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17자)

3번 창고

주인을 지키는 키링 인형 · 연채온

11월 15일 월요일 새벽 여섯 시 사십 분⁠, 해나는 김포 공단의 부서진 정류장에서 첫차를 내렸다⁠. 정류장 지붕은 여전히 반쯤 내려앉아 있었고⁠, 지붕 틈으로 이슬이 떨어져 의자가 젖어 있었다⁠. 해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왔다⁠. 망원동을 떠난 뒤에도 앞치마를 벗지 않았다⁠. 주머니에 실패와 파란 귀 견본 토끼와 노란 체크 귀 토끼와 접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정류장 의자 끝에 생산 2반 반장이 앉아 있었다⁠. 야간조를 마치고 첫차를 기다리는 길이었다⁠. 반장은 해나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망원동 사장님⁠? 여기서 뭐 해요⁠?⁠”

“⁠오늘부터 공장 다녀요⁠.⁠”

“⁠사장님이요⁠? 공장을요⁠?⁠” 반장이 웃었다⁠. “⁠우리 딸이 들으면 기절하겠네⁠. 사장님 토끼 사려고 줄 섰다가 못 산 애예요⁠.⁠”

“⁠반장님⁠.⁠”

“⁠네⁠.⁠”

“⁠지난번에 물어봤던 거요⁠. 밤에 어느 길로 가세요⁠?⁠”

반장은 웃음을 거두고 해나를 오래 보았다⁠. 이번에는 왜 묻느냐고 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공장 담벼락을 가리켰다⁠.

“⁠2동 뒷문으로 나와서 공장 마당을 가로질러요⁠. 지게차 다니는 데요⁠. 밤에는 불이 반만 켜져요⁠. 마당 지나서 정문⁠, 정문에서 이 정류장까지 컨테이너 사이로 걸어요⁠. 컨테이너 사이가 제일 무서워요⁠. 트럭 기사들이 거기서 잠깐씩 차를 대고 자거든요⁠. 시동 걸린 채로⁠.⁠”

해나는 반장의 말을 손끝으로 받았다⁠. 마당⁠, 지게차⁠, 반만 켜진 불⁠, 컨테이너 사이의 시동 소리⁠.

“⁠오늘 만들어 드릴게요⁠.⁠”

*

여덟 시⁠, 승진은 정문에서 해나에게 출입증을 건넸다⁠. 「⁠기술 고문 봉해나⁠」 승진은 오늘도 작업 조끼를 입었다⁠. 조끼 안주머니가 불룩했다⁠. 바늘구멍만 남은 초록 귀 토끼가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두 주입니다⁠. 오늘이 첫날이고요⁠.⁠”

“⁠알아요⁠.⁠”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3번 창고요⁠. 슬아가 준 영상 그대로요⁠.⁠”

3번 창고 옆 마당에는 개발팀이 만들어 둔 실험용 골목이 있었다⁠. 철제 칸막이로 좁은 길을 만들고 천장에 가로등 하나를 달았다⁠. 바닥에 넘어져도 다치지 않게 매트가 깔려 있었다⁠. 개발팀 직원 하나가 가디언을 가방에 달고 골목 입구로 갔다⁠. 해나에게 슬아의 영상을 넘겨준 개발팀 언니였다⁠. 언니는 해나를 보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슬아는 괜찮아요⁠?

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숨을 한 번 쉬고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로등 밑에서 일부러 발을 헛디뎠다⁠. 매트 위로 쓰러졌다⁠.

창고 안에서 소리가 났다⁠. 만 마리의 귀가 한꺼번에 일어나는 소리였다⁠. 펠트가 펠트를 스치는 소리가 만 겹으로 겹쳐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승진이 창고 철문을 올렸다⁠. 선반의 만 마리가 모두 귀를 세우고 있었다⁠. 별들이 한꺼번에 반짝였다⁠.

개발팀 언니가 매트 위에서 가방의 토끼를 들어 보였다⁠. 귀가 서 있었다⁠. 언니가 태블릿을 확인했다⁠.

“⁠영 점 삼 도 올랐어요⁠. 손난로보다 덜해요⁠.⁠”

해나는 승진을 보았다⁠. 승진은 창고 안의 만 마리를 보고 있었다⁠. 영상으로는 백 번 본 장면이었다⁠. 눈앞에서는 처음이었다⁠. 만 마리가 천천히 귀를 내렸다⁠. 승진의 턱이 조금 움직였다⁠.

승진이 조끼 주머니에서 공장 토끼를 꺼냈다⁠. 지난번 창고에서 해나에게 보여 주었던 분홍 귀 토끼였다⁠. 귀가 서 있었다⁠. 승진은 별에 엄지를 대 보았다⁠.

“⁠저도 방금 따뜻했습니다⁠. 영 점 삼 도만큼이요⁠.⁠”

“⁠사업부장님은 안 넘어지셨잖아요⁠.⁠”

“⁠네⁠. 매트 위의 언니가 넘어졌죠⁠.⁠” 승진은 토끼의 귀가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제 토끼가 언니를 위해 일어난 겁니다⁠. 언니 토끼는 저를 위해 일어나고요⁠. 서로 남을 위해 귀를 세우는데 아무도 못 지키네요⁠.⁠”

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승진이 처음으로 해나의 말을 해나보다 먼저 했다⁠. “⁠다시 한번 해 볼까요⁠?⁠” 개발팀 언니가 물었다⁠.

“⁠아뇨⁠.⁠” 해나가 말했다⁠. “⁠이제 몸 하나 주세요⁠. 공장에서 찍은 몸이요⁠. 별은 빼고요⁠.⁠”

*

오후 한 시⁠, 공장 휴게실의 긴 탁자 위에 크림색 토끼 몸 하나가 놓였다⁠. 분홍 귀가 달려 있었다⁠. 자수 기계에 들어가기 전의 몸이었다⁠. 가슴이 비어 있었다⁠. 해나는 반장이 점심시간에 벗어 준 낡은 작업복 소매를 가위로 오렸다⁠. 소매 끝이 기름때로 반들거렸다⁠. 십오 년 입었다고 했다⁠.

휴게실에 사람이 모였다⁠. 점심을 먹던 생산 2반 직원들이 도시락을 든 채 해나 주위로 몰려들었다⁠. 누군가 과자 봉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사장님⁠, 진짜 사십 분 걸려요⁠?⁠”

“⁠네⁠.⁠”

“⁠내기해요⁠. 나는 삼십 분에 과자 한 봉지⁠.⁠”

“⁠나는 한 시간에 두 봉지⁠. 손이 느려 보여⁠.⁠”

“⁠사장님 손 안 느려⁠. 영상 봤어⁠.⁠”

해나는 소매에서 올을 풀어 금실과 꼬았다⁠. 공장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꼬인 실이 금빛으로 번지자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1동 꼬는 기계에서 매일 보는 금빛인데⁠, 손가락 사이에서 번지는 것은 다르게 보였다⁠. 반장이 해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해나는 바늘에 실을 꿰고 반장을 보았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다시 한번만 말해 주세요⁠. 천천히요⁠.⁠”

반장은 천천히 말했다⁠. 2동 뒷문⁠, 공장 마당⁠, 반만 켜진 불⁠, 지게차가 다니는 노란 선⁠, 정문⁠, 경비실 믹스커피⁠, 컨테이너 사이⁠, 시동 걸린 트럭⁠, 지붕 부서진 정류장⁠. 해나는 첫 땀을 놓았다⁠. 2동 뒷문을 열고 나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노란 선 앞에서 바늘이 멈칫했다⁠. 반장이 말하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후진 경고음⁠. 삐⁠, 삐⁠, 삐⁠. 해나는 소리를 피해 반 걸음 비켜서 다시 걸었다⁠.

사십 분이 지났다⁠. 별의 왼쪽 아래 꼭짓점을 짧게 끊었다⁠. 손끝이 따뜻했다⁠. 공장에서 찍은 몸의 가슴 위에서⁠, 손으로 놓은 별이 햇빛을 머금었다⁠.

“⁠사십 분 딱이네⁠.⁠” 과자 봉지를 내놓은 직원이 말했다⁠. “⁠아무도 못 맞혔어⁠. 과자는 반장님 드려⁠.⁠”

반장은 토끼를 두 손으로 받았다⁠. 별에 손끝을 대 보더니 흠칫 놀랐다⁠.

“⁠뜨겁네⁠. 아까 공장 거는 안 이랬는데⁠.⁠”

승진이 휴게실 문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해나는 몰랐다⁠. 승진은 반장의 손에 들린 토끼를 보았다⁠. 분홍 귀⁠, 공장에서 찍은 몸⁠, 손으로 놓은 별⁠. 승진은 아무 말 없이 문간을 떠났다⁠.

*

밤 열한 시 오십 분⁠, 해나와 승진은 정문 경비실 옆에서 공장 마당을 보았다⁠. 반장이 야간조를 마치고 2동 뒷문으로 나왔다⁠. 가방 손잡이에 토끼가 매달려 있었다⁠. 마당의 불은 반만 켜져 있었다⁠. 노란 선 너머로 지게차 한 대가 상자를 싣고 천천히 움직였다⁠.

반장이 노란 선 앞에 이르렀을 때 지게차가 후진했다⁠. 운전석의 기사는 높이 쌓은 상자에 가려 뒤를 보지 못했다⁠. 후진 경고음이 울렸다⁠. 삐⁠, 삐⁠, 삐⁠. 반장은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반장의 토끼가 뜨거워졌다⁠. 해나의 손끝이 먼저 알았다⁠. 분홍 귀가 쫑긋 일어났다⁠. 별에서 금빛 실 한 가닥이 튀어나가 반장의 작업복 깃을 휘감고⁠, 반장을 뒤로 한 걸음 잡아당겼다⁠. 반장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게차의 쇠 발톱이 반장이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금빛 실은 순식간에 별로 돌아왔다⁠.

“⁠아이고⁠, 깜짝이야⁠!⁠”

반장의 비명에 지게차가 멈췄다⁠. 기사가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승진이 정문에서 마당으로 달려갔다⁠. 해나는 달리지 않았다⁠. 3번 창고를 보았다⁠. 철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없었다⁠. 만 마리는 조용했다⁠. 반장의 별은 반장 하나를 향해 있었다⁠.

승진이 반장을 일으켜 세우고 해나에게로 돌아왔다⁠. 숨을 몰아쉬었다⁠. 패딩 지퍼가 다 열려 있었다⁠.

“⁠창고는요⁠?⁠”

“⁠조용해요⁠.⁠”

승진은 3번 창고의 철문을 보았다⁠. 아무 빛도 새어 나오지 않는 철문이었다⁠. 승진은 조끼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초록 귀 토끼를 꺼내지 않고 주머니 안에서 쥐기만 했다⁠.

“⁠몸은 공장 거였습니다⁠.⁠”

“⁠네⁠.⁠”

“⁠별만 사장님 손이었고요⁠.⁠”

“⁠네⁠.⁠”

승진은 한참 말이 없었다⁠. 마당 건너에서 반장이 엉덩이를 털며 지게차 기사에게 삿대질을 했다⁠. 기사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반장의 목소리가 정문까지 들렸다⁠. 내가 토끼 아니었으면 너 오늘 큰일 났어⁠.

*

11월 17일 수요일 오후 두 시⁠, 대표가 3번 창고에 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정장을 입은 외국인 넷과 통역사 하나가 대표 뒤를 따랐다⁠. 인수를 놓고 다투는 해외 캐릭터 회사 가운데 한 곳의 실사단이었다⁠. 대표는 분홍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승진도 넥타이를 맸다⁠.

“⁠원조 사장님⁠! 공장에 계신다면서요⁠. 피 부장이 비밀로 하더라고요⁠.⁠” 대표가 해나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오늘 보여 줄 게 있다면서요⁠?⁠”

해나는 개발팀 언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실험용 골목에 들어가 매트 위로 넘어졌다⁠. 창고 안의 만 마리가 한꺼번에 귀를 세웠다⁠. 펠트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외국인들이 탄성을 질렀다⁠. 한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어 찍었다⁠. 통역사가 말을 옮기기도 전에 대표가 손뼉을 쳤다⁠.

“⁠이거예요⁠, 이거⁠! 이걸 광고로 씁니다⁠. 만 마리가 한 사람을 위해 일어선다⁠. 백만 마리면 더 장관이고요⁠.⁠”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해나가 말했다⁠. “⁠만 군데로 흩어져요⁠. 넘어진 사람 토끼는 영 점 삼 도 올랐어요⁠.⁠”

해나는 반장을 불러 토끼를 보여 주었다⁠. 공장 몸에 손으로 놓은 별⁠. 반장이 지게차 이야기를 했다⁠. 통역사가 옮겼다⁠. 외국인 가운데 하나가 반장의 토끼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대표는 반장의 토끼를 손바닥에 올려 무게를 재듯 흔들었다⁠.

“⁠좋네요⁠. 하나에 몇 분이라고요⁠?⁠”

“⁠사십 분이요⁠.⁠”

“⁠백만 개면요⁠?⁠” 대표가 휴대전화 계산기를 두드렸다⁠. “⁠육십육만 시간⁠. 사장님이 하루 열 개 하시면 이백칠십 년이 넘네요⁠. 원조 사장님 손자 손녀까지 하셔도 모자라네요⁠.⁠” 대표는 토끼를 반장에게 돌려주었다⁠. “⁠사장님⁠, 저는 사장님 말 안 믿는 게 아니에요⁠. 다 믿어요⁠. 근데 사장님 말이 맞으면 이 사업은 아예 없는 사업이에요⁠.⁠”

“⁠한 사람이 하면 그래요⁠.⁠”

“⁠그럼 누가 해요⁠? 백만 명이 바느질을 해요⁠?⁠”

대표가 웃었다⁠. 외국인들도 통역을 듣고 웃었다⁠. 해나는 웃지 않았다⁠. 승진도 웃지 않았다⁠.

“⁠대표님⁠, 두 주를 약속했습니다⁠.⁠” 승진이 말했다⁠.

“⁠피 부장이 약속했지⁠, 내가 했나⁠?⁠” 대표는 승진을 보지 않고 실사단에게 손짓했다⁠. “⁠실사가 다음 주예요⁠. 숫자가 그 전에 나가야 돼⁠. 출고는 원래대로 20일⁠. 사흘 남았네요⁠. 원조 사장님 출입증은 오늘까지로 하고요⁠. 고문 계약은 피 부장이랑 따로 하세요⁠. 공방 이름은 상자에 잘 넣을게요⁠. 「⁠망원동 솔기의 손길⁠」⁠”

대표는 실사단을 데리고 창고를 떠났다⁠. 경비원 하나가 해나 옆으로 와서 미안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해나는 목에 건 출입증을 벗어 경비원에게 건넸다⁠. 「⁠기술 고문 봉해나⁠」 사흘짜리 출입증이었다⁠.

정문까지 승진이 따라 나왔다⁠. 둘은 말없이 걸었다⁠. 정문 앞에서 해나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사업부장님은 아직도 모르겠어요⁠?⁠”

승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끼 안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해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정문 너머 컨테이너 사이로 트럭 한 대가 시동을 건 채 멈춰 있었다⁠.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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