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04자)

디자이너 구슬아

주인을 지키는 키링 인형 · 연채온

10월 29일 금요일 아침 일곱 시⁠, 슬아는 공방 문을 열고 들어와 앞치마를 두르지 않았다⁠. 작업대 끝⁠, 늘 앉던 자리에 서서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았다⁠. 해나는 개수대에 손을 담근 채 슬아의 등을 보았다⁠. 슬아의 등이 평소보다 곧았다⁠.

“⁠오늘이 29일이야⁠.⁠”

“⁠알아⁠.⁠”

“⁠아까 여섯 시에 회신 보냈어⁠. 간다고⁠.⁠”

해나는 물에서 손을 꺼냈다⁠. 수건으로 손가락을 하나씩 닦았다⁠. 검지 첫 마디가 뻑뻑했다⁠. 수건을 다 쓰고 나서야 해나는 슬아에게로 몸을 돌렸다⁠.

“⁠언제부터 나가⁠?⁠”

“⁠월요일⁠. 출시 날부터⁠.⁠”

슬아가 가방 손잡이에서 토끼를 풀었다⁠. 노란 체크 귀 토끼였다⁠. 지난봄에 해나가 놓아 준 별이 가슴에 있었다⁠. 슬아는 토끼를 작업대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해나가 매일 별을 놓는 자리였다⁠.

“⁠이거 돌려줄게⁠.⁠”

“⁠왜⁠?⁠”

“⁠공장 거 달고 다니려고⁠. 다음 출고분부터 내 도안 들어가⁠. 귀가 반쯤 접힌 토끼⁠. 내가 그린 거 내가 안 달고 다니면 웃기잖아⁠.⁠”

“⁠공장 거는 안 지켜⁠.⁠”

“⁠알아⁠. 네가 백 번 말했잖아⁠.⁠” 슬아가 웃으려다 말았다⁠. “⁠근데 해나야⁠, 이거 달고 폭신 출근하면 내가 매일 아침 회사 문 앞에서 너를 생각해야 돼⁠. 나는 그게 싫어⁠.⁠”

해나는 작업대 위의 토끼를 보았다⁠. 노란 체크 귀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슬아의 졸업 작품을 자르던 날이 떠올랐다⁠. 슬아는 가위를 쥐고 한참 망설이다가⁠, 해나가 보는 앞에서 단번에 잘랐다⁠. 졸업 작품은 버려도 토끼 귀는 오래 간다고 했다⁠.

“⁠안 받아⁠. 네 거야⁠.⁠”

“⁠그럼 여기 둬⁠. 네 거 아니고 내 거로⁠.⁠”

슬아는 토끼를 작업대에 둔 채 가방을 멨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귀 오리는 거⁠, 무탁 씨한테 시키지 마⁠. 걔는 가위를 칼처럼 써⁠.⁠”

문 방울이 울렸다⁠. 해나는 작업대 위의 토끼를 집지 않았다⁠. 토끼의 별에 손끝을 대 보았다⁠. 미지근했다⁠. 주인이 두고 간 별은 주인 손을 떠난 별이었다⁠.

*

오후 두 시⁠, 무탁이 작업대 끝 슬아의 자리에 앉아 가위를 들었다⁠. 슬아가 하지 말라고 한 일이었다⁠. 해나에게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누나⁠, 이거 그냥 동그랗게 자르면 되죠⁠?⁠”

“⁠토끼 귀는 길쭉해요⁠.⁠”

“⁠아⁠, 길쭉⁠.⁠”

무탁은 펠트를 접고 가위를 세웠다⁠. 김밥 써는 손놀림이었다⁠. 쓱⁠, 쓱⁠, 쓱⁠. 귀 다섯 개가 한꺼번에 잘려 나왔다⁠. 하나는 길쭉했고⁠, 하나는 동그랬고⁠, 셋은 삼각형이었다⁠.

“⁠무탁 씨⁠, 이건 고양이 귀예요⁠.⁠”

“⁠고양이 토끼 하면 되잖아요⁠. 요즘 섞는 게 유행이에요⁠.⁠”

“⁠토끼한테 물어봐야죠⁠.⁠”

“⁠토끼는 대답 안 해요⁠. 누나만 실이랑 얘기하잖아요⁠.⁠”

해나는 웃음을 참으며 삼각형 귀를 한쪽으로 치웠다⁠. 무탁은 시무룩해졌다가 다시 가위를 들었다⁠. 다음 다섯 개는 그럭저럭 길쭉했다⁠. 무탁은 귀를 하나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춰 보더니 뿌듯한 얼굴을 했다⁠.

“⁠슬아 누나한테 사진 보내도 돼요⁠?⁠”

“⁠보내지 마요⁠.⁠”

“⁠왜요⁠?⁠”

“⁠울 거예요⁠.⁠”

“⁠감동해서요⁠?⁠”

“⁠아뇨⁠.⁠”

*

11월 1일 월요일 오전 열 시⁠, 폭신 계정에 글이 올라왔다⁠. 「⁠별토끼 가디언 정식 출시⁠」 사진 속 토끼는 창고에서 본 만 마리 중 하나였다⁠. 크림색 몸⁠, 분홍 귀⁠, 금빛 별⁠. 가격은 이만 구천 원이었다⁠. 해나의 토끼보다 천 원 쌌다⁠.

열 시 사십 분⁠, 같은 계정에 글이 하나 더 올라왔다⁠. 「⁠만 개 전량 품절 · 감사합니다 · 2차 출고 준비 중⁠」

“⁠사십 분이래⁠.⁠” 해나가 화면을 보며 말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탁은 배달을 나갔고 공방에는 해나 혼자였다⁠. 해나가 별 하나를 놓는 시간이었다⁠.

점심때 말선의 가게 텔레비전에서 폭신 대표가 인터뷰를 했다⁠. 마흔 후반의 남자가 분홍 넥타이를 매고 웃었다⁠. 화면 아래 자막이 흘렀다⁠. 「⁠‘⁠수호 토끼⁠’ 폭신컴퍼니⁠, 해외 캐릭터 기업 두 곳서 인수 제안⁠… 기업 가치 세 배로⁠」 대표는 일본과 미국과 태국에서 예약이 몰려 해외 출고를 앞당긴다고 했다⁠. 기자가 토끼가 정말 지켜 주느냐고 묻자 대표는 웃으며 토끼를 카메라 앞에 들어 보였다⁠.

“⁠귀엽잖아요⁠. 귀여운 게 사람을 지키는 겁니다⁠.⁠”

말선이 국자로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해나야⁠, 저 사람 말이 맞냐⁠?⁠”

“⁠반만요⁠.⁠”

“⁠반이면 떡볶이 반 그릇이네⁠. 반 그릇은 안 판다⁠.⁠”

말선은 텔레비전을 끄지 않고 평상으로 나왔다⁠. 솔기 앞 줄을 보았다⁠. 서른 명 남짓이었다⁠. 지난주까지 백 명이 넘던 줄이었다⁠. 줄 선 사람들의 가방 손잡이 몇 개에 벌써 분홍 귀 토끼가 달려 있었다⁠. 공장 토끼를 사고도 솔기 줄에 선 사람들이었다⁠.

“⁠우리 컵떡볶이가 오늘 서른 개 나갔다⁠. 지난주엔 이백 개였어⁠.⁠” 말선은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체험관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해⁠. 사진 찍으러⁠. 사진 찍는 사람은 떡볶이를 안 먹어⁠. 배가 안 고프거든⁠. 배고픈 사람은 너한테 와⁠.⁠”

“⁠배고픈 사람이요⁠?⁠”

“⁠무서운 사람⁠.⁠”

해나는 줄을 보았다⁠. 맨 앞에 선 사람은 마흔쯤 된 여자였다⁠. 가방 손잡이에 분홍 귀 토끼가 달려 있었다⁠. 여자가 해나와 눈이 마주치자 분홍 귀 토끼를 손으로 가렸다⁠. 해나는 여자에게 다가가 길을 물었다⁠. 여자는 토끼를 가린 채 대답했다⁠.

“⁠요양 병원 야간 근무 끝나고 새벽 다섯 시에 나와요⁠. 병원 앞 공원을 가로질러요⁠. 공장 토끼도 사고 여기도 왔어요⁠. 둘 다 있으면 더 안전할까 해서요⁠.⁠”

“⁠공장 토끼는 집에 두고 다니세요⁠.⁠”

“⁠왜요⁠?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잖아요⁠.⁠”

해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공장 토끼가 해롭다는 증거는 해나에게 없었다⁠. 해나가 아는 것은 창고에서 손끝으로 받은⁠,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고른 열뿐이었다⁠.

*

오후 네 시⁠, 승진이 솔기 문을 열었다⁠. 체험관 앞치마 차림이었다⁠. 손에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승진은 종이를 작업대 위에 내려놓지 않고 해나에게 직접 건넸다⁠. 출시 첫날 판매 기록이었다⁠. 지역별로 막대가 그려져 있었다⁠. 서울⁠, 경기⁠, 부산⁠, 대구⁠. 맨 아래에 해외 예약이 따로 적혀 있었다⁠.

“⁠사십 분에 만 개입니다⁠. 사장님 별 하나 놓는 동안이요⁠.⁠”

“⁠세어 보셨어요⁠?⁠”

“⁠제가 제일 먼저 셌습니다⁠.⁠” 승진은 웃지 않았다⁠. “⁠사장님⁠, 저는 오늘 자랑하러 온 게 아닙니다⁠. 다시 여쭤보러 왔어요⁠. 공방 파실 생각 없으세요⁠? 2차부터 사장님이 공장에 계시면 실이 더 진해질 겁니다⁠. 헌 옷도 받고요⁠. 사장님 방식대로요⁠.⁠”

“⁠제 방식은 길을 듣는 거예요⁠.⁠”

“⁠만 명의 길을 다 들으실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열 명이에요⁠.⁠”

“⁠그래서 만 명입니다⁠.⁠”

둘은 같은 숫자를 서로 다른 말로 들었다⁠. 해나는 판매 기록을 반으로 접어 승진에게 돌려주었다⁠.

“⁠창고에서 만졌어요⁠. 만 마리가 다 똑같이 따뜻했어요⁠. 어디로도 안 가는 열이에요⁠.⁠”

“⁠어디로도 안 가는 열이 아무 열도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승진은 접힌 종이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슬아 씨 오늘 출근했습니다⁠. 첫 회의에서 대표님한테 귀 접힌 도안을 보였는데 대표님이 웃으셨어요⁠. 대표님이 웃으시는 거 저는 일 년에 두 번 봅니다⁠.⁠”

“⁠슬아 얘기는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승진은 문 앞에서 몸을 돌렸다⁠. 방울이 울리기 전에 한마디를 보탰다⁠. “⁠2차는 백만 개를 말씀하십니다⁠. 대표님이요⁠.⁠”

방울이 울렸다⁠. 해나는 작업대를 짚은 손을 오래 떼지 못했다⁠.

*

같은 날 저녁 일곱 시⁠, 성수동 폭신 본사 7층⁠. 슬아는 새 책상에 앉아 모니터에 귀 접힌 토끼 도안을 띄워 놓고⁠, 다른 창으로 사내 메신저를 보았다⁠. 첫날이라 아무도 슬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옆자리 디자이너는 헤드폰을 쓰고 곰 얼굴의 눈썹 각도를 이십 분째 고치고 있었다⁠.

복도 끝 유리방은 벽 하나를 통째로 큰 화면이 덮고 있었다⁠. 화면에 전국 지도가 떠 있고⁠, 지도 위에 분홍 점들이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었다⁠. 유리문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가디언 반응 모니터 ·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점 하나하나가 팔려 나간 토끼였다⁠. 슬아가 지나갈 때 점들이 일제히 아주 조금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유리방 안에서 개발팀 직원 둘이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보고⁠, 서로 얼굴을 보았다⁠.

슬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더 유리방을 보았다⁠. 점들은 조용했다⁠. 슬아는 책상으로 돌아와 귀 접힌 토끼의 귀를 한 번 더 접었다⁠. 손끝이 오른쪽 귀의 곡선을 따라가다 멈췄다⁠. 망원동 공방 창가에서 늘 손끝으로 받던 열이 생각났다⁠. 모니터는 아무 열도 내지 않았다⁠.

*

밤 열한 시⁠, 해나는 공방 작업대에서 열 번째 별을 놓았다⁠. 요양 병원 여자의 별이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길을 사십 분 동안 걸었다⁠. 별을 다 놓고 손끝을 비볐다⁠. 따뜻했다⁠. 작업대 한구석에 슬아의 노란 체크 귀 토끼가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해나는 토끼를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닫다가 다시 열고⁠, 토끼를 꺼내 창가의 견본 토끼 옆에 앉혔다⁠. 파란 귀와 노란 귀가 나란히 창밖을 보았다⁠.

휴대전화가 떨렸다⁠. 슬아였다⁠.

「⁠첫날 끝⁠. 사원증 사진 개못생기게 나옴⁠」

「⁠내일부터 2차 도안 회의⁠. 귀 접힌 거 통과됨⁠」

「⁠너 무탁한테 가위 줬지⁠」

해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삼각형 귀 세 개 나옴⁠」 슬아의 답은 바로 왔다⁠. 「⁠ㅋㅋㅋ 고양이 됐네⁠」 해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웃음이 났다가 금방 가라앉았다⁠.

*

새벽 세 시⁠, 해나는 잠이 오지 않아 공방 바닥에 깐 요 위에서 휴대전화를 보았다⁠. 공방 위층 원룸 월세를 아끼려고 지난주부터 공방에서 잤다⁠. 슬아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세 시 십오 분⁠, 화면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방금 우리 가디언이 귀를 세움⁠. 나 자고 있었는데⁠. 무서워서 깸⁠」

「⁠님들 지금 가디언 귀 서 있음⁠? 우리 집 것도 섬⁠」

「⁠부산인데 우리 것도 3시 14분에 섬⁠. 고양이가 토끼한테 하악질함⁠」

「⁠대구 수성구⁠. 동일⁠. 따뜻해지면서 귀가 쫑긋⁠」

「⁠도쿄입니다⁠. 일본 시간도 같은 3시 14분이에요⁠. 토끼가 이상해요⁠」

「⁠단체로 뭐 하는 거임⁠?⁠? 이거 업데이트 같은 거임⁠?⁠?⁠」

글이 일 분 사이에 백 개를 넘었다⁠. 사진이 줄줄이 붙었다⁠. 책상 위에서⁠, 침대 머리맡에서⁠, 가방 손잡이에서 분홍 귀 토끼들이 모두 귀를 세우고 있었다⁠. 사진을 찍은 시각이 모두 같았다⁠. 세 시 십사 분⁠.

해나는 요에서 일어나 앉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해나는 창고에서 만진 고른 열을 떠올렸다⁠. 만 마리가 한 덩어리로 따뜻하던 열이었다⁠. 한 덩어리는 한 번에 움직였다⁠.

어디선가 누군가 위험했다⁠. 만 마리가 단 한 사람을 향해 동시에 귀를 세웠다⁠. 해나는 화면을 내리며 위험했던 사람을 찾았다⁠. 사진 속 토끼들 사이로 뉴스 속보 하나가 끼어 있었다⁠. 「⁠새벽 3시 14분 대전 유성구 횡단보도서 배달 오토바이에 20대 여성 치여 중상⁠」

해나는 속보 사진을 두 손가락으로 벌려 키웠다⁠. 손끝이 화면 위에서 미끄러졌다⁠. 횡단보도 위에 떨어진 가방이 흐리게 찍혀 있었다⁠. 가방 손잡이에 분홍 귀가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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