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20자)

승진의 길

주인을 지키는 키링 인형 · 연채온

11월 17일 수요일 저녁 아홉 시⁠, 해나는 떡볶이집 2층 창고 방에서 헌 옷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공방을 넘긴 뒤 말선이 내준 방이었다⁠. 떡 상자와 헌 옷 상자 사이에 요 하나를 깔면 꽉 차는 방이었다⁠. 창문을 열면 맞은편 공방이 보였다⁠. 공방 문 위에는 나사 구멍 네 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승진은 공방에 아무것도 들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재봉틀이 창가에서 혼자 가로등 불빛을 받았다⁠.

계단 밑에서 말선이 소리쳤다⁠.

“⁠해나야⁠! 손님⁠!⁠”

해나가 내려가자 평상 끝에 승진이 앉아 있었다⁠. 회색 정장 위에 패딩을 입고⁠,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평상 반대편 끝에는 슬아가 깁스한 오른팔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오늘 오후에 퇴원한 슬아였다⁠. 무탁은 평상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컵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셋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들 왜 여기 있어⁠?⁠”

“⁠나는 퇴원 기념⁠.⁠” 슬아가 말했다⁠.

“⁠저는 배고파서요⁠.⁠” 무탁이 말했다⁠.

승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패딩 안주머니에서 토끼를 꺼내 평상 위에 올려놓았다⁠. 누렇게 바랜 몸⁠, 초록 체육복 귀⁠, 단추 눈 하나⁠. 가슴에 바늘구멍만 별 모양으로 남은 토끼였다⁠.

“⁠사장님⁠. 별 하나 놓아 주시겠습니까⁠?⁠”

말선이 국자를 든 채 가게 문간에서 멈췄다⁠. 해나는 토끼를 보았다⁠. 할머니가 뚫은 구멍들이 가로등 불빛에 작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밤에 어느 길로 가세요⁠?⁠”

승진은 이번에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

“⁠금요일마다 어머니 집에 갑니다⁠. 망원동이요⁠. 지금도 거기 사세요⁠.⁠”

승진은 평상 위에 손가락으로 길을 그렸다⁠. 해나는 승진의 손가락을 보지 않았다⁠. 승진의 목소리를 들었다⁠. 승진이 다른 주머니에서 꺼낸 천 조각에서 올을 풀어 금실과 꼬면서 들었다⁠. 바래고 해진 초록 체육복 바지의 자투리였다⁠. 스물네 해 전 할머니가 귀를 오리고 남은 천이었다⁠. 승진은 자투리를 지갑에 넣고 다녔다⁠.

“⁠망원역 2번 출구로 나와서 큰길을 따라 걷습니다⁠. 학원이 있던 자리는 지금 편의점이에요⁠. 편의점 앞에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재개발 구역이 나와요⁠. 다 비었습니다⁠. 창문마다 엑스 자로 테이프를 붙여 놨고요⁠. 거기 어머니 생선 가게가 있었어요⁠. 간판이 아직 붙어 있습니다⁠. 「⁠피가네 생선⁠」 제가 열 살 때 아버지가 달았어요⁠.⁠”

“⁠그 생선 가게 내가 알지⁠.⁠” 말선이 문간에서 끼어들었다⁠. “⁠너희 엄마 고등어 반 마리 덤으로 주던 집⁠.⁠”

“⁠반 마리가 아니라 꼬리만 주셨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이모님이 늘 반 마리라고 소문내서 손해 봤다고⁠.⁠”

“⁠그게 그거지⁠.⁠”

무탁이 떡볶이를 먹다가 사레가 들렸다⁠. 슬아가 왼손으로 무탁의 등을 두드렸다⁠. 해나는 웃음을 참으며 첫 땀을 놓았다⁠.

해나의 바늘이 할머니의 구멍을 찾았다⁠. 별의 첫 번째 꼭짓점⁠, 가장 위의 구멍이었다⁠. 바늘이 저절로 그리로 들어갔다⁠. 해나가 찌른 것이 아니라 구멍이 바늘을 끌어당겼다⁠. 해나는 숨을 멈췄다⁠. 두 번째 구멍⁠, 세 번째 구멍⁠. 스물네 해 전 할머니의 손이 지나간 자리를 해나의 손이 그대로 따라갔다⁠.

“⁠재개발 구역을 지나면 가로수가 하나 있습니다⁠. 은행나무요⁠. 밑동이 패여 있어요⁠. 2003년에 트럭이 받은 자리예요⁠. 나무가 안 죽었습니다⁠. 패인 채로 컸어요⁠. 저는 금요일마다 거기서 한 번 멈춥니다⁠. 손바닥으로 밑동을 짚고요⁠.⁠”

해나는 은행나무 앞에 멈췄다⁠. 머릿속에서 손바닥으로 밑동을 짚었다⁠. 패인 자리가 손바닥에 거칠게 닿았다⁠. 바늘이 느려졌다⁠.

“⁠나무에서 어머니 집까지 계단이 열한 개입니다⁠. 어머니가 현관 불을 켜 두세요⁠. 제가 서른아홉인데도요⁠.⁠”

“⁠왜 지난번엔 말 안 했어요⁠?⁠”

해나가 바늘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승진이 평상 위에 그리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그 길은 할머니한테만 말한 길이었습니다⁠. 열다섯 살 때요⁠.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할머니 별이 진짜로 없어지는 것 같았어요⁠.⁠” 승진은 해나의 바늘을 보았다⁠. “⁠제 손으로 풀어 놓고 할머니 별 걱정을 했습니다⁠. 웃기죠⁠.⁠”

“⁠안 웃겨요⁠.⁠”

슬아가 평상 끝에서 고개를 돌려 맞은편 공방을 보았다⁠. 무탁은 컵떡볶이를 내려놓고 헬멧을 품에 안았다⁠. 말선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텔레비전 소리를 줄였다⁠.

사십 분이 지났다⁠. 해나는 별의 왼쪽 아래 꼭짓점을 짧게 끊었다⁠. 할머니가 짧게 끊은 자리에서 해나도 끊었다⁠. 매듭을 짓자 손끝이 따뜻했다⁠. 바랜 토끼의 가슴에 금빛 별이 앉았다⁠. 새 별이 옛 구멍을 다 덮었다⁠.

해나는 토끼를 승진의 손바닥에 올렸다⁠. 승진은 별에 엄지를 대지 않았다⁠. 손바닥만 오므려 토끼를 감쌌다⁠.

“⁠가방 손잡이에요⁠. 주머니 말고요⁠.⁠”

“⁠압니다⁠. 할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

밤 열한 시⁠, 승진은 망원역 2번 출구로 나와 큰길을 걸었다⁠. 가방 손잡이에 토끼가 둘 매달려 있었다⁠. 분홍 귀 공장 토끼와 초록 귀 토끼⁠. 해나와 슬아와 무탁은 스무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무탁이 휴대전화로 승진의 뒷모습을 찍었다⁠. 슬아가 시킨 일이었다⁠.

“⁠찍어 둬⁠. 내일 필요할지 몰라⁠.⁠”

“⁠슬아 누나⁠, 이거 스토킹 아니에요⁠?⁠”

“⁠본인이 허락했어⁠.⁠”

“⁠허락받은 스토킹은 뭐예요⁠?⁠”

“⁠동행⁠.⁠”

승진은 편의점 앞에서 걸음을 늦추고 유리문 안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학원 간판이 붙어 있던 자리에 「⁠24시⁠」라는 붉은 글씨가 깜빡였다⁠. 승진은 다시 걸어 왼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재개발 구역이었다⁠. 가로등이 다 꺼져 있었다⁠. 빈 건물들의 창마다 테이프가 엑스 자로 붙어 있었고⁠, 바람이 테이프 끝을 펄럭이게 했다⁠. 오늘 밤은 바람이 셌다⁠. 해나의 앞치마 자락이 다리에 감겼다⁠.

승진이 「⁠피가네 생선⁠」 간판 앞을 지나갈 때였다⁠. 바람이 골목을 훑고 지나갔다⁠. 녹슨 간판이 끼익 소리를 냈다⁠. 간판을 붙든 나사 하나가 빠졌다⁠. 간판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다⁠.

승진의 가방에서 두 토끼가 동시에 뜨거워졌다⁠. 해나의 손끝이 먼저 알았다⁠. 분홍 귀가 일어났다⁠. 초록 귀도 일어났다⁠. 분홍 귀 토끼의 별은 반짝이기만 했다⁠. 초록 귀 토끼의 별에서 금빛 실 한 가닥이 튀어나가 승진의 패딩 깃을 감고⁠, 승진을 뒤로 두 걸음 잡아당겼다⁠.

간판이 떨어졌다⁠. 승진이 서 있던 자리에 「⁠피가네 생선⁠」이 얼굴을 박고 엎어졌다⁠. 쇳소리가 재개발 구역의 빈 건물들 사이로 울렸다⁠. 금빛 실은 순식간에 별로 돌아왔다⁠.

승진은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있었다⁠. 무탁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슬아도 깁스한 팔을 안고 달려갔다⁠. 해나는 걸어갔다⁠. 승진의 가방 손잡이에서 초록 귀 토끼가 아직 따뜻했다⁠.

승진은 엎어진 간판을 보았다⁠. 아버지가 단 간판이었다⁠. 승진은 웃었다⁠. 웃다가 손등으로 눈을 눌렀다⁠. 손등이 젖었다⁠.

“⁠두 번째네요⁠.⁠” 승진이 말했다⁠. “⁠스물네 해 만에⁠.⁠”

무탁의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 「⁠가디언 귀 세움 · 방금 · 전국⁠」 무탁이 화면을 들어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전국의 공장 토끼 만 마리가 승진을 위해 귀를 세우고 있었다⁠. 승진의 가방 손잡이에 달린 분홍 귀 토끼도 그중 하나였다⁠.

*

은행나무는 재개발 구역 끝에 서 있었다⁠. 밑동이 어른 손바닥 두 개만큼 패여 있었다⁠. 패인 자리에 껍질이 새로 덮여 울퉁불퉁했다⁠. 승진은 손바닥으로 밑동을 짚었다⁠. 해나도 옆에서 밑동을 짚었다⁠. 머릿속에서 짚었던 자리와 같은 자리였다⁠.

계단 위에서 손전등 불빛이 흔들리며 내려왔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꽃무늬 누빔 조끼를 입은 노인이 손전등을 들고 은행나무 앞까지 내려왔다⁠. 간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나온 승진의 어머니였다⁠.

“⁠승진아⁠! 너 괜찮아⁠? 무슨 소리야⁠?⁠”

“⁠간판이 떨어졌어요⁠, 엄마⁠.⁠”

“⁠우리 간판⁠?⁠” 어머니는 손전등을 골목 안으로 비추다가 엎어진 「⁠피가네 생선⁠」을 보고 혀를 찼다⁠. “⁠네 아버지가 나사를 셋만 박았어⁠. 내가 넷 박으라고 했는데⁠.⁠” 어머니는 손전등을 돌려 해나와 슬아와 무탁을 차례로 비췄다⁠. “⁠이분들은 누구야⁠? 회사 사람들이야⁠? 밤 열한 시에 회사 사람들을 데리고 와⁠?⁠”

“⁠망원동 사람들이에요⁠.⁠”

어머니의 손전등이 승진의 가방 손잡이에서 멈췄다⁠. 초록 귀 토끼가 불빛을 받았다⁠. 새 별이 반짝였다⁠. 어머니는 손전등을 내리고 토끼를 손끝으로 만졌다⁠. 별의 왼쪽 아래 꼭짓점을 엄지로 쓸었다⁠.

“⁠차옥 할머니 별이네⁠.⁠”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네가 풀었다고 해서 내가 한 달을 울었는데⁠.⁠”

“⁠엄마⁠.⁠”

“⁠누가 다시 놔 줬어⁠?⁠”

승진이 해나를 보았다⁠. 어머니도 해나를 보았다⁠. 해나는 앞치마 자락을 바람에 펄럭이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는 해나의 분홍 머리핀을 보더니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차옥 할머니 손녀구나⁠. 할머니가 늘 머리핀 꽂은 손녀 자랑을 했어⁠. 손이 할머니보다 빠르다고⁠.⁠”

“⁠할머니보다 느려요⁠.⁠”

“⁠할머니가 그렇게 말했으면 빠른 거야⁠.⁠” 어머니는 손전등을 승진에게 쥐여 주었다⁠. “⁠얘기 끝나면 다 올라와⁠. 고등어 구워 놓을게⁠. 꼬리 말고 몸통으로⁠.⁠”

어머니는 슬리퍼를 끌며 계단 열한 개를 올라갔다⁠. 현관 불이 켜져 있었다⁠. 서른아홉 살 아들을 기다리는 불이었다⁠.

“⁠고등어 몸통이래요⁠.⁠” 무탁이 속삭였다⁠. “⁠누나⁠, 저 오늘 진짜 잘 따라왔다⁠.⁠”

“⁠너는 떡볶이 먹고 왔잖아⁠.⁠” 슬아가 말했다⁠.

“⁠고등어 들어갈 데는 따로 있어요⁠.⁠”

“⁠사장님⁠.⁠”

“⁠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장님 손으로는 하루 열 개입니다⁠. 제 공장으로는 만 개를 찍어도 아무도 못 지키고요⁠.⁠” 승진의 목소리가 은행나무 밑동에 부딪혀 낮게 울렸다⁠. “⁠저는 오늘 밤 다 알았습니다⁠. 그래도 답이 없어요⁠.⁠”

“⁠제 손으로는 못 해요⁠.⁠” 해나가 말했다⁠. “⁠손이 만 개면요⁠.⁠”

승진이 해나를 보았다⁠.

“⁠몸은 공장에서 찍어요⁠. 귀도요⁠. 귀는 공장이 이기잖아요⁠. 별만 빼고요⁠.⁠” 해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실패를 꺼냈다⁠. “⁠별은 곁의 사람이 놓아요⁠. 엄마가 딸 별을⁠, 딸이 엄마 별을요⁠. 그 사람 길을 아는 사람이요⁠. 금실은 헌 옷 가져오는 사람한테 나눠 줘요⁠. 실은 헌 옷을 먹고 커요⁠. 모자라지 않아요⁠.⁠”

“⁠요즘 누가 바느질을 합니까⁠?⁠”

“⁠다들 해⁠.⁠” 슬아가 끼어들었다⁠. 깁스한 팔을 들어 보였다⁠. “⁠키링 꾸미기⁠, 헌 옷 고쳐 입기⁠. 우리 동기들 다 해⁠. 헌옷토끼 해시태그 봤잖아⁠. 손으로 하는 게 유행이야⁠. 부장님 회사가 숫자를 안 봐서 그렇지⁠.⁠”

“⁠저도 귀 잘라요⁠.⁠” 무탁이 손을 들었다⁠. “⁠삼각형이지만요⁠.⁠”

승진은 은행나무 밑동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 껍질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승진은 손바닥을 털지 않고 오래 내려다보았다⁠.

“⁠몸은 공장이⁠, 별은 곁의 사람이⁠.⁠”

승진이 해나의 말을 한 번 따라 했다⁠. 같은 말을 한 번 더 따라 했다⁠. 이번에는 숫자를 말할 때의 목소리였다⁠.

“⁠내일 이사회가 있습니다⁠. 인수사 앞에서 2차를 확정하는 자리예요⁠. 이걸 가지고 가겠습니다⁠.⁠”

“⁠대표님이 안 들으시면요⁠?⁠”

“⁠그럼 저는 끝이죠⁠.⁠” 승진이 가방 손잡이의 초록 귀 토끼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사장님은 공방을 거셨잖아요⁠. 저도 뭘 하나는 걸어야 공평하죠⁠.⁠”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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