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26자)

줄 서는 골목

주인을 지키는 키링 인형 · 연채온

10월 첫 월요일 새벽 다섯 시 오십 분⁠, 해나는 공방 개수대에 더운물을 받아 두 손을 담갔다⁠. 손가락 마디가 물속에서 천천히 풀렸다⁠. 일주일 동안 날마다 별을 열 개씩 놓은 손이었다⁠. 엄지와 검지 끝에 바늘 자국이 점점이 박혀 있었고⁠, 검지 첫 마디는 구부릴 때마다 뻑뻑했다⁠. 할머니도 아침마다 이렇게 손을 담갔다⁠. 어린 해나는 할머니가 세수를 손으로만 하는 줄 알았다⁠.

슬아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파스 한 상자를 작업대에 던졌다⁠.

“⁠약국 아저씨가 너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더라⁠. 일주일에 파스를 세 상자 사는 스물여섯은 처음 본대⁠.⁠”

“⁠뭐라고 했어⁠?⁠”

“⁠토끼 만든다고⁠. 아저씨가 그럼 토끼 하나만 달래⁠. 약사님도 밤에 퇴근한대⁠.⁠”

해나는 물에서 손을 꺼내 수건으로 닦았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는데 골목에는 벌써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첫날 같은 삼백 명은 아니었다⁠. 그래도 백 명은 넘었다⁠. 줄은 이제 날마다 생겼다⁠. 담요와 보온병과 접이식 의자가 골목의 아침 풍경이 되었다⁠.

슬아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골목 상인회 단톡방이 밤새 시끄러웠다⁠.

「⁠세탁소⁠: 오늘도 내 가게 앞에 돗자리 넷⁠. 다리미 들고 넘어 다님⁠」

「⁠꽃집⁠: 저희는 좋아요 ㅎㅎ 줄 서는 분들이 꽃을 사 가세요⁠.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시대요⁠」

「⁠철물점⁠: 접이식 의자 이틀 만에 스무 개 팔림⁠. 이런 날이 오다니⁠」

「⁠빌라 주민 대표⁠: 새벽 네 시부터 떠드는 소리에 아기가 깹니다⁠. 구청에 민원 넣기 전에 상인회가 정리해 주세요⁠」

「⁠분식 길말선⁠: 오늘 밤 열 시 우리 가게에서 회의함⁠. 다들 와⁠. 떡볶이 공짜⁠」

「⁠세탁소⁠: 공짜면 간다⁠」

“⁠오늘 밤에 회의래⁠.⁠” 슬아가 화면을 내렸다⁠. “⁠너 불려 갈걸⁠.⁠”

*

여덟 시⁠, 맞은편 빈 가게의 셔터가 올라갔다⁠. 휴대전화 대리점이 나가고 반년 동안 비어 있던 가게였다⁠. 셔터 안에서 분홍색이 쏟아져 나왔다⁠. 벽도 분홍⁠, 선반도 분홍⁠, 바닥에 깐 카펫도 분홍이었다⁠. 유리문 위에 간판이 붙어 있었다⁠. 「⁠폭신 별토끼 가디언 · 사전 예약 고객 체험관⁠」

가게 안 선반마다 토끼가 줄지어 앉아 있었다⁠. 크림색 몸에 분홍 귀⁠, 가슴에 금빛 별⁠. 직원 셋이 토끼 귀 머리띠를 쓰고 문 앞에서 줄 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사전 예약 고객님은 안에서 기다리세요⁠! 의자 있고요⁠, 난방도 됩니다⁠! 사진 찍는 곳도 있어요⁠!⁠”

줄 끝의 몇 사람이 머뭇거리다 체험관 안으로 들어갔다⁠. 체험관 한가운데에는 사람 키만 한 토끼 인형이 서 있었고⁠, 인형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화면에 「⁠오늘 밤도 무사히⁠」라는 글자가 반짝였다⁠. 들어간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나와서 다시 솔기 줄 끝에 붙었다⁠. 몇은 나오지 않았다⁠.

해나는 앞치마를 두른 채 길을 건넜다⁠. 체험관 문을 밀고 들어가자 난방 바람이 얼굴을 덮었다⁠. 해나는 선반의 토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별에 닿았다⁠. 금빛 실이었다⁠. 반짝이는 폴리에스터 자수실이었다⁠. 차가웠다⁠. 별의 왼쪽 아래 꼭짓점은 다른 넷과 길이가 같았다⁠.

“⁠만지셔도 됩니다⁠. 견본이니까요⁠.⁠”

승진이 계산대 뒤에서 나왔다⁠. 오늘은 분홍 바람막이 대신 폭신 로고가 박힌 앞치마를 둘렀다⁠. 해나가 처음 보는 승진의 앞치마였다⁠. 끈을 너무 세게 묶어서 허리가 잘록했다⁠.

“⁠이건 실이 달라요⁠.⁠”

“⁠압니다⁠. 아직 시제품이에요⁠.⁠” 승진은 토끼를 받아 선반에 도로 앉혔다⁠. “⁠지난주 사전 예약이 십일만입니다⁠. 다음 주에 일본 바이어가 이 가게를 보러 와요⁠. 귀여운 건 국경이 없다고 말씀드렸죠⁠.⁠”

“⁠사전 예약한 십일만 명한테 이걸 보내요⁠?⁠”

“⁠더 나은 걸 보내야죠⁠. 그래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승진이 계산대에 기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장님 줄은 오늘도 백 명이 넘죠⁠. 사장님은 열 명을 받고 구십 명을 돌려보내실 겁니다⁠. 그 구십 명이 여기 와서 사진이라도 찍고 갑니다⁠. 저는 그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사진은 안 지켜요⁠.⁠”

“⁠사장님 토끼도 열한 번째부터는 안 지키잖아요⁠.⁠”

해나의 손끝이 앞치마 주머니 속에서 굳었다⁠. 열한 번째 별 이야기를 승진이 어떻게 아는지 해나는 묻지 않았다⁠.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

점심때 무탁이 골판지 한 장을 들고 나타났다⁠. 골판지에는 매직으로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줄 정리 봉사 · 영상 올린 사람 · 반성 중⁠」 무탁은 골판지를 목에 걸고 줄을 따라 오가며 돗자리를 세탁소 문 앞에서 치웠다⁠.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진을 찍자 무탁은 골판지로 얼굴을 가렸다⁠.

“⁠누나⁠, 저 오늘 배달 쉬어요⁠. 반성하려고요⁠.⁠”

“⁠반성은 배달하면서 해도 돼요⁠.⁠”

“⁠배달하면 돈 벌잖아요⁠. 그럼 반성이 안 돼요⁠.⁠”

무탁은 휴대전화를 꺼내 아침 뉴스 화면을 보여 주었다⁠. 방송사 아침 프로그램이 망원동 골목을 삼십 초 동안 비췄다⁠. 자막이 흘렀다⁠. 「⁠망원동 ‘⁠수호 토끼⁠’ 열풍⁠… 전문가 “⁠심리적 안정 효과일 뿐⁠”⁠」 화면 구석에 무탁의 헬멧 뒤통수가 잠깐 지나갔다⁠.

“⁠구독자가 구천 명 됐어요⁠. 근데 하나도 안 기뻐요⁠. 아니⁠, 조금 기뻐요⁠. 근데 반성 중이라서 안 기쁜 척하는 중이에요⁠.⁠”

“⁠어머님은요⁠?⁠”

무탁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오늘 새벽에 토끼가 뜨거워졌대요⁠. 가로등 나간 데서요⁠. 역주행하는 오토바이가 튀어나왔는데 엄마가 한 발짝 뒤로 끌려갔대요⁠. 엄마는 노래 부르다가 박자 놓친 줄 알았대요⁠. 내 김밥이 어때서⁠, 하다가요⁠.⁠”

해나는 웃었다⁠. 일주일 만에 처음 소리 내어 웃었다⁠. 무탁은 해나의 웃음을 보고 골판지를 고쳐 메더니 다시 줄로 걸어갔다⁠.

*

월요일 열한 번째 손님은 세탁소 사장의 딸이었다⁠. 지난주에 첫 번째로 해 주겠다고 했던 약속이 줄에 밀려 밤으로 미뤄졌다⁠. 성수동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열두 시에 걸어오는 딸의 길을 세탁소 사장이 대신 말했다⁠. 딸의 대학 과잠을 잘라 귀를 달았다⁠.

열두 번째는 줄에서 울던 할머니였다⁠. 손녀가 새벽에 물류 센터로 출근한다고 했다⁠. 해나는 두 사람을 돌려보내지 못했다⁠.

열한 번째 별을 놓을 때 해나는 성수동에서 망원동까지 걸었다⁠. 다리를 건너는 데서 길이 흐려졌다⁠. 세탁소 사장이 말한 편의점이 강변에 있었는지 큰길에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자꾸 자리를 바꿨다⁠. 바늘땀 하나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해나는 땀을 뽑고 다시 놓았다⁠. 다시 놓은 땀도 미끄러졌다⁠.

열두 번째 별을 다 놓았을 때는 밤 아홉 시 반이었다⁠. 해나는 두 토끼를 나란히 놓고 보았다⁠. 별의 꼭짓점들이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손끝을 대 보았다⁠. 미지근했다⁠. 아침에 놓은 별들처럼 손끝을 데우지 않았다⁠.

“⁠비뚤어졌네⁠.⁠” 슬아가 옆에서 말했다⁠.

“⁠다시 할게⁠. 내일 아침에⁠.⁠”

“⁠내일 아침에는 내일 열 명이 와⁠.⁠”

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위를 들어 두 별의 실을 한 땀씩 끊었다⁠. 금실이 풀려 나와 손바닥에 감겼다⁠. 해나는 풀린 실을 실패에 도로 감았다⁠. 길을 놓친 별에서 나온 실이었지만 실패에 감기자 다시 꿀 색으로 빛났다⁠. 실은 상하지 않았다⁠. 상한 것은 해나의 열한 번째 손이었다⁠.

*

밤 열 시⁠, 떡볶이집 안은 사람으로 꽉 찼다⁠. 탁자 넷을 붙이고 상인회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세탁소⁠, 꽃집⁠, 철물점⁠, 반찬가게⁠, 빌라 주민 대표⁠. 말선이 커다란 접시에 떡볶이를 산처럼 쌓아 탁자 한가운데 놓았다⁠. 해나는 문 옆 의자에 앉았다⁠. 해나 맞은편에 승진이 앉아 있었다⁠. 체험관 앞치마는 벗고 다시 회색 정장이었다⁠.

“⁠새 세입자 인사부터 하겠습니다⁠.⁠” 말선이 국자로 탁자를 두드렸다⁠. “⁠폭신 사업부장님⁠. 맞은편 가게 들어왔대⁠.⁠”

승진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앉지 않고 서류철을 펼쳤다⁠.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줄 때문에 불편하신 것 압니다⁠. 저희가 두 가지를 하겠습니다⁠. 첫째로 줄 관리 직원 두 명을 새벽부터 세우겠습니다⁠. 비용은 저희가 냅니다⁠. 둘째로 상인회 가을 축제를 후원하겠습니다⁠. 오백만 원입니다⁠.⁠”

탁자가 술렁였다⁠. 철물점 사장이 떡을 집다 말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꽃집 사장이 박수를 치려다 말선을 보고 손을 내렸다⁠.

“⁠그 대신이 뭔데요⁠?⁠” 빌라 주민 대표가 물었다⁠.

“⁠줄을 저희 체험관 앞으로 모으겠습니다⁠. 난방도 되고 의자도 있으니 주민분들 시끄러우실 일도 없습니다⁠. 솔기 손님들은 거기서 기다리시다가 차례가 되면 길을 건너가시면 됩니다⁠.⁠”

해나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줄 선 사람들이 하루 종일 폭신 토끼를 보면서 기다려요⁠.⁠”

“⁠보기만 하시는 겁니다⁠.⁠”

“⁠보기만 하다가 사요⁠. 지난주에 줄에서 빠진 사람들이 그랬어요⁠.⁠”

“⁠사셔도 됩니다⁠. 사장님이 못 받으시는 분들이니까요⁠.⁠”

해나와 승진 사이로 떡볶이 김이 올라갔다⁠. 세탁소 사장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말선이 국자를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끼 사장 말도 맞고 저 양반 말도 맞네⁠.⁠” 반찬가게 사장이 말했다⁠. “⁠근데 나는 새벽 네 시에 우리 가게 앞에서 사람들이 고구마를 구워 먹는 건 못 참겠어⁠.⁠”

“⁠고구마요⁠?⁠” 해나가 물었다⁠.

“⁠어제 누가 버너를 가져왔어⁠. 고구마 냄새에 내 장조림이 졌어⁠.⁠”

꽃집 사장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웃음이 탁자 한 바퀴를 돌았다⁠. 웃음이 끝나자 말선이 국자를 들었다⁠.

“⁠손 들어⁠. 줄을 폭신 가게 앞으로 옮기고⁠, 새벽 다섯 시 전에는 못 서게 하는 거⁠. 찬성⁠.⁠”

손이 올라갔다⁠. 세탁소⁠, 철물점⁠, 반찬가게⁠, 빌라 주민 대표⁠. 꽃집 사장은 반쯤 들었다가 다 들었다⁠. 해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말선은 손을 들지도 내리지도 않고 국자만 쥐고 있었다⁠.

“⁠통과⁠.⁠”

승진이 해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긴 사람의 인사가 아니었다⁠. 사과에 더 가까운 인사였다⁠. 해나는 마주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

사람들이 다 나간 뒤 해나는 말선을 도와 떡볶이 접시를 치웠다⁠. 말선은 개수대 앞에서 한참 접시를 문지르다가 물을 잠갔다⁠.

“⁠해나야⁠. 아까 그 양반⁠.⁠”

“⁠사업부장님요⁠?⁠”

“⁠얼굴 어디서 봤는지 생각났다⁠.⁠” 말선은 고무장갑을 벗어 개수대 가장자리에 걸쳐 두었다⁠. “⁠너희 할머니 수선집에서 봤어⁠. 스물네 해 전 가을이었나⁠. 중학생 남자애가 교복 바지 단을 줄이러 왔는데⁠, 할머니가 바지를 받아 놓고 그 애를 구석 의자에 앉히더라⁠. 밤 열한 시에 학원 끝나고 혼자 걸어간다는 애였어⁠. 할머니가 그 애 체육복 자투리로 토끼를 하나 만들어 줬어⁠. 귀 한쪽만 초록인 토끼⁠.⁠”

해나는 손에 든 접시를 내려놓았다⁠.

“⁠이모가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그 애가 다음 날 새벽에 수선집 셔터를 두드렸거든⁠. 울면서⁠. 할머니 덕에 살았다고⁠. 트럭이 인도로 들어왔는데 토끼가 자기를 잡아당겼대⁠.⁠” 말선이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 애 성이 피씨였어⁠. 시장에서 피씨는 그 집 하나였다⁠. 엄마가 새벽 생선 가게 하던 집⁠.⁠”

말선의 가게 창 너머로 맞은편 체험관의 분홍 불빛이 보였다⁠. 불은 열 시 반이 넘도록 꺼지지 않았다⁠. 손님 하나 없는 가게에서 승진이 혼자 선반 앞에 서서 토끼를 하나씩 손에 들고⁠, 별을 엄지로 쓸고 있었다⁠. 해나는 승진의 손놀림을 알았다⁠. 할머니의 실패 모서리를 쓸던 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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