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57자)

헌 옷 한 벌

주인을 지키는 키링 인형 · 연채온

화요일 아침⁠, 해나는 공방 문 옆에 빨래 바구니를 내놓았다⁠. 할머니가 수선집에서 쓰던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였다⁠. 바구니 손잡이에 종이를 묶었다⁠. 「⁠헌 옷 바구니 · 오래 입은 옷 한 벌 두고 가세요 · 토끼 몸이 됩니다⁠」

토끼의 크림색 몸통은 원래 할머니가 남긴 광목으로 지었다⁠. 광목은 지난주에 바닥이 났다⁠. 새 광목을 사 오면 몸통은 지을 수 있었지만⁠, 해나는 새 천이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할머니는 몸통도 헌 천으로 지었다⁠. 남이 오래 입은 천이어야 별이 앉을 자리가 따뜻하다고 했다⁠.

열 시가 되기 전에 바구니가 찼다⁠. 줄 선 사람들이 가방에서⁠, 쇼핑백에서⁠, 입고 있던 몸에서 옷을 꺼냈다⁠. 무릎이 나간 추리닝⁠, 소매가 닳은 니트⁠, 목이 늘어난 티셔츠⁠. 사람들은 옷만 두고 가지 않았다⁠. 옷을 넣으면서 한마디씩 했다⁠.

“⁠이거 제 첫 월급으로 산 거예요⁠. 팔꿈치 구멍 났는데 못 버렸어요⁠.⁠”

“⁠우리 아빠 등산복이요⁠. 아빠가 산에 못 가신 지 삼 년 됐어요⁠.⁠”

“⁠전 남친 거요⁠. 버리려다가 토끼라도 되라고⁠.⁠”

슬아가 바구니 옆에 쪼그려 앉아 옷을 한 벌씩 펼쳐 보았다⁠. 니트를 들어 햇빛에 비춰 보고⁠, 티셔츠의 목을 당겨 보고⁠, 등산복의 지퍼를 올렸다 내렸다⁠. 슬아의 얼굴이 해나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학교 다닐 때 원단 시장에서 짓던 얼굴이었다⁠.

“⁠이 니트는 귀 스무 개 나와⁠. 이 등산복은 단추 대신 지퍼 손잡이를 눈으로 달면 웃기겠다⁠.⁠”

“⁠토끼가 등산 가는 거야⁠?⁠”

“⁠토끼도 산에 가고 싶을 수 있지⁠.⁠”

점심때쯤 슬아의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떨렸다⁠. 줄 선 사람 하나가 바구니에 옷을 넣는 사진을 올렸는데⁠, 사람들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헌옷토끼⁠」 저마다 버리지 못한 옷을 찍어 올리고 옷에 얽힌 사연을 적었다⁠. 군산에서⁠, 청주에서⁠, 제주에서⁠. 오사카에서 온 글도 있었다⁠. 「⁠한국 토끼에게 제 교복을 주고 싶어요⁠」

“⁠택배로 보내도 되냐는 문의가 마흔 건이야⁠.⁠” 슬아가 화면을 내렸다⁠. “⁠우리 옷 가게 하냐⁠?⁠”

“⁠받아⁠.⁠”

“⁠어디다 둬⁠? 공방이 여덟 평인데⁠.⁠”

“⁠말선 이모 창고⁠.⁠”

“⁠이모가 떡볶이 백 그릇 값 받는다고 할걸⁠.⁠”

말선은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슬아가 택배 상자를 창고에 쌓아도 되느냐고 묻자⁠, 말선은 국자를 든 채 창고 열쇠를 내밀다가 도로 거두었다⁠.

“⁠조건이 있다⁠.⁠”

“⁠떡볶이 백 그릇이요⁠?⁠”

“⁠백 그릇은 내가 팔지⁠. 너희가 사진을 올려 줘⁠. 헌 옷 맡긴 사람은 우리 떡볶이 천 원 할인⁠. 해시태그 뭐라 그랬지⁠? 헌옷토끼⁠? 거기다 헌옷떡볶이도 붙여⁠.⁠”

“⁠떡볶이가 헌 옷이면 안 되잖아요⁠.⁠”

“⁠맛은 새 옷이다⁠.⁠”

말선은 열쇠를 슬아의 손바닥에 떨어뜨리고 몸을 돌렸다⁠. 창고 문을 열자 비닐로 싼 떡 상자들 사이로 빈자리가 반쯤 있었다⁠. 저녁이 되기 전에 남은 반이 다 찼다⁠.

*

오후 네 시⁠, 해나는 바구니에서 꺼낸 니트로 올을 풀었다⁠. 니트 올은 길고 부드러웠다⁠. 할머니의 금실 한 가닥과 함께 엄지와 검지 사이에 넣고 비볐다⁠. 손가락 사이가 데워졌다⁠. 꼬인 실이 금빛으로 번지며 길어졌다⁠. 해나는 남은 실을 실패에 감다가 손을 멈췄다⁠.

실패가 무거웠다⁠. 지난주보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 두꺼워져 있었다⁠. 공방을 연 뒤 반년 동안 한 마디가 불었는데⁠, 일주일 사이에 두 마디가 더 불었다⁠. 해나는 실패를 창 쪽으로 들어 보았다⁠. 감긴 금실이 햇빛을 받아 겹겹이 빛났다⁠. 사람들이 두고 간 옷의 수만큼⁠, 옷에 얽힌 말의 수만큼 실이 늘어 있었다⁠.

할머니는 이 실이 남의 헌 옷을 먹고 큰다고 했다⁠. 해나는 지금까지 할머니의 말을 비유로 들었다⁠. 이제는 손바닥이 무게로 알았다⁠.

“⁠해나야⁠, 뭐 해⁠? 실패하고 대화해⁠?⁠”

“⁠실이 쪘어⁠.⁠”

“⁠너는 빠졌어⁠. 밥 먹어⁠.⁠”

슬아가 김밥 한 줄을 내밀었다⁠. 무탁의 어머니가 아침에 줄 선 사람들에게 돌리고 남은 김밥이었다⁠. 은박지에 매직으로 「⁠토끼 사장님 몫 · 단무지 두 개⁠」라고 적혀 있었다⁠. 단무지가 정말 두 개 들어 있었다⁠.

*

밤 열한 시⁠, 해나는 무탁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았다⁠. 무탁이 빌려준 헬멧이 머리보다 커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헬멧이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무탁은 출발하기 전에 해나를 돌아보며 세 번 말했다⁠.

“⁠꽉 잡으세요⁠. 진짜 꽉요⁠. 저 무서우면 브레이크 세게 잡아요⁠.⁠”

“⁠무서우면 왜 배달을 해요⁠?⁠”

“⁠밤에 단가가 높아서요⁠.⁠”

오토바이가 망원동 골목을 빠져나가 한강 둔치로 내려갔다⁠. 바람이 헬멧 틈으로 들어와 귀를 때렸다⁠. 해나는 무탁의 배달 조끼 옆구리를 잡았다⁠. 무탁의 토끼가 헬멧 옆에서 흔들렸다⁠. 형광 주황 귀가 바람에 펄럭였다⁠.

둔치 길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늦게 뛰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강을 보며 맥주를 마시는 사람⁠. 해나는 사람들의 가방을 보았다⁠. 가방 손잡이마다 키링이 달려 있었다⁠. 곰⁠, 고양이⁠, 캐릭터 모양 키링들 사이로 크림색 토끼가 보였다⁠. 솔기 토끼는 아니었다⁠. 귀가 분홍이었다⁠. 폭신 체험관이 지난 금요일부터 견본을 삼만 구천 원에 팔기 시작한 것을 해나는 알고 있었다⁠. 체험관 유리문에 붙은 종이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가디언 견본 한정 판매 · 오늘 밤도 무사히⁠」

“⁠누나⁠, 저기도 분홍이에요⁠. 저기도⁠. 저기도⁠.⁠”

무탁이 신호에 멈출 때마다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셀 수 없이 많았다⁠. 해나의 토끼가 열 명을 지키는 동안⁠, 분홍 귀 토끼는 둔치 길을 다 덮고 있었다⁠.

망원 한강공원 출입구를 지날 때였다⁠. 앞에서 뛰던 여자가 속도를 늦추고 휴대전화를 보았다⁠. 등에 멘 작은 가방에 분홍 귀 토끼가 달려 있었다⁠. 뒤에서 자전거 한 대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검은 모자를 깊이 눌러쓴 남자였다⁠. 자전거가 여자 옆을 스치는 순간 남자의 손이 가방끈을 낚아챘다⁠.

여자가 끌려가며 넘어졌다⁠. 가방끈이 끊어지지 않아서 여자의 몸이 자전거를 따라 두어 걸음 끌려갔다⁠. 분홍 귀 토끼가 아스팔트에 쓸렸다⁠. 토끼는 뜨거워지지 않았다⁠. 귀도 서지 않았다⁠. 해나는 차가운 토끼가 아스팔트에 쓸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끈이 끊어지고 자전거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탁 씨⁠!⁠”

“⁠개무서워요⁠!⁠”

무탁은 소리를 지르면서도 오토바이를 돌렸다⁠. 자전거가 사라진 쪽으로 달리다가 둔치 끝의 볼라드 앞에서 멈췄다⁠. 자전거는 이미 다리 밑 계단으로 올라가 버렸다⁠. 무탁은 헬멧을 벗고 계단을 올려다보다가 돌아왔다⁠. 숨이 차서 말을 못 했다⁠.

해나는 여자 옆에 무릎을 꿇었다⁠. 여자의 무릎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손바닥도 까졌다⁠. 여자는 일어나려다 주저앉아 끊어진 가방끈을 내려다보았다⁠. 끈에 매달린 분홍 귀 토끼만 남아 있었다⁠.

“⁠이거 사면 지켜 준다고 했는데⁠.⁠”

여자가 토끼를 들어 올렸다⁠. 토끼의 별이 아스팔트에 긁혀 실밥이 풀려 있었다⁠. 해나는 풀린 실을 손끝으로 만졌다⁠. 폴리에스터였다⁠. 차가웠다⁠.

“⁠누가 그렇게 말했어요⁠?⁠”

“⁠체험관 언니가요⁠. 오늘 밤도 무사히⁠, 라고⁠.⁠”

무탁이 112에 신고하는 동안 해나는 손수건으로 여자의 무릎을 눌렀다⁠. 여자는 아픈 것보다 부끄러운 얼굴을 했다⁠. 삼만 구천 원을 내고 산 토끼를 해나 앞에서 들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얼굴이었다⁠.

*

새벽 한 시⁠, 망원지구대의 형광등 밑에서 여자는 진술서를 썼다⁠. 해나는 옆 의자에 앉아 여자의 까진 손바닥에 밴드를 붙여 주었다⁠. 벽에는 경찰청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늦은 귀갓길⁠, 안심 동행 서비스를 신청하세요⁠」 포스터 속 경찰관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진술을 받던 젊은 순경이 해나의 분홍 머리핀을 보고 볼펜을 멈췄다⁠.

“⁠혹시 솔기 사장님이세요⁠?⁠”

“⁠네⁠.⁠”

순경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근무복 허리띠를 슬쩍 들어 보였다⁠. 무전기 옆에 크림색 토끼가 매달려 있었다⁠. 귀가 남색 근무복 천이었다⁠. 해나가 지난주에 놓은 별이었다⁠. 비번 날 새벽 네 시부터 줄을 섰던 청년이었다⁠.

“⁠밤에 순찰 돌 때 무서워서요⁠. 경찰이 무섭다고 하면 웃기잖아요⁠. 그래서 비번 날 몰래 섰어요⁠.⁠”

“⁠안 웃겨요⁠.⁠”

“⁠팀장님은 웃었어요⁠. 팀장님도 하나 갖고 싶대요⁠.⁠”

여자가 진술서에서 고개를 들어 순경의 토끼를 보았다⁠. 손에 쥔 분홍 귀 토끼와 순경의 토끼를 번갈아 보았다⁠. 두 토끼는 생김새가 거의 같았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분홍 귀 토끼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거 사장님이 버려 주세요⁠.⁠”

*

이튿날 아침 열 시⁠, 해나는 체험관 계산대 앞으로 갔다⁠. 손에 끈 끊어진 분홍 귀 토끼가 들려 있었다⁠. 여자가 버려 달라고 두고 간 토끼였다⁠. 해나는 토끼를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다⁠.

승진이 계산대 안에서 토끼를 내려다보았다⁠. 별의 풀린 실밥을 보고⁠, 아스팔트에 쓸린 몸을 보았다⁠. 승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는 얼굴이었다⁠.

“⁠어젯밤 망원 한강공원 출입구요⁠. 날치기한테 끌려갔어요⁠. 무릎이 다 까졌어요⁠.⁠”

“⁠다치신 분은 괜찮으세요⁠?⁠”

“⁠이거 사면 지켜 준다고 했대요⁠.⁠”

“⁠저희는 지켜 준다고 쓴 적 없습니다⁠.⁠” 승진은 유리문에 붙은 종이를 가리켰다⁠. “⁠오늘 밤도 무사히⁠. 바람을 적은 거예요⁠. 약속이 아니고요⁠.⁠”

“⁠사는 사람한테는 같은 말이에요⁠.⁠”

승진이 입을 다물었다⁠. 계산대 위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으로 나무 상판을 두 번 두드렸다⁠. 체험관 직원들이 토끼 귀 머리띠를 쓴 채 멀찍이서 둘을 보았다⁠.

“⁠견본 판매는 오늘부로 멈추겠습니다⁠.⁠”

해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던 말에 대답을 들었다⁠.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사장님께 하나 말씀드리죠⁠. 견본은 실이 달라서 그랬습니다⁠. 사장님도 아시잖아요⁠. 실만 맞으면 됩니다⁠.⁠”

“⁠실만 맞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건 봐야 압니다⁠.⁠” 승진은 끈 끊어진 토끼를 집어 계산대 밑으로 넣었다⁠. “⁠다음 주면 됩니다⁠.⁠”

“⁠뭐가요⁠?⁠”

승진은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자신이 있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

밤 열두 시⁠, 해나는 공방 불을 끄고 문을 잠그다가 골목 끝에서 엔진 소리를 들었다⁠. 체험관 뒷문에 흰 승합차 한 대가 멈췄다⁠. 직원 둘이 차에서 상자를 내려 체험관 뒷문 안으로 날랐다⁠. 상자마다 「⁠김포 · 취급 주의⁠」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세 번째 상자를 옮기던 직원이 발을 헛디뎠다⁠. 상자가 기울면서 뚜껑이 벌어졌다⁠. 안에서 둥근 것이 하나 굴러 나와 골목 바닥을 굴렀다⁠. 실타래였다⁠. 어른 주먹만 한 실타래가 솔기 문 앞까지 굴러와 해나의 운동화 앞에서 멈췄다⁠.

실타래는 금빛이었다⁠. 가로등이 없는 골목에서⁠, 아무 빛도 받지 않은 채⁠, 꿀 색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해나의 앞치마 주머니 속에서 할머니의 실패가 뜨거워졌다⁠. 핫팩을 넣은 것처럼⁠,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앞치마 천 너머로 열이 번졌다⁠. 실패가 실타래를 알아보고 있었다⁠.

직원이 뛰어와 실타래를 주워 갔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상자에 도로 넣고⁠, 뒷문을 닫았다⁠. 골목이 다시 어두워졌다⁠. 해나는 주머니 속 실패를 꺼내 두 손으로 감쌌다⁠. 열은 승합차가 골목을 빠져나가고 한참 지나서야 식었다⁠. 해나는 식은 실패를 쥔 채 체험관 뒷문의 닫힌 철문을 오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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