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31자)

백중

저승사자도 반한 트로트 가수 · 지백솔

아홉 시 정각⁠, 결승 생방송의 첫 음이 스튜디오를 채웠다⁠. 방청석에 노란 티셔츠 백오십 장이 일어났다⁠. 하모니카 동아리 여덟 명은 하늘색 조끼를 입고 셋째 줄에 앉았고⁠, 영천 막걸리 할아버지는 맨 앞줄 끝에 지팡이를 세워 두었다⁠. 맨 앞줄 가운데 한 자리에는 하얀 수건이 접혀 놓여 있었다⁠. 「⁠능곡 이발관⁠」 노란 티셔츠 할머니들이 아무도 수건 자리에 앉지 않게 지켰다⁠.

객석 맨 뒤 기둥 옆에 흰머리를 쪽 찐 여자가 앉아 있었다⁠. 검은 남바위에 검은 도포⁠. 옆자리 방청객은 여자를 보지 못하고 팔걸이에 팔을 올렸다가⁠, 팔이 시리다며 내렸다⁠. 말희는 무대 옆 어둠 속에서 감찰과 눈이 마주쳤다⁠. 감찰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1라운드는 빨리 지나갔다⁠. 아홉 시 십 분⁠, 차온이 옥배가 편곡한 노래를 불렀다⁠. 숨이 길었다⁠. 이제는 차온의 숨이었다⁠. 아홉 시 이십오 분⁠, 말희가 「⁠곱빼기 인생⁠」을 불렀다⁠. 1996년 고속도로 휴게소 카세트 판매대에서 시작된 노래가 결승 무대에서 3절까지 불렸다⁠. 방청석이 따라 불렀다⁠. 맨 앞줄 끝의 영천 할아버지가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드려 박자를 맞췄다⁠. 우물 뚜껑을 두드리던 할매의 장단이었다⁠.

광고가 나가는 동안 말희는 대기실에서 휴대전화를 보았다⁠. 채란의 문자였다⁠.

「⁠아빠 깨어 있어⁠. 볼륨 최대⁠. 학주 할아버지 테이프 베개 옆에⁠」 「⁠아빠가 엄마 1라운드 3절까지 부른 거 보고 박수 쳤어⁠」 「⁠갓 선생 왔대⁠. 아빠가 문간 보고 인사했어⁠」

*

아홉 시 사십 분⁠, 차온이 2라운드를 불렀다⁠. 방송국 밴드가 반주를 맡았다⁠. 차온은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카메라를 보고 짧게 고개를 숙였다⁠. 어느 요양원 휴게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할머니에게 하는 인사였다⁠.

노래가 끝나고 차온이 무대에서 내려오다가 말희와 엇갈렸다⁠. 차온이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 주었다⁠. 요양원 직원이 보낸 사진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가 텔레비전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화면 시계는 아홉 시 사십사 분⁠.

“⁠보셨어요⁠.⁠”

“⁠잘했다⁠.⁠”

“⁠선생님도 잘하세요⁠. 숨 일찍 쉬지 마시고요⁠.⁠”

말희가 차온의 등을 떠밀었다⁠. 차온이 웃으며 대기석으로 갔다⁠.

*

파주 솔미요양병원 4층 병실⁠, 아홉 시 오십 분⁠. 남추엽은 침대 머리맡에 서 있었다⁠. 오른손에 놋쇠 종을 쥐고⁠. 왼손은 비어 있었다⁠. 쉰여섯 해 동안 왼손으로 할 일이 없었다⁠.

권우갑은 침대 머리를 세우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딸 채란이 오른쪽에서 아빠 손을 잡았다⁠. 베개 옆에 비닐을 뜯지 않은 카세트테이프가 놓여 있었다⁠. 비닐 위에 매직 사인과 붓글씨가 나란히 있었다⁠.

“⁠갓 선생⁠.⁠”

우갑이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불렀다⁠. 목소리가 작았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말씀하시오⁠.⁠”

“⁠화투 빚 얼마 남았어⁠?⁠”

“⁠피 열한 장이오⁠.⁠”

“⁠저승 가서 갚을게⁠.⁠”

“⁠저승에서는 화투를 치지 않소⁠.⁠”

“⁠그럼 당신 떠돌 때 갚으려고 했는데⁠.⁠”

“⁠떠돌지 않을 것이오⁠.⁠”

추엽이 텔레비전을 보았다⁠. 화면 속 무대에 금색 스팽글 드레스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채란이 리모컨으로 볼륨을 끝까지 올렸다⁠. 옆 침대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텔레비전을 보았다⁠. 맞은편 할아버지도 깨어 있었다⁠.

*

아홉 시 오십칠 분 삼십 초⁠. 밴드석에서 주옥배가 리듬 단추를 눌렀다⁠. 「⁠트로트 2⁠」 반 박자를 기다려 주는 손이 전주를 깔았다⁠. 화면 아래로 자막이 지나갔다⁠. 「⁠당신 이름 석 자 — 작곡·편곡 주옥배⁠」 서른두 해 묵은 노래가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말희는 은순이를 입가에 댔다⁠.

“⁠영천 장날 국밥 세 그릇 / 다 먹고서 당신을 봤지 / 마이크 쥔 손이 떨리던 / 말 많은 사람⁠.⁠”

옥배가 쓴 가사였다⁠. 서른두 해 전에 쓴 가사가 서른두 해 뒤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방청석이 조용했다⁠. 노란 티셔츠들이 따라 부르지 않았다⁠. 처음 듣는 노래였다⁠.

1절이 지나고 2절이 지났다⁠. 말희는 숨을 일찍 쉬지 않았다⁠. 객석 맨 뒤의 감찰이 앉은 채로 허리를 폈다⁠. 조정실 유리 너머에서 염유준이 헤드셋을 귀에서 내렸다⁠. 카메라 감독에게 손짓을 했다⁠. 클로즈업⁠, 얼굴만⁠.

2절 끝⁠, 옥배의 손이 건반에서 떨어졌다⁠. 반주가 멈췄다⁠. 스튜디오에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방청객 백오십 명의 숨소리와 조명기의 웅웅거림뿐이었다⁠. 옥배가 악보에 적어 둔 「⁠여기서 이름⁠」의 자리였다⁠.

열 시였다⁠.

말희는 무대 한가운데서 종소리를 들었다⁠. 파주의 병실에서 울리는 소리가 일산의 스튜디오까지 들릴 리 없었다⁠. 그래도 들렸다⁠. 손바닥으로 덮지 않은 맑은 소리⁠. 한 소절⁠. 말희에게는 한 소절이 남아 있었다⁠.

숨을 들이켰다⁠. 끝까지⁠. 늦게⁠.

손이 떨렸다⁠. 목도 떨렸다⁠. 객석 맨 뒤에서 감찰이 말희를 보았다⁠. 서른 해 동안 안 흔들린 무대는 없었다⁠. 오늘도 흔들렸다⁠. 말희는 흔들리는 채로 은순이를 입가에 댔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올랐다⁠. 말희는 차오른 마음을 꺾기 하나로 꺾어 내렸다⁠. 서른 해 동안 노래 끝에서 하던 대로⁠.

“⁠권우갑 씨⁠.⁠”

맨목소리였다⁠. 사회자가 가수를 부르듯이⁠, 또렷하게⁠.

“⁠아프지 말고⁠, 잘 가이소⁠.⁠”

*

파주 병실에서 텔레비전 속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추엽은 종을 쥔 채로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쉰여섯 해 전 단양 고개에서 들은 목소리와 같은 모양이었다⁠. 붙잡는 소리가 섞이지 않은⁠, 보내는 소리⁠.

우갑이 일어났다⁠.

몸은 베개에 기댄 채 그대로였고⁠, 일어난 것은 넋이었다⁠. 넋은 낡은 감색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사회자 시절의 차림이었다⁠. 넋이 침대에서 내려와 허리를 폈다⁠. 텔레비전 속에서 노래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후렴이었다⁠. 옥배의 손이 건반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갑의 넋이 텔레비전을 보았다⁠. 다음에 딸을 보았다⁠. 채란이 아빠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채란은 울면서도 리모컨을 놓지 않았다⁠. 볼륨 표시가 화면 귀퉁이에 떠 있었다⁠. 끝까지⁠.

“⁠갓 선생⁠. 후렴까지만 듣고 가면 안 돼⁠?⁠”

“⁠걸으면서 들으시오⁠. 노래는 귀에 남소⁠.⁠”

우갑의 넋이 중절모를 벗어 채란 쪽으로 한 번 들었다가 다시 썼다⁠. 사회자가 무대에서 내려가며 객석에 하던 인사였다⁠. 추엽이 앞서 문간으로 걸었다⁠. 우갑이 따랐다⁠. 문간을 나서기 전에 우갑이 손가락을 튕겼다⁠. 2박자였다⁠. 추엽의 도포 소매 안에서도 손가락이 튕겼다⁠.

복도 시계가 열 시 일 분을 가리켰다⁠. 종소리는 멎어 있었다⁠.

*

열 시 삼십 분⁠, 결과 발표⁠. 사회자가 봉투를 열기 전에 화면 가득 숫자가 올라갔다⁠. 심사위원 점수는 차온이 높았다⁠. 시청자 투표는 말희가 높았다⁠. 둘을 합친 숫자의 차이는 일 점이 되지 않았다⁠.

“⁠트롯 왕관전 시즌3 우승자는⁠, 차온⁠!⁠”

차온이 무대 한가운데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을 내리고 나서 가장 먼저 말희에게 걸어왔다⁠. 말희는 차온을 안았다⁠. 차온의 어깨가 떨렸다⁠.

“⁠선생님⁠, 저 이겨도 돼요⁠?⁠”

“⁠니 할매 좋은 데로 옮기라⁠. 그라고 내 꺾기로 이깄으니까 내가 이긴 기다⁠.⁠”

방청석 맨 뒤에서 감찰이 일어났다⁠. 말희는 차온의 어깨 너머로 감찰을 보았다⁠. 감찰이 남바위를 벗었다⁠. 쪽 찐 흰머리가 조명 아래 드러났다⁠. 감찰은 말희를 향해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그리고 기둥 옆에서 사라졌다⁠. 갓을 거두러 가는 걸음은 아니었다⁠.

조정실 유리 너머에서 유준이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국장이 무언가 소리치는 것이 유리 너머로도 보였다⁠. 유준은 듣다가 전화를 끊고 시청률 화면을 보았다⁠. 열 시 정각의 숫자가 이번 시즌 가장 높았다⁠. 반주가 멈추고 아무 소리도 없던 십 초 동안의 숫자였다⁠. 유준은 숫자를 캡처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열어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갈치조림 남겨 두세요⁠」

*

생방송이 끝나고 무대 뒤 비상구 계단참에서 말희는 휴대전화를 켰다⁠. 단톡방 「⁠금씨네 셋⁠」에 채란의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열 시 이 분에 보낸 문자였다⁠.

「⁠아빠 갔어⁠」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웃었어⁠. 엄마 노래 후렴까지 들었어⁠. 손가락으로 이불 두드리다가 멈췄어⁠」

말희는 계단참에 앉았다⁠. 구두를 벗었다⁠. 맨발로 차가운 계단을 디디고 단톡방을 오래 보았다⁠. 화면 맨 위로 올리면 석 달 치 곰이 있었다⁠. 엄지를 든 곰⁠, 만세 하는 곰⁠, 춤추는 곰⁠, 주먹 쥔 곰⁠, 고개 숙인 곰⁠.

비상구 문이 열리고 옥배가 들어왔다⁠. 옥배는 말없이 말희 옆에 앉았다⁠. 오르간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리듬 단추를 누르듯 가방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2박자였다⁠.

“⁠옥배 씨⁠.⁠”

“⁠예⁠.⁠”

“⁠노래 좋더라⁠. 서른두 해 동안 와 안 줬노⁠.⁠”

“⁠줬으면 누님이 그때 불렀겄쥬⁠. 그럼 오늘 부를 노래가 없었겄쥬⁠.⁠”

말희는 웃었다⁠. 웃으면서 울었다⁠. 립스틱이 번졌다⁠. 번진다고 말해 줄 사람이 둘이나 없었다⁠. 옥배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능곡 이발관⁠」이 수놓인 하얀 수건이었다⁠. 학주의 빈소에서 손자가 옥배에게 맡긴 것이었다⁠.

말희는 단톡방에 답을 쳤다⁠. 돋보기는 머리 위에 있었다⁠. 내려 쓰지 않고 쳤다⁠. 오타가 났다⁠. 고치지 않고 보냈다⁠.

「⁠잘 가쏘⁠」

채란이 곰을 보냈다⁠. 엄지를 든 곰이었다⁠. 우갑이 보내던 곰과 같은 곰이었다⁠.

*

괴산 고추 장터는 몇 주 사이에 가을 냄새로 바뀌어 있었다⁠. 빨간 고추 포대가 천막 아래 산처럼 쌓였고⁠, 매운 냄새 사이로 햇사과 냄새가 섞여 들었다⁠. 장터 공터에 1톤 탑차가 들어왔다⁠. 옆판이 끼이익 울며 올라갔다⁠. 짐칸 무대 위에 전자 오르간이 있었고⁠, 오르간 다리는 바닥 철판의 옛 자국 네 개에 정확히 들어가 있었다⁠.

탑차 옆판의 글씨는 새로 칠했다⁠. 「⁠금말희 쇼 — 개업·회갑·체육대회·칠순 잔치⁠」 아래에 작은 글씨가 한 줄 더 있었다⁠. 「⁠반주·편곡 주옥배⁠」 작게 쓰자고 옥배가 우겼고⁠, 말희가 크게 썼다⁠.

공터를 메운 사람이 장터 생기고 처음이라고 했다⁠. 노란 티셔츠가 곳곳에 섞여 있었다⁠. 「⁠본방사스⁠」 등판도 보였다⁠. 하모니카 동아리는 맨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탑차 조수석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안전띠가 매여 있었다⁠. 안전띠 아래에 낡은 중절모 하나와 하얀 이어폰 한 쌍이 놓여 있었다⁠.

말희는 은순이를 들고 짐칸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금색 스팽글 드레스가 가을볕에 자글자글 반짝였다⁠. 사회자가 없었다⁠. 서른 해 동안 첫 순서는 늘 사회자의 몫이었다⁠.

말희가 은순이를 입가에 댔다⁠.

“⁠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아주 귀한 분을 모셨습니다⁠.⁠”

장터가 웃었다⁠. 사회자 흉내가 서툴렀다⁠. 말희는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이었다⁠.

“⁠예순두 살⁠, 준우승 가수⁠. 금⁠! 말⁠! 희⁠! 박수 한번 주십쇼⁠!⁠”

박수가 터졌다⁠. 옥배가 리듬 단추를 눌렀다⁠. 「⁠트로트 2⁠」 반 박자를 기다려 주는 전주가 장터 바닥을 울렸다⁠.

말희는 첫 소절을 내기 전에 장터 맨 뒤를 보았다⁠. 고추 포대 산 옆에 검은 갓이 서 있었다⁠. 남추엽은 갓 끈을 단정하게 매고⁠, 귀 위로 머리 한 가닥을 내려뜨린 채⁠, 두 손을 도포 밖으로 꺼내 들고 있었다⁠.

말희가 노래를 시작했다⁠. 추엽의 두 손이 2박자에 맞춰 마주 왔다⁠. 손바닥이 닿았다⁠. 짝⁠. 짝⁠. 1절이 지나고 2절이 지나고 3절의 마지막 소절이 끝날 때까지⁠, 고추 포대 옆의 손뼉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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