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57자)

만 마리가 한꺼번에

주인을 지키는 키링 인형 · 연채온

11월 2일 화요일 아침⁠, 무탁은 공방 작업대에 노트북을 펴 놓고 낮은 의자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표가 하나 떠 있었다⁠. 무탁이 태어나서 처음 만든 표였다⁠. 칸마다 시각과 지역과 글 주소가 들어 있었다⁠.

“⁠누나⁠, 이거 엑셀이 저를 무시해요⁠. 숫자 넣으면 날짜로 바꿔요⁠. 삼 시 십사 분 넣었는데 3월 14일로 바뀌었어요⁠.⁠”

“⁠앞에 따옴표 하나 찍어요⁠.⁠”

“⁠따옴표요⁠? 엑셀한테 말을 거는 거예요⁠?⁠”

“⁠네⁠. 이건 날짜 아니라고요⁠.⁠”

무탁은 따옴표를 찍고 숫자를 다시 넣었다⁠. 이번에는 날짜로 바뀌지 않았다⁠. 무탁이 손뼉을 쳤다⁠. 슬아가 있었다면 무탁의 등을 한 대 쳤을 것이었다⁠. 해나는 무탁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밤새 무탁은 귀 세운 토끼 사진을 모았다⁠. 사진이 올라온 시각을 하나씩 적었다⁠. 시각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지 않았다⁠. 세 덩어리로 뭉쳐 있었다⁠. 출시 날 밤 열한 시 사십 분⁠, 이튿날 새벽 한 시 오십이 분⁠, 그리고 세 시 십사 분⁠. 덩어리마다 전국에서 사진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세 번이에요⁠. 하룻밤에요⁠.⁠”

해나는 표 옆에 뉴스 화면을 띄웠다⁠. 시각마다 사고가 있었다⁠. 열한 시 사십 분⁠, 인천에서 자전거를 타던 대학생이 공사장 펜스에 부딪혀 쇄골이 부러졌다⁠. 한 시 오십이 분⁠, 부산 지하철역 계단에서 야간 근무를 마친 여자가 굴러 발목을 다쳤다⁠. 세 시 십사 분⁠, 대전 횡단보도⁠.

무탁은 피해자들의 계정을 찾아냈다⁠. 다들 다친 뒤에 글을 올렸다⁠. 병원 침대 사진 옆에 분홍 귀 토끼가 있었다⁠.

「⁠계단에서 미끄러질 때 토끼가 따뜻해지긴 했어요⁠. 근데 그게 다였어요⁠」

「⁠귀가 서길래 뭔가 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안 함⁠. 그냥 따뜻한 손난로⁠」

「⁠친구 대신 씀⁠. 친구 가디언이 사고 직전에 따뜻해지기만 했대요⁠. 친구는 그거 믿고 이어폰 끼고 걸었대요⁠」

무탁은 마지막 글을 소리 내어 읽다가 목이 막혔다⁠. 노트북을 해나 앞으로 밀어 놓고 헬멧을 품에 끌어안았다⁠.

“⁠개무서워요⁠, 누나⁠. 진짜로요⁠. 우리 엄마도 가디언 사려고 했어요⁠. 누나 거 있는데도 하나 더 있으면 좋다고⁠.⁠”

“⁠어머님한테 사지 말라고 해요⁠.⁠”

“⁠말했어요⁠. 엄마가 누나 장사 방해하는 거냐고 물었어요⁠.⁠”

해나는 웃지 못했다⁠. 표의 세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세 줄 모두 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 위험할 때마다 만 마리가 귀를 세웠다⁠. 만 마리의 열이 한 사람에게 모이지 않고 만 군데로 흩어졌다⁠. 위험한 한 사람의 가방에 달린 토끼는 만 분의 일만큼 따뜻했다⁠.

할머니가 별이 퍼진다고 하던 말이 손끝에서 풀렸다⁠. 떡볶이 이야기가 아니었다⁠.

*

열 시⁠, 해나가 무탁의 오토바이 뒤에 앉으려는데 시장 입구에서 무탁의 어머니가 김밥 바구니를 들고 걸어왔다⁠. 꽃무늬 몸뻬 대신 새 고무줄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방 손잡이에 토끼가 둘 매달려 있었다⁠. 하나는 해나가 놓은 별⁠, 귀가 분홍 국화 무늬였다⁠. 다른 하나는 분홍 귀였다⁠.

“⁠엄마⁠!⁠” 무탁이 헬멧을 쓴 채 소리를 질렀다⁠. “⁠사지 말라니까⁠!⁠”

“⁠귀엽잖아⁠. 둘이면 두 배지⁠.⁠”

무탁의 어머니는 해나에게 김밥 두 줄을 내밀었다⁠. 해나는 김밥을 받고⁠, 어머니의 가방 손잡이를 보았다⁠.

“⁠어머님⁠, 분홍 귀는 집에 두고 다니세요⁠.⁠”

“⁠왜⁠? 사장님 토끼가 샘내⁠?⁠”

“⁠샘은 안 내요⁠. 근데 공장 토끼는 어머님 길을 몰라요⁠.⁠”

“⁠길은 내가 알지⁠. 토끼가 왜 알아야 돼⁠?⁠” 어머니가 웃었다⁠. “⁠사장님 토끼는 내 노래도 알잖아⁠. 내 김밥이 어때서⁠. 공장 토끼는 그냥 옆에서 듣기만 하라고 해⁠.⁠”

해나는 대답할 말을 찾다가 찾지 못했다⁠. 어머니는 김밥 바구니를 고쳐 들고 시장 안으로 걸어갔다⁠. 두 토끼가 나란히 흔들렸다⁠. 국화 귀는 한쪽으로⁠, 분홍 귀는 다른 한쪽으로⁠.

“⁠누나⁠, 우리 엄마 원래 말 안 들어요⁠.⁠” 무탁이 헬멧 안에서 중얼거렸다⁠. “⁠저 닮아서요⁠.⁠”

*

열한 시⁠, 해나는 성수동 폭신 본사 로비에 서 있었다⁠. 로비 한가운데 사람 키의 세 배는 되는 곰 인형이 앉아 있었다⁠. 곰의 배에 문이 있었다⁠. 회의실이었다⁠. 방문객들이 곰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무탁은 곰을 올려다보며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누나⁠, 곰 배 속에서 회의하면 집중이 돼요⁠?⁠”

“⁠모르겠어요⁠.⁠”

“⁠저는 배고플 거 같아요⁠.⁠”

안내 데스크 직원이 해나의 이름을 듣고 전화를 걸었다⁠. 오 분 뒤 승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오늘은 넥타이를 맸다⁠. 분홍 넥타이였다⁠. 해나를 보고 넥타이를 손으로 한 번 눌렀다⁠.

“⁠대표님 회의가 있어서요⁠. 매고 왔습니다⁠.⁠”

“⁠잘 어울려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승진은 해나만 데리고 7층으로 올라갔다⁠. 무탁은 로비의 곰 옆 소파에 남았다⁠. 7층 복도 끝 회의실은 세 벽이 유리였다⁠. 유리 너머로 책상들이 보였다⁠. 해나는 책상들 사이에서 슬아의 뒷모습을 찾지 않으려고 의자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열었다⁠.

“⁠어젯밤 세 시 십사 분이요⁠. 보셨죠⁠.⁠”

“⁠봤습니다⁠. 저희 모니터에도 떴어요⁠.⁠”

해나는 무탁의 표를 승진 앞으로 돌렸다⁠. 시각 세 줄⁠, 사고 세 건⁠, 피해자의 글 세 개⁠. 승진은 표를 끝까지 읽었다⁠. 읽는 동안 얼굴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 노트북을 해나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세 분 다 다치셨네요⁠. 안타깝습니다⁠.⁠”

“⁠세 분 다 가디언을 달고 있었어요⁠.⁠”

“⁠압니다⁠.⁠” 승진은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별토끼 가디언 사용자 설문 · 출시 이틀 · 응답 팔천이백 명⁠」 막대가 몇 개 그려져 있었다⁠. “⁠밤길이 덜 무섭다는 분이 팔십칠 퍼센트입니다⁠. 귀갓길에 서두르지 않게 됐다는 분이 육십 퍼센트고요⁠. 사장님⁠, 무서운 사람은 뛰어요⁠. 뛰는 사람이 넘어집니다⁠. 덜 무서우면 똑바로 걸어요⁠.⁠”

“⁠덜 무서워서 이어폰을 꼈대요⁠. 대전 그분이요⁠.⁠”

“⁠이어폰은 가디언 전에도 꼈을 겁니다⁠.⁠”

“⁠토끼를 믿고 어두운 길로 들어가요⁠.⁠”

“⁠그 길은 원래 다들 지나가는 길이에요⁠. 토끼가 있든 없든⁠.⁠” 승진이 종이를 해나 앞에 밀어 놓았다⁠. “⁠사장님 토끼를 단 사람은 하루 열 명씩 늘어납니다⁠. 제 토끼를 단 사람은 하루 만 명씩 늘어나요⁠. 세 분이 다치신 동안 만 명이 덜 무섭게 집에 갔습니다⁠. 저는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나는 종이를 보지 않았다⁠. 승진을 보았다⁠. 승진의 말에는 구멍이 없었다⁠. 해나가 아는 것은 손끝의 열이었고⁠, 손끝의 열은 막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흩어지는 거 아시잖아요⁠. 모니터에 점이 한꺼번에 밝아지는 거요⁠.⁠”

승진이 잠깐 말을 멈췄다⁠. 유리벽 너머를 보았다⁠.

“⁠압니다⁠. 흩어지죠⁠.⁠” 승진은 목소리를 낮췄다⁠. “⁠대신 넓어집니다⁠. 사장님 별은 깊고 제 별은 넓어요⁠. 둘 다 필요해요⁠. 저는 사장님이 공장에 와서 그 깊이를 넓이에 보태 주시길 바랐습니다⁠. 지금도 바랍니다⁠.⁠”

“⁠깊이는 보태지는 게 아니에요⁠.⁠”

“⁠그건 해 봐야 알죠⁠.⁠”

“⁠해 봤잖아요⁠. 세 번⁠.⁠”

승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

대표였다⁠. 텔레비전에서 본 얼굴이 그대로 들어왔다⁠. 분홍 넥타이를 맨 마흔 후반의 남자가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며 해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이 크고 따뜻했다⁠. 악수를 끝까지 하지 않고 손을 놓았다⁠.

“⁠아⁠, 망원동 원조 사장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피 부장이 사장님 얘기만 해요⁠. 제가 질투가 날 지경이에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혹시 고문 생각 없으세요⁠? 저희 2차부터는 원조 사장님 이름을 상자에 넣고 싶은데요⁠. 「⁠망원동 공방의 손길 그대로⁠」 어때요⁠, 피 부장⁠?⁠”

“⁠대표님⁠, 지금 사장님이 사고 얘기를 하시던 중입니다⁠.⁠”

“⁠아⁠, 새벽 세 시 십사 분⁠!⁠” 대표가 손뼉을 쳤다⁠. “⁠그거 봤어요⁠? 해시태그가 오백만 회예요⁠. 전국 토끼가 한꺼번에 귀를 세웠다⁠, 일본도 같은 시각이다⁠. 이런 걸 돈 주고 못 만들어요⁠. 인수하겠다는 두 회사가 다 그 얘기만 해요⁠. 전국 동시 반응⁠. 다음 광고는 그걸로 갑니다⁠.⁠”

“⁠그 시각에 대전에서 사람이 다쳤어요⁠.⁠”

대표가 해나를 보았다⁠. 웃음이 얼굴에서 반쯤 내려갔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죠⁠. 저희도 위로금 보내 드릴 거예요⁠. 근데 사장님⁠, 토끼가 사고를 낸 건 아니잖아요⁠? 오토바이가 냈지⁠.⁠”

“⁠토끼가 지켜 준다고 믿었대요⁠.⁠”

“⁠믿는 건 손님 자유고요⁠.⁠” 대표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피 부장⁠, 2차 확정해⁠. 백만 개⁠. 11월 20일 출고⁠. 해외 물량 절반⁠. 인수사 실사 전에 숫자를 보여 줘야 돼⁠.⁠”

“⁠대표님⁠, 백만 개면 한 분 위험하실 때 백만 마리가 귀를 세웁니다⁠.⁠”

“⁠그럼 해시태그가 오억 회겠네⁠.⁠” 대표가 웃었다⁠. 농담인지 아닌지 해나는 가르지 못했다⁠. “⁠피 부장⁠, 원조 사장님이랑 잘 얘기해서 고문 계약도 같이 가져와⁠. 사장님⁠, 다음에 떡볶이 사 드릴게요⁠. 망원시장 떡볶이 유명하다면서요⁠.⁠”

대표가 나갔다⁠. 문이 닫히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승진은 분홍 넥타이를 손가락으로 느슨하게 풀었다⁠. 해나가 처음 보는 손놀림이었다⁠. 승진은 해나를 보지 않고 유리벽을 보았다⁠.

“⁠백만 개라고 하셨죠⁠.⁠” 해나가 말했다⁠.

“⁠네⁠.⁠”

“⁠막으실 거예요⁠?⁠”

“⁠제가 막을 수 있는 숫자가 아닙니다⁠.⁠” 승진이 넥타이를 다시 조였다⁠. “⁠그리고 막고 싶은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

같은 시각⁠, 로비의 곰 옆 소파에서 무탁은 폭신 직원 셋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내려오던 직원 하나가 무탁의 헬멧을 알아보았고⁠, 둘이 따라붙었다⁠.

“⁠혹시 그 영상 라이더님이세요⁠? 트럭⁠?⁠”

“⁠네⁠. 근데 저 반성 중이에요⁠.⁠”

“⁠사인해 주세요⁠!⁠”

무탁은 반성 중이라면서 사원증 뒷면에 사인을 세 장 해 주었다⁠. 사인이라고 해 봐야 이름 세 글자를 크게 쓰는 것이었다⁠. 직원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라이더님⁠, 솔기 사장님 같이 오셨죠⁠? 저희 팀에서 솔기 줄 서려고 휴가 낸 사람이 둘이에요⁠. 대표님한테는 비밀이고요⁠.⁠”

“⁠가디언 만드시면서요⁠?⁠”

“⁠만드니까 알죠⁠.⁠” 다른 직원이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개발팀 사람들이 그러는데⁠, 반응 모니터 점이 한꺼번에 깜빡일 때마다 사무실이 조용해진대요⁠. 다들 뉴스부터 찾아본대요⁠. 어디서 누가 다쳤나⁠.⁠”

무탁은 사원증에 마지막 사인을 하다가 펜을 멈췄다⁠. 곰 인형의 배 속 회의실에서 누가 웃는 소리가 났다⁠. 직원들은 웃음소리에 놀라 흩어졌다⁠. 무탁은 펜을 쥔 채 곰을 올려다보았다⁠. 곰은 웃는 얼굴이었다⁠.

*

해나는 노트북을 덮고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 유리벽 너머 책상들 사이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슬아였다⁠. 폭신 사원증을 목에 걸고⁠, 모니터에 귀가 반쯤 접힌 토끼를 띄워 놓고 있었다⁠.

해나는 걸음을 멈췄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슬아의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고 벌어졌다⁠.

복도 끝 유리방의 큰 화면에서 전국 지도 위의 분홍 점들이 한꺼번에 아주 조금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위험했다⁠. 슬아의 눈이 화면으로 갔다가 해나에게 돌아왔다⁠.

슬아는 고개를 돌렸다⁠. 모니터의 접힌 귀를 한 번 더 접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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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혜령2026.11.01· 9화

    엑셀이 숫자를 날짜로 바꾼다고 억울해하는 무탁 씨에게서 제 모습을 봤어요.

    • 연채온작가2026.11.01

      무탁 씨 인생 첫 표라서 칸마다 정성이 들어갔어요. 그 표가 생각보다 큰 걸 찾아냅니다.

만 마리가 한꺼번에 · 주인을 지키는 키링 인형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