠어요⁠.⁠”

*

저녁 여덟 시⁠, 백조세탁에는 손님이 없었다⁠. 엄마는 다리미를 켜 두고 다리지 않았다⁠. 셔터를 내리면서 나를 보았다⁠.

“⁠너 그 회사 왜 나왔냐⁠.⁠”

“⁠내 자리가 아니었어⁠.⁠”

“⁠네가 1등이었다며⁠.⁠” 엄마가 셔터 손잡이를 놓았다⁠. 셔터가 반쯤 내려온 채 멈췄다⁠. “⁠1등이 왜 자기 자리가 아니야⁠. 미쳤냐⁠. 크림 회사를 왜 나와⁠. 손님들한테 벌써 열두 번 말했는데⁠.⁠”

엄마 입에서 나온 말은 화가 나 있었다⁠. 엄마의 속은 다른 데 있었다⁠.

‘⁠잘했다⁠. 내 딸이다⁠. 저 회사 사장 크림 다 쓰고 나면 다른 거 사 바르면 된다⁠. 세탁기 할부는 지난주에 남은 걸 한꺼번에 다 냈다⁠. 단골 계모임 곗돈 타서⁠. 말 안 했다⁠.⁠’

“⁠엄마⁠.⁠”

“⁠왜⁠?⁠”

“⁠할부 다 냈다며⁠.⁠”

엄마가 다리미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다리미에서 김이 올라와 엄마 얼굴을 가렸다⁠.

“⁠너 진짜 무섭다⁠.⁠”

“⁠알아⁠.⁠”

엄마는 셔터를 끝까지 내리고 내 앞으로 왔다⁠. 키가 나보다 작은 엄마가 내 재킷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 번 털었다⁠. 면접 날 아침처럼⁠. 털어 낼 먼지가 없는 어깨였다⁠.

“⁠다음 면접 때도 다려 줄게⁠. 마흔세 번째든 마흔네 번째든⁠.⁠”

*

12월 4일 금요일 오전⁠, 노동청 민원실 번호표 기계에서 종이가 한 장 나왔다⁠.

「⁠민원 대기 41⁠」

나는 번호표를 들고 한참 웃었다⁠. 옆에서 성우가 내 번호표를 넘겨다보았다⁠. 노동청에 같이 가자고 연락한 것은 나였고⁠, 성우는 대답 대신 시간만 물었다⁠. 성우는 남색 패딩 차림에 에코백 대신 서류 봉투를 들고 왔다⁠. 「⁠43⁠」번 번호표를 뽑았다⁠. 성우가 42번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이상하게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대기 의자에 나란히 앉자 성우가 나를 재었다⁠.

‘⁠사직서를 냈다고⁠. 기사에 났다⁠. 이 사람이 그만두면 나는 뭘 받나⁠.⁠’

“⁠당신이 사장실에서 두 자리 안 만들었으면⁠, 나는 2등으로 떨어지고 끝났을 거예요⁠.⁠” 성우가 말했다⁠. “⁠3등 될 일은 없었어요⁠.⁠”

“⁠알아요⁠.⁠”

“⁠그래서 내려놓은 거예요⁠? 내려놓으면 끝이에요⁠?⁠” 성우가 서류 봉투를 무릎에 내리쳤다⁠. “⁠나는 위자료 받으려고 온 거 아니에요⁠. 몇 해 전에 카지노 공기업 채용 비리로 떨어진 사람들이 위자료 받았대요⁠. 한 사람에 수백만 원⁠. 나는 그거 받으려고 3년 버틴 거 아니에요⁠. 자리 받으려고 왔어요⁠.⁠”

‘⁠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그랬다⁠. 그만하라고⁠. 아버지 말 듣고 나왔다⁠.⁠’

성우의 말은 맞았다⁠. 나는 성우의 3등을 내 손으로 만들었고⁠, 사직서 한 장으로 3등이 2등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같이 찾아요⁠. 자리⁠.⁠”

“⁠어떻게요⁠?⁠”

민원실 문이 열리고 경민 팀장이 들어왔다⁠. 베이지 재킷은 엄마가 다려서 주름 하나 없었다⁠. 경민 팀장은 성우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처음 만나는 얼굴이 아니었다⁠. 경민 팀장은 면접장에서 성우의 점수를 적었고⁠, 보정 파일에서 같은 점수를 고쳤다⁠.

경민 팀장이 가방에서 투명 파일을 꺼냈다⁠. 2026년 원본 평가표였다⁠. 맨 위 석 장 가운데 하나를 성우에게 내밀었다⁠. 「⁠지원자 43⁠」⁠. 합계 칸 옆에 볼펜으로 동그라미 친 숫자⁠.

「⁠2⁠」

성우는 평가표를 두 손으로 받았다⁠. 받는 동안 성우의 속이 멈췄다⁠. 한참 아무것도 들리지 않다가⁠, 한 마디가 왔다⁠.

‘⁠2등⁠.⁠’

성우가 웃었다⁠. 웃다가 고개를 숙였고⁠, 고개를 숙인 채 어깨가 떨렸다⁠. 대기 의자의 다른 민원인들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저 사람 왜 울어⁠.⁠’ ‘⁠체불인가⁠.⁠’

“⁠미안해요⁠.⁠” 경민 팀장이 말했다⁠. “⁠고친 건 나예요⁠.⁠”

성우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 ‘⁠이 사람이 고쳤다⁠. 이 사람이 원본을 들고 왔다⁠. 둘 다 이 사람이다⁠.⁠’

“⁠수첩도 있어요⁠.⁠” 경민 팀장이 갈색 수첩을 내밀었다⁠. “⁠누가 시켰는지⁠.⁠”

전광판에 「⁠41⁠」이 떴다⁠.

*

근로감독관은 안경을 이마에 올린 채 원본 평가표와 수첩을 오래 보았다⁠. 감독관이 나를 재었고⁠, 들렸다⁠. ‘⁠협박 입사자 기사의 A 씨구나⁠. 기사하고 서류가 반대 얘기를 하네⁠.⁠’

“⁠채용절차법 위반은 저희가 조사해서 과태료를 매깁니다⁠. 채용에 관한 부당한 청탁이나 압력⁠, 강요는 3천만 원 이하예요⁠. 상시 근로자 서른 명 넘는 회사니까 결담은 적용 대상이고요⁠.⁠” 감독관이 평가표를 가지런히 모았다⁠. “⁠점수를 고쳐서 특정인을 붙인 건 형법의 업무방해예요⁠. 그건 경찰이나 검찰에 고발하셔야 합니다⁠. 은행들 채용 비리 때 행장들이 그 죄로 실형을 받았어요⁠.⁠”

“⁠고발장은 오늘 내요⁠.⁠” 성우가 말했다⁠. “⁠제가 피해자니까 제 이름으로요⁠.⁠”

경민 팀장이 성우를 보았다⁠. ‘⁠내 이름도 들어가겠구나⁠. 공범으로⁠.⁠’ 경민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동안 휴대전화가 가방 속에서 한 번 울렸다⁠. 경민 팀장은 꺼내 보지 않았다⁠.

노동청을 나와 우리 셋은 관할 경찰서로 걸었다⁠. 성우는 원본 평가표 사본을 서류 봉투에 넣어 가슴에 안고 걸었다⁠. 경민 팀장은 수첩을 손에 쥐고 걸었다⁠. 나는 「⁠민원 대기 41⁠」 번호표를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세 사람의 걸음이 하나도 안 맞았다⁠. 지원이 있었으면 박자를 맞춰 주었을 것이다⁠.

*

12월 9일 수요일 아침⁠, 백조세탁 우편함에 두꺼운 봉투가 왔다⁠. 봉투 겉면에 성수 뷰티기업 협의회 로고가 찍혀 있었다⁠.

「⁠청년과 함께하는 공정 채용 간담회 — 12월 17일(⁠목⁠) 오후 두 시⁠, 성수 컨벤션홀 · 패널⁠: 백윤아(⁠전 결담 신입사원⁠)⁠」

초대장 안에 손글씨 쪽지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반듯하고 느린 글씨였다⁠.

「⁠오셔서 직접 말씀하시죠⁠. — 도형석⁠」

엄마가 어깨 너머로 쪽지를 읽었다⁠. ‘⁠이 사람이 전무구나⁠. 글씨는 반듯하네⁠. 사람은 안 반듯한데⁠.⁠’

“⁠가냐⁠?⁠” 엄마가 소리 내어 물었다⁠.

“⁠가⁠.⁠”

엄마가 다리미판 위의 남색 재킷을 집어 들었다⁠. 다리미 스위치를 켜는 딸깍 소리가 났다⁠.

8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