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513자)

허공에 호통

저승사자도 반한 트로트 가수 · 지백솔

“⁠구⁠, 독⁠, 이⁠. 아니지⁠. 구⁠, 독⁠.⁠”

오학주가 휴대전화 화면을 검지 하나로 꾹꾹 눌렀다⁠. 한 글자 누를 때마다 손가락을 들어 화면을 확인하고 다시 내렸다⁠. 독수리가 먹이를 고르는 손놀림이었다⁠. 파주 금촌 말희네 빌라 거실⁠, 탁자 위에는 수박 접시와 돋보기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학주 것⁠, 하나는 말희 것이었다⁠. 둘 다 자주 남의 것을 썼다⁠.

“⁠할아버지⁠, 거기 말고 위에요⁠, 위에⁠.⁠”

스피커폰 너머에서 학주의 손자가 소리쳤다⁠. 대학생이라고 했다⁠. 이십 분째 같은 말을 하는 중이었다⁠.

“⁠위가 어디냐⁠?⁠”

“⁠파란 거요⁠!⁠”

“⁠다 파랗다⁠.⁠”

말희는 수박씨를 뱉으며 웃었다⁠. 웃다가 화면을 들여다보고 웃음을 멈췄다⁠.

“⁠어르신⁠, 채널 이름이 이상한데요⁠.⁠”

화면 맨 위에 「⁠금말회 TV⁠」라고 떠 있었다⁠. 학주가 돋보기를 고쳐 쓰고 한참 보았다⁠.

“⁠회나 희나⁠. 회도 맛있소⁠.⁠”

손자가 전화기 너머에서 끅끅 웃었다⁠. 결국 손자가 원격으로 이름을 고쳐 주었다⁠. 학주는 몇 해 동안 찍어 둔 영상을 올렸다⁠. 괴산 장터 무대⁠, 칠순 잔치 무대⁠, 그리고 1998년 능곡 장터에서 찍었다는 흐릿한 캠코더 영상까지⁠. 영상 속 서른세 살의 말희가 지금과 같은 파마머리로 지금과 같은 꺾기를 하고 있었다⁠.

저녁까지 구독자는 서른일곱 명이 되었다⁠. 학주의 경로당 친구들과 이발소 단골들이었다⁠. 학주는 숫자가 하나 오를 때마다 박수를 쳤다⁠.

창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났다⁠.

“⁠유투부라는 것이 그리 좋소⁠?⁠”

검은 갓이 베란다 화분 옆에 서 있었다⁠. 학주가 수박을 든 채 굳었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말희는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남의 집에 들어올 때는 초인종부터 누르소⁠.⁠”

“⁠눌렀소⁠. 아무도 못 들었소⁠.⁠”

“⁠어르신은 와 저 양반이 보이는데⁠?⁠”

말희가 묻자 저승사자가 갓 끈을 만지작거렸다⁠. 말하기 싫은 것을 말할 때 나오는 손버릇이었다⁠.

“⁠나는 산 사람 눈에 안 보이오⁠. 두 가지만 빼고⁠. 하나는 부름을 한 번이라도 들은 사람⁠. 저 어른은 내 부름을 한 번 들었소⁠.⁠”

학주가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예선장 맨 뒷줄에서 들었던 낮은 종소리가 떠오른 얼굴이었다⁠.

“⁠다른 하나는⁠?⁠”

저승사자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갓 그늘 아래 창백한 얼굴이 아주 조금 붉어졌다⁠. 말희는 저승사자도 얼굴이 붉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가 손뼉 친 노래의 주인이오⁠.⁠”

“⁠손뼉은 안 쳤잖아요⁠. 치다 말았지⁠.⁠”

“⁠손바닥이 닿을 뻔했소⁠. 그 정도면 친 것이오⁠.⁠”

학주가 손뼉을 쳤다⁠. 이번에는 끝까지 쳤다⁠. 저승사자가 학주를 노려보았고⁠, 학주는 수박을 한 조각 더 집었다⁠.

*

능곡 경로당은 시장 골목 끝 이층집 일층에 있었다⁠. 마루에는 화투판이 둘⁠, 부엌에는 식혜 냄비가 셋⁠. 학주가 회장에게 부탁해 오후 세 시에 말희의 무대를 잡았다⁠. 무대라고 해야 마루 끝에 방석을 치운 자리였다⁠. 옥배가 휴대용 오르간을 무릎에 얹고 리듬 단추를 눌렀다⁠.

할머니들은 화투패를 쥔 채 고개만 돌렸다⁠. 할아버지들은 아예 돌리지 않았다⁠. 말희는 서른 해 동안 이런 객석을 수없이 겪었다⁠. 첫 소절이 끝나기 전에 화투패를 내려놓게 만들면 이기는 것이었다⁠.

1절 중간쯤 화투패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말희는 속으로 하나를 셌다⁠.

“⁠반 박자 빠르오⁠.⁠”

마루 기둥 옆에서 저승사자가 말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딱이면서⁠. 말희는 못 들은 척하고 2절로 들어갔다⁠.

“⁠2절은 더 빠르오⁠. 1968년 악극단에서 이리 불렀으면 단장한테 쫓겨났소⁠.⁠”

말희는 꺾기를 넣으면서 기둥을 째려보았다⁠.

“⁠꺾기는 좋소⁠. 그런데 숨을 너무 일찍 쉬오⁠.⁠”

“⁠박자는 내가 정한다⁠, 이 양반아⁠!⁠”

은순이를 통해 호통이 경로당 마루를 울렸다⁠. 화투판 두 개가 동시에 멈췄다⁠. 식혜를 젓던 부엌 할머니가 국자를 떨어뜨렸다⁠. 모두가 말희가 노려보는 기둥을 보았다⁠. 기둥 옆에는 달력 한 장과 선풍기 한 대뿐이었다⁠.

말희는 노래를 이어 갔다⁠. 이어 가면서 한 소절 끝날 때마다 기둥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옥배는 아무것도 모르고 반주를 쳤다⁠. 저승사자는 기가 막힌 얼굴로 팔짱을 풀었다⁠. 학주는 마루 끝에서 휴대전화를 높이 들고 이 모든 것을 찍었다⁠. 손이 떨려서 화면이 출렁였다⁠.

노래가 끝나자 할머니 하나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저 가수는 귀신이랑 싸우면서 노래를 하네⁠!⁠”

경로당이 뒤집어졌다⁠. 화투패가 전부 바닥에 내려가 있었다⁠.

경로당 회장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말희 앞으로 왔다⁠. 아흔 가까운 나이에 허리가 꼿꼿했다⁠.

“⁠가수 양반⁠, 그 귀신한테 내 말도 좀 전해 주소⁠. 우리 할멈 데려간 놈이면 한 대 때려 주고⁠.⁠”

“⁠이 양반은 그런 거 안 합니더⁠. 박자만 따집니더⁠.⁠”

“⁠박자 따지는 귀신이면 우리 할멈 데려간 놈 맞네⁠. 할멈이 노래방 가면 박자 맞추라고 내 옆구리를 찔렀거든⁠.⁠”

마루가 다시 한 번 뒤집어졌다⁠. 기둥 옆의 저승사자는 억울한 얼굴로 갓을 고쳐 썼다⁠.

*

이튿날 아침⁠, 말희는 우갑의 전화에 깼다⁠. 사회자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옥타브 높았다⁠.

“⁠당신 떴어⁠!⁠”

“⁠뭐가 떠⁠?⁠”

“⁠유투부⁠! 아니⁠, 유튜브⁠! 백만이야⁠, 백만⁠!⁠”

말희는 돋보기를 찾다가 이마에 얹힌 것을 내려 썼다⁠. 학주가 올린 영상 제목은 이랬다⁠. 「⁠예순두 살 트로트 가수⁠, 허공에 대고 호통⁠」 영상 밑에 댓글이 수천 개 달려 있었다⁠.

「⁠귀신이랑 듀엣하는 줄⁠」 「⁠기둥 옆에 뭐 있음⁠? 소름⁠」 「⁠근데 노래 왜 이렇게 잘함⁠」 「⁠우리 엄마가 이 노래 카세트 있다고 함⁠」

단톡방 「⁠금씨네 셋⁠」도 불이 났다⁠.

「⁠엄마 귀신 봐⁠?⁠?⁠?⁠」 「⁠회사에서 다 엄마 얘기해⁠」 「⁠팀장님이 엄마 팬이래 미치겠다⁠」

우갑은 곰을 다섯 개 연달아 보냈다⁠. 마지막 곰은 춤을 추고 있었다⁠.

점심때 트롯 왕관전 공식 채널에 패자 부활전 중간 순위가 떴다⁠. 탈락자 마흔 명 가운데 맨 위에 금말희라는 이름이 있었다⁠. 조회수 칸의 숫자가 둘째 이름보다 열 배 길었다⁠.

*

오후에 염유준이 능곡 경로당에 왔다⁠. 양복 대신 반팔 셔츠를 입고⁠, 손에는 수박 한 통을 들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텔레비전에서 본 얼굴은 아니었지만 텔레비전 사람인 것은 다들 알았다⁠.

“⁠어머니가 보내셨어요⁠. 영상을⁠.⁠”

유준이 경로당 부엌 식혜 냄비 옆에 앉으며 말했다⁠. 말희는 냄비 뚜껑을 열어 식혜를 한 국자 떠 주었다⁠.

“⁠니 엄마가 내 영상을 우째 보노⁠?⁠”

“⁠일산 백석동 경로당 단톡방에 누가 올렸대요⁠. 아침 여섯 시에 전화하셔서 첫마디가 ‘⁠말희 언니 떨어뜨린 놈이 너냐⁠’였어요⁠.⁠”

말희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유준도 이번에는 따라서 아주 조금 웃었다⁠. 웃음은 금방 걷혔다⁠. 유준이 태블릿을 꺼냈다⁠.

“⁠선생님⁠, 패자 부활전 무대 말인데요⁠. 조회수로 보면 선생님이 거의 확정이에요⁠. 그래서 그림을 미리 맞춰 두고 싶어요⁠.⁠”

화면에 무대 그림이 떠 있었다⁠. 무대 한가운데 말희⁠, 뒤편 기둥 옆에 빈자리⁠. 빈자리 위에 빨간 글씨로 「⁠허공 리액션 — 호통 3회⁠」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뭐꼬⁠?⁠”

“⁠사람들이 좋아한 건 이 장면이에요⁠. 노래하다가 허공에 대고 호통치는 거⁠. 생방송에서 한 번 더 해 주세요⁠. 세 번이면 좋고요⁠.⁠”

“⁠내는 노래하러 나가는 기다⁠.⁠”

“⁠노래는 지난번에도 하셨어요⁠. 그리고 떨어지셨죠⁠.⁠”

유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말희는 식혜 국자를 냄비에 걸쳐 놓았다⁠.

“⁠지난번엔 사람이 쓰러졌다⁠.⁠”

“⁠그것도 운이 나빴죠⁠. 선생님⁠, 저희 방송은 사람이 웃으면 살고 울면 죽어요⁠. 웃기면 채널이 안 돌아가고⁠, 울리면 다음 날 아무도 기억 못 해요⁠. 숫자가 그래요⁠.⁠”

“⁠사람 웃기는 건 내가 삼십 년 했다⁠. 노래로 웃겼다⁠. 귀신 흉내로 웃긴 적은 없다⁠.⁠”

“⁠귀신 흉내 아니잖아요⁠. 선생님이 진짜로 뭘 보셨든⁠, 사람들은 그걸 보고 웃었어요⁠.⁠”

말희의 눈이 기둥으로 갔다⁠. 저승사자가 부엌 문간에 기대서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 유준은 말희의 눈길을 따라 문간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유준이 다시 말희를 보았다⁠.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지금도 뭐 보이세요⁠?⁠”

“⁠보이믄 우짤 긴데⁠?⁠”

“⁠그것도 찍고 싶어요⁠.⁠”

유준이 서류철을 꺼냈다⁠. 패자 부활전 출연 계약서였다⁠. 말희는 돋보기를 쓰고 한 줄씩 읽었다⁠. 출연료⁠, 녹화 일정⁠, 생방송 동의⁠. 셋째 장 중간에 한 줄이 있었다⁠.

「⁠출연자는 제작진이 구성한 연출 장면(⁠콩트 포함⁠)에 협조한다⁠.⁠」

말희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경로당 부엌 앞치마였다⁠. 콩트 조항 위에 볼펜으로 두 줄을 그었다⁠. 그리고 맨 아래 서명란에 이름을 꾹꾹 눌러 썼다⁠.

“⁠노래는 할게⁠. 호통은 안 한다⁠.⁠”

유준이 줄 그어진 자리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하시면 저희가 순서를 앞으로 빼요⁠. 시청률 제일 낮은 시간으로요⁠.⁠”

“⁠빼라⁠. 거기서도 부를게⁠.⁠”

유준이 서류철을 닫았다⁠. 닫는 소리가 경로당 부엌에서 탁 울렸다⁠. 할머니들이 문간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유준은 수박을 놓고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식혜 맛있네요⁠. 생방송 때 뵙겠습니다⁠.⁠”

*

유준은 경로당 골목을 빠져나와 차에 앉자마자 에어컨을 끝까지 올렸다⁠.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일곱 통 와 있었다⁠. 넷은 편성국장⁠, 셋은 어머니였다⁠.

편성국장에게 먼저 걸었다⁠. 국장은 인사도 없이 숫자부터 말했다⁠.

“⁠지난주 예선 방송 시청률 봤지⁠? 지난 시즌 같은 주보다 낮아⁠. 결승까지 이 추세면 시즌 4는 없어⁠. 알지⁠?⁠”

“⁠압니다⁠.⁠”

“⁠그 허공 할머니⁠, 붙잡았어⁠?⁠”

“⁠계약은 했습니다⁠. 콩트는 안 하신답니다⁠.⁠”

“⁠그럼 왜 붙잡아⁠?⁠”

유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국장이 한숨을 쉬고 끊었다⁠. 유준은 핸들에 이마를 대고 잠깐 있다가 어머니에게 걸었다⁠. 어머니는 첫 신호가 가기도 전에 받았다⁠.

“⁠만났어⁠? 말희 언니 만났어⁠?⁠”

“⁠만났어요⁠. 식혜 얻어먹었어요⁠.⁠”

“⁠사인 받았니⁠?⁠”

“⁠계약서에 받았어요⁠.⁠”

“⁠그거 말고 내 거⁠!⁠”

유준은 웃음이 나서 핸들에서 이마를 뗐다⁠. 어머니는 젊어서 새벽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라디오에서 트로트가 나오면 칼질을 반 박자 늦췄다⁠. 유준이 이 일을 시작한 것도 어머니의 칼질 소리 때문이었다⁠. 지금은 숫자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었다⁠.

“⁠엄마⁠, 그 언니 노래 왜 좋아요⁠?⁠”

“⁠좋은 데 이유가 어디 있니⁠. 듣고 있으면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거 같아⁠.⁠”

전화를 끊고 유준은 태블릿을 열었다⁠. 「⁠허공 리액션 — 호통 3회⁠」를 지우지 않고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노래만 할 경우 — 첫 순서⁠」 두 줄을 오래 보다가 화면을 껐다⁠.

*

해가 지고 경로당 마당 평상에 저승사자가 앉아 있었다⁠. 말희는 옆에 앉아 남은 식혜를 종이컵에 따라 내밀었다⁠. 저승사자가 컵을 받아 냄새만 맡고 내려놓았다⁠.

“⁠당신 덕에 백만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니오⁠.⁠”

“⁠박자 지적한 건 당신이잖아⁠.⁠”

“⁠반 박자 빨랐던 것은 사실이오⁠.⁠”

말희가 피식 웃었다⁠. 저승사자는 웃지 않았다⁠. 마당 가로등 아래 갓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생방송이라 했소⁠?⁠”

“⁠그래⁠. 전국에 나간다⁠.⁠”

저승사자가 허리춤의 종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종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덮었다⁠.

“⁠생방송 날 밤⁠, 내가 불러야 할 사람이 있소⁠.⁠”

“⁠누군데⁠?⁠”

저승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상에서 일어나 경로당 담장 너머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말희는 종이컵을 쥔 채 담장을 보았다⁠. 식혜에 뜬 밥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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