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39자)

솔기 간판

주인을 지키는 키링 인형 · 연채온

밤 열한 시 삼십사 분⁠, 슬아는 성수동 공장 골목을 지나 뚝섬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카페들이 다 문을 닫은 뒷길이었다⁠. 낮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 붉은 벽돌 건물들이 밤에는 불 꺼진 창만 늘어놓았다⁠. 슬아는 휴대전화로 택시 앱을 보며 걸었다⁠. 「⁠주변에 배차 가능한 택시가 없습니다⁠」 화면을 끄고 가방을 고쳐 멨다⁠.

가방 손잡이에 토끼가 매달려 있었다⁠. 귀가 반쯤 접힌 토끼였다⁠. 2차 견본이었다⁠. 슬아가 그린 귀였다⁠. 공장에서 처음 찍어 나온 날⁠, 슬아는 견본 하나를 몰래 가방에 달았다⁠. 접힌 귀가 걸음마다 까딱거렸다⁠. 슬아는 걸으면서 귀를 손끝으로 한 번 만졌다⁠. 미지근했다⁠.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낮게 깔려 다가왔다⁠. 슬아는 길 가장자리로 비켰다⁠. 오토바이는 지나가지 않고 슬아 옆에 붙어 속도를 줄였다⁠. 뒷자리의 남자가 손을 뻗었다⁠.

손이 가방끈을 잡아챘다⁠. 슬아는 놓지 않았다⁠.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이 먼저 끈을 감아쥐었다⁠. 끈이 오른손목에 두 바퀴 감겼다⁠. 오토바이가 속도를 올렸다⁠. 슬아의 몸이 앞으로 끌려갔다⁠. 운동화 밑창이 아스팔트를 긁었다⁠. 두 걸음⁠, 세 걸음⁠.

가방의 토끼가 뜨거워졌다⁠. 접힌 귀가 펴지며 일어났다⁠. 슬아는 귀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귀가 서고⁠, 별이 반짝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금빛 실은 나오지 않았다⁠. 토끼는 손난로처럼 따뜻하기만 했다⁠.

끈이 끊어졌다⁠. 슬아는 오른손을 짚으며 넘어졌다⁠. 손목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오토바이가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소리가 다 사라질 때까지 슬아는 아스팔트에 엎드려 있었다⁠. 끊어진 가방끈에 매달린 토끼가 슬아의 뺨 옆에서 아직 따뜻했다⁠. 귀가 천천히 접혔다⁠.

*

밤 열한 시 사십 분⁠, 무탁의 오토바이가 망원동 골목을 빠져나왔다⁠. 해나는 헬멧 끈을 채우지도 못하고 무탁의 조끼를 붙잡았다⁠. 해나의 휴대전화는 슬아에게 일곱 번 전화를 걸었다⁠. 일곱 번 다 받지 않았다⁠.

“⁠누나⁠, 성수동 어디요⁠?⁠”

“⁠뚝섬 가는 길이요⁠. 걸어간다고 했어요⁠.⁠”

“⁠성수동에서 뚝섬 가는 길이 몇 개인데요⁠!⁠”

해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슬아의 길을 해나는 알았다⁠. 지난봄 노란 체크 귀 토끼를 놓을 때 슬아가 다 말해 주었다⁠. 학교 앞 원룸에서 지하철역까지⁠. 성수동 회사에서 뚝섬까지는 해나가 들은 적 없는 길이었다⁠. 슬아는 폭신에 다닌 지 열이틀째였다⁠.

여덟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누군가 받았다⁠. 슬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보세요⁠? 이 휴대전화 주인분 지인이세요⁠? 여기 성수동 뒷길인데요⁠, 쓰러져 계셔서 제가 구급차 불렀어요⁠.⁠”

해나는 무탁의 등에 이마를 박았다⁠. 무탁이 속도를 올렸다⁠. 강변북로를 따라 강물이 검게 흘렀다⁠. 무탁은 한 번도 개무섭다고 하지 않았다⁠.

*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광진구의 대학 병원 응급실에서 슬아는 침대에 앉아 오른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깁스가 팔꿈치 아래부터 손가락 마디까지 덮었다⁠. 이마와 왼쪽 뺨에 붕대가 붙어 있었다⁠. 해나가 커튼을 걷자 슬아가 고개를 들었다⁠.

“⁠왔네⁠.⁠”

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대 옆으로 갔다⁠. 슬아의 깁스를 보았다⁠. 깁스 끝으로 나온 손가락들이 퉁퉁 부어 있었다⁠. 매일 토끼 귀를 오리던 손가락이었다⁠.

“⁠오른손이래⁠. 손목뼈 두 개⁠. 수술은 안 해도 된대⁠. 여덟 주⁠.⁠” 슬아가 왼손으로 이불 위의 토끼를 집어 해나에게 내밀었다⁠. 끊어진 가방끈에 귀 접힌 토끼가 매달려 있었다⁠. “⁠이거 봐⁠. 귀가 섰어⁠. 진짜 섰어⁠. 근데 그게 다야⁠.⁠”

해나는 토끼를 받았다⁠. 별은 이미 식어 있었다⁠.

“⁠마감은 했어⁠. 퇴근 전에⁠.⁠” 슬아가 웃으려다 얼굴을 찡그렸다⁠. 뺨의 붕대가 당겼다⁠. “⁠경고 문구 넣을 자리⁠, 작게 그렸어⁠. 아무도 안 읽게⁠.⁠”

“⁠슬아야⁠.⁠”

“⁠네 토끼 달고 갔으면 어땠을까⁠.⁠” 슬아가 해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창가에 있잖아⁠. 노란 귀⁠. 그 별은 성수동 길 모르잖아⁠. 근데 알았으면⁠.⁠”

무탁이 커튼 밖에서 헬멧을 안고 서성였다⁠. 들어오지도 가지도 못했다⁠. 간호사가 지나가며 무탁에게 보호자냐고 물었다⁠. 무탁은 고개를 저었다가 끄덕였다가 다시 저었다⁠.

무탁은 십 분을 그렇게 서성이다가 결국 커튼을 젖히고 들어왔다⁠. 손에 편의점 봉지가 들려 있었다⁠. 봉지 안에서 바나나 우유 세 개와 빨대 세 개가 나왔다⁠. 무탁은 우유 하나에 빨대를 꽂아 슬아의 왼손에 쥐여 주었다⁠.

“⁠슬아 누나⁠, 이거 뼈에 좋대요⁠. 편의점 아저씨가 그랬어요⁠.⁠”

“⁠편의점 아저씨가 의사야⁠?⁠”

“⁠편의점 아저씨는 다 알아요⁠. 새벽에 별사람 다 온대요⁠.⁠”

무탁은 주머니에서 매직을 꺼내더니 허락도 받지 않고 슬아의 깁스에 글씨를 썼다⁠. 「⁠빨리 나으세요 · 반성 중 공무탁⁠」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슬아가 깁스를 내려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뺨의 붕대가 당겨 얼굴을 찡그렸고⁠, 찡그리면서 또 웃었다⁠.

“⁠너 왜 반성 중이야⁠? 이번엔 네가 올린 거 없잖아⁠.⁠”

“⁠그냥요⁠. 반성은 쌓아 두면 좋대요⁠.⁠”

“⁠그것도 편의점 아저씨가 그랬어⁠?⁠”

“⁠네⁠.⁠”

슬아는 바나나 우유를 빨대로 빨았다⁠. 해나는 슬아의 웃는 얼굴을 보다가 커튼 밖으로 나왔다⁠. 웃는 얼굴 옆에 있으면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

새벽 한 시⁠, 응급실 앞 복도 의자에 승진이 앉아 있었다⁠. 슬아가 회사 비상 연락망으로 문자를 보낸 지 사십 분 만이었다⁠. 승진은 정장 재킷을 입지 않고 셔츠 위에 패딩만 걸쳤다⁠. 패딩 지퍼가 반쯤 열려 있었다⁠. 해나가 커튼 밖으로 나오자 승진이 일어났다⁠.

“⁠슬아 씨는요⁠?⁠”

“⁠손목 두 개 부러졌어요⁠. 오른손이요⁠.⁠”

승진은 눈을 감았다⁠. 오래 감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해나의 손에 들린 귀 접힌 토끼를 보았다⁠.

“⁠2차 견본이네요⁠.⁠”

“⁠귀가 섰대요⁠. 따뜻해졌대요⁠. 그게 다래요⁠.⁠”

해나는 토끼를 승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승진은 토끼를 내려다보았다⁠. 식은 별을 엄지로 쓸었다⁠. 실패 모서리를 쓸던 엄지였다⁠.

“⁠열한 시 삼십사 분이었습니다⁠.⁠” 승진이 말했다⁠. “⁠모니터에 떴어요⁠. 저는 그때 사무실에 있었고요⁠. 점이 한꺼번에 밝아지는 걸 봤습니다⁠. 그게 슬아 씨였어요⁠.⁠”

“⁠사업부장님⁠.⁠”

“⁠네⁠.⁠”

“⁠공방 드릴게요⁠.⁠”

승진이 고개를 들었다⁠. 해나는 복도 바닥을 보며 말했다⁠. 말을 고르지 않았다⁠. 지난 열 주 동안 머릿속에서 수백 번 고른 말이었다⁠.

“⁠솔기라는 이름이랑 토끼 도안이랑 공방이랑⁠, 할머니 재봉틀까지요⁠. 사업부장님이 처음에 사겠다고 한 거 전부요⁠.⁠”

“⁠사장님⁠.⁠”

“⁠대신 2차 출고를 멈추세요⁠. 그리고 공장을 저한테 맡기세요⁠. 제가 공장에서 보여 드릴게요⁠. 공장 토끼가 왜 한 사람을 못 지키는지⁠, 어떻게 하면 지키는지요⁠.⁠”

승진은 토끼를 쥔 손을 내렸다⁠. 복도 끝 자판기에서 커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른 소리였다⁠. 승진은 자판기 소리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두 주까지만 기다리실 겁니다⁠. 그 이상은 제가 회사를 걸어도 안 됩니다⁠.⁠”

“⁠두 주요⁠.⁠”

“⁠실패도요⁠? 할머니 실패도 같이 주시는 겁니까⁠?⁠”

해나는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응급실까지 앞치마를 두른 채 왔다⁠. 주머니 속에서 나무 실패가 손바닥에 닿았다⁠. 슬아가 넘겨준 메모리 카드도 함께 닿았다⁠.

“⁠실패는 안 돼요⁠.⁠”

“⁠알겠습니다⁠.⁠” 승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서류 가지고 가겠습니다⁠. 제 이름으로요⁠.⁠”

*

새벽 네 시⁠, 해나는 공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응급실에서 돌아와 불을 켜지 않았다⁠. 골목 가로등 불빛이 창으로 들어와 작업대 위에 길게 누웠다⁠. 해나는 작업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바늘 자국이 수백 개 박힌 나무 상판이었다⁠. 손바닥이 자국마다 걸리며 지나갔다⁠.

벽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공방을 열던 날 해나가 붓펜으로 옮겨 쓴 글씨였다⁠. 할머니 수선집 벽에 사십 년 붙어 있던 글씨를 그대로 따라 썼다⁠. 「⁠밤길은 손이 지킨다⁠」 해나는 종이를 떼어 네 번 접었다⁠. 접은 종이를 실패 옆⁠,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할머니의 발틀 재봉틀 앞에 앉아 발판에 발을 얹었다⁠. 발판을 밟지 않았다⁠. 발판의 왼쪽 나사가 반 바퀴 풀려 있었다⁠. 할머니가 풀어 둔 자리 그대로였다⁠. 해나는 발을 내리고 재봉틀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덮었다⁠. 쇠가 차가웠다⁠.

*

토요일 아침 일곱 시⁠, 망원동 골목은 줄이 없었다⁠. 해나가 어젯밤 공방 계정에 「⁠오늘은 쉽니다⁠」라고 올렸다⁠. 그래도 몇 사람이 나와서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말선은 떡볶이집 셔터를 반만 올리고 평상에 앉아 있었다⁠. 세탁소 사장과 꽃집 사장과 철물점 사장이 말선 옆에 서 있었다⁠. 아무도 떡볶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승진은 서류 봉투를 들고 왔다⁠. 작업대 위에 서류를 펼쳤다⁠. 해나는 읽지 않고 서명했다⁠. 승진이 받은 돈이 적힌 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해나는 보지 않았다⁠. 서명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자 손끝이 차가웠다⁠.

간판은 무탁이 내렸다⁠. 문 위에 나무 간판이 붙어 있었다⁠. 지난봄 해나가 할머니의 수선집 선반 판자를 잘라 직접 글씨를 판 간판이었다⁠. 「⁠솔기⁠」 무탁은 철물점에서 빌린 사다리에 올라가 드라이버를 쥐고 다리를 떨었다⁠.

“⁠누나⁠, 저 높은 데 개무서워요⁠.⁠”

“⁠두 칸밖에 안 올라갔어요⁠.⁠”

“⁠두 칸이 제 키보다 높아요⁠.⁠”

“⁠무탁 씨 키가 백구십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제 눈높이가 이백구십이에요⁠.⁠”

평상에서 말선이 피식 웃었다⁠. 웃음은 금방 끝났다⁠. 무탁은 나사를 하나씩 풀었다⁠. 마지막 나사가 빠지자 간판이 무탁의 두 손에 안겼다⁠. 무탁은 간판을 안고 사다리를 내려와 해나에게 건넸다⁠. 해나는 간판을 승진에게 건넸다⁠. 승진은 간판을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글씨 끝의 칼자국을 엄지로 쓸었다⁠.

해나는 공방 열쇠를 꺼냈다⁠. 할머니의 수선집 열쇠와 같은 꾸러미에 끼워 두었던 열쇠였다⁠. 해나는 꾸러미에서 공방 열쇠만 빼서 승진의 손바닥에 올렸다⁠.

“⁠재봉틀 기름은 일주일에 한 번이에요⁠. 발판이 뻑뻑하면 왼쪽 나사를 반 바퀴 푸세요⁠.⁠”

“⁠네⁠.⁠”

“⁠창가 견본 토끼는 제가 가져가요⁠. 파란 귀요⁠. 할머니 작업복이에요⁠.⁠”

“⁠네⁠. 그건 사장님 겁니다⁠.⁠”

“⁠이제 사장 아니에요⁠.⁠”

해나는 공방으로 들어가 창가의 견본 토끼와 노란 체크 귀 토끼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헌 옷 바구니에서 니트 한 벌을 꺼내 종이봉투에 담았다⁠. 할머니의 실패는 이미 주머니에 있었다⁠. 토끼 두 마리와 니트 한 벌과 실패 하나⁠. 반년 동안 하루 열 개씩 별을 놓은 공방에서 해나가 들고 나갈 것은 앞치마 주머니 하나와 종이봉투 하나에 다 들어갔다⁠.

말선이 평상에서 일어나 해나의 앞까지 걸어왔다⁠. 손에 컵떡볶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먹고 가⁠.⁠”

“⁠아침이에요⁠, 이모⁠.⁠”

“⁠아침이니까 먹어⁠. 저녁은 어디서 먹을지 모르잖아⁠.⁠”

해나는 떡볶이를 받았다⁠. 컵이 뜨거웠다⁠. 해나는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골목을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승진이 공방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다⁠. 철컥⁠. 문 위의 빈자리에 나사 구멍 네 개가 남아 있었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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