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48자)

순서

저승사자도 반한 트로트 가수 · 지백솔

결승 진행표는 A4 한 장이었다⁠. 아홉 시 정각 시작⁠, 1라운드 두 곡⁠, 광고⁠, 2라운드 두 곡⁠, 문자 투표⁠, 열 시 삼십 분 결과 발표⁠. 2라운드 칸에 두 줄이 적혀 있었다⁠.

「⁠21⁠:40 금말희⁠」 「⁠21⁠:57 차온⁠」

말희는 돋보기를 쓰고 진행표를 들여다보았다⁠. 아홉 시 오십칠 분 삼십 초에 노래를 시작해야 「⁠여기서 이름⁠」 대목이 열 시에 온다고 옥배는 말했다⁠. 열 시 자리에 차온의 이름이 있었다⁠.

순서는 준결승 방송 마지막에 생방송으로 추첨했다⁠. 사회자가 공 두 개를 상자에서 꺼냈고⁠, 차온이 뽑은 공에 「⁠2⁠」가 적혀 있었다⁠. 오디션에서 마지막 순서는 가장 좋은 자리였다⁠. 시청자의 귀에 마지막 노래가 남은 채로 투표가 시작되었다⁠. 추첨하던 밤 말희는 학주의 빈자리를 보느라 추첨을 보지 못했다⁠.

*

결승 사흘 전⁠, 일산 별관 조정실⁠. 모니터 서른 대가 벽을 덮고 있었다⁠. 염유준은 모니터 앞 의자를 돌려 말희를 마주 보았다⁠. 오늘은 넥타이도 모자도 없었다⁠. 눈 밑이 거뭇했다⁠.

“⁠2라운드 순서를 바꿔 달라는 말씀이세요⁠?⁠”

“⁠내가 아홉 시 오십칠 분에 부르고 싶다⁠.⁠”

“⁠안 돼요⁠.⁠”

유준이 바로 말했다⁠. 말희가 예상한 대답이었다⁠.

“⁠추첨은 생방송이었고 수백만이 봤어요⁠. 순서를 바꾸면 그 순간 조작 의혹이 나와요⁠. 이유가 아무리 좋아도요⁠. 이유가 좋을수록 더 의심받아요⁠.⁠”

“⁠이유를 들어 보지도 않고⁠?⁠”

“⁠들으면 흔들려요⁠. 그래서 안 들으려고요⁠.⁠”

말희는 의자를 끌어 유준 가까이 앉았다⁠. 조정실 스태프들이 모니터를 보는 척하며 귀를 세웠다⁠.

“⁠니한테만 말할게⁠. 믿든 안 믿든⁠.⁠”

유준이 스태프들에게 잠깐 나가 달라고 했다⁠. 조정실 문이 닫혔다⁠. 모니터 서른 대의 웅웅거림만 남았다⁠.

말희는 말했다⁠. 예선장 기둥 옆의 검은 갓부터 장례식장 뒷마당의 감찰까지⁠. 학주가 왜 노래 중간에 나갔는지⁠. 우갑이 왜 석 달을 넘겼는지⁠. 백중 밤 열 시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유준은 한 번도 끊지 않았다⁠. 말희가 말을 마쳤을 때 유준이 오래 천장을 보았다⁠.

“⁠선생님⁠, 저 지금 이 얘기 믿으면 PD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안 믿어도 된다⁠.⁠”

“⁠안 믿기는데요⁠. 근데 학주 어르신 나가신 시각이랑 돌아가신 시각⁠, 제가 화면 기록으로 확인했어요⁠. 아홉 시 삼십오 분⁠. 그리고 선생님 패자 부활전 때 1절만 부르신 거⁠,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말희 언니는 누구 때문에 짧게 부른 거라고⁠.⁠”

유준이 진행표를 집어 들었다⁠. 2라운드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제가 순서를 바꾸면 조작이에요⁠. 그런데 규정이 하나 있어요⁠. 참가자가 생방송 전 리허설에서 공개적으로 순서 변경을 요청하고⁠, 심사위원 세 명이 모두 동의하면 바꿀 수 있어요⁠. 출연자 건강 문제 같은 걸 생각해서 넣어 둔 조항이에요⁠. 한 번도 쓴 적은 없어요⁠.⁠”

“⁠그라믄 내가 요청하믄⁠…⁠…⁠.⁠”

“⁠선생님이 요청하시면 안 돼요⁠. 선생님이 마지막 자리를 가져가시는 거잖아요⁠. 유리한 쪽이 요청하면 아무도 동의 안 해요⁠. 불리해지는 사람이 요청해야 돼요⁠.⁠”

말희는 진행표 위 차온의 이름을 보았다⁠.

“⁠차온이가 와 그걸 하겠노⁠. 그 아한테는 위약금 삼억이 걸려 있다⁠.⁠”

“⁠그러니까요⁠.⁠”

유준이 진행표를 내려놓았다⁠.

“⁠저는 여기까지예요⁠. 더는 못 도와드려요⁠. 국장님은 차온 씨 마지막 순서로 우승하는 그림을 원하세요⁠. 아이돌이 원조 할머니를 이기는 그림⁠. 시청률이 제일 잘 나오는 그림이래요⁠.⁠”

*

결승 이틀 전⁠, 리허설 무대 뒤⁠. 차온이 생수병을 들고 계단에 앉아 있었다⁠. 말희가 옆에 앉자 차온이 엉덩이를 옆으로 옮겼다⁠. 계단 아래에서 스태프들이 조명을 고치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PD님이 무슨 말씀 하셨는지 대충 알아요⁠. 조정실 문 닫혔을 때 다들 궁금해했거든요⁠.⁠”

말희는 차온에게 다 말하지 않았다⁠. 저승도 종도 감찰도 빼고 말했다⁠. 우갑이 백중 밤 열 시를 넘기기 어렵다는 것⁠. 열 시에 말희가 무대에서 우갑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는 것⁠. 옥배가 서른두 해 전에 쓴 노래에 이름 부르는 대목이 있다는 것⁠.

차온이 생수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한참을 그렇게 했다⁠.

“⁠마지막 순서 내놓으면 저 질 수도 있어요⁠.⁠”

“⁠안다⁠.⁠”

“⁠선생님이 마지막에 그런 노래 부르시면⁠, 저 무조건 져요⁠. 사람들이 다 울 거잖아요⁠.⁠”

“⁠그것도 안다⁠.⁠”

차온이 생수병을 계단에 내려놓았다⁠.

“⁠선생님은 왜 저한테 부탁 안 하세요⁠? 그냥 바꿔 달라고 하시면 되잖아요⁠.⁠”

“⁠니가 이길라꼬 왔으니까⁠. 내가 니 이길 자리를 달라 카믄⁠, 그기 부탁이가 강도질이지⁠.⁠”

차온이 웃었다⁠.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넥타이 대신 손가락을 꼬았다⁠.

“⁠할머니가요⁠, 매점 접고 요양원 들어가셨어요⁠. 작년에⁠. 제가 우승하면 좋은 데로 옮겨 드리려고 했어요⁠. 지금 계신 데는 밤 아홉 시 오십 분에 텔레비전을 끄거든요⁠.⁠”

말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온의 할머니가 「⁠곱빼기 인생⁠」을 손님 없는 매점에서 틀던 모습을 떠올렸다⁠.

“⁠1라운드는 아홉 시 십 분이니까 보시겠지만⁠, 2라운드는 아홉 시 오십칠 분이라 못 보세요⁠. 마지막 노래가 제일 좋은 노래인데⁠.⁠”

차온이 일어났다⁠. 바지를 털었다⁠.

“⁠그러니까 제가 두 번째 노래를 일찍 부르면 할머니가 보세요⁠. 저도 남는 게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차온아⁠, 그기 무슨⁠…⁠…⁠.⁠”

차온은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리허설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가 심사위원석을 향해 손을 들었다⁠. 심사위원 셋이 큐시트를 넘기다 고개를 들었다⁠.

“⁠심사위원님들⁠, 결승 2라운드 순서 변경을 요청합니다⁠. 제가 먼저 부르고 싶습니다⁠. 아홉 시 사십 분에요⁠.⁠”

리허설 스튜디오가 조용해졌다⁠. 조정실 유리 너머에서 유준이 헤드셋을 벗었다⁠.

“⁠이유가 뭡니까⁠?⁠”

심사위원 하나가 물었다⁠. 차온이 대답했다⁠.

“⁠제 할머니 요양원이 아홉 시 오십 분에 텔레비전을 끕니다⁠. 그 전에 제 마지막 노래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반은 사실이었다⁠. 말희는 계단 위에서 차온의 등을 보았다⁠. 거짓말이 서툰 사람의 등이었다⁠.

심사위원 셋이 서로를 보았다⁠.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가 끄덕였다⁠. 세 번째가 조정실을 보았다⁠. 유준이 유리 너머에서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심사위원이 펜을 들어 큐시트에 줄을 그었다⁠.

*

결승 전날⁠, 탑차 짐칸이 다시 무대가 되었다⁠. 옆판을 올린 짐칸에 옥배의 전자 오르간이 돌아와 있었다⁠. 오르간 다리가 바닥 철판의 옛 자국 네 개에 정확히 맞게 들어갔다⁠. 옥배가 오르간 위에 부엌 타이머를 올려놓았다⁠. 빨간 토마토 모양 타이머였다⁠.

“⁠이게 뭐꼬⁠?⁠”

“⁠우리 집 라면 타이머유⁠. 삼 분짜리⁠. 근디 돌리면 육십 분까지 가유⁠.⁠”

옥배가 타이머를 돌려 놓고 「⁠트로트 2⁠」를 눌렀다⁠. 말희가 「⁠당신 이름 석 자⁠」 1절을 불렀다⁠. 2절이 끝나고 반주가 멈추는 대목에서 타이머가 땡 울렸다⁠. 말희가 맨목소리로 이름 대신 「⁠아무개 씨⁠」를 불렀다⁠. 연습에서 우갑의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한 번 부르면 오늘 밤 열 시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삼 초 빨라유⁠.⁠”

다시 했다⁠. 이번에는 이 초 늦었다⁠. 세 번째에 타이머와 이름이 같은 박자에 떨어졌다⁠. 옥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슈⁠. 누님 숨만 일찍 안 쉬면⁠.⁠”

“⁠그 말은 저승사자가 하는 말이다⁠.⁠”

“⁠저승사자가 뭔 말을 하는지는 몰러도 맞는 말이유⁠.⁠”

짐칸 그늘에서 검은 갓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옥배는 보지 못했다⁠. 말희는 웃음을 참으며 타이머를 다시 돌렸다⁠. 빨간 토마토가 째깍째깍 돌아갔다⁠. 장터에서 서른 해 동안 들은 소리보다 작은 소리가⁠, 오늘은 가장 크게 들렸다⁠.

*

결승 전날 밤⁠, 유준은 별관 옥상에서 국장의 전화를 받았다⁠. 순서가 바뀌었다는 보고가 하루 늦게 국장에게 올라간 참이었다⁠. 국장의 목소리가 수화기 밖으로 새어 나왔다⁠.

“⁠차온이 순서를 앞으로 뺐다고⁠? 그걸 왜 허락해⁠? 마지막에 아이돌이 우승하는 그림이 우리 그림이잖아⁠!⁠”

“⁠규정대로 했습니다⁠. 참가자 공개 요청⁠, 심사위원 전원 동의⁠.⁠”

“⁠그 할머니가 마지막이면 다 울고 끝나잖아⁠. 우는 그림은 다음 날 아무도 기억 안 한다며⁠. 네가 한 말이야⁠!⁠”

“⁠제가 한 말 맞습니다⁠.⁠”

유준이 옥상 난간에 기댔다⁠. 일산 호수공원 쪽으로 밤 불빛이 퍼져 있었다⁠.

“⁠그리고 국장님⁠, 남편분 병실 생중계는 안 합니다⁠. 출연자가 거절했습니다⁠.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남편이 동의했다며⁠!⁠”

“⁠둘이 갈리면 무대에 서는 사람 말을 듣겠습니다⁠. 결승 시청률 안 나오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국장이 무언가 소리치다 전화를 끊었다⁠. 유준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결승 날 경로당에서 다 같이 본다⁠. 백석동 할머니들 다 온다⁠. 갈치조림 해 놓을게⁠」

유준은 답을 쳤다⁠. 「⁠짜게 하지 마세요⁠」 보내고 나서 지웠다⁠. 다시 쳤다⁠. 「⁠짜게 해 주세요⁠」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

백중날 저녁⁠, 일산 별관 대기실⁠. 말희는 금색 스팽글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스팀다리미가 칙 하고 김을 뱉었다⁠. 스팽글이 자글자글 소리를 냈다⁠. 서른 해 동안 같은 소리였다⁠.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탁자 위에 은순이와 학주의 테이프와 옥배의 악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말희는 학주의 테이프 비닐을 뜯지 않았다⁠. 대신 매직으로 비닐 위에 사인을 했다⁠. 「⁠권우갑 씨께⁠. 금말희⁠」 학주의 메모대로였다⁠. 병실에 가져다줄 사람이 없어 대기실까지 들고 온 테이프였다⁠.

드레스 주름을 다 펴고 돌아보니 테이프가 뒤집혀 있었다⁠. 사인 아래에 낯선 손 글씨가 하나 더 있었다⁠. 붓으로 쓴 단정한 글씨였다⁠. 「⁠남추엽 받음⁠. 권우갑 씨 노잣돈 대신⁠」

말희가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는 말희만 비쳤다⁠. 등 뒤 문간에 검은 갓이 서 있었다⁠.

“⁠노잣돈은 사잣밥 동전으로 넉넉하오⁠. 이건 바깥양반 머리맡에 두겠소⁠. 가는 길에 들으라고⁠. 그래도 받았다는 표시는 해야 하오⁠.⁠”

“⁠당신 붓글씨도 쓰나⁠?⁠”

“⁠악극단 포스터를 내가 썼소⁠.⁠”

말희가 테이프를 저승사자에게 내밀었다⁠. 저승사자가 받았다⁠. 사람의 물건이 저승사자의 손에 쥐어지는 것을 말희는 처음 보았다⁠.

“⁠하나 더 일러 주겠소⁠. 오늘 밤 열 시⁠, 종이 울리면 당신은 한 소절 안에 이름을 불러야 하오⁠. 한 소절이 넘어가면 종소리가 사라지고⁠, 종소리가 사라지면 저승 문이 닫히오⁠.⁠”

“⁠한 소절⁠.⁠”

“⁠옥배 씨가 박자를 맞추어 두었다 들었소⁠. 박자는 반주자를 믿으시오⁠. 당신은 이름만 믿으시오⁠.⁠”

저승사자가 갓 끈을 조였다⁠. 오늘은 끈을 두 번 감아 매었다⁠.

“⁠감찰은 객석 맨 뒤에 앉으오⁠. 나는 파주에 있겠소⁠. 종을 쥐고 바깥양반 머리맡에⁠.⁠”

“⁠늦지 마라⁠.⁠”

“⁠쉰여섯 해 동안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소⁠.⁠”

“⁠그라믄 오늘도 늦지 마라⁠.⁠”

저승사자가 아주 조금 웃었다⁠. 말희는 저승사자가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눈 밑이 조금 접히는 웃음이었다⁠.

“⁠열 시에 봅시다⁠. 가수 양반⁠.⁠”

문간이 비었다⁠. 말희는 거울을 보며 진한 빨간 립스틱을 입술 끝까지 채웠다⁠.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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