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03자)

옛 규례

저승사자도 반한 트로트 가수 · 지백솔

“⁠안 나간다고⁠?⁠”

권우갑이 침대 머리를 세워 달라고 했다⁠. 채란이 손잡이를 돌렸다⁠. 침대가 끼릭끼릭 올라가는 동안 우갑은 말희를 보았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고른 말을 언제 꺼낼지 재는 얼굴이었다⁠.

“⁠어제 PD한테 말했다⁠.⁠”

“⁠PD가 뭐래⁠?⁠”

“⁠이유를 묻길래 말 못 한다 캤다⁠.⁠”

우갑이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들썩였다⁠. 웃음이 배를 건드렸는지 우갑이 숨을 멈추고 배를 감쌌다⁠. 채란이 간호사 호출 단추에 손을 올렸다⁠. 우갑이 고개를 저었다⁠.

“⁠말희야⁠. 당신 그날 밤 내 손잡고 노래 안 하고 있겠다는 거지⁠?⁠”

“⁠그래⁠.⁠”

“⁠그럼 나는 뭘 보면서 가⁠?⁠”

말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 노래 안 하는 얼굴 보면서 가⁠. 삼십 년 동안 나 그 얼굴 본 적 없어⁠. 무대 올라가기 전에도 흥얼거렸고⁠, 무대 내려와서도 흥얼거렸고⁠, 운전하면서도⁠, 밥하면서도⁠, 나랑 싸우면서도 흥얼거렸어⁠. 당신 입 다문 얼굴은 영천 장터에서 국밥 세 그릇 다 먹을 때 한 번 봤어⁠. 그때도 다 먹고 나서 흥얼거렸지⁠.⁠”

“⁠그날 일은 와 자꾸⁠…⁠…⁠.⁠”

“⁠마지막에 처음 보는 얼굴 보고 가라고⁠? 나 그거 싫어⁠.⁠”

채란이 아빠 침대 난간을 잡았다⁠.

“⁠아빠⁠, 엄마가 노래하면 아빠가 떠돈대⁠. 엄마가 다 말해 줬어⁠. 갓 선생 얘기⁠.⁠”

우갑이 딸을 보았다⁠.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다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알아⁠. 떠돌면 갓 선생도 같이 떠돈대⁠. 그래서 둘이 화투 치면서 연습했어⁠. 백 년 동안 칠 화투⁠.⁠”

“⁠아빠⁠!⁠”

“⁠농담이야⁠. 반은⁠.⁠”

채란이 울음을 터뜨렸다⁠. 우갑이 딸의 손등을 토닥였다⁠. 힘이 없어서 토닥이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

밤 열 시 오 분⁠, 노래를 마친 병실에 저승사자가 남아 있었다⁠. 오늘은 화투패를 펴지 않았다⁠. 보호자 의자에 앉지도 않았다⁠. 창가에 서서 오래 말이 없다가⁠, 말희가 짐을 챙기려 하자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갔는지 말하리다⁠.⁠”

말희의 손이 멈췄다⁠. 채란이 아빠 침대 곁에서 고개를 들었다⁠. 채란에게는 아빠가 창가를 보는 모습만 보였다⁠.

“⁠1971년 가을이었소⁠. 새별 악극단이 단양 장터에 가는 길이었소⁠. 단양은 내 고향이오⁠. 어머니가 장터 국밥집을 하셨소⁠. 아들 트럼펫 소리 들으러 장터 맨 앞에 자리 잡고 계셨소⁠.⁠”

저승사자가 창유리에 손을 댔다⁠. 유리에 김이 서리지 않았다⁠.

“⁠버스가 고개 마루에서 굴렀소⁠. 나는 바위 사이에 끼었소⁠. 사자가 왔소⁠. 첫 번째를 불렀소⁠. 두 번째를 불렀소⁠. 그때 어머니가 고개를 뛰어 올라오셨소⁠. 장터까지 소문이 먼저 내려왔던 것이오⁠. 국밥집 앞치마를 두른 채로⁠, 맨발로⁠.⁠”

병실이 조용했다⁠. 옆 침대 할아버지의 숨소리만 났다⁠.

“⁠어머니가 나를 찾았소⁠. 사람들이 말려도 바위 사이로 손을 넣으셨소⁠. 내 이름을 불렀소⁠. 추엽아⁠.⁠”

저승사자가 처음으로 제 이름을 말했다⁠. 남추엽⁠. 말희는 이름이 저승사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종을 덮고 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를 맡은 사자가 종을 쥐고 어머니 곁에 섰소⁠. 세 번째를 부르지 않았소⁠.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게 두었소⁠. 어머니는 처음엔 살라고 부르셨소⁠. 나는 일어나지 못했소⁠. 몇 번을 부르시다가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다르게 부르셨소⁠. 가라고⁠. 아프지 말고 가라고⁠. 추엽아⁠.⁠”

말희는 숨을 쉬지 않았다⁠.

“⁠그 목소리에 내가 일어났소⁠. 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소⁠. 내가 가장 오래 들은 목소리였소⁠. 나는 그 목소리를 가져갔소⁠. 노래가 아니라⁠. 그래서 쉰여섯 해 동안 노래 한 곡을 끝까지 들은 적이 없었소⁠. 내 귀에는 늘 어머니의 부름이 먼저 있었소⁠.⁠”

저승사자가 말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옛 규례가 있소⁠. 사자가 종을 쥐고 곁에 서 있으면⁠, 넋이 가장 오래 들은 목소리가 세 번째 이름을 불러도 넋은 일어나오⁠. 다만 부르는 사람이 보내겠다는 마음으로 불러야 하오⁠. 붙잡는 마음이 섞이면 넋은 일어나다 주저앉소⁠.⁠”

말희가 천천히 우갑을 보았다⁠. 우갑은 이미 말희를 보고 있었다⁠.

“⁠당신이 부르면 돼⁠.⁠”

우갑이 말했다⁠.

“⁠노래하다가⁠. 열 시에⁠. 내 이름⁠.⁠”

*

병실 문간의 공기가 서늘해졌다⁠. 쪽 찐 흰머리에 검은 남바위⁠, 감찰이 문틀 안에 서 있었다⁠. 채란이 몸을 떨며 에어컨 리모컨을 찾았다⁠. 채란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규례는 닫혔소⁠.⁠”

감찰의 목소리가 병실 바닥을 울렸다⁠.

“⁠백 년 전에 닫았소⁠. 산 사람에게 세 번째를 맡기면⁠, 보내겠다고 부르다가 마지막 소리에서 붙잡는 사람이 생기오⁠. 열에 아홉이 그렇소⁠. 넋은 반쯤 일어나다 주저앉고⁠, 주저앉은 넋은 떠도는 넋보다 아프오⁠. 몸에도 저승에도 반씩 걸쳐서⁠.⁠”

감찰이 저승사자를 보았다⁠.

“⁠남 사자⁠, 당신 어머니가 열에 하나였소⁠. 그래서 당신이 이 일을 하게 된 것이오⁠. 보내는 목소리를 들은 넋이 사자가 되오⁠. 당신은 알 것 아니오⁠. 열에 하나가 얼마나 드문지⁠.⁠”

“⁠압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한테 그걸 시키겠소⁠? 생방송 무대에서⁠, 수백만이 보는 앞에서⁠, 제 남편 이름을⁠?⁠”

저승사자가 갓 끈을 풀었다⁠. 말희는 숨을 들이켰다⁠. 저승사자가 갓을 벗어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이발소에서 학주가 빗겨 준 머리가 드러났다⁠. 귀 위로 한 가닥이 내려와 있었다⁠.

“⁠이 사람이 흔들리면 제 갓을 거두십시오⁠.⁠”

“⁠갓만이 아니오⁠. 백 년이오⁠. 어쩌면 그보다 길게⁠.⁠”

“⁠쉰여섯 해를 기다렸습니다⁠. 백 년도 기다리겠습니다⁠.⁠”

감찰이 오래 저승사자를 보았다⁠. 갓을 받쳐 든 손⁠, 흐트러진 머리 한 가닥⁠. 그러고 나서 말희를 보았다⁠.

“⁠당신은⁠?⁠”

말희는 침대 난간을 잡았다⁠. 우갑의 손이 난간 위로 올라와 말희의 손등을 덮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서른 해 동안 무대 뒤에서 말희의 등을 떠밀던 손이었다⁠.

“⁠흔들릴 겁니더⁠.⁠”

말희가 말했다⁠.

“⁠흔들려도 부를 겁니더⁠. 삼십 년 무대에서 안 흔들린 날이 없었어예⁠. 흔들려도 끝까지 불렀어예⁠. 이번에도 그럴 겁니더⁠.⁠”

감찰이 대답하지 않았다⁠. 문틀 안의 서늘한 기운이 조금 옅어졌다⁠.

“⁠그 밤 무대를 보겠소⁠. 마지막 소리에서 한 치라도 붙잡으면⁠, 내가 종을 거두고 남 사자의 갓도 거두오⁠.⁠”

감찰이 사라졌다⁠. 채란이 에어컨을 끄며 중얼거렸다⁠. 왜 갑자기 추웠다가 괜찮아지냐고⁠.

저승사자가 갓을 다시 썼다⁠. 끈을 매는 손이 느렸다⁠. 우갑이 침대에서 손을 뻗어 저승사자의 도포 소매를 잡았다⁠. 잡히지 않는 소매였는데⁠, 우갑의 손가락은 소매 끝에 닿아 있었다⁠.

“⁠갓 선생⁠. 백 년 떠돌게 되면 화투는 내가 칠게⁠.⁠”

“⁠떠돌지 않게 하겠소⁠.⁠”

“⁠그래도⁠. 혹시나⁠.⁠”

*

자정이 가까운 병원 휴게실⁠, 자판기 불빛 아래 채란과 말희가 나란히 앉았다⁠. 채란이 캔 율무차 두 개를 뽑았다⁠. 하나를 엄마 손에 쥐여 주고⁠, 제 것은 따지 않고 손바닥으로 굴렸다⁠.

“⁠엄마⁠.⁠”

“⁠와⁠.⁠”

“⁠아까 그 감찰이라는 사람⁠, 진짜 있었어⁠?⁠”

“⁠있었다⁠. 흰머리 쪽 찌고⁠.⁠”

“⁠나는 춥기만 했어⁠.⁠”

채란이 캔을 굴리다가 멈췄다⁠.

“⁠엄마⁠, 나 아까 엄마한테 결승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 말 취소할게⁠.⁠”

말희가 딸을 보았다⁠. 채란은 정면의 꺼진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 둘의 얼굴이 어둡게 비쳤다⁠.

“⁠아빠가 엄마 노래 안 하는 얼굴 보고 가기 싫대⁠. 나도 싫어⁠. 엄마 입 다물고 아빠 옆에 앉아 있는 거⁠, 그거 보면 나 평생 생각날 거 같아⁠.⁠”

“⁠채란아⁠.⁠”

“⁠대신 나는 아빠 옆에 있을게⁠. 엄마는 무대에 있고⁠. 아빠 손은 내가 잡을게⁠. 텔레비전 볼륨은 내가 올릴게⁠. 엄마 목소리 제일 크게⁠.⁠”

채란이 율무차 캔을 땄다⁠. 칙 소리가 휴게실에 울렸다⁠.

“⁠엄마가 아빠 이름 부를 때⁠, 나도 같이 속으로 부를게⁠. 그 감찰 할머니가 엄마 흔들린다고 하면⁠, 내 몫까지 쳐 달라고 해⁠.⁠”

말희는 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딸의 어깨가 생각보다 넓었다⁠. 언제 이렇게 넓어졌는지 말희는 몰랐다⁠. 서른 해 동안 행사장을 도느라 놓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니 아빠 닮아서 말을 잘하네⁠.⁠”

“⁠엄마 닮아서 고집도 세⁠.⁠”

둘이 동시에 웃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 어두운 얼굴 둘이 같이 웃었다⁠.

*

이튿날 아침⁠, 솔미요양병원 주차장에 말희의 탑차가 세워져 있었다⁠. 말희는 운전석에서 학주의 테이프를 손에 쥐고 있었다⁠. 비닐을 뜯지 않은 테이프⁠. 누군가 운전석 창을 두드렸다⁠.

주옥배였다⁠. 등에 전자 오르간 가방을 메고⁠, 손에 누런 봉투를 들고 있었다⁠. 탑차에서 오르간을 가져간 지 꼭 이 주 만이었다⁠.

“⁠나머지 반도 돌려줬슈⁠.⁠”

옥배가 창 너머에서 말했다⁠. 말희가 창을 내렸다⁠.

“⁠PD한테⁠?⁠”

“⁠계약금⁠. 팔백 다⁠. 결승은 누님 반주 쳐유⁠. 차온이 반주는 방송국 밴드가 친대유⁠. 편곡은 내가 해 놨슈⁠. 자막도 그대로 나온대유⁠.⁠”

옥배가 누런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 오선지가 들어 있었다⁠. 종이가 누렇게 바래고 귀퉁이가 닳아 있었다⁠. 맨 위에 연필 글씨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당신 이름 석 자⁠」 날짜는 1995년 3월⁠.

“⁠누님 결혼식 날 드리려고 썼슈⁠. 우갑이 형님이 결혼식 축가는 신부가 직접 부르는 거라고 해서⁠, 누님 부르라고⁠. 근데 못 드렸슈⁠.⁠”

“⁠와⁠?⁠”

“⁠가사 끝에 신랑 이름 부르는 대목이 있는디⁠, 그게 너무 낯간지러워서유⁠.⁠”

옥배가 귀까지 빨개졌다⁠. 서른두 해 묵은 부끄러움이었다⁠.

“⁠차온이는⁠?⁠”

“⁠차온이도 알아유⁠. 내가 말했슈⁠. 학주 어르신 가신 날⁠, 차온이가 먼저 그러더라구유⁠. 선생님 결승은 옥배 선생님이 치셔야 한다고⁠. 그 청년이 숨만 길어진 게 아니유⁠.⁠”

옥배가 탑차 옆판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금말희 쇼⁠」 글씨 아래⁠,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였다⁠. 원래 거기에 「⁠반주 주옥배⁠」가 작게 적혀 있었다⁠.

“⁠이긴다는 사람 골랐다고 했잖유⁠. 다시 생각해 보니께⁠, 나는 이기는 노래보다 끝까지 부르는 노래를 치는 사람이었슈⁠. 누님은 삼십 년 동안 노래를 끊어도 사람 때문에 끊었지⁠, 노래가 싫어서 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께⁠. 괴산 장터에서도 그랬구유⁠.⁠” 말희는 오선지를 펼쳤다⁠. 2절 끝⁠, 후렴으로 들어가기 전에 짧은 대목이 있었다⁠. 반주가 멈추고⁠, 가수가 맨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 악보 위에 옥배의 연필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여기서 이름⁠」

말희는 악보를 오래 보았다⁠. 학주의 테이프와 옥배의 악보가 무릎 위에 나란히 놓였다⁠.

“⁠옥배 씨⁠.⁠”

“⁠예⁠.⁠”

“⁠열 시에 맞출 수 있나⁠? 이 대목⁠.⁠”

옥배가 악보를 받아 들고 손가락으로 마디를 짚었다⁠. 입속으로 박자를 세었다⁠. 한참을 세더니 고개를 들었다⁠.

“⁠노래 시작을 아홉 시 오십칠 분 삼십 초에 하면 되겄슈⁠. 이 대목이 딱 열 시에 와유⁠.⁠”

“⁠결승 순서가 아직 안 나왔다⁠.⁠”

“⁠그건 누님이 해결하셔유⁠. 나는 박자만 맞추면 되니께⁠.⁠”

말희가 웃었다⁠. 이 주 만에 처음 웃었다⁠. 휴대전화를 들어 염유준의 번호를 눌렀다⁠. 유준이 첫 신호에 받았다⁠.

“⁠PD님⁠. 결승 나간다⁠.⁠”

“⁠…⁠…어제 안 나가신다고 하셨잖아요⁠.⁠”

“⁠어제는 어제고⁠. 대신 부탁이 하나 있다⁠.⁠”

말희는 운전석 너머 병원 4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창가에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회자가 무대 끝에서 가수를 부를 때처럼⁠, 크게⁠.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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