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25자)

이사회

주인을 지키는 키링 인형 · 연채온

11월 18일 목요일 오후 한 시⁠, 폭신 본사 로비의 커다란 곰은 오늘도 웃고 있었다⁠. 무탁은 곰의 발밑에 종이 상자 하나를 내려놓고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상자 안에는 망원동에서 가져온 헌 옷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말선의 창고에서 골라 온 것이었다⁠. 무릎 나간 추리닝⁠, 팔꿈치 구멍 난 니트⁠, 등산복⁠, 수술복⁠, 배달 조끼⁠.

“⁠누나⁠, 저 오늘 여기서 상자 지키는 거예요⁠?⁠”

“⁠네⁠.⁠”

“⁠상자를 누가 훔쳐 가요⁠? 헌 옷인데⁠.⁠”

“⁠헌 옷이 오늘 제일 비싸요⁠.⁠”

무탁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끄덕였다⁠. 승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해나와 슬아에게 방문증을 건넸다⁠. 「⁠이사회 참고인⁠」 승진은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셔츠 단추를 맨 위까지 채웠을 뿐이었다⁠. 가방 손잡이에 초록 귀 토끼가 달려 있었다⁠. 분홍 귀 토끼는 없었다⁠.

“⁠분홍 귀는요⁠?⁠”

“⁠어머니 집에 두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고등어 옆에 두셨어요⁠. 생선 지키라고요⁠.⁠”

슬아가 깁스한 팔을 안고 웃음을 참았다⁠. 승진은 슬아의 깁스를 보았다⁠. 무탁이 쓴 「⁠반성 중 공무탁⁠」 밑에 누군가 작은 글씨를 덧붙여 놓았다⁠. 「⁠옆에서 같이 반성 중 길말선⁠」

“⁠이사회는 어디서 해요⁠?⁠” 해나가 물었다⁠.

승진이 로비의 곰을 가리켰다⁠. 곰의 배에 달린 문이었다⁠.

“⁠저 안에서요⁠.⁠”

“⁠곰 배 속에서요⁠?⁠”

“⁠대표님이 처음 회사 세우실 때 만든 방입니다⁠. 중요한 건 다 곰 배 속에서 정한다고 하세요⁠.⁠”

“⁠저는 배고플 것 같다고 했잖아요⁠.⁠” 무탁이 상자 위에서 중얼거렸다⁠.

*

곰 배 속 회의실은 둥글었다⁠. 벽이 분홍 털로 덮여 있었고⁠, 천장에 곰의 갈비뼈 모양 조명이 달려 있었다⁠. 둥근 탁자에 대표와 이사 셋⁠, 재무 담당 이사⁠, 해외 인수사 실사단 넷과 통역사가 앉아 있었다⁠. 대표는 해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원조 사장님⁠, 또 오셨네요⁠! 오늘은 떡볶이 사 드릴게요⁠. 이사회 끝나고⁠.⁠”

승진은 탁자 끝에 서서 화면을 켰다⁠. 첫 장에 토끼 하나가 떠 있었다⁠. 크림색 몸⁠, 분홍 귀⁠, 가슴이 비어 있었다⁠. 별이 없는 토끼였다⁠.

“⁠빈 토끼입니다⁠.⁠”

이사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승진은 화면을 넘겼다⁠. 작은 봉투 하나가 떴다⁠. 봉투 안에 금실 한 뼘과 바늘 하나와 작은 카드가 들어 있었다⁠. 카드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별을 놓기 전에 물어보세요⁠. 밤에 어느 길로 가세요⁠?⁠」

“⁠몸과 귀는 공장이 찍습니다⁠. 하루 만 개도⁠, 십만 개도 됩니다⁠. 별은 공장이 놓지 않습니다⁠. 사는 사람이 자기 곁의 사람에게 놓아 줍니다⁠. 엄마가 딸에게⁠, 친구가 친구에게요⁠. 그 사람의 길을 아는 사람이요⁠.⁠”

승진은 반장의 영상을 틀었다⁠. 밤의 공장 마당⁠, 후진하는 지게차⁠, 금빛 실⁠, 엉덩방아⁠. 이어서 무탁이 찍은 재개발 골목 영상을 틀었다⁠. 떨어지는 「⁠피가네 생선⁠」⁠, 뒤로 끌려가는 승진⁠. 같은 순간 무탁의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던 알림까지⁠. 「⁠가디언 귀 세움 · 방금 · 전국⁠」

“⁠위 토끼는 공장 몸에 손으로 별을 놓은 겁니다⁠. 아래 토끼는 별이 둘 달려 있었고요⁠. 하나는 공장 별⁠, 하나는 손 별⁠. 손 별만 저를 잡아당겼습니다⁠. 공장 별은 전국의 다른 토끼 만 마리하고 같이 귀만 세웠고요⁠.⁠”

“⁠피 부장⁠, 그거 피 부장이에요⁠?⁠” 재무 이사가 물었다⁠.

“⁠네⁠. 제 아버지 간판입니다⁠.⁠”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통역사가 실사단에게 낮게 말을 옮겼다⁠.

“⁠금실은 팔지 않습니다⁠.⁠” 승진이 이어 말했다⁠. “⁠헌 옷 한 벌을 가져오면 금실 한 뼘을 줍니다⁠. 실은 헌 옷을 먹고 늘어납니다⁠. 모자랄 일이 없어요⁠. 빈 토끼는 구천구백 원에 팝니다⁠.⁠”

*

“⁠숫자 하나 보여 드려도 될까요⁠?⁠”

슬아가 일어났다⁠. 깁스한 오른팔을 탁자 위에 올리고 왼손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에 그래프가 떴다⁠. 그래프는 비뚤었다⁠. 막대 끝이 물결처럼 흔들렸고 글씨는 초등학생 글씨 같았다⁠. 이사 하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왼손으로 그렸어요⁠. 오른손이 부러져서요⁠. 가디언 달고 다니다가요⁠.⁠”

기침하던 이사가 입을 다물었다⁠. 슬아는 왼손으로 화면을 넘겼다⁠.

“⁠헌옷토끼 해시태그요⁠. 한 달 만에 사십만 건이에요⁠. 헌 옷 사진하고 사연을 올리는 거예요⁠. 저희 회사가 한 푼도 안 쓴 해시태그예요⁠. 이건 키링 꾸미기 재료 판매고요⁠. 작년보다 세 배요⁠. 요즘 애들은 완성품을 사서 그냥 달지 않아요⁠. 자기 손으로 뭘 붙이고 꿰매고 그려요⁠. 그래야 자기 거라고 생각해요⁠.⁠” 슬아가 해나를 한 번 보았다⁠. “⁠저도 그래서 공장 가디언을 달고 다녔어요⁠. 제가 그린 귀니까요⁠. 근데 별은 제가 안 놓았어요⁠. 그래서 제 거가 아니었어요⁠.⁠”

대표가 손을 들어 슬아의 말을 끊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웃음 아래의 목소리는 웃지 않았다⁠.

“⁠슬아 씨⁠, 도안 좋아요⁠. 그래프는 다음부터 오른손으로 그리고요⁠.⁠” 대표는 승진을 보았다⁠. “⁠피 부장⁠, 내가 하나만 물을게⁠. 수호 토끼를 파는 회사가 손님한테 ‘⁠당신이 직접 지키세요⁠’라고 하면 누가 사요⁠?⁠”

“⁠곁의 사람이 지켜 준다고 합니다⁠. 직접이 아니고요⁠.⁠”

“⁠같은 말이야⁠. 우리가 안 지킨다는 말이지⁠.⁠” 대표가 재무 이사에게 손짓했다⁠. 재무 이사가 서류를 넘겼다⁠. “⁠백만 개 계약이 해외에 이미 잡혀 있어요⁠. 일본⁠, 미국⁠, 태국⁠. 안 나가면 위약금이 이백억이에요⁠. 그리고 공장 금실은 회사 자산이에요⁠. 피 부장이 피 부장 토끼에서 뽑았어도⁠, 회사 기계로 꼰 순간 회사 거야⁠. 그걸 헌 옷이랑 바꿔 공짜로 준다고⁠?⁠”

“⁠헌 옷이 금실을 키웁니다⁠.⁠”

“⁠헌 옷은 쓰레기야⁠, 피 부장⁠.⁠”

해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의 눈이 모두 해나에게로 왔다⁠. 분홍 털 벽에 둘러싸여⁠, 해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실패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무 실패가 탁자 위에서 데구루루 반 바퀴 굴렀다⁠.

“⁠이게 금실이 처음 나온 데예요⁠. 할머니가 사십 년 쓴 실패요⁠. 할머니는 하루에 열 개만 놓았어요⁠. 저도 열 개만 놓았고요⁠. 그래서 실이 계속 불었어요⁠. 사람들이 헌 옷을 가져오고 길을 말해 줬으니까요⁠.⁠” 해나는 실패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대표님 공장에 있는 금실도 여기서 나갔어요⁠. 사업부장님 별에서요⁠. 그 별은 사업부장님 길을 알던 별이에요⁠. 길을 모르는 기계에 넣으니까 만 군데로 흩어진 거예요⁠.⁠”

“⁠사장님⁠.⁠” 대표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장님 말이 다 맞아도요⁠, 회사는 이백억을 못 냅니다⁠. 사장님이 원하시는 거 알아요⁠. 공방 돌려 드릴게요⁠. 솔기 간판도요⁠. 고문료도 드리고요⁠. 대신 백만 개 상자에 사장님 이름을 넣게 해 주세요⁠. 「⁠망원동 솔기 봉해나가 함께합니다⁠」 그럼 손님들도 안심해요⁠.⁠”

해나는 실패를 다시 쥐었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공방을 돌려준다는 말이 귓속에서 오래 울렸다⁠. 할머니의 재봉틀⁠, 나사 구멍 네 개⁠, 창가의 햇빛⁠.

“⁠안 돼요⁠.⁠”

“⁠왜요⁠?⁠”

“⁠안심하면 어두운 길로 들어가요⁠.⁠”

대표는 해나를 오래 보았다⁠. 이윽고 어깨를 으쓱하고 이사들을 둘러보았다⁠.

“⁠표결합시다⁠. 2차 백만 개⁠, 예정대로⁠. 찬성⁠.⁠”

이사 셋과 재무 이사의 손이 올라갔다⁠. 대표의 손도 올라갔다⁠. 승진은 손을 들지 않았다⁠. 실사단은 표결권이 없었다⁠.

“⁠통과⁠.⁠” 대표가 손을 내렸다⁠. “⁠피 부장은 오늘부로 사업부장에서 내려와요⁠. 인사 발령은 내일 아침에 나가고⁠. 수고 많았어⁠. 진심이야⁠.⁠”

승진은 고개를 숙였다⁠. 오래 숙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얼굴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오래 들고 다닌 상자를 막 내려놓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감사했습니다⁠, 대표님⁠.⁠”

이사들이 서류를 챙기는 사이⁠, 대표가 해나 옆으로 왔다⁠.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만 낮췄다⁠.

“⁠사장님⁠,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시고⁠.⁠”

대표는 휴대전화 화면을 해나에게 보여 주었다⁠. 사진 속에 초등학생쯤 된 여자아이가 학원 가방을 메고 있었다⁠. 가방 손잡이에 크림색 토끼가 달려 있었다⁠. 귀가 하늘색 줄무늬였다⁠. 별의 왼쪽 아래가 짧았다⁠. 해나가 놓은 별이었다⁠.

“⁠우리 딸 거예요⁠. 엄마 셔츠로 귀 달았고요⁠. 사장님 첫 줄 선 날⁠, 비서가 새벽 네 시에 가서 섰어요⁠. 비서 엄마 거라고 하고요⁠. 길은 우리 집사람이 말했어요⁠. 죄송합니다⁠.⁠”

해나는 사진을 오래 보았다⁠. 기억이 났다⁠. 학원에서 집까지⁠, 놀이터를 지나는 길이었다⁠. 길을 말해 준 여자는 놀이터 그네가 삐걱거린다고 했다⁠.

“⁠대표님은 아셨네요⁠.⁠”

“⁠알았죠⁠. 처음부터요⁠.⁠” 대표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백만 개는 나가야 돼요⁠. 직원이 이백 명이에요⁠. 이백 명 집에도 딸이 있어요⁠. 사장님 손으로 그 딸들 다 못 지키시잖아요⁠.⁠”

대표는 해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회의실을 나갔다⁠. 해나의 손바닥 안에서 실패가 뜨거워졌다가 식었다⁠.

*

실사단이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나가던 실사단원 하나가 통역사를 불러 세우고 무언가 짧게 말했다⁠. 통역사가 승진에게 다가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이분이 전해 달래요⁠. 빈 토끼 안은 회사가 아니라 시장이 정할 거라고요⁠. 시장이 정하면 연락하겠대요⁠.⁠”

승진은 명함을 받았다⁠. 영어로 적힌 명함이었다⁠. 승진은 명함을 셔츠 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채웠다⁠.

로비로 나오자 무탁이 헌 옷 상자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됐어요⁠?⁠”

“⁠졌어요⁠.⁠” 해나가 말했다⁠.

“⁠아⁠.⁠” 무탁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헌 옷은요⁠?⁠”

“⁠그대로 들고 가요⁠.⁠”

승진은 한 시간 뒤에 종이 상자를 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상자 안에 머그잔과 서류철 몇 개와 쿠키 상자가 들어 있었다⁠. 곰 인형 앞에서 승진은 상자를 내려놓고 곰을 올려다보았다⁠.

“⁠열한 해 다녔습니다⁠. 입사 첫날 이 곰 앞에서 사진을 찍었어요⁠.⁠”

“⁠아까 열한 개라고 하셨죠⁠. 어머님 집 계단도요⁠.⁠” 무탁이 말했다⁠.

“⁠그건 우연입니다⁠.⁠”

“⁠우연도 숫자예요⁠.⁠”

승진이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숫자가 없는 웃음이었다⁠.

로비 회전문이 한 바퀴 돌 때 슬아의 휴대전화가 떨렸다⁠. 슬아가 왼손으로 화면을 들어 보였다⁠. 폭신 계정에 방금 올라온 글이었다⁠.

「⁠별토끼 가디언 2차 백만 개 · 출고를 하루 앞당깁니다 · 내일 새벽 다섯 시 김포 공장 첫 트럭 출발 · 생방송으로 함께해 주세요⁠」

사진 속에 3번 창고의 선반이 있었다⁠. 선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대표가 선반 앞에서 분홍 넥타이를 매고 웃고 있었다⁠.

“⁠생방송이래⁠.⁠” 슬아가 말했다⁠. “⁠백만 마리 귀 세우는 거⁠, 광고로 쓴다며⁠. 생방송 중에 누가 다치면 귀 세우는 거 다 나오겠네⁠.⁠”

해나는 앞치마 주머니의 실패를 쥐었다⁠. 실패 옆에 슬아가 넘겨준 메모리 카드가 아직 있었다⁠. 실패 옆에 할머니의 글씨를 옮겨 적은 종이도 있었다⁠. 「⁠밤길은 손이 지킨다⁠」

“⁠김포 가요⁠.⁠” 해나가 말했다⁠.

“⁠지금요⁠?⁠” 무탁이 물었다⁠.

“⁠새벽 다섯 시 전에요⁠. 헌 옷 상자도 가져가요⁠.⁠”

무탁은 상자를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망원동 사람들이 입다 둔 옷의 무게였다⁠. 무탁은 휘청하다가 상자를 고쳐 안고⁠, 곰 인형을 한 번 올려다보고⁠, 해나를 따라 회전문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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